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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01 (수)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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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069      
[국가] 소련 1 (한메)
소련 蘇聯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소련 1

1917년의 볼셰비키혁명(10월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정권이 중심이 되어 1922년 말에 소비에트연방으로 성립, 공산주의 체제하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세계 최대의 다민족국가를 이루었다가 91년 말에 연방구성 공화국 독립 등의 여파로 소독립국가연합(蘇獨立國家聯合)이 구성됨으로써 해체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구(舊)소련 구성 15개공화국(러시아·우크라이나·백러시아·카자흐·우즈베크·투르크멘·키르기스·타지크·몰도바·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중 새로 구성된 소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참가한 국가는 독립한 발트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과 협정서명에 불참한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공화국이다.

국제적으로는 종전에 소련이 차지하였던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러시아연방이 승계했고, 이미 UN에 가입해 있는 우크라이나·백러시아연방 이외의 9개공화국도 독립국으로서 UN에 가입하였다. 소연방 해체의 출발이 된 발트3국 독립 이전, 즉 원래의 소련은 면적 2240만 3000㎞橈, 인구 2억 8574만 3000(1989)이었다. 지구 전체 육지면적의 약 1/6을 차지하였고, 인구로는 중국·인도에 이어 세계 제3위였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공산주의)국가이며, 정식명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Soyuz Sovetskikh Sotsialisticheskikh Respublik;약칭 SSSR, 영어로는 USSR). 수도는 모스크바.

[국제사회에서 사라지는 소련의 상징]

<국기(國旗)·국장(國章)·국가(國家)>

소련의 국기는 직사각형(가로·세로의 비는 2대1) 붉은 천의 깃대 편 깃봉 쪽 한구석에 낫과 망치를 금색으로 그린 위에 5개의 뾰족한 끝을 가진 별인 오광성(五光星)을 그렸다. 낫은 농민, 망치는 노동자를 나타냈다. 붉은 바탕색은 <공산당의 지도아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건설을 지향하는 소련 인민의 영웅적 투쟁의 상장>을 뜻하였다.

국제무대, 특히 올림픽대회 등에서 자주 게양되어 눈에 익었던 소련국기는 이제 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지고, 종전에 UN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와 외교무대 등에서 사용되던 소련국기 대신 러시아연방기(직사각형을 가로로 3등분하여 위로부터 백·청·적색을 칠한 것)가 나부끼게 되었다. 소련의 국장은 태양 빛을 받고 밀이삭으로 둘러싸인 지구를 배경으로 하여 낫과 망치를 그렸는데, 그것들이 상징하는 뜻은 국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낫은 농민, 망치는 노동자를 나타내며, 15개공화국의 언어로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고 기명(記銘)한 위에 오광성이 그려졌다.

국가는 1918년부터 43년까지는 <인터내셔널가(歌)>였으나, 1944년 새로운 국가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에는 스탈린을 예찬하는 가사가 들어 있었으므로 스탈린비판 이후 약 20년 동안 변칙적으로 곡만을 연주하다가, 77년부터 개작되어 불려왔었다.

<소비에트라는 독특한 체제>

흔히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고 불렸던 국명의 본래 뜻은 <소비에트체제인 사회주의 공화국의 동맹>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민족명이나 지명이 들어 있지 않은데, 그것은 이 국가의 성립에서 나왔다. <소비에트>란 러시아어로 평의회(評議會)라는 뜻이며, 1905년의 혁명 때 모스크바북동쪽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시(市)에서 처음으로 소비에트라는 이름의 전시적(全市的)인 노동자의 대표기관이 생긴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1917년의 혁명 때에는 노동자·병사·농민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이것이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N.레닌은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재빨리 인정하여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하였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획득한 직후인 1918년 1월의 제3차소비에트대회에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하였고, 그 뒤 1922년 12월 30일 여기에 우크라이나·백러시아·자카프카스의 세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이 참가함으로써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성립되었다.

소련은 러시아연방공화국을 비롯하여 15개의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루어진 다민족의 동맹국가였다. 15개공화국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는 UN에 의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1945년의 얄타회담에서 인정된 것이다. 소련헌법은 15개의 연방구성 공화국에 소연방으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할 권리를 인정하였지만(제72조), 이것은 1991년 9월에 발트3국이 독립하고 12월에 소독립국가연합이 구성됨으로써 소련이 해체되기까지는 유명무실하였다.

소연방을 구성하였던 공화국은 모두 인구 100만 이상의 나라들인데, 그 이하 인구의 민족·종족은 자치공화국·자치주·자치구를 이루어 공화국의 하부단위를 구성하였다. 자치공화국도 연방구성 공화국과 마찬가지로 각기 독자적인 헌법·최고회의·각료회의가 있었지만,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권은 없었다.

각 공화국의 지방행정단위는 지방·주·자치주·자치구·시·시내구·읍·면이었다. 시에는 공화국 직속인 것과 주·지구에 속하는 것이 있었다. 소련의 국권 최고기관은 연방소비에트와 민족소비에트의 양원으로 구성되는 최고소비에트(최고회의)이다. 최고회의는 양원의 합동회의에서 간부회를 선출하며, 그 의장이 소련의 국가원수로 간주되었다. 최고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기간에는 간부회가 그 권력을 행사하였다.

최고회의는 양원의 합동회의에서 소련각료회의를 편성하였는데, 그 의장이 소련수상이었다. 또 각 지방행정단위마다 각기 인민대의원소비에트가 있으며, 그 집행·처리 기관으로서의 집행위원회가 의원 중에서 선출되고, 그 위원장이 한국의 직할시·도·군의 장이나 시·읍·면의 장에 해당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은 연방수준에서 읍·면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소비에트를 통하여 통치받게 되어 있었으며, 연방이나 구성 공화국의 국명에 소비에트라는 용어가 들어 있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소련공산당의 역할>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 국권의 최고기관은 소련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의 역할에 대하여 소련헌법은 제6조에 <소련공산당은 소비에트사회의 지도적·선도적 힘이며, 소련 정치체제와 모든 국가 및 공공조직의 중핵이다>라고, 그 지도적 역할을 평가했었다. 이론적으로는 공산당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은 당대회이지만, 이것은 5년에 1회, 10일 정도밖에 열리지 않으므로 당대회에서 선출되는 중앙위원회가 당대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모든 활동을 지도하고,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서기국 및 서기장을 선출하였다.

따라서 실제로는 이 중앙위원회가 소련공산당의 최고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핵을 이루는 것이 정치국과 서기국이며, 또 그것을 지도한 것이 서기장이었다. 그러므로 소련에서는 공산당의 서기장을 최고회의간부회의장(국가원수)이나 각료회의의장(수상)보다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 8월의 강경보수파 쿠데타가 3일천하로 실패한 뒤, 위기를 모면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공산당서기장을 사임함과 동시에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1991년 말에 소연방 구성 15개국 가운데 11개공화국이 소독립국가연합을 성립시킴으로써 20세기 세계사에 소비에트와 공산당이라는 독특한 국가·정치체제를 이루었던 소련은 붕괴되어 국제사회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20세기 세계 속의 소련]

소련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이다.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고 그 기초를 다지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미국이 소련을 승인한 것은 1933년이며, 소련은 뒤늦게 34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가 핀란드에 침공한 직후인 39년 말 제명당하였다. 소련은 1928년부터 5개년계획을 실시,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제3차 5개년계획은 나치스독일과의 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는 스탈린주의가 지배하여 대규모 숙청과 개인숭배가 성행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소련은 참전국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대전 후에는 동유럽사회주의 여러 국가들의 지도적 위치에서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조직하여 미국에 맞서는 큰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948년에는 유고슬라비아가 이탈하였고, 50년대 초에 우호관계를 맺은 중국(중공)이 60년대 초에는 소련권에서 이탈하는 등 사회주의진영에도 분열이 시작되었다.

1956년 제20차당대회에서의 스탈린비판의 움직임은 동유럽에까지 파급되어 헝가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소련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소련의 군사개입은 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사건 때와 79년의 아프가니스탄사태 때에도 되풀이되었다. 한편 소련의 과학기술은 급속히 발전하여 1957년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고, 1961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

1950년대 중반부터 소련은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 동유럽제국 이외의 몽골·베트남·북한·쿠바·아프가니스탄·에티오피아 등 각국에 대한 원조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나 소련경제의 정체와 더불어 그러한 원조재정으로 경제적 부담이 크게 증가하였다. 소련의 최고권력자 자리는 스탈린이 죽은 후 말렌코프(해임)를 거쳐 흐루시초프(해임)·브레주네프(사망)·안드로포프(사망)·체르넨코(사망)를 거쳐 고르바초프(사임)로 이어졌다.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는 인사의 쇄신과 경제 활성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그때까지의 미국편중 외교에서 탈피, 서유럽과 일본에 대해서도 상응한 배려를 하는 외교전략을 취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덩샤오핑[鄧小平]과 정상회담을 갖고 30년간에 걸친 중·소대립을 청산하였고, 1990년에는 한국과 국교를 맺었다.

또한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 세계적인 민주화 추세 속에서 일어난 동유럽권의 시민혁명은 공산당정권의 전면적인 몰락과 동·서독의 통일을 이루어냄으로써 소련·동유럽관계의 새로운 장(章)을 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해 경제악화와 연방구성 공화국의 독립 요구 등으로 강경보수파의 <3일천하>로 끝난 쿠데타를 유발하였다. 쿠데타 진압 후 고르바초프체제는 약화되고 B.옐친 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새로운 최고권력자로 부상하여, 91년 말 11개공화국으로 구성된 소독립국가연합을 출범시킴으로써 금세기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이자 최대의 공산주의국가였던 소련은 해체되기에 이르렀으며, 또한 고르바초프도 연방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국토]

<자연>

소련은 남북으로 약 5000㎞, 동서로 약 1만㎞에 걸쳐 있으면서 12개국(북한·중국·몽골·아프가니스탄·이란·터키·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핀란드)과 국경이 닿아 있었고, 그 국경선은 6만㎞나 되었다. 동서로 길기 때문에 시간대(時間帶)가 11개나 되었다.

소련의 자연적 조건은 각양각색이었다. 유럽 부분은 대체로 평야이고, 아시아 부분의 북부는 시베리아 저지(低地), 중부시베리아 대지(臺地), 극동 산지(山地)로 점차 높아졌으며, 중앙아시아의 서부는 광대한 투란 저지였다. 그리고 소련의 남부는 카프카스·파미르·톈산[天山]·알타이·사얀 등의 산맥이 연이어 있었다. 삼림면적은 7억ha 이상이나 되었으며, 하천으로 시베리아 지역의 오브·예니세이·레나·아무르 등과 내륙의 볼가·아무다리야 등의 긴 강이 있는데, 500만㎞를 넘었다.

기후는 한랭한 북부로부터 아열대적인 남부나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 등 여러 가지로서, 시베리아는 극단적으로 대륙적이지만, 서부(발트해 연안)와 동부(태평양 연안)는 해양적 기후의 영향을 받았다. 기후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① 영구빙설지대(永久氷雪地帶) ② 툰드라 ③ 툰드라·타이가 점이대(漸移帶) ④ 타이가 ⑤ 타이가·스텝 점이대 ⑥ 스텝 ⑦ 반사막(半沙漠) ⑧ 사막 ⑨ 아열대 ⑩ 산지(山地)로 나누어진다.

<지지(地誌)>

소련에는 20개의 경제지역이 있었다(20개 경제지역 중의 어떤 것을 통합하여 13개의 지역구분 등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다음에서는 가운뎃점(·)으로 이어진 것을 하나의 지역으로 보면, 13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괄호 안의 것은 바탕이 된 경제지역의 명칭이다.

① 모스크바 주변(중앙지역) ② 레닌그라드 주변(북서부지역) ③ 콜라반도·④ 백해(白海) 연안·⑤ 북부우랄(북부지역) ⑥ 볼가강유역(볼가―비야트카 지역과 볼가 연안지역) ⑦ 우랄(우랄 지역) ⑧ 서시베리아(서시베리아 지역) ⑨ 동시베리아(동시베리아 지역) ⑩ 소련 극동부(극동부지역) ⑪ 중앙흑토대(중앙흑토지역) ⑫ 우크라이나·⑬ 몰다비아(도네츠―드네프르 연안·남부·남서부·몰다비아의 각 지역) ⑭ 백러시아·⑮ 발트3국·16 칼라닌그라드(백러시아 지역과 발트 연안지역) 17 중앙아시아·18 카자흐(중앙아시아 지역과 카자흐 지역) 19 북카프카스·20 자카프카스(북카프카스 지역과 자카프카스 지역)였다.

[역사]

<시기 구분>

소련의 역사는 《소련공산당사(증보제4판, 1972)》에 의하면 다음의 11시기로 나뉜다. ① 사회주의혁명의 발전과 소비에트권력의 강화기(1917∼18) ② 외국의 군사간섭과 내전기(1918∼20) ③ 국민경제의 부흥, 소연방의 창설기(1921∼25) ④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의 전면적 집단화 준비기(1926∼29) ⑤ 전전선(全戰線)에 걸친 사회주의의 공세기(1929∼32) ⑥ 국민경제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성, 사회주의 승리의 시기(1933∼37) ⑦ 사회주의 사회의 강화, 국방강화기(1937∼41) ⑧ 대조국전쟁기(1941∼45) ⑨ 부흥과 발전,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기(1945∼52) ⑩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기(1952∼58) ⑪ 사회주의 사회의 완성과 공산주의로의 점진적 이행기(1959∼70).

또한 《소비에트역사백과사전》 제13권(1971)의 <소비에트연방> 항목에서의 시기구분은 거의 이것과 같아서 ① 1917∼18년 ② 1918∼20년 ③ 1921∼25년 ④ 1926∼40년 ⑤ 1941∼45년 ⑥ 1946년 이후로 되어 있다. 1976∼80년에 간행된 경제사 《소비에트경제(전7권)》는 ① 1917∼20년 ② 1921∼25년 ③ 1926∼32년 ④ 1933∼37년 ⑤ 1938∼45년 ⑥ 1946∼60년 ⑦ 1960∼70년대의 각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⑥ 은 <국민경제의 부흥과 발달한 사회주의경제의 창설>, ⑦ 은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에서의 소련경제>라는 제명이 붙어 있다.

그리고 J.보파의 《소연방사(蘇聯邦史, 1979)》에서는 ① 혁명 ② 네프(NEP, 신경제정책)시대 ③ 공업화와 집단화 ④ 개인권력 ⑤ 대조국전쟁 ⑥ 냉전 ⑦ 흐루시초프화의 10년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구분에는 그 이후 시기의 역사과정이 기술되어야 할 것은 물론, 1991년 말에 20세기 역사의 일대변혁인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라는 돌발사가 일어난 이상, 그 붕괴과정의 역사적 사실이 추가 기록됨으로써 조만간 소련의 종언에 대한 평가와 결론이 내려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기에서는 소련의 역사를 ① 혁명기 ② 사회주의적 개조와 공업화기 ③ 대조국전쟁기 ④ 스탈린비판기 ⑤ 발달한 사회주의의 시기 ⑥ 소연방체제의 해체기 등 6시기로 구분하여 개관하기로 한다.

<혁명기>

⑴ 10월혁명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1월 7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정권이 성립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였다. 그해 3월(러시아력 2월)에 일어난 <2월혁명>에 의하여 국회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임시정부는 <평화와 토지>를 갈구하는 노동자·농민의 뜻에 부응할 수가 없었고, 병사·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V.I.레닌을 지도자로 하는 볼셰비키는 <4월테제>에 의하여 소비에트가 즉각적으로 정권을 장악할 것을 주장하며 세력을 급속히 신장시켜, 이를 실현하였다. 소비에트정부는 민족자결 원칙에 바탕을 두는 무병합·무배상의 강화를 위하여 교전 각국의 정부와 인민에게 호소한 <평화에 대한 포고>, 토지의 무상몰수와 분배를 정한 <토지에 대한 포고>를 즉각 발표한데 이어, 1918년 1월에는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하여 새로운 공화국의 기본원칙을 천명하였다. 그 후 18년 3월 무렵까지 광대한 옛 러시아제국 영역 각지에서 소비에트정권이 성립되어 임시정부체제는 급속도로 붕괴하였다. 1918년 3월에는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맺고 이를 전후로 해서 은행·운수·대공업기업·외국무역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한 준비작업을 하였다.

⑵ 국내전쟁과 여러 공화국의 탄생

그러나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1918년 중엽부터 영국·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군대를 보내어 반혁명군을 도움으로써 국내전쟁·간섭전쟁이 시작되었다. 소비에트정권은 적군(赤軍)을 창설하여 이에 맞섬과 동시에 자가소비·종자용 곡물을 제외한 모든 곡물을 농민으로부터 강제로 징수하는 식량징발제를 토대로 하는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모든 힘을 국내전쟁승리를 위하여 동원하였다. 부농에 대한 곡물징발을 빈농위원회가 맡았으므로 부농과 빈농의 계급투쟁은 격렬해졌다.

1919년 3월의 제8차당대회에서는 <빈농에 의거하면서 중농층과 견고한 동맹을 맺는> 정책이 분명해지고, 중농을 점진적이고도 계획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이는 방침이 취해졌다. 주변 여러 민족지역에서는 국내전쟁 속에서도 혁명과 반혁명의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핀란드에서도 1917년 12월 6일에 의회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31일 소비에트정부가 승인하였다. 발트해 연안지방에서는 수도(首都)와 거의 동시에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되었으나 곧 독일군에게 점령되어 반혁명정권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소비에트정권이 여러 민족 근로자의 지지를 얻어 확립되었다. 백러시아에서는 민스크시의 권력을 장악한 소비에트를 1918년 3월에 독일군이 쓰러뜨리고 영역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적군의 반격으로 인하여 1919년 1월 1일에 소비에트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1917년 12월 25일에 하리코프에서 소비에트정부가 조직되고 1918년 1월에는 키예프의 중앙라다(의회)가 폐지되고, 11월 소비에트정권이 성립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옛 러시아제국 영역 내에서 공업·농업이 가장 발전된 지역이어서 노동자 못지않게 농민과 부르주아의 힘도 강하였으므로 투쟁은 격렬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자카프카스에서는 석유노동자가 집중되어 있었던 바쿠에서 수도와 거의 동시에 소비에트정권이 성립하였으나, 그 밖의 지역인 아르메니아에서는 민족부르주아인 연방당(聯邦黨)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무슬림민주당이, 그루지야에서는 멘셰비키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각각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터키·독일·영국군대의 지지를 얻었다.

바쿠소비에트도 1918년 7월에 타도되었다. 소비에트정권은 영국군 철수 후인 1920년 4월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같은 해 11월에는 아르메니아에서, 1921년 2월에는 그루지야에서 각각 성립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는 1917년 11월 14일에 타슈켄트소비에트가 정권을 수립하였다. 히바와 부하라의 두 한국(汗國)은 1920년 2월과 8월의 인민소비에트혁명을 거쳐 1923년과 1924년에 각각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⑶ 소비에트연방 결성과 네프

1922년 12월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가 결합한 자카프카스공화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 및 백러시아의 4개 공화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비에트연방)을 결성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는 1924년 민족적 경계구분이 단행되어 우즈베크·투르크멘 등 2개의 공화국이 탄생하여 1925년 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였다.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네프(NEP;신경제정책)>로 전환하였다. 네프는 곡물징발제를 폐지하여 현물세제로 바꾸고, 자유시장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개인 기업의 상업활동도 허용하였다. 이러한 네프의 영향에 의하여 국내전쟁 전 수준의 절반이었던 농업생산과 1/7로 줄어 있던 공업생산은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적 개조와 공업화기>

⑴ 일국사회주의노선(一國社會主義路線)의 확립

소련은 혁명에 성공하였고 경제적으로도 일단 부흥된 단계에서 확고한 사회주의 건설방침을 제시하여야 할 시기를 맞이했다. 레닌은 사회주의혁명이 세계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고전적 명제를 수정하여, 소련 한 나라만으로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여 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자 하였다.

1924년 레닌은 죽고, 이러한 사회주의 건설방침에 대해 레닌의 수정안에 따르는 I.V.스탈린과 세계혁명을 주장하는 L.트로츠키·G.E.지노비예프 사이에 격렬한 당내투쟁이 벌어졌다. 이는 25년에 열린 당대회에서 주류파인 스탈린의 승리로 끝나면서 스탈린의 지도권이 확립되고 그 체제에 따라 일국사회주의건설이 시작되었다.

⑵ 5개년계획에 의한 공업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따라 1928년 10월부터 중공업 우선의 제1차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0년의 전화(電化)에 바탕을 둔 장기발전계획(長期發展計劃)과 21년에 설치한 소련계획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1920년대 후반에 실시된 단년도계획(單年度計劃) 등의 경험과 대부분의 공업부문을 국유화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하였다. 제1차5개년계획기간에는 1500개의 대공업기업이 조업을 시작하였다.

돌격대작업반을 선두로 하는 대중적 사회주의경쟁으로 건설은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고, 계획과제는 32년말까지 완수되었다. 공업생산은 2배 이상, 그 가운데에서도 기계제작·금속가공은 4배, 전력생산은 2.7배가 되어, 소련은 공업국으로 바뀌었다. 실업은 1930년에 없어졌다. 우랄·시베리아에 대규모 건설이 진행되었고, 연방공화국·자치공화국에서도 연방정부의 원조로 공업화가 시작되어, 비(非) 러시아계 여러 민족의 노동자계급이 늘어났다. 1933∼37년의 제2차5개년계획기에는 공업생산은 2.2배, 그중 기계제작은 2.8배가 되었다. 1935년에는 스타하노프운동이라는 작업능률증진운동이 시작되어 모든 분야로 확산되어 갔다.

⑶ 농업의 전면적 집단화

농업생산은 네프 아래서 주로 개인경영에 의하여 부흥되었으나, 1928년 1월 곡물 공급의 위기가 닥쳐왔다. 그 직접적 원인은 가격이 낮은 데 대한 농민의 불만과 농산물 판매에 상응할 공업제품 부족으로 인한 곡물 매석(賣惜), 부농의 투기와 선동으로 생각되나, 그 배경으로는 공업생산 발전에 비한 농업생산의 낙후, 농민의 중소농화로 말미암은 자가소비율 증대 등이 있다.

예약매입제 등이 시도되었으나, 근본적 해결은 콜호스(협동조합농장)로 조직화하여 농촌에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는 동시에 농업기계화의 길을 여는 것뿐이었다. 29년 봄, 스탈린은 보다 점진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N.I.부하린 등 반대파를 공격하고, 연말의 <대전환(大轉換)>에 의하여 전면적 집단화운동을 시작하였다. 1932년 말에는 파종면적의 3/4 이상을 집단화하였고,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는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소프호스(국영농장)도 대규모로 건설되었고, 그 농업기계로써 주변 콜호스를 원조하면서 선전·교육활동을 하는 등 정치적인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농업집단화를 <제2의 혁명>이라고도 하며, 부농의 토지·농구·재산이 몰수되어 콜호스에 분배되었다. 이 운동은 성과를 올리는 데만 급급하여 많은 폐단이 있었지만, 1930년대 말에는 계획했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1991년 말 소연방이 해체되고 소독립국가연합이 발족한 뒤, 국내외적으로 구(舊)소련을 승계한 것으로 간주되는 러시아연방에서 1992년 3월에 전면적 토지사유제를 도입, 집단농장의 토지를 공매하기 시작함으로써 소련 역사를 통하여 줄곧 실시되어 왔던 토지국유화제는 소멸되었다.

1934년의 당대회를 전후하여 스탈린의 권위가 높아지고, 그의 <전제(專制)>가 시작되었다. 특히 1934년 12월 S.M.키로프 암살사건을 계기로 1936∼38년까지 <대숙청>이 실시되었다. 이는 모스크바재판과 군사지도자 비밀재판에 의해 부하린·지노비예프·L.R.카메네프·M.N.투하체프스키 등을 포함하여 제17차 당대회에서 뽑힌 당 중앙위원과 그 후보자 중 7할이 체포·처형된 대규모의 숙청이었다.

제1·2차의 5개년계획 기간에 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적 요소는 모두 없어졌고, 1936년 12월 제8차소비에트대회에서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선언,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는 1920년대 후반의 토지·수리 개혁을 통하여 집단화를 통한 연속적인 농업변혁과 함께 문맹퇴치·여성해방운동이 전개되는 등 공업화의 기초를 굳혔다. 새 헌법에 의하여 카자흐·키르기스는 연방공화국이 되었고, 자카프카스공화국은 해체되어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는 독립된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대조국전쟁기>

⑴ 전쟁의 접근

1930년대에는 독일·일본 등에서 파시즘이 대두하였고, 소련은 1934년에 국제연맹에 가입, 1935년에는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인민전선전술을 결정하는 등 반파시즘세력 결집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서유럽 지배층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는 독일에 대해서 유화정책을 계속 취했기 때문에 소련은 1939년 8월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내의 국방태세 구축을 서둘렀다. 1940년에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몰다비아에서 소비에트정권이 성립하여 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였다. 1938년의 <장구산사건[張鼓山事件]>, 39년의 <노몬한 사건> 등 분쟁이 이어진 소련·일본 간에 1941년 4월 중립조약이 맺어졌다.

⑵ 독일군의 침략과 반격

1939년 9월에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 41년 6월 갑자기 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가, 11월에는 모스크바·레닌그라드 근처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12월에는 모스크바 근교에서 소련군이 반격작전으로 나와 독일군의 전격작전의 실패는 확실해졌다. 레닌그라드는 그해 9월에 포위되었으나 함락되지는 않았고, 방위전쟁은 900일이나 이어졌다.

독일측 추축군(樞軸軍) 33만이 포위·섬멸된 1942년 9월부터 1943년 2월에 걸친 스탈린그라드의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1943년 7월 쿠르스크의 전투에서는 추축군측은 50만 이상을 잃었다. 미국·영국은 소련과 반파시즘연합을 형성하였고 무기를 원조하였다. 1944년 6월에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할 때까지는 추축군의 대부분은 독·소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소련군은 독일군을 추격해서 동유럽을 파시즘 지배하에서 해방, 1945년 4월에는 베를린을 포위하자, 5월 8일에 결국 독일은 항복하였다.

또 소련은 8월 8일에는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고, 곧 중국 둥베이[東北]지역에 있는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소련의 이른바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는 세계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승리를 거두었고, 제국주의의 식민지체제는 허물어졌다.

⑶ 부흥

대조국전쟁으로 인하여 소련은 국부(國富)의 30%, 2000만의 인명을 잃는 역사상 유례 없는 큰 손해를 입었다. 1942년의 공업생산은 1940년 공업생산의 66%에 지나지 않았고, 농업생산은 38%까지 떨어졌는데, 개전 후 1360개 이상의 대기업과 1000만 이상의 주민을 소련의 동부로 분산·이동시켜 피해를 줄였다. 조강 등의 중공업과 전차·항공기를 비롯한 무기류 생산은 급격히 늘어나 독일을 능가하게 되었고, 1946∼50년의 제4차5개년계획에 의해 계속 부흥, 1950년 공업생산은 172%가 되었다.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人民委員會議) 의장(총리), 국가방위위원회 의장, 최고사령관 등의 권한을 한몸에 지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종전 후 <냉전>이라는 국제적 긴장 속에서 <스탈린숭배>가 일세를 풍미하면서, 이로 인한 교조주의 폐단 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비판시기>

⑴ 해빙시기

1953년 3월, 1922년 이후 30년 동안 당서기장이었던 스탈린이 죽고, 뒤를 이어 G.M.말렌코프가 수상 겸 당 제1서기가 되었다.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여 수상이 계속 사임하는 사태가 생기고 마지막으로 N.S.흐루시초프가 당 제1서기로 올랐다. 그리고 카자흐의 처녀지 개간 등으로 농업생산증가를 도모하여 국민생활은 급속히 향상하였다.

소련은 이미 원자폭탄을 보유하면서, 1953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성립시키는 등 군사적인 힘을 갖추고 한국전쟁과 인도차이나전쟁을 휴전으로 이끌었다. 그 무렵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발언권도 강화되고 저우언라이[周恩來]·네루의 평화5원칙이 천명되는 등 평화공존의 기운이 높아졌다. 1956년 2월, 제20차 당대회에서는 흐루시초프가 비밀보고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맹렬히 비판함으로써 이른바 해빙현상, 비(非)스탈린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반대하던 말렌코프·V.M.몰로토프 등은 뒤에 실각되었다.

⑵ 사회주의세계 체제의 확립

1950년대는 공업생산부문에서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야금과 기계제작, 후반에는 석유화학 등 새로운 분야까지 급속히 발전했다.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고, 1958년 흐루시초프가 총리 겸 당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완전·전면군축을 제안, D.D.아이젠하워·J.F.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고, 1961년에는 새로운 당의 강령 작성에서 주도권을 쥐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과의 노선상의 대립을 국가적 대립으로까지 이르게 한 점과 <쿠바위기> 등 외교상의 실책과 농업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내정상의 실패가 원인이 되어 1964년에 실각하였다.

<발달한 사회주의의 시기>

⑴ 미국에 접근하는 경제력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 실각 후 당 제1서기(1966년 서기장으로 개칭)로는 L.I.브레주네프가, 총리에는 A.N.코시긴이 뽑혔다. 새정권은 공업관리·계획제도의 개선을 추진하여, 최신기술 도입, 자동화, 거대한 콤비나트와 대형발전소 건설을 실행하였으며, 일렉트로닉스·무선공학 부문도 발전시키고, 공업·농업을 포함한 지역생산종합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곡물 생산은 1978년에는 2억 3720만t이나 되어 1953년의 근 3배나 증대되었고, 축산에서도 소·양·돼지 수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게 되었다. 농업의 기계화·화학화·전화(電化)도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노동의 생산성 향상을 비롯하여 사료증산에도 역점을 두었다. 코메콘(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을 통한 동유럽 사회주의 여러 나라와의 경제적 결합도 강화되어, 1971년에는 <종합프로그램>을 채택하였고, 미국으로부터는 1972년 이후 해마다 곡물을 수입하였으며, 1972년 R.M.닉슨 대통령과는 SALT(전략무기제한협정)Ⅰ, 1979년 J.E.카터대통령과는 SALTⅡ에 조인하는 등 공존노선을 희구했으나,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이후로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⑵ 새 헌법 채택

브레주네프는 1976년에 원수·국방회의의장, 1977년 최고회의간부회의장을 겸임하면서 18년간 당과 정부를 이끌었다. 그 동안 그는 A.I.솔제니친·A.D.사하로프 등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다소 풍요로워진 국민생활을 배경으로 차츰 자유화가 진행되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발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여러 민족은 대략 실질적인 평등을 달성, 민족간의 문화적 접근도 이루어지면서 소비에트연방이 성장해 왔다.

1977년 이른바 <브레주네프헌법>이 채택되었는데, 이 헌법은 이러한 단계를 문서로써 확정시켜 놓은 것이다. 제6조에 <소비에트연방공산당은 소비에트사회의 지도적·선도적 힘이며 소련정치체제와 모든 국가 및 공공조직의 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은 11년간 지속해오면서 공산당 일당체제로서 사실상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1982년에 브레주네프가 죽은 뒤 당서기장은 Y.V.안드로포프·K.U.체르넨코에 이어 M.고르바초프가 1985년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개혁정책을 폈다.

<소연방체제의 해체기>

⑴ 고르바초프의 신사고(新思考)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고르바초프는 최근까지 오랜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적(敎條的)인 이해(理解) 및 해석(解釋) 위에 구축되어 왔던 소련의 세계관을 대담하게 전환시키는 정책을 내놓았다. 고르바초프 정권이 국내정책에서 표방한 것이<페레스트로이카>였다면, 외교정책에서는 <새로운 정치사고(政治思考)>를 표방하였다.

제27차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 <신사고>는 오늘날의 세계현상(世界現狀)에 비추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때로는 근본적 교의마저 부정할 정도로까지 새로운 발상이며 창조적 해석이다. 신사고외교의 특징은 소련 국내의 경제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긴장완화의 국제환경조성, 이데올로기나 계급이익 중시에서 각국의 국가이익 중시로의 방향전환, 군사력강화 지향의 안전보장에서 자국과 타국과의 안전이 양립하는 상호안전보장이라는 발상의 모색, 양체제가 다같이 상호의존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경제체제의 존재 용인, 계급적 대립의 틀 안에서보다는 국가간에 공통되는 지구적 규모의 가치 또는 전지구적 이익을 존중하는 자세 등이다.

그 결과, 미·소정상회담의 적극적 개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중·소관계 정상화, 한·소국교 수립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브레주네프시대에 정체(停滯)된 소련경제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서도 호전되지 못하고 사태가 악화,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⑵ 8월쿠데타의 영향

1989년 5월 대통령제 신설로 고르바초프는 소련대통령이 되었다. 12월에 소련은 동서냉전의 종결을 선언하였고, 약 1년 뒤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수뇌회의석상에서 동서대립의 정식 종말을 알리는 <파리헌장>이 참가 35개국에 의해서 채택됨으로써 미국도 냉전의 종결을 공식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냉전의 종결을 미국보다 빠른 시기에 승인하려 한 경향에서도 나타났듯이, 소련의UN에 대한 태도의 호의적인 전환도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세계문명으로의 통합 내지 참가의 의사를 표명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걸프전쟁이 일어났을 때 다국적군의 행동을 정당화한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찬성의 거수를 한 것같이, 최근의 소련은 UN 중시의 태도로 전환했었다. 또한 소련은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국제조직으로의 접근·참가에도 적극적이었다. 예를 들면, 국제통화기금(IMF)·관세무역일반협정(GATT)·세계은행 등에 대한 적극적 가입 희망 등이 그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 1990년 3월에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등 발트3국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5월에는 옐친이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에 선출되었다.

1991년 1월 소련은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 무력개입을 하였고, 2월에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요구한 데 맞서 소련최고회의가 옐친의 발언을 비난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 무렵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연방에 닥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신연방조약>으로도 불린 소련의 주권국가연방(Union of Soverign States)안(案)을 내놓았다. 이 안의 골자는 국명에서 <사회주의>가 삭제되고, <정치는 독립, 경제는 통일>이며, 종래 연방이 가진 권한을 대폭적으로 각 공화국에 이양한다는 것이다.

기본원칙에서 구성 공화국의 지위를 완전한 정치적 권한을 가지는 주권국가로 규정하고, 공화국에 법과 자원면에서 우선권을 주었다. 연방에 남겨진 권한은 연방외교의 추진 및 공화국외교의 조정 외에 국방·안전보장, 통화발행과 연방예산의 집행 등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그 권한은 대폭 제한된 것이었다. 7월에 옐친이 러시아연방의 직선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그의 지위가 확고해지기 시작하던 중, 8월 19∼21일 소련 강경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정부·당·군·KGB·내무부의 최고위층이 쿠데타의 주모급이었으나, 계획이 철저하지 못했던 데다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도시 주민이 옐친의 지도하에 반쿠데타투쟁을 전개하고, 서방선진국(특히 미국)의 강력한 반발로 쿠데타는 <3일천하>로 실패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쿠데타 실패의 결과 고르바초프체제는 현저히 약화된 반면에 옐친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다.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서기장직을 사임하고 아울러 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하였으며, KGB·내무부·군의 권한과 규모도 축소되었다. 각 공화국의 독립 기운이 고조되었고, 9월에는 소련인민대표대회가 발트3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⑶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와해

1991년 8월 19일에 일어난 강경보수파 쿠데타의 주요 동기는 조인 직전에 있던 신연방조약(주권공화국연방안)의 조인 저지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진압 후에도 계속해서 신연방조약의 조인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4일 7개공화국(러시아·백러시아·카자흐·우즈베크·투르크멘·키르기스·타지크)이 신연방조약에 가조인(假調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1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이 조약의 조인에 실패하였고, 당초 신연방조약에 불참하였던 우크라이나공화국이 12월 1일의 국민투표에서 90% 이상의 찬성으로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연방(옐친대통령)이 즉각 승인하였고, 폴란드·미국·캐나다·유럽공동체(EC) 등 세계 각국이 잇따라 지지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우크라이나의 소연방 잔류를 촉구하였으나, 1주일 뒤인 8일 러시아·우크라이나·백러시아의 슬라브계 3국이 외교·국방 및 핵무기통제권 등을 공동관장하고 수도를 민스크(백러시아)로 하는 소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약칭 CIS)을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발트3국의 독립 후 잔여 12개공화국을 가능한 한 많이 끌어들여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던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노력은 좌절되었으며, 더욱이 21일 소독립국가연합에 이미 독립한 발트3국과 그루지야를 뺀 8개공화국이 참가하여 11개공화국으로 새로운 소독립국가연합을 구성함으로써 74년간 존재하였던 20세기 최대의 공산국가 소련은 해체되었고, 따라서 고르바초프도 소연방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뒤에 계속)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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