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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30 (화)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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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러시아혁명 (한메)
러시아혁명 -革命 Russian Revolution

제정러시아에서 일어난 1905년의 부르주아적 혁명운동과 17년~21년의 사회주의혁명 및 내전(內戰)을 총칭하는 말.

사회주의 이름 아래 새로운 사회체제를 창출해 내는 한편 반(反)자본주의·반제국주의 혁명운동을 세계로 확대시키는 근원을 형성하여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혁명은 크게 나누어 1905년 제 1 차 혁명과 17년의 혁명으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2월혁명>과 <10월혁명>으로 구분된다. <10월혁명>은 러시아혁명의 전(全)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을 이루었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사회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권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러시아혁명>이라는 명칭은 <10월혁명>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역사적 전제]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핀란드의 자치를 인정하면서도 지배하고 폴란드와 카프카스를 완전히 병합하여 동으로는 시베리아에서 극동까지를 판도로 하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대러시아민족이 제국의 주민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국가권력은 신분제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사법제도와 전(全) 신분적 지방자치제, 그리고국민개병제 군대를 가진, 개량된 무제한 전제군주제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에 의해 육성된철도와 중기계공업, 외국 자본으로 발전한 철강·석탄·석유업이 자립적으로 성장한 면(綿)공업과 병존하는 후진자본주의적 공업체제와, 지주적 토지소유가 말·농기구를 가진 공동체 농민의 노동에 의해 지탱되는 고용제적 농업구조가 출신지로부터 유출된 노동자의 저임금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체제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었으나, 20세기에 접어들자 공황으로 인해 경제성장이 멈추었으며, 구조적 잘못으로부터 갖가지 사회운동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민족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이 분출되어 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황제 니콜라이 2세는 90년대 성장정책의 추진자였던 재무장판 S.Y. 비테를 실각시키고 내무장관 V.K. 플레베를 중용하여 억압정책을 펴는 한편, 모험적 인물의 정책발안(政策發案)을 받아들여 극동에서 모험정책을 추진, 1904년 1월 러·일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은 국민으로부터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또한 러시아의 군사력과 국력의 결함을 노출시켰다. 같은해 7월 내무장관 플레베가 페테르스부르크의 노상에서 암살당하자, 그를 대신한 내무장관 P.D.스뱌토폴크 미르스키는 양보노선으로 전환, <자유주의자의 봄>이 도래했다. 정치당파로서는 20세기 초부터 마르크스주의자당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하 사회민주당으로 약칭함)과 나로드니키계의 사회혁명당(SR당)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국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반정부적인 지주층은 젬스트보(지방자치체)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압력을 가했고, 해방동맹(입헌민주당의 전신)은 정치적 시위를 목적으로 한 해방연회(解放宴會) 개최를 반복하며 입헌정치를 요구했다.

[제1차혁명]

1904년 말 뤄순[旅順]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러시아정부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동요되었다.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제 G.A.가폰은 자신이 조직해 온 페테르스부르크노동자의 합법적 친목·공제단체(共濟團體)인 <페데르스부르크시 러시아인 공장노동자 모임(회원 약 1만)>을 움직여 황제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의 제출을 단행했다. 이것은 푸틸로프공장의 동맹파업 중에 진행되어 청원행진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1905년 1월 9일(新曆 1월22일) 수십만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정치적 자유와 국민대표제, 8시간 노동과 단결권을 요구하며, 동궁(冬宮)을 향해 행진을 개시했다. 이 행진 대열에 군대가 발포하여, 정부 발표로는 130명, 혁명측의 추산으로는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발생시켰다(피의 일요일). 페테르스부르크의 학생·시민들은 동정파업을 했으며,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도 항의파업에 들어갔다.

정부는 문제를 노동자의 처우개선문제로 축소 파악하여 대응하고자 했으나, 노동입법에 소극적인 자본가들조차 입헌적 개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월 4일에는 황제의 백부인 모스크바총독 세르게이대공(大公)이 사회혁명당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도 하는 수 없이 2월 18일 국민대표를 법안심의에 참가시킬 것을 약속하고, 그 안(案)의 작성을 내무장관 A.G.불리긴에게 위임하는 칙서를 냈다. 이는 여론을 한층 더 활기있게 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전문직업인연맹을 결성, 운동의 조직화에 착수했다.

동해해전(東海海戰)에서 발트함대가 전멸되자 정부에 대한 비판은 한층 높아졌으며, 6월 9∼11일에는 폴란드 제2의 도시 로지에서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대와 충돌, 3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한편 6월 14일 흑해함대 소속의 전함 포템킨호에서는 수병(水兵)들의 반란이 일어나, 오데사 시민들도 행동을 같이 하여 정부를 놀라게 했다. 8월 6일, 극히 한정된 내용의 자문의회(불리긴의회) 설치계획이 발표되었으나, 이것으로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때마침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8월 10일부터 포츠머스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전권위원에 기용된 비테는 남사할린의 할양이라는 러시아로서는 최소의 양보로 일본과의 강화를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8월 말 정부가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노동자·시민·정당들이 대학 구내에서 정치집회를 자유롭게 열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의 물결은 10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10월 7일 모스크바와 카잔 사이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시작된 전국철도총파업은 일반노동자와 시민들을 총파업으로 이끌었다. 그런 와중에서 비테는 니콜라이 2세에게 양보를 촉구, 결국 10월 17일(신력 10월 30일) 시민적 자유와 임법의회의 개설(開設)을 약속하는 <10월 조서(詔書)>가 발표되었다. 2일 뒤, 사실상의 총리직인 각료회의 의장직을 신설하는 칙령이 내려져 비테가 초대 총리로서 임명되었다.

이로써 <자유의 날들>이 도래했으나, <자유>를 통일 슬로건으로 전국민적인 연합을 유지하며 진행되어 온 혁명은 이 시점에서부터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노동자들은 8시간노동제의 요구를 실력으로 행사하려는 투쟁적 방법을 택하여, <10월 조서>에 만족한 자본가와 충돌했다. 농민들은 공동체의 결정으로 지주에 대하여 지대(地代)인하와 노동보수인상을 교섭해왔으나, 10월 이후 중앙농업지대와 볼가강연안지방에서 격렬한 지주령 파괴행동에 나섰다.

지주들은 한 때는 영지의 포기를 고려했으나, 이윽고 실력자위책을 취하고 전체적으로 우익화하였다. 12월 2일 페테르스부르크소비에트·농민동맹·사회민주당 양파(볼셰비키와 멘셰비키)·사회혁명당·폴란드사회당 등 6개 단체가 국고에로의 납세거부를 호소하는 <재정선언>을 발표하자,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다음날 페테르스부르크소비에트의 대의원 전원을 체포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12월 7일 모스크바에서 파업이 시작되자 당국은 노동자들이 조직한 무장자위대에 공격을 가했으며, 페테르스부르크와 폴란드로부터 증원군을 동원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한 노동자들을 분쇄했다. 이 때 약 700명의 노동자·시민이 사망했다. 이는 통상 <모스크바봉기>라 불리는데, 무장한 노동자가 혁명의 기득권과 해방된 공간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었다.

위기를 벗어난 황제와 보수파는 약속한 대개혁을 실시하지 않고 12월 11일 우선 <불리긴국회> 선거법을 약간 수정한 정도의 국회선거법을 제정하였고, 다시 1906년 2월 20일에는 황제의 법률재가권(法律裁可權)을 인정한 국회·국가평의회의 2원(二院)입법제를 발표했다. 국회개원 직전인 같은해 4월 23일(신력 5월 6일) 계속해서 황제에게 <최고 전제권력>이 속(屬)한다는 신국가기본법이 공포되었다.

혁명의 결과는 무제한 전제로부터 국회와 국가평의회의 2원에 의해 제한되는 전제로의 이행(移行)이라는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끝난 것이다. 4월 27일 국회는 개회했으나, 자유주의자의 정당인 입헌민주당과 무당파(無黨派) 급진농민들로 구성된 트루도비키파가 의원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정부와 대립했다. 7월 8일 정부가 국회를 해산하자, 181명의 의원들은 비보르크에 모여 반정부투쟁을 호소했으나, 발트함대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쳤다.

국회해산과 함께 총리를 겸임하기에 이른 내무장관 스톨리핀은 이후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공동체의 해체를 노린 개혁을 추진, 1907년 6월 3일 제2국회의 해산과 동시에 지주세력을 우대하는 신국회선거법을 공포하고, 강제로 국회를 정부에 협력기관으로 만듦으로써(6월 3일의 쿠데타) 제1차혁명은 종결되었다.

[재편(再編)의 한계와 제1차세계대전]

스톨리핀의 집권하에서 경제는 다시 호황을 맞이하여 은행의 힘이 강해졌으며, 부르주아문화가 발전했으나, 제1차혁명이 낳은 모순은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갔다. 정치적으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국회와 국가평의회는 전제권력을 이용하는 스톨리핀의 개혁노선을 방해하여, 스톨리핀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가운데 1911년 9월 암살당했다.

스톨리핀개혁의 중심이었던 토지개혁도 농촌구조를 개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동체를 고집하는 농민과 공동체로부터 나온 부농(富農)과의 사이에 새로운 대립관계를 낳았다. 노동입법은 지체되었으며, 노동자들은 다시 과격하게 되어 12년 프라하협의회에서 독자적인 당을 결성한 레닌파 볼셰비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제1차혁명의 정점에서 전제에 조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자본가들 중에서 지주귀족을 밀어내고 국가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정치지향의 자본가가 나타난 사실인데, 진보당을 조직한 모스크바의 면공업자본가 A.I. 코노발로프 등의 우익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러한 노동자의 급진화와 부르주아지의 급진화에 따라 1914년 초 여름의 러시아에는 또다시 혁명적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톨리핀은 재편의 조건으로 <국내외의 20∼30년간의 평온>을 내걸었으나, 제국주의국가들간의 대립과 발칸지역국가들간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에 러시아는 휘말렸으며, 결국 14년 7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에 이르렀다. 교전(交戰)열강이 모든 경제력과 국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한 총력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러시아국가(國家)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러시아혁명의 조건을 일변시켰는데, 구체적으로는 개전 직후에 보였던 거국일치적 상황은 급속히 사라지고 14년 말에는 수송과 보급곤란이 이미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15년 4월 갈리치아에서 러시아군의 제1선은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후퇴했으며, 이어서 폴란드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어 대퇴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모든 공업시설의 동원을 주장하며 군수품생산에의 참여를 노린 모스크바의 자본가들은 전시공업위원회를 만들어내고, 신임할 만한 인물들로 구성된 내각을 요구하는 국회다수파 <진보블록>을 형성했다. 황제는 황후와 G.E.라스푸틴의 조언을 들어 패배의 책임자인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니콜라이대공을 해임하고 스스로 그 후임이 되었다. 대신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황제와 격돌했다. 이후 황제는 황후와 라스푸틴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그의 정치지도는 혼란에 빠져 갔다. 이리하여 국가의 해체가 본격화되었다.

[2월혁명]

혁명은 다시 페테스부르노동자들의 행동에 의해 시작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중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된 이 도시에는 식량난과 연료난이 극심했다. 더욱이 전국 제일의 공업도시이자 군대의 집결지로서 38만 명의 노동자와 47만 명의 병사가 이 지역에 있었다. 자본가들 가운데 급진파와 결탁한 전시공업위원회 산하 노동자그룹은 1917년 2월 14일 국회재개일(再開日)에, 과거 <피의 일요일>에 동궁으로 청원행진한 것처럼 국회로 시위행진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 등의 반대로 당일의 행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수도 중심부에서의 시위참가 호소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복잡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2월 23일(신력 3월 8일) 국제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무명활동가그룹의 공작으로 비보르크구(區)의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빵을 달라>고 외치며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여기에 남자노동자들도 호응하여 시위대는 네바강의 다리를 돌파하고 시의 중심부인 네프스키대로로 향하려고 했다. 파업은 이틀째부터는 다른 구에도 파급되었으며, 25일에는 시 전체가 파업에 들어갔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카자흐병사가 경찰서장을 참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병사들의 명령불복종을 예감시키기도 했으나, 26일 병사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 많은 수의 사망자를 냈다. 그러나 이 날의 진압행동에 불만을 품고 돌아온 근위 볼니연대의 병사들은 하사관의 지도 아래 다음날 27일 아침 반란을 일으켰으며,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2연대에도 파급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2곳의 감옥으로부터 정치범들을 해방시켰다.

석방된 정치범들 중 일부는 국회건물에 모여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대표소비에트 창설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정부측의 군관구사령관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대를 출동시켰으나, 이 부대는 도중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국회는 이날 아침 황제의 휴회명령을 받아들여 해산하기로 결정했으나, 사태가 급변하고 있음을 알고 본회의장 밖에서 비공식회의를 열어, 국회임시위원회를 선출했다. A.I. 코노발로프와 제휴한 A.F.케렌스키는 국회가 혁명을 담당하도록 노력했다.

밤이 되어 국회건물 내에 노동자대표와 사회주의정당대표가 모여 소비에트의 결성회의를 개최하자, 국회임시위원회는 심야 2시, 권력장악을 결의했다. 다음날 각 관청에 대한 접수가 행해졌는데, 국회의 대표자가 교통부에 들어가 철도 운행을 지휘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것은 모길료프의 총지휘부에 있던 황제가 이바노프장군에게 명하여 수도에서 발생한 혁명에 대해 진압군을 출동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총지휘부의 군 수뇌들은 국회의장 M.V.로잔코와 접촉하면서 황제에게 계속해서 양보를 진언하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3월 1일 병사들이 최종적으로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것이 <명령 제1호>라는 문서로 정리되었다. 노동자와 병사가 소비에트에 충성을 표시하고 관리와 장교가 국회임시위원회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상태가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소비에트의 승인을 받아,3월 2일 국회임시위원회는 총리 G.E. 리보프, 외무장관 P.N. 밀류코프, 상공장관 A.I. 코노발로프 등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발족시켰다. 이 백군(白軍)수뇌 들은 로잔코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태자에게 양위(讓位)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일단 이를 받아들였으나, 황태자의 병을 고려하여 자신의 동생 미하일에게 양위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하일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여기서 제정(帝政)은 붕괴하게 되었다.

제정을 타도한 혁명 중의 하나는 <노동자·병사의 혁명>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지의 혁명>이었다. 이 2개의 혁명은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이 혁명의 수익자로서 농민과 피압박민족이 새로이 만들어진 자유의공간 속에서 혁명에 나서게 되었다. 농민들은 공동체단위로 행동했으며 볼로스티(郡과 面의 중간 행정단위) 차원의 위원회를 조직했다. 피압박민족들도 조직체를 형성했는데, 우크라이나에서는 3월 4일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우크라이나중앙라다(평의회라는 뜻)를 성립시켰다.

이 이후의 <농민혁명>과 <민족혁명>의 전개는 <노동자·병사혁명>과 <부르주아지혁명>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임시정부는 정치범의 대사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신분제의 폐지, 종교적·민족적 차별의 철폐를 실현하여 러시아를 자유로운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평화>에 있었다. 부르주아지에게 있어 혁명은 보다 효율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는 3월 18일 무(無)병합·무배상금강화(講話)의 실현을 목표로 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는 외무장관 밀류코프의 방침과 충돌하여 4월 20일 페트로그라드병사들의 주도하에 밀류코프타도, 침략반대를 내건 시위가 일어났으며 밀류코프는 각외(閣外)로 물러났다. 볼셰비키는 귀국한 V.I.레닌의 <4월 테제>를 받아들여 소비에트권력의 수립을 목표로 한 활동을 개시했다.

다른 한편 소비에트주류파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이같은 동요 뒤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신정부의 외무장관인 M.I.테레시첸코는 전쟁목적을 수정하기 위한 연합국회의 개최를 제창했으며, 체신장관 I.G.체레텔리는 소비에트가 주장하는 선에서 평화를 위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의 개최를 추진했다. 육해군장관 케렌스키는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진선(前線)에서의 공세를 준비하려고 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이 정책은 깊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민중들은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가하여, 6월 8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하에 시위를 행할 것을 결정케 하였다. 소비에트주류파는 이를 강력히 비난하며 시위를 중지시켰으나,6월 18일 <무병합·무배상금·민족자결의 전면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개최할 수 밖에 없었다. 이 6월 시위는 30만에서 4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가 되었다.

[10월혁명]

혁명의 과제는 <자유>와 <평화>에 그치지 않았다. 2월혁명에 의해 8시간 노동제를 획득한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조직하여 권리요구를 한층 더 높였으나, 자본가측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1917년 5월 말에서 6월 초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위원회협의회는 볼셰비키의 지도하에 <노동자통제(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의 필요를 결의했다. 농민들은 <토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5월 말에 개최된 제1차전러시아농민대회가 사회혁명당의 지도하에 헌법제정회의에서<토지 사회화>를 실현할 것을 결의하자, 볼로스티에 집결한 농민들은, 즉시 이를 실현해도 좋다고 판단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회혁명당의 지도자 V.M. 체르노프가 농무장관의 자리에 있었으나, 연립의 조건에 구속되어 농민들의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는 시책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가 겨우 결정한 토지매매와 저당의 금지도 지주인 총리 이하 여러 장관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피압박민족들도 <자치(自治)>를 요구했다. 우크라이나중앙라다가 5월 중순에 자치를 요구하자 임시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6월 10일 라다는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선언했다.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지방의 자치를 인정하는 안(案)을 내어 정부와 라다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으나, 입헌민주당 출신의 4명의 대신이 이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이러한 정부의 위기에 대하여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또다시 주도권을 쥐고 연립의 중지와 소비에트권력의 실현을 요구하며 7월 3일의 무장시위를 결행했다.

볼셰비키는 시기상조라 하여 시위를 중지시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위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도 계속되는 시위에 소비에트주류파는 볼셰비키 음모를 간파하고 탄압에 나섰다. 레닌은 지하로 잠행(潛行))했으나 볼셰비키는 비합법화되지 않았으며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G.Y. 리보프는 총리직을 사임했고, 전선에서는 케렌스키가 시작한 공세가 독일의 역공을 초래해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

불과 4명의 입헌민주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입각하게 되어,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제2차연립정부가 7월 24일에 성립되었다. 정부는 평화를 실현할 전망을 갖지 못하고 전선과 국내질서의 유지만을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인이 그 주역(主役)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신임 최고군사령관 L.G.코르닐로프는 전선에서 사형제도를 부활시킨 데 이어, 후방에서도 군내항명자(軍內抗命者;명령 불복종자)에 대해 이 제도를 부활할 것을 목표로, 군사독재의 수립도 불사한다는 심산이었다.

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의 양보를 문제 삼지 않은 채 A.M. 크프장군에게 수도진격을 명령했다. 정부 내의 입헌민주당 소속 4명의 장관들은 코르닐로프 지지를 표명하고 사임했다. 케렌스키에게 남은 것은 소비에트의 지지 뿐이었다. 소비에트는 일치단결하여 코르닐로프군에 맞서 싸울 태세를 취했는데, 그 중심이 되어 활동한 것은 볼셰비키였다. 코르닐로프군의 진격은 저지되었으며, 8월 31일 크리모프가 자살했고, 다음날에는 코르닐로프가 체포되었다.

코르닐로프반란의 경험은 소비에트권력을 요구하는 주장을 일반화시켰다. 볼셰비키는 연립책을 들고 나온 소비에트우파를 제외한 좌파만의 정권을 원했다. 8월 31일 페테르스부르크소비에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정권>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한 것은 볼셰비키의 역량을 나타낸 것이었다. 케렌스키는 새로운 권력기반을 구하여 9월에 민주주의파회의를 열고 이른바 예비의회를 발족시켰으며, A.I.코노발로프 부총리로 맞이하여 제3차연립정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농민혁명이 고양(高揚)되어, 지주저택에 대한 방화행위가 확대되어 갔으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부의 수명은 이미 다해 있었다. 잠행중인 레닌은 임시정부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의 결행을 동지들에게 제안했으나 당중앙위원회는 이에 즉시 찬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G.E. 지노비예프와 L.B. 카메네프 등의 고참 간부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권력장악에의 준비는 페트로그라드소비에트의 의장이 된 L. 트로츠키의 판단으로 진행되어, 10월 12일 반(反)혁명로부터의 소비에트의 방위라는 목적으로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가 위원을 파견하여 페트로그라드의 군사조직을 그 지휘하에 두려고 하자, 군관사령부와 충돌했다. 23일 밤 임시정부는 이 도전을 분쇄할 것을 결의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볼셰비키측을 공격했다. 그러나 24일 중으로 수도 내의 주요 거점은 모두 혁명파병사와 노동자적위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임시정부는 동궁(冬宮)에 고립되었다. 10월 25일(신력 11월 7일) 오전 10시 군사위원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었음을 선언했다. 동궁은 26일, 약간의 전투 끝에 함락되어, 케렌스키를 제외한 각료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 행동은 25일 밤 11시에 열린 제2차 전러시아노동자·병사소비에트대회에 기정사실로서 제시되었다.

소비에트우파는 이에 항의하여 퇴장했고, 남은 볼셰비키와 좌파사회혁명당, 그 외 약간의 당파들은 소비에트권력의 행동강령을 담은 호소문,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레닌의 제안에 의해 가결했다. 민주적 강화와 즉시휴전, 지주의 토지몰수, 군대의 민주화,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헌법제정회의의 소집, 식량의 확보, 민족자결권의 보장 등이 새로운 권력의 목표로 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사실이다.

목표에 관해서는 모두 일치했으나, 좌파사회혁명당에 의해 입각을 거절당한 볼셰비키가 레닌을 수반으로 하고 트로츠키를 외무인민위원으로하는 단독정부를 제안하자, 타당(他黨)들은 모두 반대했다. 이 때문에 단순다수(單純多數)로 임시노농정부와 인민위원회의가 선출되었다. 수도를 탈출한 케렌스키는 P.N.크라스노프장군의 부대와 함께 공격해 왔으나, 10월 30일 교회의 풀코보에서 격파되었다. 그 날 모스크바에서도 5일간 계속된 대전투가 끝나고 임시정부파가 패배했다. 11월 1∼4일에는 북부방면군(軍)과 서부방면군사령부가 있는 프스코프와 민스크에서 소비에트권력이 수립되었다. 이리하여 10월혁명은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볼셰비키와 좌파사회혁명당을 지지하는 페트로그라드 및 모스크바의 노동자와 병사, 북부방면군·서부방면군병사들의 조직된 힘에 의한 것이었다. 이 노동자·병사혁명은 농민혁명과 민족혁명의 도움을 받아 부르주아지의 혁명을 타도한 것이다. 키예프에서는 우크라이나중앙라다와 소비에트가 협력하여 임시정부측의 군관사령부(軍管司令部)를 타도했다. 1월 7일 라다도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혁명의 과정이 품은 모순은 즉시 현재화(顯在化)되었다. 노동자·병사혁명의 한쪽 중심이었던 혁명적 병사집단은, 휴전이 실현되고 계급제(階級制)의 폐지와 장교선거제를 중심으로 군대의 민주화가 실현됨과 함께 급속히 해체되어 갔다. 곧바로 민족혁명과의 대립도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중앙라다와 러시아인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지방소비에트의 대립으로, 12월에 모스크바 정부는 최후 통첩을 보냈고 원정군을 파견했다.

1918년 1월 26일 소비에트군은 키예프를 점령했으며, 우크라이나 전역은 일단 소비에트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농민과의 관계에서는, 12월에 노동자·병사소비에트와 농민소비에트가 합쳐지고 좌파사회혁명당이 입각하는 등의 진전을 보였으나,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자력으로 지주를 몰아내고 토지를 공동체의 원리로 분배해 갔다. 11월에 행해진 헌법제정회의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선전(善戰)했으나, 득표율 24%의 제2당에 머물렀다.

레닌정부는 이 결과가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여기에 따를 것을 거부하고, 1918년 1월 5일 개최된 헌법제정회의에 소비에트가 채택한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 선언>의 채택을 강요하여 이것이 거부당하자 하루만에 회의를 해산했다. 1월 10일 제3차 소비에트대회에서 레닌은, 러시아는 <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이라고 선언했다. 10월혁명의 사회주의혁명으로서의 성격은 이 때 명시되었던 것이다.

[소비에트정권]

<평화>의 실현은 새 정권 최대의 과제였다. 민주적 강화와 즉시휴전의 요청은 교전열강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간신히 동부전선의 긴장해소를 원하는 독일이 이에 응하여 12월 9일부터 브래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무병합·무배상금>의 강화원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섭을 지연시키며 조인은 하지 않는다는 전권대표 트로츠키의 노력과는 달리 독일은 공세로 나오면서 페트로그라드 방면으로 진격했다.

결국 러시아혁명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는 <숨 돌릴 틈>이 필요하다고 하여, 즉시 강화를 주장한 레닌의 방침이 채용되어 3월 3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당 내에서도 혁명전쟁론(독일군을 공격해 들어 감으로써, 독일 국내에 혁명을 유발시킨다는 주장)의 입장에 서 있던 N.I. 부하린 등은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좌파사회혁명당의 각료가 전원 사임하고 하야(下野)한 사실이다.

경제관리면에서도 노동자통제에 의해 서서히 공장관리체제로 진행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자본가들의 사보타지와 도망 등으로 인해 공장을 차례차례 접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6월 28일 모든 대규모공장의 국유화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도시와 농촌의 상품유통이 중지된 가운데, 토지를 자신들의 힘으로 획득한 농민들은 도시에 곡물을 제공할 의무를 느끼지 못했다.

독일군의 침입으로 인해 곡창 우크라이나를 짐령당한 혁명정권은 나머지 중앙부농촌에서 부농들이 숨겨 놓은 곡물을 몰수할 방침하에 무장한 노동자들을 파견했다. 6월 11일에는 빈농위원회의 설치도 포고되었다. 하야한 좌파사회혁명당은 이에 강력히 반발, 7월 4일 독일대사를 살해하고 무력반란을 일으켰다. 레닌정부는 이를 진압하고, 소비에트의 제2당인 이 당을 비합법화했다. 10월혁명파의 이 무력충돌은 그에 이어지는 내전의 서막이 되었다.

[내전과 간섭전쟁]

이 때 이미 극동으로부터 볼가강 근처까지 체코슬로바키아군단에 의해 각지의 소비에트정권이 타도되고 있었다. 이 군단은,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체코슬로바키아인 병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민족주의적인 이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유럽전선에 배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동 중 무장해제를 명령받자, 18년 5월 25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과 프랑스연합군 1만 5000명이 북쪽의 아르항겔스크에 상륙하여 반소정권(反蘇政權)을 옹립했다. 그리고 8월 2일과 3일에는 미국과 일본이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을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시베리아출병을 선언했다. 연합국은 동부전선의 재건을 위해 무력간섭의 기회를 노리고 있있던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반란에 의해 사마라(현재 쿠이비셰프)에 헌법제정회의의원들이 반소정권을 수립했다.

소비에트정권은 이 위기에 처하여 적군(赤軍)을 징병제군대로 전환했으며, 8월 30일 레닌이 암살자에게 저격되어 중상을 입자 체카(KGB의 전신)를 중심으로 적색테러로써 대항했다. 반볼셰비키파들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후원을 받는 사회혁명당파와 구(舊)군인·제정파(帝政派)·자유주의파의 대립은 뿌리 깊은 것이었으나, 9월 우파에서 열린 국가회의에서 타협이 성립되어 5인의 집정부(執政府)하에 전러시아통일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는 단명에 그쳤다.

11월 17일 육해군장관 A.V. 콜차크는 쿠데타를 일으켜 최고집정관에 취임했다. 이리하여 제정파군인이 반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콜차크는 연해주에서 일본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펴고 있던 G.M. 세묘노프도 일단 휘하에 두고, 전시베리아지배자로서의 지위를 굳힌 뒤, 1919년 3월 우랄에서 서쪽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4월에는 카잔과 사마라에서 80㎞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했다. 이 때 북서부에서는 에스토니아로부터 로잔코군이 페트로그라드를 목표로 침공해 들어가 협공의 형태를 취했으나, 적군은 이를 잘 막아내어, 결국 6월 9일 V.I.차파예프군이 우파를 탈환했으며, 콜차크군을 퇴각시켰다.

이미 시베리아에서는 콜차크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농민파르티잔이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중앙부의 농민들은 소비에트정권의 곡물징발에 고생하면서도, 필연적으로 지주제의 부활을 가져올 제정파의 승리를 두려워하여 적군을 도와주었다. 이것이 적군이 승리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다. 콜차크군의 진격이 저지되자, 이번에는 남쪽으로부터 A.I.데니킨군이 공격해 왔다. 6월 24일 하리코프를 함락시킨 데니킨군은 7월 3일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개시했다. 적군측의 작전상 혼란도 있어서 데니킨군의 전진은 계속되었으며, 10월 13일 오룔이 함락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트로그라드방면에는 N.N.유데니치군이 진격해 왔다. 군사인민위원 트로츠키의 작전안이 이 위기 속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이와 함께 데니킨군의 배후에서 무정부주의자 N.I. 마흐노가 이끄는 우크라이나농민군이 공격을 가함으로써 적군을 도와주었다. 1월 20일 오룔이 탈환되었으며, 데니킨군은 후퇴했다. 12월 16일에는 키예프가 탈환되었고 데니킨군은 완전히 격파되었다.

이 치열한 내전을 치르기 위해 소비에트정권은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라 불린 경제정책을 취했다. 이 정책을 지탱한 첫번째 기둥은 <곡물독재>였으며, 두번째 기둥은 전공업의 국유화였다. 1920년 11월에는 5∼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소규모 공장까지도 국유화되었다. 상품경제는 철저히 국가통제 하에 들어간 것이다. 정치면에서도 공산당만의 일당(一黨)국가를 이상형으로 하여, 조직국(組織局)과 서기국에 의해 당기구가 정비되있으며 당과 국가가 일체화되었다. 이리하여 <군사적 프롤레타리아독재>라 불리는 강력한 국가가 창출되었다.

내전과 간섭전(干涉戰)은 국제제국주의와의 투쟁이며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의 제1보로 여겨졌기 때문에, 혁명적 공산주의자를 규합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조직이 구상되었다. 1919년 3월 2∼6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1차대회가 포위상태에 있던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이곳에서 세계 각지로 흩어진 대표들은 각국 사회주의운동의 좌익을 결집하여 1920년 7월 23일 제2차대회를 열었다. 41개국·67개 조직의 대표가 참석한 이 대회에서, 코민테른을 본부로 하고 각국 공산당을 그 지부로 하는 규약이 결정되었으며, 또한 러시아혁명을 식민지종속국에 전파케 하려는 <민족식민지문제 테제>가 채택되었다.

러시아혁명을 확대시키려는 최초의 실험은 폴란드전쟁에 의해 시도되었다. 1920년 봄 우크라이나에 침입하여 5월 7일 키예프를 점령한 독립폴란드의 J.K. 필수트스키군(軍)을 추격하여, 적군은 폴란드 영내로 진격을 개시했다. 7월 30일에는 망명자들에 의해 폴란드임시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적군이 만일 필수트스키군을 분쇄했더라면 이 위원회가 폴란드의 혁명정부가 되었을 것이다. 8월 15일 M.N.투하체프스키가 이끄는 적군은 바르샤바 근교에서 진격이 저지되어 퇴각했다. 혁명의 군사적 수출은 실패한 것이다.

이 무렵, 백군 최후의 대표자로서 등장한 P.N. 브랑겔장군은 20년 6월 4만의 병력을 이끌고 크림반도로 들어갔다. 9월이 되자 브랑겔군은 더욱 전력을 증강하여 아조프해 동쪽 연안인 쿠반지방에 진출했다. 브랑겔군과의 전투에 임했던 적군은, 데니킨군에 대한 승리 후 <탈주병·배신자> 등으로 몰아세웠던 마흐노군과 새로이 협정을 맺고 공동투쟁을 펼치게 되었다. 11월에 행한 양군의 공동반공(反攻)은 효력을 발휘하여, 브랑겔군은 궤멸되었다.

이리하여 백군과의 투쟁은 종결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적군과 마흐노군과의 협력관계도 끝이 났다. 적군이 케르치를 점령한 10일 후, 마흐노군을 <소비에트공화국과 혁명의 적>이라고 선언하였다. 같은 무렵 소비에트정권은 탐보프주(州)에서 발생한 A.S. 안토노프의 반란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반란지도자 안토노프는 사회혁명당원이었다.

농민들은 20년 여름부터 <인마(人馬)의 해방>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반정부 게릴라활동을 시작하여 군(郡)당부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일소했다. 제정파장군들이 타도되자, 이번에는 농민·사회혁명당파와 공산당정권의 대립이 정면으로 대두된 것이다. 다년에 걸쳐 농민혁명의 최대 근거지였던 탐보프주의 반란에 이어, 1921년 3월 역시 페트로그라드혁명을 지탱한 기둥의 하나였던 크론슈타트 요새에서 반란(크론슈타트의 반란)이 발생했다. 마흐노군과 마찬가지로 이 2개의 반란은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레닌은 이 무렵 농민과의 화해를 고려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21년 3월의 제10차당대회에서 곡물의 할당징발제를 폐지하고 현물세제(現物稅制)를 도입했고, 잉여곡물의 판매를 허용하는 신정책을 채용했다. 이 정책은 같은 해 도시와 농촌간의 자유로운 상품경제관계를 인정하는 네프(신경제정책)체제로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이 하여 1921년 3월의 크론슈타트반란이 진압된 시점을 내전의 종료, 크게는 러시아혁명시대의 종결로 볼 수 있다.

이는 2월 21일 단 하나 남겨진 멘셰비키의 그루지아공화국이 적군의 침공에 의해 타도되어 카프카스가 완전히 소비에트정부에 의해 제압된 사실과 상응하고 있다. 21년 혁명과 내전·간섭전쟁에 승리한 소비에트권력은 정치적으로는 일원적인 강력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국토는 황폐해졌으며, 그해 가을 볼가강 연안에는 엄청난 기근이 발생하여,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 새로운 사회주의국가의 탄생은 전세계에 변혁을 불러일으켰고, 세계사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세계에 미친 영향]

유라시아대륙에 펼쳐진 대제국(大帝國)에서 일어난 사회주의혁명은 프랑스혁명에 필적하는 커다란 영향을 세계사에 미쳤다. 1919년에 발족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운동으로서의 러시아혁명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정치적 메커니즘이 되었다.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세계전쟁으로 고통을 받으며 신세계를 갈망하고 있던 많은 식민지국가들은 볼셰비즘과 공산주의에서 현상(現狀)타개책을 찾고자 했다.

유럽 각국 사회주의정당 내의 좌파는 우파와 격렬히 대립하여 공산당의 결성을 서둘렀다. 1918년에는 독일혁명이 러시아혁명의 뒤를 이있으나, 이곳에서는 러시아식 혁명이 거부되었다. 1919년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이 탄생하여 최초로 러시아식 혁명의 확대가 실현되었으나, 그것도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선진자본주의국가인 미국·영국·프랑스 등지에서는 새로운 노동자개념을 들고 나온 러시아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개혁을 진전시켰으며, 노동자를 체제질서 내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한층 가속화했다. 이와 같이 러시아혁명은 공산주의운동과 지도층의 개혁의욕 고취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고 대전 후의 유럽에 혁신적 영향을 끼쳤다. → 러시아사

<진영식>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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