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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6-02-25 (토)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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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14      
[근대] 베를리오즈 (브리)
베를리오즈 (Louis-) Hector Berlioz 1803. 12. 11 프랑스 라코트생앙드레~1869. 3. 8 파리.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음악비평가·지휘자.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1830), 합창이 있는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1839)· 〈파우스트의 저주 La Damnation de Faust〉(1846)가 대표작이다. 말년에 그의 명성은 국외로 널리 퍼졌으며 고향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초기 활동

베를리오즈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알프스 지역의 그르노블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학교는 엉망이었으나 베를리오즈는 교양을 갖춘 계몽된 의사였던 아버지에게서 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라틴어뿐만 아니라 음악도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많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베를리오즈는 어린시절에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스스로 화성법을 공부하고 12세 때 지방 실내악단을 위한 곡을 작곡했다. 연주자들의 도움으로 플루트와 기타를 배웠으며 기타 연주는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1821년 그의 아버지는 의학을 공부시키려고 그를 파리로 보냈고 그는 1년 동안 첫번째 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교과 과정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만 생기면 파리 오페라단의 공연을 보러 갔으며, 그곳에서 손으로 악보를 베끼면서 전체 레퍼토리를 공부했고 특히 글루크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었다. 마음속에 음악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히 자리잡게 되자 파리 음악원 작곡교수였던 장 프랑수아 르쉬에르의 제자가 되었다. 이 일로 베를리오즈는 그의 인생에서 거의 8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부모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는 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830년 마침내 로마 대상을 받았으며 그 이전 대회에서는 2등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으로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음악 경력에서 이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대작이자 19세기의 신기원을 이룩한 작품인 〈환상 교향곡〉을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로마 대상의 특전으로 부여된 2년 동안의 이탈리아 체재를 포함한 3년간의 외국생활은 어떤 측면에서는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파리에서 오랜 견습 기간에 그는 베토벤과 베버, 그리고 위대한 두 시인 셰익스피어와 괴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셰익스피어 배우인 해리엇 스미드슨을 먼발치에서 사랑하게 되었고, 이 짝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재능있고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인 카미유 모크(후에 플레이엘 부인)와 약혼했다.

로마 대상의 의무 조항으로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면서 그는 약혼녀는 물론 창작력을 자극했던 예술적 환경까지 버려야 했다. 그는 결국 천재적 감각으로 근대 프랑스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셈이 되었다. 대중은 1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파리 악파'에 만족해 있었고,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있는 빈을 포함한 모든 유럽 지역은 앙드레 그레트리, 에티엔 메윌, 루이지 케루비니 등이 작곡한 작품을 환영했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베버와 베토벤의 작품들(마지막 현악 4중주를 포함한)을 내세우려 했고 자신의 작품이 그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는 음악의 극적 표현을 위해 그가 잘 알고 있는 무대음악의 대가인 글루크에게 다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베를리오즈에게 있어 음악은 무엇보다 먼저 극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이들 세 음악가는 모두 일면 극작가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823년 첫번째 음악 평론에 이미 이 강령이 나타나 있으며 초기의 이러한 예리하고 강렬한 시각은 완숙기에 가서도 예술적 근원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지적이고 직관적인 시각의 바탕을 이해하려면 그의 정력적인 활동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되게 하려는 자기 본위의 끊임없는 노력은 사실 엄청난 정력이 필요했다. 독일, 벨기에,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지로의 잦은 여행의 결과로 그는 유럽 굴지의 관현악단에 새로운 양식을 전파했으며, 반대로 그들을 통하여 젊은 작곡가와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음악 어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에서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회고록 Mémoires〉(1870)에서 〈환상 교향곡〉은 물론 오라토리오와 수많은 칸타타, 24편의 가곡과 2편의 서곡, 미사와 오페라의 일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Tempest〉에 붙인 환상곡, 괴테의 〈파우스트 Faust〉의 8장면의 음악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쏟아냈던 파리 시절 이후 얼마나 그가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이탈리아에서도 베를리오즈는 창작 노트를 채우고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를 만났으며 멘델스존과는 평생의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기타를 어깨에 메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 농부들과 유랑민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받았던 인상은 〈트로이 사람들 Les Troyens〉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Béatrice et Bénédict〉(1862 초연) 등 마지막 작품에까지 음악적·극적 영감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그러는 동안 연애는 시들해졌고 로마의 메디치 저택에서의 생활을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18개월의 유랑생활 끝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로마 대상의 나머지 특전은 박탈되었다.

완숙기의 활동

파리로 돌아온 그는 다시 파리 무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작품을 가지고 당시 유행하던 모노드라마(한 사람의 연기자에 의한 낭송에 음악적으로 처리된 장면이 군데군데 삽입됨)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환상 교향곡〉이 주인공의 고통과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에 베를리오즈는 그의 이 새로운 작품을 〈생활로의 복귀 Le Retour à la vie〉(나중에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렐리오 Lélio〉라 했음)라 불렀다. 1832년 초연되었고 그 안에 3~4곡의 쾌활한 소품을 포함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베를리오즈는 다시 시작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들은 1833년 10월 3일에 결혼했다. 처음 몇 년 동안 그들 부부는, 후에 모리스 위트리요가 그림을 그렸던 몽마르트의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곳을 찾았던 방문객들 가운데는 알프레드 드 비니와 쇼팽을 포함한 낭만주의 운동에 동참한 젊은 시인들과 음악가들도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그곳에서 유일한 후손 루이를 얻었으며, 진혼곡 〈죽은 자를 위한 대미사 Grande Messe des morts〉(1837), 교향곡 〈이탈리아의 아롤드 Harold en Italie〉(1834)·〈로미오와 줄리엣〉(1839),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1838, 파리)를 작곡했다.

〈이탈리아의 아롤드〉 초연 이후 베를리오즈는, 유명한 바이올린의 거장 파가니니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베를리오즈야말로 베토벤에서 시작된 새로운 음악 전통을 계속 수행해나갈 운명을 타고난 천재라고 단언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다음날 베를리오즈는 파가니니로부터 그 찬사를 되풀이하는 편지와 함께 2만 프랑을 받았다. 그 돈으로 원고 쓰는 일에서 해방된 그는 합창을 포함한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여 파가니니에게 헌정했다.

파리에서 작곡가들은 어떤 성향을 가졌든 간에 으레 파리 오페라단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받고 싶어했다. 베를리오즈의 친구들이 오페라 대본을 손에 넣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결과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을 각색한 대본이 확보되었고 베를리오즈는 짧은 시간 안에 그 악보를 완성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파리 오페라단에서 〈벤베누토 첼리니〉의 공연은 실패로 끝났다. 이 타격 이후 프랑스에서 이 작품과 베를리오즈의 평판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음악이 좋았으나 대본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대본과 음악 둘 다의 성질을 제대로 모르는 판단에 불과하다.

진혼곡 〈죽은 자를 위한 대미사〉(1837)는 로마 대상을 받은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기념행사에 사용하려고 정부에서 위촉한 작품이다. 공공 행사를 위해 위촉된 또 다른 군악대·합창·현악을 위한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1840)은 7월 혁명 10주년을 위해 위촉된 작품으로 〈벤베누토 첼리니〉의 실패에 대한 위안을 삼고자 작곡한 것이다. 몇 해 전 베를리오즈는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의 대표적인 일간지 〈주르날 데 데바 Journal des Débats〉의 음악 평론가가 되었는데, 때마침 그의 고용주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의 악보는 바스티유 부대의 출발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 음악은 불행하게도 드럼 대열의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게 되었고, 베를리오즈는 다음달에 연주회장에서 이 음악을 다시 연주함으로써 그때의 실패를 만회했다.

당시 파리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는 이 작품에 대해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베를리오즈는 바그너를 음악 잡지 평론에 소개했고 30년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변덕스러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근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마치 이념의 싸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오직 음악을 통한 극의 창조를 목표로 했으나 바그너는 교향곡과 오페라의 결합을 시도했다. 1855년 두 사람은 런던에서 다시 만나 서로 기질이 닮았음을 알았지만 철학의 차이가 여전히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1840년 이후 베를리오즈는 계속되는 유럽 연주여행을 강행했는데 마지막 여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1867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무리한 일련의 연주들이 되었으며 당시 그는 극도로 병세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연주는 악보와 연주를 통해 러시아 5인조, 특히 무소르크스키에게 자신의 음악 양식을 소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명지휘자였던 베를리오즈는 지휘자들의 결함을 보완하여 새 법칙을 따르는 새로운 음악으로 이끌었다. 즉 그의 주문은 악보에 있는 대로 연주하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의 악보에 나타나 있는 난해한 리듬과 생소한 선율 굴절은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관현악 단원들은 새로운 정확성, 활력, 앙상블을 습득해야 했고 이것은 베를리오즈의 몫이었다. 바그너의 회상은 그가 1839년 베를리오즈의 지휘에서 경험했던 '신세계의 발견'을 증언하고 있다.

베를리오즈는 관현악법에 관한 대표적 저서인 〈근대 악기 편성법과 관현악법의 특징 Traité d'instrumentation et d'orchestration modernes〉(1844)을 썼다. 기술적인 지침서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이 책은 다음 세대에서는 음악의 표현 미학에 대한 입문서가 되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보여주었듯이 그 원리는 바흐에게도 적용할 수 있으며 이른바 표제음악에 대한 생각에 지배받지도 않는다. 표제음악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공헌은 첫번째 교향곡 악보에 함께 인쇄된 '이야기'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 교향곡도 표제가 없이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극음악 가운데는 〈파우스트의 저주〉(1846)와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L'Enfance du Christ〉(1854)의 두 작품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또다른 두 작품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했는데, 베르길리우스의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1855~58)과,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을 기초로 작곡된 짧고 익살스러운 코미디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1860~62)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이 모든 작품들의 대본은 베를리오즈 자신이 직접 썼다. 그는 또한 진혼곡의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주 찬양 Te Deum〉(1849, 초연 1855)을 작곡했으며, 1843~56년 연가곡집 〈여름밤 Les Nuits d'été〉을 포함한 자신의 가곡들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서곡인 〈리어 왕 Le Roi Lear〉(1831)과 〈로마의 사육제 Le Carnaval romain〉(1844)는 〈벤베누토 첼리니〉와 〈해적 Le Corsaire〉(1831~52)에서 각각 그 소재를 취한 것이다.

말년에 베를리오즈는 질병으로 무력하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죽음으로 상심했다. 1854년, 이혼했지만 그때까지도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첫번째 부인이 죽었고, 여러 해 동안 그의 동반자였으며 1862년 그가 홀로 되었을 때 결혼했던 2번째 부인 마리아 레치오도 갑자기 죽었다. 게다가 말년에 그가 애정을 쏟았던 아들 루이는 선장으로 일하다가 33세에 아바나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

평가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강한 개성(극적 표현력과 다양함)으로 청중에게 열광과 혐오의 양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 변모로 인해 사람에 따라서는 똑같은 그의 작품이라도 어떤 곡은 무척 좋아하면서도 또다른 곡은 싫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는 좋아하지만 〈오셀로 Othello〉는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특정한 나라의 전통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음악의 뿌리를 탐색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난해했다.

그의 선율은 풍부하면서 확장되어 있어 4마디로 이루어진 악구(樂句)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며, 그의 화성은 모호하고 미묘하지만 언제나 기능적이며 음색의 요소들에 자주 의존하고 있다. 조바꿈은 거칠며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보다 더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절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절묘한 대조를 통한 조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관현악법은 일반적으로 밝고 투명하지만 결코 창백하지는 않다. 조지 버나드 쇼는 "어떤 지휘자도 베를리오즈·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기 전에는 음악적 인상에서 최고로 민감한 지휘자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벨기에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모든 작품이 걸작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베를리오즈의 작품 하나하나는 일련의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 혹은 최상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완벽함을 잃지 않으려는 계속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그 각각마다 서로 다른 독창적인 개념을 구현한 것임을 뜻한다. 프랑크의 판단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를리오즈는 거의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떤 것에 대한 친숙함은 다른 것에 대한 손쉬운 접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주제 하나하나를 위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한 작곡가의 작품인데도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로미오와 줄리엣〉·〈그리스도의 어린시절〉만큼 서로 닮지 않은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화성체계는 시종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인 기대에서 현저하게 벗어나 있는 화성에 기인하고, 또 한편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서투른 시도로 보는 대신 있는 그대로 감상되어야 하는 뉘앙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의 선율과 자유분방한 대위법은 작품 어디에나 나타나 있는 특징인데, 선율은 강렬한 독창성과 역동적인 균형을 가지고 있으며 대위법은 능숙하면서도 소탈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적 요소들 말고도 베를리오즈는 각각의 오페라와 그 등장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개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작품들 각각을 반복해서 듣는 것만이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힘과 미적 차원(심리적 차원을 포함하여)에 대한 안목을 열어줄 것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작품 하나하나에 특이한 개성을 부여했다는 말은, 곧 다른 작곡가라면 결코 제시할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을 각 작품 속에 구현했음을 뜻한다.

극과 분위기의 창조에 있어 베를리오즈는 우수, 자기 성찰, 부드럽고 격정적인 사랑, 자연에 대한 명상, 군중의 소동 등을 다루는 장면에서 탁월했다. 그의 일관된 의도는 진실과 음악 감각의 결합이었다. 이때 음악 감각은 강렬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다시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늘고 섬세하며 세상의 것이 아닌 예기치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관한 보다 신중하고 냉철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첨가하고 인용할 필요가 있다. 1935년 존경받는 영국의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 경은 〈트로이 사람들〉을 처음 듣고는, 이 작품은 '음악극 분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설득력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코 베를리오즈의 진가를 모른다"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19세기에 저술된 책들은 바그너나 드뷔시에 대한 편견이 있든 없든 간에 학생들을 잘못 인도할 것이며 청중의 귀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를 단순히 관현악의 재료적 측면을 개발한 데 불과한 음색의 기술자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행히도 서구 전역에서는 그의 주요작품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연주되면서 베를리오즈를 최고 수준의 극적인 작곡가로 보는, 보다 수긍할 만한 견해가 한편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베를리오즈의 작품 가운데 정규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은 〈환상 교향곡〉과 몇 곡 되지 않는 짧은 발췌곡뿐이었다. 청중의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연주된 그의 대작들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을 그대로 묻어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LP 음반의 등장은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청중은 이제 연주자들의 해석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베를리오즈 작품의 연주에 대해서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사전 지식과 비평적 태도를 가지고 듣게 되었다.

J. Barzun 글

참고문헌

별 : J. 루셀로, 김범수 역, 세광음악출판사, 1992
베를리오즈-환상의 계절속에서 : 장 마르오, 대작곡가의초상편집위원회 역, 창우문화사, 1982
베를리오즈(세계음악가전집 5) : 태림출판사 편집부 편, 태림출판사, 1978
Berlioz and the Romantic Century, 3rd ed., 2 vol. : Jacques Barzun, Columbia Univ. Press, 1970
Memoirs, Hector Berlioz :, David Cairns (trans.), 1969
Berlioz, the Man and His Work : Walter J. Turner, J. M. Dent & Sons, 1934
Berlioz (Musiciens d'aujourd'hui), 2nd ed. : Romain Rolland, 1908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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