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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13 (월)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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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29      
[국가] 일본 (한메)
일본 日本 Japan

아시아 동쪽 해상에 있는 입헌군주국.

면적 37만 78000㎞². 인구 1억 2611만 (1997). 동쪽과 남쪽은 태평양, 서쪽은 한국의 동해, 남서쪽은 동중국해, 북쪽은 오호츠크해와 접해 있다. 수도는 도쿄[東京].

[자연]

<지세>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인 일본열도는 홋카이도[北海道]·혼슈[本州]·시코쿠[四國]·규슈[九州]의 4개 큰 섬과 34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 국토는 지질학적으로 최근의 조산운동, 즉 지진·화산의 잦은 발생 및 해안선 높이의 변화 등의 영향으로 산지가 많은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국토의 4/5 정도가 산지인데 대부분 경사면이 매우 가파르고 강과 골짜기가 많은 유년기 지형이다.

많은 일본의 강은 길이가 짧고 급류를 이루며 골짜기에는 하안단구가 형성되어 있다. 가장 긴 강은 시나노강[信濃川]인데 길이는 367㎞에 불과하며 유역면적이 가장 넓은 강은 도네강[利根川]이다. 해안은 곶·만 등과 같이 융기 또는 침강한 특성이 있어 지각변동의 초기단계임을 알 수 있다. 산지는 긴 산맥으로 이어지지 않고 저지 등으로 분리된 수많은 좁은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는 강력한 단층작용 등에 기인한다. 강이 산에서 빠져나온 곳에는 선상지가 형성되어 있고 바다까지 이어진 경우에는 선상지 앞에 낮은 삼각주평야가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평야로는 간토[關東]·노비[濃尾]·오사카[大阪] 평야를 들 수 있다.

또한 일본은 화산과 지진의 나라이다. 빈번히 발생하는 지진과 화산폭발은 국토의 기반암이 불안함을 나타낸다. 200여 곳의 화산이 있는데 역사시대에 들어와 그 중 60여 곳이 폭발하였다. 유명한 후지산[富士山, 3776m]은 1707년 폭발한 적이 있는 휴화산이다. 아사마산[淺間山]과 사쿠라지마산[櫻島山]은 잘 알려진 활화산이다. 각지에 온천이 많은 것도 화산의 발달과 관계가 깊다. 거대한 화산은 대부분 원추형이며 칼데라가 발달하였다. 규슈에 있는 아소산[阿蘇山]의 칼데라는 세계 최대규모이다.

<기후>

일본열도는 남북위도차가 22°나 되고 아시아대륙과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기단이 부딪치는 곳이므로 기후조건이 매우 다양하다. 대륙기단의 영향으로 연간온도차가 크지만, 이는 해양의 영향으로 완화되며, 따라서 습도가 높고 강수량이 많은 현상이 나타난다. 겨울철에는 주로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 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강한 북서풍이 동해상의 습기를 몰고와 일본 서해안에 폭설을 내리게 한다. 여름철에는 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남동풍이 불어와 따뜻하고 습도가 높다.

때로는 날씨가 급격히 변화하는데 봄과 여름철에 특히 변화의 폭이 크다. 해안지방의 날씨는 따뜻한 쿠로시오해류와 찬 오호츠크해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두 해류는 혼슈 북동쪽에서 만난다. 겨울철에는 쿠로시오해류의 지류인 쓰시마해류가 대한해협을 경유하여 동해로 빠지면서 앞바다의 수온이 약간 내려가는데 이때 혼슈와 홋카이도지방 북동해안에 짙은 안개가 생성된다.

홋카이도 동부지역을 제외한 일본의 연평균강수량은 1016㎜, 혼슈의 몇몇 해안산악지역은 3048㎜ 이상, 일본내해 주변과 서부홋카이도는 1016∼1524㎜이다. 홋카이도 북부지역에 눈이 오는 날은 연평균 130일 이상, 동해 주변은 80일, 남부의 태평양 연안과 도쿄만 서부는 10일 정도이다. 일본의 우기는 6월과 9월이다. 태풍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하기도 하나 늦여름의 건기에 대비해 물을 저장해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일본의 1월 평균기온은 홋카이도가 -7∼-9℃, 규슈 남부가 7℃이다. 7월 평균기온은 규슈가 27℃, 혼슈 중부가 2∼4℃, 혼슈 중부가 24℃, 홋카이도가 21℃이다.

<생물상>

일본의 식물상은 지형·기후만큼 다양하다. 소나무·전나무·삼목 등의 침엽수, 참나무·단풍나무·소나무·물푸레나무·자작나무·너도밤나무 등의 활엽수가 다양하게 분포하며 대나무·야자나무 같은 아열대식물이 혼슈 북부지역까지 분포한다. 재조림사업의 결과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새로운 품종이 많이 들어왔고 일본 고유종은 많이 사라졌다.

일본의 육상·해상 동물의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다. 곰·오소리·수달·여우·해마·사슴 등의 포유류가 살고 있다. 특히 일본원숭이는 일본 특산종으로서 혼슈 북부의 아오모리[靑森]는 세계 원숭이 분포의 북한지이다. 학·꿩·공작·비둘기·딱다구리 등의 조류, 바다거북·도마뱀·뱀 등의 파충류 그 밖에 양서류도 분포한다. 바다에는 수백 종의 어류가 분포하는데 대구·숭어·정어리·송어·고등어 등이 많이 잡힌다.

[역사]

<원시사회>

일본열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열도 최초의 문화는 조몬식토기[繩紋式土器]의 문화 즉 조몬문화(BC 4500∼BC 2세기)로 이때까지 어렵상태(漁獵狀態)가 이어졌고 금속기의 발명은 없었다. 이는 BC 2세기 무렵 한반도로부터 조몬토기와는 계통이 다르고 그보다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문화 및 도작(稻作)과 금속기문화가 전해짐으로써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야요이문화[彌生文化]라 한다. 야요이문화는 한국·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각지에 취락이 형성되었다. 중국기록에 의하면 1세기 후반 10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고대사회>

일본열도를 통일한 야마토국가[大和國家]의 모체가 형성된 것은 5세기,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은 고대국가가 성립된 6세기 말이고 고대국가체제가 정비된 것은 7세기 중반이다. 세습제를 확립한 오키미[大君;王]가 군림하고 농구와 무구(武具)를 독점함으로써 세력을 가지게 된 족장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였다. 족장은 조정으로부터 성(姓)을 하사받고 귀족이 되어, 씨족민과 예속민을 거느리고 조정에 봉사하였다. 미야케[屯倉]·다도코로[田莊]라고 하는 대토지를 소유한 대군은 베민(部民;私有民]이라는 경작민을 소유하였다.

백제(百濟)로부터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하고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7세기에 지배계급은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율령제도를 지배의 기본체제로 하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자 하였고, 국민을 공민(公民;양민)과 노비(천민)로 나누었다.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부여받은 공민은 조(租)·용(庸)·조(調) 외에 병역·잡역(강제노동)을 부담하였다.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걸쳐서 율령국가의 기반이었던 반전제가 무너지고 귀족·사찰의 사적(私的) 토지소유인 장원이 발달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장원·공령(公領)의 경작을 도급받은 농민상층(農民上層)이 차츰 토지경작권을 가지게 되어 자립적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작과 경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장한 지주농민과 관리 가운데 무사(武士;사무라이)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무사, 중앙귀족, 사찰세력과의 대립 항쟁을 통하여 세력을 신장하였다.

무사들은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는데, 12세기 중반 이래 다이라[平]·미나모토[源]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다가 미나모토 요리모토[源賴朝]가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를 열어 이른바 무가정치가 시작되었다. 794년의 교토[京都] 천도 이후 가마쿠라바쿠후 성립까지의 기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라고 한다.

<중세사회>

1192년 가마쿠라바쿠후가 성립된 뒤에도 중앙귀족과 사찰세력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여 장원영주·무사영주의 2원지배체제가 지속되었다. 1274년과 81년의 2회에 걸친 몽골의 침입 때는 태풍에 힘입어 이를 물리쳤으나, 막대한 군비지출 등으로 지배체제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1333년 반(反)바쿠후세력을 결집한 고다이고왕이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지방세력의 불만을 고조시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초래하였다.

남북조시대는 1336년 아시카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무로마치[室町]에 바쿠후를 세운 뒤에도 약 60년간 지속되다가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무력세력의 통합을 주창하면서 남조를 소멸시킴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편 무로마치바쿠후는 처음부터 그 기반이 취약하여 1467년 이후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에 접어 들었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守護]가 다이묘[大名;領主], 즉 슈고다이묘가 되고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극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은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강대한 군사집단(家臣團)을 편성하고, 영내(領內)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료고쿠[大名領國]를 형성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다이묘 가운데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0년 전국을 통일하였고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문화적·경제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결국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1603년 에도[江戶;지금의 東京]에 새 바쿠후를 개설하였다. 바쿠후는 가신단의 영지를 재편성하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삼근교대(參勤交代)의 제도화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외국무역의 관리와 통제를 위하여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바쿠후체제에 한[藩;大名의 영지]을 결합시킨 바쿠한체제[幕藩體制]의 경제적 기초는 자급자족적 경제의 농촌이었다.

농업생산에서 이탈한 무사계급은 농업생산담당자인 소농으로부터 생산물의 절반 이상을 연공(年貢)으로 수탈하였다. 농민은 전답영대매매금지령(田畓永代賣買禁止令)·분지제한령(分地制限令) 등에 의하여 전답의 매매·저당을 원칙적으로 금지당하였다. 무사계급은 3도(三都;京都·東京·大阪) 또는 성(城) 부근에 살면서 연공미(年貢米)와 그 환금(換金)으로 생활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가 되자 농촌사회는 화폐 및 상품이 유통되는 사회로 차츰 변질하였다. 농민층의 분해가 진행되고 농촌공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화폐경제의 발전은 영주계급에도 영향을 주어, 지출의 증대로 재정이 궁핍해진 바쿠한영주는 연공의 증징(增徵)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혹한 연공수탈에 반대하는 농민봉기와 도시 시민들의 폭동이 계속 일어나게 되자 19세기에 바쿠후나 한에서 경제개혁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에도바쿠후 말기에는 구미열강의 개국요구가 거듭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으나 미국 M.C.페리 제독의 압력에 굴하여 1854년 쇄국정책을 포기하였다. 바쿠후에 의한 개국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바쿠후타도운동이 격화된 내란상황 속에서 1867년 에도바쿠후는 무너졌다.

<근대사회>

1869년의 판적봉환(版籍奉還;영주들이 영지와 백성을 조정에 반환한 일) 등에 의해 조정은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추진하였다. 젊은 반(反)바쿠후세력이 중심이 되이 다이묘체제를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고 서양의 기술·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 등 여러 정책으로 1890년대부터 1910년대에 걸쳐서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계제공장생산이 확립되었다.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정책을 추진하였다. 1894∼95년의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사할린남부·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계속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1940년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었고,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원자폭탄투하를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현대사회>

항복문에 따라 일본은 1895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모두 포기하였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민주화를 추진하였고 1947년에는 정치·사회·교육 개혁안을 포함시킨 새 헌법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보수적인 자민당정권 아래에서 일본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비무장화에 따라 국방비의 부담이 없어졌고 한국의 6·25에 따른 특수(特需) 등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대부분 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됨과 동시에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주변국들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고 무역에 있어서 불공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말에 들어와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정치]

메이지유신 이후 프로이센헌법을 본뜬 메이지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왕중심의 강력한 군주권을 배경으로 입헌주의 외관을 갖춘 것이었다. 지금의 일본헌법은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46년 메이지헌법을 개정하여 제정한 것으로 구헌법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왕을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한 것과 국민주권을 강조한 점이다. 새 헌법의 제정은 점령군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고 주권재민, 군비철폐, 인권보장, 정치기구의 민주화 등이 명시되어 있다.

<정치기구(정치구조)>

주권은 국민의 대표자에 의해 행사되는 원칙(대의민주제)을 취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정치구조상 최고기관의 위치를 차지한다. 국회는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의 양원으로 구성되며 법률제정, 예산안 심의·의결, 조약승인 등 정치운용의 근거가 되는 국가행위에 참여한다. 국회가 승인한 법률이나 예산에 의거해서 정치·행정을 실제로 수행하는 기관은 내각이다.

내각은 국회의원의 호선(互選)에 의해 지명받은 총리 및 총리가 임명하는 국무위원(국무대신)으로 구성되는 합의체이다.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은 1955년 일본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보수합동(保守合同)으로 창당한 이래 국회에서 계속 다수의석을 차지하여 아직 한번도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 내각은 중의원에서 불신임을 받았을 경우에는, 총사퇴하거나 중의원을 해산해서 국민에게 신임을 묻는 총선거를 실시한다.

사법권을 담당하는 것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로 정한 하급재판소 즉 8개의 고등재판소와 각 현(縣)에 있는 지방재판소이다. 최고재판소의 장은 내각의 지명에 의하여 왕이 임명하고, 14명의 재판관은 내각이 임명한다.

<정당>

일본 최초의 정당은 1874년 결성된 애국공당(愛國公黨)이다. 1918∼32년 정우회(政友會) 내각이 정권을 차지한 뒤로는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뒤 진보당·협동당·자유당 등의 보수정당이 성립하여 이합집산이 거듭되었고 공산당·사회당 등도 결성되었다.

자유민주당은 일본의 보수적인 흐름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1949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吉田茂內閣]을 발족시킨 이래 계속 정권을 확보해왔다. 민주주의를 기조로 하는 문화국가의 완성, 자주독립, 자유주의 경제에 의한 민생의 안정과 복지국가의 완성 등을 강령으로 삼고 자위력(自衛力)의 증대, 고도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왔다.

일본사회당은 1947년 일시 정권을 잡은 뒤로는 계속 주요 야당에 머물러 있는데 노동조합·대도시시민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밖에 일본공산당·공명당·민주사회당 등이 10% 내외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오랫동안 일본 정치의 근간을 이루었던 관료 의존형태는, 정당제 도입 후 정당기구에도 반영되어 관료출신 인사와 정책입안자가 여당 내에 포진하게 됨으로써,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관료가 일체화되는 독특한 권력 공유체제가 형성되어 정당간의 정권교체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의 정당은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인 몇 개의 파벌에 의해 움직여지는 특성이 있다.

[외교]

1945년 8월 말부터 1952년 4월까지 연합국에 의한 일본점령, 실질적으로 미군의 단독점령기간중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1951년 9월 제2차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해 연합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점령군은 주둔군체제로 계속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때 소련은 조약에 서명을 하지 않아 일본은 쿠릴열도 일부 섬의 영토회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을 관계국과 협상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아시아 각국과 배상조약을 체결한 뒤 관계가 재개되었다. 1956년에는 소련과 일·소공동선언에 합의, 영토문제를 일단 보류하고 국교를 회복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제연합에 가입한 뒤에는 콜롬보계획·GATT·OECD 등의 주요 기여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1964년 도쿄올림픽, 1970년 오사카국제박람회를 개최하고 1965∼66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71년 중국의 국제연합 가입과 1972년 미국대통령 R.M.닉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국제정세가 급속히 변화하자 이에 신속히 대응하여 1972년 9월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그 뒤 중국과 교역확대를 추진하여 1978년에는 양국사이에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는 한편 중화민국에 대한 투자도 게을리하지 않있다.

한국과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정상화하였으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교과서 왜곡파동·종군위안부문제 등이 현안으로 계속 대두되고 있다. 일본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일 안보체제를 기본축으로 하는데, 1990년대 들어와 일본이 미·일경제전쟁에서 사실상 승자로 부상하면서 세계 각국과의 통상마찰완화가 일본외교의 중심과제가 되고 있다.

[군사]

현행헌법 아래서 일본은 공격목적의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따라서 1945∼50년에는 군대가 없었으나 한국에서 6·25가 발발한 것을 계기로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청으로 개편·확충되었으며 54년에는 자위대로 성장하였다. 1958년부터 7차례의 방위력증강계획으로 군비확장을 계속해온 일본은 점차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에 들어 세계 제3위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1991년 4월 자위대 발족 이래 최초로 페르시아만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같은 해 말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명문화한 유엔평화유지군협력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뒤 92년 자위대병력을 캄보디아에 파병하였다. 육상·해상·항공의 3개 자위대 총병력은 27만 5000명이고 지원제로 되어 있다. 1992년 군사비는 4조 6220억 엔[円]이었다.

육상자위대는 정원 18만 명, 예비자 4만 6000명, 전차 1210대, 야포 880문, 헬리콥터 458대이다. 해상자위대는 정원. 4만 6000명, 예비자 1100명, 호위함 61척, 잠수함 16척, 고정익기(固定翼機) 87대(P3C 대잠초계기 50대)이다. 항공자위대는 정원 4만 5000명, 예비자 800명, F15전투기 143대, F4 전투기 125대, F1지원전투기 74대, E2C 조기경보기 8대로 되어 있다.

[경제]

세계 GN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은 세계무역에서도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여, 90년 수출액에서는 구 서독과 미국에 이어, 수입액에서는 미국과 구 서독에 이어 각각 제3위를 차지하였다. 일본이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뀐 것은 1년간의 플로(flow;흐름)에서는 1965년, 스토크(stoke;殘高)에서는 1968년의 일이었으나, 그 뒤 2차례의 석유 파동시기를 제외하고는 경상수지의 흑자기조와 그 누적을 배경으로 대외증권투자·차관·직접투자가 모두 급증하였다.

특히 1983년부터 1984년에 걸쳐 대외자산에서 대외부채를 공제한 순자산은 373억 달러에서 743억 달러로 늘어 영국에 이어 제2위국으로 부상하였다. 이처럼 뛰어난 경제성과를 이루어낸 것은 ME(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혁명이라 불리는 신기술혁신에 의한 산업구조의 자원절약·지식집약화, 그리고 낮은 실업률하에서의 안정된 노사관계와 노동생산성의 상승, 안정된 물가수준 등을 배경으로 한 제품의 가격·품질면에서의 강한 국제경쟁력 등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경제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얻기는 했으나, 동시에 무역마찰을 일으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일본의 대외직접투자, 즉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이 진행되고 있으나, 그에 따른 문제점과 복지문제·고령화사회의 도래 등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일본경제의 전개과정>

⑴ 일본의 봉건사회와 상품경제

13세기 초 가마쿠라시대에 형성된 일본의 봉건사회는 몽골의 침입 이래 느슨해지기 시작했으며, 남북조시대·무로마치 바쿠후·전국시대로 이어지는 동란 속에서 상품경제가 급속히 발전하여 정기시장을 만들 정도로 각지에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또한 에도시대의 밀무역(密貿易)에서 시작하여 공식무역으로 전개된 무역은 동남아시아 각지에 일본인마을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으며, 쇄국 직전 그 규모는 화교를 능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업·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층과 결탁해서 성립된 쇼쿠호[織豊]정권 이후에는 유럽의 절대왕정과 비슷한 성격이 이어지는 한편, 도쿠가와바쿠후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막혔으나 국내 경제는 그 나름대로 발전하였다. 연공미와 각지의 특산물 거래를 통하여 상인자본이나 대금(貸金)자본을 대두시켰고, 상품경제의 농촌침투는 지주와 소작의 관계를 성립시켰다. 제사·직물 등에서 도매제 가내공업이 광범하게 형성되어, 바쿠후 말기에는 일부에서 공장제수공업(매뉴팩처)이 성립하였다.

⑵ 바쿠후 말기의 개항과 메이지유신

일본이 쇄국을 하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19세기에 자본주의적 공업화가 실현되었다. 1850년대 구미의 각국이 개항을 요구, 54년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 등에 개국하였다. 이때 무역이 성행하여 상품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것은 바쿠한체제의 정치적 동요로 격화되어, 68년 하급무사층이 주체가 되었던 왕정복고에 의하여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졌다. 그 뒤 폐번치현(廢藩置縣)과 신분제 및 직업 선택이나 이동에 관한 봉건적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자본주의성립의 전제를 이루는 노동력의 상품화(무산계급창출)의 제도적 조건을 창출하였다.

또한 근대적 토지소유와 조세 및 재정제도를 확립하였다. 그 밖에 봉건적 가신단을 해체하고 교통·통신 및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직접 관영사업을 경영하여 기계화공업의 도입에 주력하였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미쓰이[三井]나 미쓰비시[三菱] 등의 정상적상인(政商的商人)·대금자본(貸金資本)에게 이권을 주어 그들의 자금력을 이용하는 한편, 불환지폐 또는 국립은행에 의한 불환은행권의 발행을 증가시켜 재원의 부족을 충당하였다. 그 결과 격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수습한 것이 1881년에 시작된 지폐정리였다.

⑶ 산업자본의 확립과 그 한계

지폐정리가 일단락된 뒤인 1887∼90년에 철도에서부터 시작된 민간기업은 면사방적·광산으로 확산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면사방적업의 성립이다. 원료를 국산면화에서 수입면화로 바꾸었으며 세사(細絲)는 만들지 못했으나 생산성이 높은 영국제 링방적기와 증기기관을 도입하여 1890년대 국내시장을 장악하였고 청·일전쟁 뒤에는 수출산업으로까지 성장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산업자본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화공업제품은 구미 여러 나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다. 면사방적업이 주식회사 형태의 대규모기업으로 성립한 것과는 달리, 재래산업인 제사업·직물업 등은 중·소영세기업으로 머물게 되었다. 또한 노동력 수요가 대부분 혼전기여성의 노동력에 한정되었기때문에, 농촌에는 도시로 유출된 여성을 제외한 계층의 인구가 과잉·적체되어 가족경영의 소농형태로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농경영을 근본으로 한 농산물의 가격형성이 이윤의 성립을 저해하게 되었으며, 농민층의 와해는 지주·소작관계의 재생산으로 왜곡되는 악순환의 구조를 고착화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가지면서도 97년 청·일전쟁의 승리에 따른 배상금을 기초로 해서 금본위제를 확립함으로써 일본자본주의는 국제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었다.

⑷ 제국주의화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

20세기 들어 제국주의시대의 본격화는 일본자본주의를 제국주의로 전화하도록 촉진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타이완[臺灣]·남(南)사할린·한국을 식민지화하는 한편, 양 전쟁 후 관영인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의 창설과 육·해군 공창(工廠)의 증강, 철도국유화 등 군비확장을 위하여 정부주도로 중공업 육성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중공업화를 위한 자본재·원료수입의 증대에 따른·재정 및 경상수지의 적자가 초래되었다.

외채발행에 의한 외자 도입이 그것을 일시적으로 호도했으나, 메이지 말년에는 그것도 한계에 달하였고, 제1차세계대전 직전에는 국민경제적으로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유럽이 주된 전투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미국과 함께 일대 수출붐을 맞이하였다. 여기서 얻은 외화로 일시적인 여유를 가졌으나, 전후공황·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금융공황으로 또다시 위기에 직면하였다.

다만 그 동안 대전중 유럽으로부터의 수입단절을 배경으로 하여 민간에서 중화학공업의 기업 발흥이 본격화한 사실, 대전 전후 도시화의 진행이 공공투자를 주도했던 사실, 만성불황을 배경으로 하여 자본이 집중되고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住友] 등의 재벌콘체른과 면공업 독점체에 의한 금융자본의 독점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이래 금지하고 있던 금수출을 재개한 1930년에 일본경제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공황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고, 이로 인한 불황으로 농촌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가 격화되어 좌익·우익의 사회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이 위기를 군부파시즘에 의한 좌익탄압과 대외군사침략, 그리고 1931년 말의 금 수출재금지 뒤의 환(換)덤핑에 의한 수출과 군수 인플레이션에 의한 호황으로 타개하였다.

이 금 수출재금지에 의한 금본위제의 최종적 포기는 일본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지표이며 적자공채의 발행에 의한 군수인플레이션정책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공황 후 블록경제하에서 수출과 군사침략에 의한 일본의 대외진출은 미국·영국 등 구미 연합 여러 나라와의 제국주의적 대립을 격화시켜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⑸ 연합국 점령하에서의 전후개혁과 경제부흥

패전과 동시에 일본은 연합국(사실상 미국)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어 점령군의 주도 아래 경제의 민주화가 실시되었다. 재벌콘체른은 기존의 가족경영 위주에서 법인 사이의 주식보합에 의한 형태로 바뀌었고, 농지개혁은 자작농 체제를 창출하였으며, 노동개혁에 의해 처음으로 노동3권이 보장된 현대적 노사관계가 정착하였다. 재정·금융제도에서도 적자공채의 발행과 일본은행에 의한 그 인수의 금지 등이 단행되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대중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의 도입을 가져온 헌법개정 등과 함께 전후개혁의 일환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일본자본주의의 구조를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맞게 고친 제도적 변혁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일본경제는 미국의 대일 경제원조와 철·석탄에 중점을 둔 경사생산(傾斜生産)방식의 채용으로 1948년 무렵부터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후부흥을 결정적으로 촉진한 것은 1950년 한국에서 일어난 6·25였다. 또한 전후부흥이 동서냉전의 대립양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실현되었다는 사정은, 그 뒤 일본자본주의의 두드러진 대미종속·의존관계를 만들어내었다. 1951년 9월에 체결되고 1952년 4월에 발효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으나, 동시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되어 그 뒤에도 일본은 미국의 <핵과 달러의 우산> 밑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⑹ 제1차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화

1955년부터 64년까지 일본경제는 실질GNP성장률이 연평균 약 10%의 고도성장을 실현하였는데 그것은민간설비투자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고도성장의 내용은 경제의 실체면에서 산업구조의 고도화, 제조업구성의 중화학공업화 과정이었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은 이것에 직결된 부품생산 또는 제2차·3차 가공제품 생산주체로서 재편성되었다. 이와 같은 고도성장과 중화학화로 일본은 64년 4월 국제통화기금(IMF) 8조국으로 이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⑺ 제2차 고도성장과 경제대국화

1964년부터 65년에 걸쳐 일본경제는 고도성장 개시 이래 처음으로 심각한 불황을 경험하기도 했으나, 65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수출이 급증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66∼73년의 실질 GNP성장률은 연평균 10.8%에 이르렀다. 중화학공업은 정상급 수준에 달하여, 68년 일본의 GNP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랐다.

⑻ 제1차 석유파동의 극복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일본경제는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공존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었고 74년 실질GNP성장률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재정지출확대에 따른 수출의 급증, 국채의 대폭발행, 에너지·물자절약 등으로 경제회복이 이루어졌다. 특히 ME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혁신투자로 중후장대형(重厚長大型) 제품을 대신하여 경박단소형(輕薄短小型) 제품이 시장을 석권하여 제1차 석유파동을 극복하였다.

⑼ 제2차 석유위기와 임조행혁(臨調行革) 노선

1979년 6월과 80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유가인상조치로 서독을 제외한 구미 여러 나라는 겨우 회복 과정에 있던 스태그플레이션이 또다시 심각해졌으나, 일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경상수지는 1979∼80년 2년간 적자가 되었으나, 무역수지는 혹자폭이 축소되었을 뿐, 물가의 상승은 원유가 상승의 범위에 머물러서 심각할 정도의 상승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GNP성장률이나 광공업생산도 별로 저하되지 않았으며 법인기업의 경상이익률도 높은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제가 제2차 석유파동을 극복한 듯이 보였을 때, 국제경제환경은 80∼82년까지의 세계불황에 직면하여 일본의 경제성장률도 1980년까지의 5% 전후에서 1981년의 4%, 1982∼83년의 3%대로 둔화되어 갔다. 이 현상은 당시 미국에서 등장한 레이건행정부의 신자유주의노선과, 일본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양 내각에 의한 임조(臨調;임시행정조사회)·행혁(行革: 행정개혁)노선의 연동에 의한 결과였다.

즉 임조·행혁노선의 방침은 <작은 정부> <민간활력>을 표어로 해서 <증세(增稅)>없는 재정재건을 목표로 하고, 구체적으로는 <1984년도 적자국채발행 제로>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목표는 성장둔화와 재정지출의 경직화로 좌절되었고, 성장은 오로지 외수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제2차 석유파동 후 엔화의 하락으로 수출은 급신장했고, 경상흑자가 즉시 엔환율의 상승을 몰고오지 않았다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⑽ 당면과제

1986∼87년 엔고[円高]는 일본의 수출산업에 타격을 주었다. 제2차 석유파동 이후 OPEC 이외의 산유량이 증대된 결과 원유가격이 1986년 초 이래 급락하였고, 또 신흥공업국(NICS)이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각국의 통화가 달러와 연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여러 나라 제품의 경쟁압력도 강해졌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자동차를 비롯한 수출 관련 제조업에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하도급 중소기업들도 생산거점의 해외이전 움직임을 강화하였는데 그것은 일본기업의 다국적기업화를 한층 촉진하는 것이였다.

(11) 90년대의 동향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가(株價)·지가(地價)가 사상 최대의 하락세를 보인 버블현상으로 경기는 후퇴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경영자의 사업확대는 진정되고, 투기 감소, 생산·재고조정 등이 이루어져 오히려 <안정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92년 6월 <생활대국 5개년계획>이 내각에서 결정되었는데, 종래의 생산주도형 경제에서 국민 각자의 생활 중시, 인류사회와의 조화 등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다.

<산업구조와 산업조직>

⑴ 산업구조의 고도화

제2차세계대전 전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농림수산업인구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1989년에는 7.4%까지 축소되었다. 이에 비하여 제2차세계대전 후의 제2차산업과 제3차산업의 취업인구는 고도성장기까지는 비중이 높았으나, 석유파동을 거친 1970년대 후반 이후 제2차산업은 축소되었고 제3차산업만 계속 비중이 높아져 고도로 성숙된 산업구조의 모습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⑵ 중화학공업화에서 지식집약화로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면과 생사를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이 1/3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여, 기본적으로 경공업 우위의 구조였으나 전후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급속하게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 서독과 함께 국제적으로 최고 수준의 중화학공업화율을 실현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중화학공업화율은 한층 높아졌으나,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기초소재산업은 정체하였고 반면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조립산업인 기계(조선을 제외한 전기·전자기기, 자동차, 공작기계, 정밀기계 등)의 비율만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ME기술의 발전과 그 응용은 NC공작기계나 로봇의 보급을 통해서 생산공정의 자동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제품의 경량화·소형화를 촉진하였다. 산업구조심의회가 발표한 <80년대의 통상산업정책 비전>에서는 바람직한 산업구조의 방향으로서 고도의 기술과 창조성이 풍부한 노동력의 결합에 의한 <창조적 지식집약화>를 내세웠다. 한편 생명공학(biotechnology)과 신소재 개발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남·북극 및 우주개발 등 21세기를 향한 첨단분야에도 많은 진전을 보이고 있다.

⑶ 에너지문제의 변천

일본의 에너지 공급은 제2차세계대전 전부터 주로 국산자원인 석탄과 수력에 의존해왔다. 고도성장이 시작된 1955년도 1차에너지공급 구성에서 차지한 비율은 77.6%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산 에너지비율은 76%를 차지했으며,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의 비율은 20. 2%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의 국제석유자본(메이저스)에 의한 중동유전개발과 그 소비지정제전략(消費地精製戰略)에 따라 원유가격이 대폭 떨어진 결과 국산 석탄에서 수입 원유 쪽으로의 급격한 전환이 추진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을 계기로 석유·에너지절약 및 석유대체에너지개발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석유로부터 석탄·천연가스로의 원연료전환, 원자력발전소의 건설로 1983년도 1차에너지공급구성에서 차지하는 석유의 비율은 60.9%로 내려갔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의 안정성이 문제가 됨에 따라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이용이 추진되고 있다.

⑷ 운수와 통신

고도성장기 이후 운수사업에서 승용차를 포함한 자동차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항공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그 중 시가지 및 도시 근교 사철(私鐵)을 제외한 철도는 60년의 철도국유화 이후 국가가 직접 운영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상선대(商船隊)를 자랑하던 해운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쇠퇴했으나 대전 후의 <계획조선>과 그 밖의정부의 보호정책에 의해 복구되었다. 육상운송에 있어서는 철도에서 자동차로 전환하게 되어 철도의 수송분담률은 1955∼84년 사이에 여객은 82.1%에서 39.0%로, 화물은 52.9%에서 5.3%로 떨어졌다. 국철경영은 1964년 이후 적자가 누적되어, 1987년 4월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분할하여 민영화되었다.

한편 통신사업은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우편·전기통신(전신·전화)을 모두 정부가 직영사업으로 경영했으나, 전후에는 우편을 제외한 전기통신사업에서 국내통신은 공공기업체인 일본전신전화공사가, 국제통신은 국책회사인 국제전신전화주식회사가 운영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전국 자동즉시통화가 가능하게 되어 세계 제일의 통신선진국이 되었다. 또한 이때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기술혁신으로 쌍방향 유선텔레비전(CATV)과 부가가치통신망(VAN)이라는 뉴미디어가 출현하였고, 또한 고도정보통신시스템(INS)이 개발되었다.

⑸ 농림수산업의 여러 문제

농업생산은 1950년대중반 연평균 4%라는 고도성장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이 유출되면서 농업생산은 정체되었다. 또한 세계 제일의 수산국이지만 고도성장기 이후 연안어업은 남획과 매립 및 공해로 인한 해양오염으로 인해 쇠퇴하였고, 원양어업도 1970년대 이후 <200해리 어업전관수역(漁業專管水城)>의 설정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⑹ 기업집단과 중소기업

제2차세계대전 전의 일본경제자본은 정상(政商)에서 발전하여 가산적(家産的) 콘체른을 형성한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 등의 재벌과 그 산하에서 독립한 면공업독점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중화학공업화 과정과 점령하의 재벌해체에 의한 지주회사(持株會社)의 해산과 가족 및 모회사(母會社)에 의한 지주지배(持株支配) 배제로 통일적 경제주체로서의 힘을 잃었다.

1947년에 제정한 독점금지법은 2차례의 개정 뒤에도 콘체른의 부활을 금지했으며, 카르텔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전후의 산업조직은 대전 전과는 달리 경쟁적 성격을 강화했으나, 1950년대 이후 구(舊) 3대 재벌계 여러 기업의 재결집이 시작되었고, 재벌을 대신하는 기업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스미토모·미쓰비시·미쓰이의 3대 집단 이외에도 후지은행[富士銀行] 등이 융자계열 형성을 단서로 거의 동일한 <기업집단>을 형성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신일본제철과 전력회사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거대기업이 6대기업집단에 속하였다.

중소기업을 보면, 제조업에서는 그 중심이 제2차세계대전 전의 도매제하에서의 제사·직물업으로부터, 대전 후에는 중화학공업으로 옮겨 갔다. 1950년대 중반에는 대기업과의 부가가치생산성 격차나 임금 격차가 컸고 이중구조를 형성했으나, 1960년대 이후 모기업으로부터의 기술이전, 금융지원의 강화로 이중구조는 해소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1970년대 후반 이후 기술혁신에 의한 산업구조의 지식집약화·소프트화는 중소기업에 새로운 발전의 여지를 제공해 주었다.

<국제수지와 대외경제관계>

⑴ 국제수지와 환율

일본의 대외경제관계는 1949년 도지라인에서의 단일고정환율(1달러詩360엔)의 설정과 중국무역의 차단, 1952년의 IMF, 1954년의 GATT가맹에 따라 미(美)달러블록에 편입되었다. 1950년대 초까지 무역에서의 국제경쟁력 결여와 해상운송업 부진으로 인한 경영수지의 적자를 미국의 원조와 6·25로 보충하는 시기가 계속되었으나, 고도성장기로 들어선 뒤에도 1960년대 중반까지 경상수지의 적자기조는 이어졌으며 외화예산할당제도에 의한 수입과 기술도입의 선별, 경상수지 개선을 위한 금융긴축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무역과 자본거래의 자유화가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제품의 국제경쟁력 강화와 엔저하에 의해 수출이 급증했고, 무역·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했다. 한편 장기자본수지는 흑자에서 적자로 바뀌었고, 일본은 자본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에 미국은 일본에 대해 엔화 환율절상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71년 8월 닉슨대통령은 신경제정책을 발표, 이로써 금·달러의 교환성을 기초로 한 IMF체제가 무너짐과 동시에 미국 스미스소니언에서의 선진 여러 나라의 통화조정에서 1달러詩308엔의 신고정환율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교환성을 상실한 달러에서의 고정환율성은 안정되지 못했고 1973년에 주요국 통화는 잇따라 변동환율제로 바뀌어갔으며, 엔환율은 단번에 1달러=270엔대로 높아졌다. 2차례의 석유파동으로 무역·경상수지는 흑자와 적자를 거듭하다가 1981년 이후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으나 엔환율은 여전히 낮았다. 이러한 이상사태는 1985년 이후 수정되어, 1987년 초에는 1달러=150엔대까지 엔고가 진행되었다. 또한 대미 증권투자 외에, 엔고와 무역마찰을 회피하기 위한 대외 직접투자의 급증 등으로 1984년 이후 장기자본의 유출은 거액에 달했고, 일본은 세계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⑵ 무역의 구조와 대외경제마찰

제2차세계대전 전의 일본무역은 면제품·생사를 수출하고 원료와 중화학공업품을 수입하였다. 30년대에는 이를 축으로 하여 이후 아시아에 중공업품을 수출하게 되었다. 전후에는 산업구조와 국제정치환경의 변화로 크게 바뀌었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1950년대 섬유를 비롯한 경공업품이 중심이었으나, 1960년대에는 철강·기계 등 중공업품의 비중이 높아졌다. 특히 1970년대 이후는 자동차, 전기·전자기기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류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수입에서는 원연료·식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1980년대 초에는 광물성 연료가 수입의 약 절반을 차지했다. 또한 2개국간 무역수지가 산유국인 중동 여러 나라와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자원국에 대해서 수입초과라는 사실이 다른 여러 나라에 대한 수출초과폭을 확대시키는 결과가 되어 무역마찰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2개국간 무역에서 일본의 수출초과 그 자체가 마찰의 원인이 되는 경향이 심해짐과 동시에, 무역마찰 회피를 위한 대외 기업진출이 오히려 현지자본과의 경합으로 인하여 투자마찰을 일으킴으로써 대외 경제마찰이 복잡해지고 있다.

⑶ 채권국화와 기업의 다국적화

장기자본의 유입은 1960년대에는 차관이 중심이었으나 70년대 이후 증권투자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장기자본의 유출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는 상품수출에 따르는 연불신용(延拂信用)이 과반을 차지했으나, 1970년대 이후는 차관·증권투자·직접투자가 다 같이 늘어났다. 일본기업의 다국적화를 의미하는 대외직접투자는 70년대까지, 값싼 노동력의 동남아시아를 향한 제조업투자(섬유 등), 광산물자원을 목적으로 한 자원국에 대한 투자, 상품수출 촉진을 목표로 한 선진국을 향한 상사·은행의 진출 등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그 뒤 대미·대유럽 무역마찰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유럽 선진국을 향한 제조업투자(전기·전자 및 자동차 등 기계중심)가 급증하고 있다.

⑷ 경제협력과 그 문제점

개발도상국들의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한 경제협력의 개념에는, 넓은 뜻으로는 민간의 수출신용과 직접투자가 포함되지만, 엄밀하게는 정부개발원조(ODA)에 한정시켜야 한다. 일본의 경제협력은, 1950년대에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배상 형태로 시작되었으나, 본격화한 것은 1960년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 가입17개국)에 가입하고 국제수지에서도 여유가 생긴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85년에 새로이 제3차중기목표를 정하고 1986년부터는 7개년계획으로 ODA배증(倍增) 및 무상협력 확충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를 향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으나 그 비율이 총액의 2/3를 차지하고 있어 가난한 나라가 가장 많은 아프리카를 향한 것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교육·문화 등에 중점을 두는 구미 여러 나라들에 비해 산업기반과 광공업 등 경제관련 분야가 과반을 차지하는 것도 문제점이다.

<금융·재정제도와 그 구조>

⑴ 금융제도와 금융시장의 특징

일본의 금융제도는 일본은행을 정점으로 해서 민간금융기관과 정부자금을 원자(原資)로 하는 각종 정부금융기관 및 주식과 증권회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여러 금융기관이나 증권회사를 통해 자금부족부문에 공급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왔다. 기업부문에 대한 산업자금 공급상황은, 제1차 고도성장기인 1960년대 중반까지는 민간금융기관 대출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특히 도시은행은 대출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본은행 차입에 의존하는 오버론(대출초과)상태가 생겨났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특히 석유·파동 이후는 기업의 산업자금 조달루트의 다양화와 내부자금의 충실화가 서로 작용하여, 산업자금 공급에서 차지하는 민간금융기관, 특히 도시은행의 비중은 낮아지고 있다.

⑵ 금융의 자유화와 국제화

고도성장기의 금융시장은 임시금리조정법에 의한 통제금리에 바탕을 두는 자금의 통제적 배분에 특징이 있으나, 제1차 석유파동 후의 국채증발(增發)은 그 소화문제를 통해 금리의 자유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금융자유화의 움직임은 1980년 외환법개정에 의한 대외거래의 원칙 자유화를 계기로 금융국제화 쪽으로 발전했으며, 자금조달면에서는 임팩트론의 도입, 외채 특히 외화계정전환사채(外貨計定轉換社債)의 발행이, 자금운용면에서는 외화예금이나 외채투자가 급증하였다. 금융의 자유화·국제화를 떠받치는 기술적 요인으로 컴퓨터에 의한 네트워크의 형성과 현금자동지급기의 도입 등 금융면에서의 기술혁신도 급속히 추진되었다.

<한병선>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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