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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08 (수) 07:42
분 류 사전2
ㆍ조회: 672      
[근대] 간디 (브리)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 10. 2 인도 구자라트 포르반다르~1948. 1. 30 델리 뉴델리.

20세기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 지도자, 비폭력주의 제창자.

넷째 아내였던 어머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서벵골 구자라트 주의 작은 공국(公國) 포르반다르의 데완(dewan:총리)이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공적인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유능한 행정가로 변덕스러운 군주들과 그들에게 오랫동안 고통당해온 백성과 권력을 쥐고 있는 고집불통의 영국 관리들 사이에서 잘 처신했다.

어머니 푸틀리바이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은 힌두신 비슈누를 신봉하는 비슈누파에 기울어져 있었다. 이 파는 비폭력을 중시하고 우주만물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한 인도종교인 자이나교의 경향을 많이 가졌다.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그는 아힝사(ahimsā: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와 채식주의, 자기 정화의 단식, 그리고 모든 종파의 상호 관용을 배우며 자랐다.

젊은시절

포르반다르의 교육시설은 형편없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가 다른 공국인 라지코트의 데완이 되었으므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결혼하여 학교를 1년 쉬었다. 공부에서나 놀이 때에나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고 시간이 나면 혼자서 오랫동안 거닐기를 좋아하는 매우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1887년 봄베이의 대학입학시험에 간신히 합격한 그는 바우나가르에 있는 사말다스대학에 입학했다. 의사가 될 생각이 있었지만 해부에 대한 비슈누교의 터부와 구자라트에서 고위 관리가 되어야 하는 가문 전통을 고려하여 변호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으로 가야 했다. 대학생활이 힘들었던 차에 영국을 '철학자와 시인의 나라, 문명의 중심지'로 생각했던 그는 그곳에 가기를 희망했다. 영국행을 결심한 그에게는 많은 장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비를 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 형에게서 돈을 구했고 어머니에게는 술과 여자, 육식을 금할 것을 맹세했다. 마지막으로 영국여행을 금하는 메드 바니아 카스트 지도자들의 교령(敎令)은 무시해버렸다. 이런 어려움을 넘은 그는 1888년 9월 영국으로 건너가 도착 10일 후 런던에 있는 이너템플법과대학에 입학했다 (→ 색인 : 법학원).

영국생활

간디는 학업에 열중했으나 영국체류 3년 동안 그의 주요 관심은 학업보다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이었다. 런던과 같은 거대도시의 생활과 서양의 음식·의복·예절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채식주의로 인해 처음에는 상당히 곤란을 겪었지만 곧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고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간디는 채식주의 식당이나 하숙집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성경은 물론 힌두교의 철학적 시가집 〈바가바드기타 Bhagavadgt〉를 처음으로 접했다. 영국 채식주의자들 가운데는 사회주의자·인도주의자·페이비언주의자·신지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상주의자였고, 그중 몇몇은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악덕을 비판했다. 단순한 생활을 예찬하고 도덕적 가치와 협동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그들의 사상은 그의 인격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91년 7월 인도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비롯하여 반갑지 않은 일들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변호사 인원이 크게 늘어 변호사자격증만 가지고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봄베이 고등학교의 시간제 교사직조차 얻기 어려워 그는 라지코트로 돌아와 소송인의 탄원서를 작성해주며 생활했으나 이 일마저도 영국인 관리의 비위에 거슬리자 계속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탈의 어느 인도인 회사로부터 1년 기한의 계약 요청을 받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갔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생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간디에게 완전히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더반의 법정에서는 유럽인 판사가 그에게 터번을 벗으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퇴장했다. 며칠 뒤 프리토리아로 여행하면서 열차의 1등칸에서 쫓겨나는 모욕을 당했고 마차를 타고 가던 중 유럽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고 백인 마부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다 (→ 색인 : 인종차별). 호텔은 유럽인 전용이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러한 굴욕은 나탈의 인도인 노동자와 상인들이 매일 겪는 일로 그들은 꾹참고 지내고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여행에서 그의 인생 중에 가장 창조적인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진실과 접한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질서를 알게 모르게 이루고 있는 모든 불의에 맞서 인도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프리토리아에 머무르는 동안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일깨우려고 애썼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계속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난 환송파티석상에서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었다. 사람들은 힘없는 자신들을 위해 그가 싸워줄 것을 간청했다. 그때까지 그는 정치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매우 두려워해왔다.

그러한 그가 1894년 7월, 하룻밤 사이에 탁월한 정치운동가로 변신했다. 나탈 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결국 입법은 막지 못했지만 언론을 통해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반에 머물기로 작정한 그는 1894년 '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외부세계에 널리 알려 런던의 〈타임스〉, 캘커타의 〈스테이츠먼〉·〈잉글리시먼〉이 사설로 다루게 되었다.

1896년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건너가 인도인 지도자들을 만나고 주요도시에서 대중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와전된 소식을 들은 나탈의 백인들은 1897년 1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린치를 가했다. 영국식민장관은 나탈 정부에 그들을 구속하라고 전보를 쳤지만 그는 개인의 잘못을 법정에서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원칙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고소하지 않았다.

1899년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 식민지 나탈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주장하는 인도인들에게 나탈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설득하고 1,100명의 지원자를 모아 간호부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뒤에도 인도인들의 처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1906년 트란스발 정부는 극히 굴욕적인 인도인등록 법령을 제정했다. 인도인들은 그의 지도 아래 그 법령에 대한 불복종과 그로 인한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고 맹세했다 (→ 색인 : 시민불복종). 이때에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satygraha:진실에의 헌신)가 태어났다. 이는 적대자들에게 원한과 투쟁, 폭력을 쓰지 않고 저항해 그것으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투쟁은 그의 지도 아래 7년 이상을 끌었다. 수백 명의 인도인들이 양심과 자존심을 거스르는 법률에 복종하기보다는 생계와 자유를 바쳤다. 1913년, 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여자들까지 포함하여 수백 명의 인도인이 투옥되었다. 수천 명의 인도인 광산노동자들은 파업을 일으키고 용감하게 감옥으로 걸어들어갔으며 매질과 총살까지도 감수했다. 이러한 희생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을 최악의 여론 속으로 끌어들여, 영국정부와 인도로부터 압력을 받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당국은 간디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치가 얀 크리스티안 스뫼츠 장군 사이에 맺어진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는 1914년 7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나 인도로 갔다. 이후 사태가 보여주듯 그는 아프리카의 인도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의 인종문제는 그의 감춰진 특별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이상적 환경을 제공했다.

종교적 추구

포르반다르와 라지코트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의 어머니와 집안의 영향으로 종교적 욕구를 지니고 있었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한 이후 크게 자극을 받았다. 프리토리아에서 퀘이커교도들이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던 노력은 실패했으나 이를 통해 그는 종교연구 욕구가 불타게 되어 톨스토이의 그리스도교적 저술에 깊이 빠졌고, 코란의 번역본을 비롯하여 힌두 경전과 철학서를 읽었다. 여러 종교를 비교연구하고 신학서들을 많이 읽고 학자들과 토론한 결과 간디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지만, 빈곤한 지성과 때로는 진실하지 않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오역하여 불완전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간디의 정신적 조언자였던 뛰어난 젊은 철학자 라지찬드라는 그에게 힌두교의 미묘함과 심오함을 깨닫게 하여 새로운 삶을 맛보게 했다. 또한 그가 영국에서 처음으로 읽었던 〈바가바드기타〉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거기에서 특히 2가지 개념이 그를 매료시켰다. 하나는 물질적 욕망을 끊어버리라는 아파리그라하(aparigraha:무소유) 개념이고 또 하나는 고통이나 기쁨, 승리나 패배에 동요되지 말라는 사마바바(samabhava:평정) 개념이다.

이러한 영향들은 변호사 일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소송의뢰인들에게 문제를 되도록이면 법정 밖에서 해결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소송의뢰인들을 그의 고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친구로 생각했다. 그의 수입은 1년에 최고 5,000파운드에 달했으나 그는 돈을 벌고, 모으는 데는 별관심이 없어 많은 부분을 공적인 활동에 사용했다. 더반이나 요한네스버그에서 그의 집은 항상 젊은 동료들과 정치동지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근검절약·육체노동 등에 큰 매력을 느꼈던 간디는 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민족지도자로서의 활동

1915~18년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민중탄압법인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투쟁을 선언했고, 곧 봉기가 일어나 펀자브의 암리차르에서 400명에 달하는 인도인이 영국군에게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1년 안에 다시 투지를 갖고 1920년 가을 그는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35년 된 인도 국민회의당을 인도 민족주의의 효율적인 정치기구로 바꾸어놓아 대도시의 중산층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중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영국정부에 대한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영국인 공장·입법기관·법원·관공서·학교 등 영국인이 운영하거나 원조하는 모든 기관에서의 거부를 포함했다. 이 운동은 인도 민중이 가지고 있던 외국 지배자에 대한 공포심을 깨뜨렸다. 수천 명이 기꺼이 투옥되었다.

1922년 2월 운동은 절정에 달했으나 차우리차우라에서 발생한 유혈폭동을 보고 그는 시민불복종운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22년 3월 10일 투옥되어 6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24년 맹장염 수술을 받은 뒤 석방되었다. 투옥기간 동안 정치 상황은 바뀌어, 국민회의파는 입법기관에 대한 참여문제를 둘러싸고 두 파로 분열되었고 1920~22년의 비협력운동 기간에 이루어졌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단결도 깨졌다. 적대적인 두 종교집단을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그는 1924년 가을 3주간의 단식을 단행했다.

1920년대 중반기에 그는 정치활동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27년 영국이 인도인의 참여를 배제한 채 인도통치법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정치적 파고가 일어나자 1928년 12월 간디는 1년 이내에 인도에게 주권을 달라는 충격적인 요구를 내걸고 완전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전국적인 비폭력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다시 국민회의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0년 3월에는 소금세의 신설에 반대하여 사티아그라하를 시작했다.

영국 통치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운동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 운동에서 6만 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1년 뒤 간디는 어윈 경과 협상을 맺어 운동을 종결하고 런던의 원탁회의에 인도 국민회의당의 유일한 대표자로 참석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권력의 양도 문제가 아닌 인도 소수민족 문제에 의제가 집중된 원탁회의는 독립을 원하는 인도인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1931년 12월 간디가 귀국했을 때 인도 국민회의당은 어윈 경의 후임자인 윌링던 경에게 전례없이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간디를 다시 투옥하고 고립시킴으로써 그의 영향력을 없애려 했으나 1932년 9월 간디는 영국정부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선거구 분리정책에 항의하여 단식에 들어갔고 이 단식은 국민감정을 격앙시켰다.

간디는 국민회의파가 비폭력주의를 근본적인 신조가 아니라 정치적인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1934년 국민회의파의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는 이제 '밑에서부터 위로' 국가를 건설하는 '건설적인 계획'을 구상하는 데 집중하여,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농민을 교육하고, 불가촉천민을 위해 계속 투쟁하고, 국민들에게 가장 적합하게 교육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썼다. 그 자신이 중부 인도의 한 마을인 세바그람에 가서 살았고 이곳은 인도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향상시키려는 간디 계획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지막 투쟁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인도 민족주의운동은 마지막 국면에 들어섰다. 그는 파시즘을 증오했으며 전쟁 또한 싫어했다. 인도 국민회의당은 자치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영국에 협력하고 간디는 1942년 영국에 인도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과 전쟁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간디와 국민회의파를 탄압했고 이에 대항하여 폭동이 발생,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1945년 영국에 노동당이 집권하면서부터 2년 동안 국민회의파, M.A. 진나가 이끄는 이슬람 동맹, 영국정부 간의 3자협상이 벌어졌으나 협상중인 1946~47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이성과 정의, 인내와 신뢰를 호소하는 간디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47년 8월 간디의 뜻과는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이 결정되었고 이는 간디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 일이었다. 양쪽으로부터의 비난을 무릅쓰고 간디는 두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이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간디는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단식에 의해 1947년 9월 캘커타의 폭동이 가라앉았고 1948년 1월에는 델리에서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월 30일 간디는 나투람 고드세라는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했다.

역사적 평가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간디를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로 여기거나, 가장 나쁘게는, 영국인에 대한 우애를 설교하면서 뒤로는 영국을 쫓아내려고 하는 위선자로 여겼다. 간디는 이러한 편견의 벽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 벽을 '사티아그라하'로 뚫으려고 했다. 1920~22년, 1930~34년, 1940~42년에 그가 펼친 3번의 운동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전후에 인도가 독립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되었다.

간디에 대한 비판은 인도인 가운데에서도 정파와 계층, 종교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그가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반대로 영국의 축출과 국내 기득권층의 제거 또는 카스트의 철폐 등과 같은 사회개혁에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했고 이슬람교에 편견을 가졌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건 정치인과 급진주의자, 테러리스트와 의회정치주의자, 도시의 지식인과 농촌의 대중들, 힌두교의 카스트와 불가촉천민,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그리고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시켰던 간디의 위대한 역할은 최근에 와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간디는 분명히 정치지도자였지만 그의 생애의 주된 동인(動因)은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 있었다. 그가 "30년 동안 열망한 것은 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종교는 형식주의나 교리, 의식, 또는 종파주의를 뜻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는 개인적인 수도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생활 속에서 도전하며 확인되는 것이었다. 그는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는 "마하트마의 고뇌는 마하트마만이 아는 것"이라고 썼다.

간디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많은 남녀노소 그리고 서구의 많은 종파의 종교인과 인도의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애정과 충성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 동료들 중에 비폭력을 신조로 받아들이고 그의 길을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간디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그가 20세기의 주요한 3가지 혁명 즉 식민주의에 대한 혁명, 인종주의에 대한 혁명, 폭력에 대한 혁명의 창시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촉진시킨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8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저술은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물질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산업화와 도시화에 대한 유보, 근대국가에 대한 불신, 폭력에 대한 전면 거부는 190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발간된 〈인도의 자치 Hind Swaraj〉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파시즘과 2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를 아직 겪지 않았던 당시의 유럽과 인도인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평등주의와 비동맹주의는 분명히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네루를 비롯하여 간디와 함께 싸웠던 인도 민족주의자들 모두는 간디의 정치·경제적 구상을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원자탄시대의 대량파괴를 구할 수 있는 처방으로 간디의 비폭력을 들고 있다. 제3세계의 사회·경제 문제를 연구한 군나르 뮈르달은 간디를 "실천적인 모든 분야에서 식견있는 진보주의자"로 평가했다. 제3세계의 위기상황과 선진국에서의 사회적 불안, 제어되지 않는 기술문명의 폐해, 핵무기에 의한 평화의 위협으로 가득 찬 현대세계에서 간디의 이상과 방법이 지닌 타당성은 점차 올바르게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B.R. Nanda 글 | 조경란(趙京蘭) 옮김

참고문헌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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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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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혼 간디 : 김갑수, 금박출판사, 1983
The Moral and Political Thought of Mahatma Gandhi : Raghavan N. Iyer, 1973(reprinted, 1978)
The Life and Death of Mahatma Gandhi : Robert Payne,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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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Congress and Gandhi Have Done to the Untouchables : Bhimrao R. Ambedkar, 1945(reissued 1977)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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