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백제 문화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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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소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지정 :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 전경

성주사지로 가는 길은 기분이 좋다. 외산에서 성주를 거쳐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성주천을 따라가다가 성주산 쪽으로 접어들면 어느새 길가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히 자란 소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산골이라고는 해도 길이 잘 나 있어서 가는 길도 퍽 수월한 편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을 찾아가는 상왕산 길이나 만수산 무량사 길에 비하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여서 오히려 이런 산골에 왜 이런 '신작로'가 났을까 의아할 정도다.

답은 성주사지에 있지 않고 성주탄광에 있다. 성주산에는 질 높은 무연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이 산 곳곳에 탄광을 많이 열었었다. 그래서 한창 때는 그 맑던 성주천 물이 탄가루로 시커멓게 변할 정도였다. 그러나 파먹을 만큼 파먹어 광산이 수명을 다했는지 이제는 폐광이 되었고 성주천은 한두 해 전부터 다시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래서 탄광 덕에 살았던 경기는 침체하고 탄광 때문에 이 산골에까지 와 살았던 사람들도 이럭저럭 다 떠나고 말았으니 성주산은 옛적과 같이 다시 적막한 산이 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자락 사이로 소풍이라도 하듯이 가다 보면 왼쪽으로 탑들이 옹기종기 서 있는 넓은 터가 눈에 들어온다. 뒤로 듬직한 성주산(680m)이 받쳐 주고 있는 이곳이 성주면 성주리의 성주사지다. 사적 제307호로서 94년까지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한창 발굴작업을 했었다. 이 본격적인 발굴 덕에 성주사지의 정확한 구조와 역사가 드러나겠지만 아직 발굴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이제까지는 지표에 드러난 것들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 성주사는 백제 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 신라 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것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聖住寺 事蹟)]에 따르면 오합사는 성주사의 전신인데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고 한다. 삼국 사이의 치열했던 정복 전쟁으로 솟구쳤던 백성의 원망을 달래 보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합사는 백제 왕실에서 매우 중히 여긴 절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오합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불우한 이야기를 간직한 절이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 15년 5월에 "흰말이 북악에 있는 오합사에 들어가서 불우(佛宇)를 돌며 울다가 며칠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도 의자왕 19년에 "오합사에 큰 붉은말이 있어 밤낮 여섯 시에 사원을 돌았다"고 씌어 있다. 이미 1960년대에도 간간이 나오는 백제 기와조각들 때문에 오합사로 추정되어 왔으며 본격적인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 기와조각들이 더욱 많이 출토되었다.

이 절이 본격적으로 규모 있게 자리잡고 지금까지 부르는 이름인 '성주사'(聖住寺)가 된 것은 신라 말의 일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水閣) 7칸, 고사(庫舍) 50여 칸으로 기록하였으니 거의 천여칸에 이르고 있다. 한창 때의 성주사는 충청남도는 물론 온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절이었고 신라 하대 구산선문에서 가장 번창하던 일문으로 특히 무염의 문도는 2천 명에 이르렀으니 수도승들이 공양하느라고 쌀을 씻은 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리나 흘러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다.

그러한 무염국사가 이 절에 있었기에 그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였으며 산도 마을도 그에 따라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 절에 관해 [동국여지승람]에는 "성주산 북쪽에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의 부도비가 있다"고 간략하게 언급했는데 그 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으니 아마도 임진왜란 때 불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그 장엄하던 절이 송두리째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면을 빙 둘러 가며 석축으로 싼 9천여 평에 이르는 성주사지에는 오직 돌로 된 것들만 그 형체를 간직하고 있다. 금당터 앞에는 오층석탑이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당터와 중문터도 그 기반인 주춧돌과 금당터 한가운데에 자리한 석조 불대좌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절에는 오층석탑 말고도 탑이 셋이나 더 있다. 각각 3층으로 금당의 뒤쪽에 거의 일렬로 정렬해 있는데 이런 배치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주사의 내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낭혜화상 부도비가 절터의 북쪽 부근에, 지금은 전각 안에 들어 있다. 이 비는 신라 하대 비로서는 가장 크며 특히 비문에 적힌 내용은 낭혜화상의 생애와 더불어 신라 하대 사상 흐름의 변천을 밝혀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무염국사를 오합사의 주지로 모시고 성주사를 열게 한 김양(金陽)은 보령 지역을 근거로 한 지방 호족이었다. 중앙 진골 귀족에 서서히 대항해 가던 호족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선종에서 찾았다. 왕이 곧 부처라거나 미륵이라고 하고, 또는 성 자체를 석가모니와 비슷하게 '釋'씨로 하여 고대 사회 체제를 유지시키는 데 한몫 하는 불교에서 벗어나, 수행으로서 득도하고 실력으로서 나서는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이제 옛 자취만 남았을 뿐이지만 당대의 모순을 자각하고 새로운 사상과 힘을 일구어내던 자취로서 성주사지는 매우 뜻깊은 유적지이다.

좀 떨어져서 성주사지를 그 뒷산과 더불어 바라보거나, 금당자리 쯤에 앉아 길 건너 앞산을 바라보거나 하면 뭉글뭉글 솟은 산언덕 풍경이 퍽이나 평온하게 느껴지는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이 풍경은 유명한 백제 산경무늬전돌[山景紋塼]하고 참 많이 닮았다. 혹여 그 전돌에 희미하게 드러난 절집과 절집에 찾아가는 스님 모습은 백제 때의 오합사인 이곳이 모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성주사지 가람 배치

소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절터에 들어서면서 거치게 되는 중문자리와 오층석탑 바로 뒤쪽의 금당자리, 금당 북쪽의 강당자리, 그리고 금당의 동쪽에 남북으로 긴 건물자리에서 삼천불전 등이 확인되었다.

중문과 오층석탑, 금당과 강당은 남북으로 일직선을 그으면 중심축에 한줄로 놓이게 되니 전형적인 일탑일금당 형식의 가람배치이다. 금당에 오르게 되는 돌계단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데 양쪽에 사자조각이 있어서 통일 신라 하대 사자의 야무진 품성을 한껏 뽐내고 있다. 금당터 한가운데에는 석조연꽃대좌가 몇 조각으로 깨진 채로 있는데, 그 너비로 보아 그위에는 장륙상에 해당되는 불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륙상은 선키가 4.8m인 상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좌상이 있었음직하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거대한 '쇠부처'가 있었는데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 부처는 바로 이 자리에 있었을 본존불로, 신라 하대에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으니 성주사 중창 때에 모셔진 부처였을 것이다.

주존불은 잃어버리고 땅속에 파묻혀 있던 흙으로 빚은 부처머리들이 동쪽 긴 건물자리에서 많이 발굴되었다. [숭암산성주사 사적]에 아홉 칸짜리 삼천불전에 관한 언급이 있어 이 부처머리들이 집단으로 나온 자리를 삼천불전터로 본다. 여기에서 나온 소조 부처머리들은 흙으로 빚어 도금하거나 채색하여 구워낸 것들로 당시 삼천불 신앙이 크게 자리잡았음을 말한다. 후대에 자꾸 보수하여 신라 하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덧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하여 수습된 것들은 국립부여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있는데 머리 길이만 12∼13cm쯤으로 두툼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들이다.

[용어 해설]

일탑일금당 : 금당 하나에 탑이 하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가장 기본적인 배치형식이다.

성주사지 오층석탑

소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절터 한가운데에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남향한 금당과 일직선을 이루며 절터의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2층 기단 위에 5층 몸돌을 올린 점은 별다를 것이 없는데 1층 몸돌 아래에 굄대처럼 돌받침을 하나 받쳐 놓았다. 이런 형식은 고려 시대 석탑에서 많이 보이는 방식이어서, 신라 하대에 세워졌다고 생각되는 이 탑은 그런 점에서 선구적인 형식을 보인다. 상륜부는 남지 않은 채로 높이가 6.6m에 이르는데 1층 몸돌이 시원하게 뻗은 위로 나머지 네 층이 고른 체감률을 보이며 올라갔고 키에 비해 지붕돌 너비가 넓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홀쭉한 인상으로 경쾌한 상승감이 있다. 보물 제19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탑의 앞쪽에 석등이 있었다. 일제 시대 때부터 무너져 뒹굴던 것을 1971년에 석탑들을 해체 수리할 때에 이 자리에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발굴조사를 하면서 어딘가로 치운 듯하다. 높이 2.2m로 오층석탑의 앞에 있기에는 다소 왜소해 보일 만큼 아담하며 창에 문을 달아 고정한 흔적이 없는 점으로 보아 실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연대가 떨어진다고 여겨졌었다. 이 절터에 있는 석물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조선 시대 것으로 추정되었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성주사지 세 기의 삼층석탑

소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지정 : 보물 제47호, 보물 제20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대개 주요 전각 앞에 탑이 하나씩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절터에는 특이하게도 탑이 넷이나 있다. 오층석탑 뒤쪽에 마치 경호라도 하듯이 버티고 서 있는 삼층석탑들은 크기도 그만그만하고 생김도 어슷비슷하다.

2층 기단에 3층 몸돌을 이루고 있어서 신라 하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꽤 왜소해진 편이다. 그리고 앞에 말한 오층석탑처럼, 기단 갑석과 1층 몸돌사이에 몸돌 굄대로 보이는 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이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난다. 또 세 탑이 모두 1층 몸돌 남쪽 면에 문틀과 문비를 새겨 넣었는데 가운데 삼층석탑의 조각이 가장 화려하다.

이처럼 세 쌍둥이 탑이 있는 것은 달리 알려진 바가 없으니 몹시 신비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세 탑의 성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얘기되었다. 낭혜화상의 비문은 있으나 정작 그 부도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반면에 다른 비의 파편 두 종류가 발견되어 어떤 사람들은 이 삼층석탑이 탑의 형태로 지어진 부도가 아니겠는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도밭이 법당 뒤편에 나란히 줄선 보기가 없고 정작 부도비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런 생각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부도비 조각은, 낭혜화상비에 적힌 '金立之撰 聖住寺碑' 곧 성주사를 중창할 때에 세운 사적비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1974년에 밝혀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이 세 탑이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迦葉) 세 여래의 사리탑이라고 적혀 있다.

서탑과 가운데 탑은 각각 보물 제47호와 제20호이고 동탑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모습은 다 엇비슷하지만 높이는 서로 조금씩 달라서 서탑이 4m, 가운데 탑이 3.7m이고 동탑은 4.6m로 가장 크다.

참고 : 신라 3층석탑의 변천

삼국시대의 석탑 중 신라 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이 유일하다. 이 석탑은 중국의 전탑양식을 충실하게 모방하여,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깍아 쌓았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기단부가 넓어 안정감을 주고, 층급 받침의 윗면과 아랫면을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이나 정림사지 석탑과는 아주 다르다. 기단부는 백제 석촌동 적석총의 기단을 연상시킨다. 분황사탑에서는 4면의 1층 탑신 중앙 밑부분에 돌문을 만들고, 화강암으로 조각한 2구씩의 인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부 끝에는 4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이 탑은 통일 후의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나 나원리 5층석탑에 영향을 준다.

통일신라 시대 탑은 의성 탑리 5층석탑에서 신라탑과 백제탑이 결합된 후, 3층석탑 양식의 시원이 되는 고선사지 3층석탑과 감은사지 3층석탑이 만들어지고, 불국사 3층석탑에 와서 3층석탑의 전형이 완성되어 크게 유행한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막강한 경제력과 추진력으로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건설해 나간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힘찬 모습은 고선사지와 감은사지 3층석탑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신문왕대에 이르면 전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집권 체제가 더욱 강화된다. 거기에 따라 신라의 문화는 전성기에 오르는데,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석굴암의 조각에서 보이는 완숙한 예술로 승화되어 나타난다. 통일 직후에 처음 만들어진 석탑은 의성 탑리에 남아 있는 5층석탑으로 나타난다. 이 석탑에서는 백제의 5층탑 형식과 신라의 분황사식 지붕이 결합된다. 백제 양식은 단층 기단, 높은 5층탑, 석조 부재의 사용, 3단의 계단식 지붕받침이 특징이었다.

통일신라 양식은 기단이 높아지고, 지붕 밑면이 전탑처럼 계단식으로 된다. 의성 탑리 5층석탑은 탑신이 5층으로 체감하는 방식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닮았으며, 지붕돌이 계단식으로 체감하는 방식은 분황사탑을 닮았다. 분황사탑과는 달리 한쪽만 문을 만들어 달았으며, 기단은 단층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은 정림사지 석탑이 석가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에서 후세 3층석탑의 전형양식 확립의 토대가 되는 고선사지와 감은사지의 3층석탑이 등장한다. 이 탑들은 높이가 9m 정도로서 정림사지 석탑과 높이가 비슷하나, 기단부의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탑으로서의 상승감과 건물로서의 안정감을 동시에 구현하게 되었다.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러한 안정감은 2단으로 된 기단을 튼튼하게 만들고, 탑신부는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체감시킴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 고선사지 3층석탑과 감은사지 3층석탑은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과 비교하여, 좀 거칠고 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통일 직후의 신라 문화가 가진 역동성과 창조적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3층석탑의 제일 앞머리에 오는 감은사지 3층석탑은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이 상승감은 있으나 안정감과 힘이 부족한데 비해, 감은사지 3층석탑은 상승감과 안정감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어 통일신라 초기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의 석탑양식이 하나로 종합되어 형성된 3층석탑 양식은 불국사 3층석탑을 정형으로 하는 우리 나라 3층석탑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통일 직후에 형성된 삼층석탑 양식은 80여년을 지나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불국사 3층석탑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전형양식의 정형을 이룩하게 된다. 불국사 3층석탑의 구조는 단아한 3층석탑의 정형을 이룩하게 되며, 완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정제된 아름다움과 단아한 기품, 조화를 이룬 이상미를 보여주고 있다.

석가탑의 단아한 아름다움은 다보탑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비교된다. 다보탑의 세련됨과 화려함이 신라 전성기 귀족 예술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석가탑의 단순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움은 불교적인 조화와 이상미를 추구했던 신라 지배층의 미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가탑의 안정감과 조화의 미는 신라 지배층이 골품제도를 토대로 국민을 지배하면서 그들이 누리던 부귀영화가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기원했던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삼층석탑의 정형은 그 뒤 수없이 모방되어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비슷한 유형의 삼층석탑은 100여기에 달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 불국사 3층석탑을 모방한 탑들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모방은 석가탑이 지닌 완벽한 아름다움을 흉내내려는 것이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규모가 작아지고, 아담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8세기의 3층석탑은 상륜부를 제외하고 높이가 대개 8m~6m 정도(석가탑은 8.2m)였으나, 9세기 초의 3층석탑은 대개 5m 정도이다. 크기가 작아지면서 옥개석의 층급 받침도 5단에서 4단으로 줄어든다. 또 석가탑을 만들 때의 조형 의도는 사라지고 형식만 모방하게 되면서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였다.

석탑 탑신부에 있어서의 변형은 지붕돌의 옥개 받침이 5단에서 4단 혹은 3단으로 줄어들고, 처마가 얇아지고 추녀의 반전이 심해지면서 이른바 말기적 양상을 보이게 된다. 추녀의 반전이 심한 예는 보령 성주사지 중앙3층석탑, 장흥 보림사 동?서 3층석탑, 해남 대흥사 응진전앞 3층석탑을 들 수 있다.

출전 : 이창호 석사학위 논문, ?신라 탑파와 그에 대한 교육?, 1994


경주 감은사지 3층석탑 경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성주사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소재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절터 서북쪽 석축 앞에 한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의 승탑이 있다. 국보 제8호인 이 승탑이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白月?光塔碑)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하대의 고승이다. 낭혜는 돌아간 뒤에 붙은 시호이며 탑호가 백월보광이다. 태종 무열왕의 8세손으로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열세 살에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부석사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는데, 스물한 살 때인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선종이 한창 널리 퍼지고 있었으므로 선수행에 몰두하였다. 그의 깨달음이 깊어 당시에 당나라의 여만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 하면서 칭찬하였다 한다. 깨침을 가지고 중국 곳곳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렸다. 마침내 당나라에 유학한지 25년 만인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김양의 권고로 웅천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김양은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호족이었고, 무염은 그 조부대까지는 진골이었으나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6두품으로 신분이 하강된 상태였으니 이 두 사람은 당시 사회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던 계층의 대표자이기도 했다.

무염은 현실과 유리된 교리에 빠져 있던 교종을 비판하여 말을 매개로 하거나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하는 '무설토론'(無舌吐論)을 주창하였다. 무염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으니 무염이 성주사에 자리를 잡자 그를 따르는 제자는 2천 명에 이르러 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하였고 이들이 뒷날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을 이루었다.

입적은 88세 때인 888년의 일이다. 돌아간 지 두 해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이 비는 진성여왕 4년인 890년에 세워졌다. 신라 명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동생인 최인곤(崔仁滾)이 글씨를 썼다.

이 비는 높이 4.55m, 폭 1.57m, 두께 42cm로 신라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크다. 거북의 얼굴 부분은 좀 상했지만 비신을 그대로 갖추고 있고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머리 위쪽에 뿔이 하나 솟고 눈이 불거졌으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다. 등에는 이중의 육각무늬가 선명하다.

등 한가운데에 있는 비좌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와 구름무늬가 도드라져 있어 화려한 맛을 낸다. 비신은 성주산이 그 주산지인 남포 오석으로 되어 있으며 비신 높이만도 2.63m이고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른다. 비머리에는 연꽃받침 위에 구름과 용이 뒤엉켜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제액 윗부분에도 아래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하나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비는 규모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한 점에서도 신라 하대 부도비 가운데에서 최고 수준을 보여 준다고 할 만하다.

한편 부도비가 모셔진 전각 옆에는 연화대석과 부도의 지붕돌 조각들이 짝이 맞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생김새로 보아 부도 조각임이 분명한데 1968년에 인근 마을사람의 집에서 연자방아로 쓰던 것과 성주사지 서쪽 부도골 산기슭에서 찾은 것들이다.

팔각원당형을 이루고 연꽃 조각이 두툼한 것으로 보아 나말 여초 부도의 형식을 갖추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따르면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은 서쪽 기슭(西麓)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부도 조각이 있던 자리와 사적기의 내용이 맞아떨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이 부도 조각의 추정 복원높이가 2.5m쯤 되는데, 4.5m가 넘는 비에 견주어 그 반도 안 되기 때문에 짝이 어울리는가 하는 견해도 있으므로 이것이 낭혜화상승탑의 부분인지 또는 다른 승탑의 조각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참고] 최치원과 사산비문

당나라에 가서 황소를 토벌함을 만방에 알리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유명하게 된 최치원(崔致遠, 857∼?)의 생애는 당시 신라 사회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보기이다.

경주 사량부의 6두품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열두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7년 만에 과거에 들어 말직이나마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다. [토황소격문]은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관역순관이 되어 여러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하던 중 879년에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지은 것이다. 이때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다. 그의 문장력은 당나라에서도 유명하여 [당서] 예문지에도 그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다.

29세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신라는 이미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지배 체제가 무너져 가고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익힌 것을 펼치려는 그의 뜻은 내란 등의 혼란도 혼란이려니와 골품 체계에 사로잡혀 있는 왕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스로 외직(外職)을 선택하여 떠돌다가 40세가 되어서는 완전히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니 이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거의 전설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최치원이 보령 앞바다의 한 섬에 갔었는데, 반석 위의 바위를 자정만 되면 저절로 회전하게 해놓고는 그곳을 떠나면서 "이 바위가 돌기를 멈추는 날이 곧 내가 생명을 마치는 날"이라는 예언을 해서 이 바위를 '자마석'(自磨石)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며, 도술을 과신하였다가 소금장수한테 무안을 당하였다는 등 그의 신이성을 한편은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단치 않게 여기기도 하는 전설들이 전한다.

당대의 지식인이었으나 뜻을 펼 수 없었던 최치원은 새로 일어나는 세력인 선종이나 호족세력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은 바로 구산선문 가운데 네 곳의 개창조의 비문이기 때문이다.

사산비문이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그리고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大崇福師碑)와 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白月?光塔碑]를 말한다. 특히 지증대사부도비문은 그대로 신라 선종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어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출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충남] (돌베개, 1995)                이전 위로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