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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1 (토)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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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51      
[현대] 옐친 (브리)
옐친 Boris (Nicolayevich) Yeltsin 1931. 2. 1 러시아 스베르돌로프스크~.

러시아의 정치인.

1985~87년 모스크바 시장 겸 모스크바 공산당위원회의 제1서기를 역임했고, 1990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1년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9년 12월 31일 사임할 때까지 정치·경제적으로 쇠퇴하던 격동기의 러시아를 이끌었다.

옐친은 우랄과학기술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55~68년 스베르돌로프스크 지구의 다양한 건설사업에 참여했고, 19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68년부터 당의 정규직원으로 채용되어 1976년에는 스베르돌로프스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후 스타브로폴 시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알게 되었다.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1985년 모스크바 당조직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옐친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1986년 정치국원이 된 옐친은 모스크바 시장으로서 자신이 유능하며 결단력을 지닌 개혁가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당회의에 참석한 옐친이 자신의 의사를 강력히 표명하기 시작하면서 고르바초프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마침내 그는 1987, 1988년 모스크바 시장직과 정치국원직을 사임했다. 급진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을 공공연하게 주장한 옐친은 1990년 5월 29일 러시아 공화국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소비에트 연맹을 구성하고 있는 각 공화국들에게 보다 많은 자치권을 부여할 것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

러시아 공화국은 점차 자치권을 확대시키고 재정과 지원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확대해 나갔다. 동시에 그는 관료주의를 공격하고 시장지향적인 경제체제로의 변환을 주장했다. 복수정당 정치체제를 지지한 옐친은 1990년 7월 소련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1991년 8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했으나, 옐친은 이들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 색인 : 1991년 소비에트 쿠데타). 결국 쿠데타는 발발 수일 만에 진압되었고 옐친은 러시아 제1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이 쿠데타 발발 이후 고르바초프의 권력기반은 급속히 와해되었고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미온적임을 계속 밀어붙이며 결국 1991년 12월 8일 고르바초프의 완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로 '슬라브 연방'을 구성했다.

이어 12월 21일, 앞서 독립한 발트 3개국 및 그루지야를 제외한 옛 소련 11개 공화국이 참여하는 독립국가연합(CIS)을 공식 출범시키고 실질적인 지도자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92년 1월에 강행한 가격 자유화가 물가폭등을 유발하는 한편 미온적인 서방의 지원과 군부의 완강한 반발 및 고르바초프의 재기조짐 등으로 정권유지에 고심해야 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와 CIS 주도권을 놓고 정치·군사·경제 부문에서 사사건건 부딪침으로써 CIS가 결국 깨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옐친은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2년 3월 31일 러시아 공화국 내 자치공화국들의 대폭적인 권한 확대를 골자로 하는 신연방조약을 체결했으며, 그해 4월 2일 다가올 인민대표대회(비상설의회)에서 보수세력이 개혁노선에 대해 퍼부을 비난에 대비하여 경제개혁을 추진해온 핵심인물 가이다르를 비롯한 내각 총사퇴를 표명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개막된 러시아 최고회의(상설의회)에서는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세력대결이 첨예해졌다. 그러나 그해 12월 5일에 열린 인민대표대회에서 옐친 대통령의 급진개혁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의회의 헌법개정안이 부결됨으로써 옐친은 의회의 강력한 도전을 일단 받아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12월 9일에 열린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이다르 총리대행에 대한 인준을 거부해 옐친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치명타를 가했다.

이에 옐친은 보수파가 주도하는 인민대표대회에 대한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언해 러시아 정국을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으나, 12월 보수·개혁파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러시아 인민대표대회는 옐친 대통령에 대한 신임 및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1993년 4월에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993년 4월 25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보리스 옐친은 보수파와의 정치투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신임과 경제정책에 대한 신임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로도 보수파가 장악한 최고회의와 계속 마찰을 빚은 옐친은1993년 9월 21일 전격적으로 최고회의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을 공표했다. 여기에 반발해 강경파가 10월초에 최고회의 의사당 건물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였으나 옐친에게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12월 의회 선거와 헌법개정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한 새 헌법은 힘겹게 통과되었으나 총선 결과 개혁에 반대하는 정파들이 급부상하여 이듬해부터 옐친은 포고령에 의한 통치에 의존하게 되었다. 1994년 12월 옐친은 러시아군을 동원해 1991년 일방적으로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체체니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체체니아 반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고 이 전쟁으로 옐친에 대한 지지도는 급락했다.

체체니아와의 전쟁과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시장 개혁의 실패로 옐친의 대통령 재선 전망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1996년 6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공산당 당수를 물리치고 재선되었다. 선거 승리 후 몇 달 동안 옐친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앓았던 심장병을 치료해야 했고 그의 건강상태는 이후로도 중요 사안으로 떠올랐다.

옐친은 2번째 임기 초기에 체체니아와의 휴전에 서명하는 한편 1997년에는 평화협정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긴장은 계속되었다. 1999년 8월 체체니아 이슬람 반군이 다게스탄을 침공했고, 다음 달에는 러시아에서 연쇄폭탄 테러가 발생해 체체니아 반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옐친은 곧 체체니아에 대한 재침공을 명령했다. 옐친은 1998년에 전 내각을 사퇴시킨 후 재임명했고, 1999년에는 17개월 사이에 연달아 4명의 총리를 해임시킴으로써 러시아 정계를 정쟁에 휘말리게 했다.

1999년 5월 국가 두마(하원)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책임을 포함한 몇 가지 이유로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상정했으나 가결에 필요한 정족수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새롭고 강력한 지도력을 바란다며 대통령직을 전격 사임했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명했고 그 대가로 푸틴은 그에게 포괄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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