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한국사사전1 한국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1 (일) 17:5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6637      
[삼국] 신라 토기 (민족)
신라토기新羅土器

삼국 시대 신라 지역에서 생산된 토기. 신라 토기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의 종류(器種)와 형태(器形)로서 그 양식적(樣式的)인 특징이 있으며, 그릇의 질감에 따라 회색토기와 적갈색토기, 두 종류가 있다.

[범위]

신라 토기에 대한 시간·공간적(時間·空間的)인 범위의 설정은 간단하지 않다. 신라는 처음에 경주 분지 일대를 영역으로 하는 소규모의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해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낙동강 일대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6세기 중후엽에는 낙동강 이서지역의 가야국(伽耶國)들을 정복하고 중앙 집권화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성장에 따라 영역이 점차 확대되기 때문에 신라 토기의 공간적인 범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신라가 주변 소국을 복속시키면서 신라 중심지의 정치·경제적인 영향력이 확대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물질 문화의 영역이 주변으로 확장되어갔다. 적어도 5세기대에는 넓은 지역에 물질 문화의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 신라식(新羅式)의 범위 설정이 어려운 문제로 대두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삼국시대 영남지역 전체의 토기를 신라 토기로 통칭하는 견해도 제시한다. 신라 토기와 가야 토기를 양식적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김해식 토기(金海式土器)를 모태로 발생한 것으로 신라의 통일에 의해 신라 토기로 통합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 세력의 범위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토기 양식 자체만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동안 양식(東岸樣式)과 서안 양식(西岸樣式)을 구분하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낙동강 동안 양식의 토기군 내에서 신라 토기의 발생, 전개, 통합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신라 토기의 영역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직접적인 지배 영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라 토기의 범위는 크게도 볼 수 있고 작게도 볼 수 있다. 크게 본다면 시간적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까지를 포괄하며, 공간적으로는 영남 전역의 토기를 신라 토기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작게 본다면 삼국 시대에 경주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점차 확대되는 토기 양식군에 한정시킬 수 있다.

[출토지 및 기종]

신라 토기는 생산지인 토기 요지(土器窯址)나 소비지인 취락지, 또는 고분군에서 출토된다. 그 동안 고고학적 조사가 고분 발굴에만 집중되어왔기 때문에 신라 토기하면 고분 부장용 토기로 대표되어왔다. 그런데 고분에서 발굴된 토기는 종류와 구성 비율이 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는 다르다.

사회 전체에서 생산되고 소비된 토기의 양상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유적에서 출토된 자료를 대상으로 해야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료의 한정성 때문에 신라토기의 연구는 고분 출토 토기를 주자료로 삼을 수밖에 없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삼국의 다른 지역보다 신라 영역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를 분묘에 매납하기 위해 생산하였다는 점이다.

고분 부장품으로 본 신라토기는 20여 주기종(主器種)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색토기로서 유개고배·무개고배·장경호·대부장경호·대부직구호·단경호·소형 평저단경호·파수부배·완·유대파수부완·개배·통형기대·유대발형기대·대옹 등과 적갈색토기로서 바리 또는 유개바리·파수부옹·시루 등이 있다. 이들 주기종(主器種)의 구성은 시기적으로 가감이 있게 된다. 이 주기종 외에도 토우장식토기(土偶裝飾土器)나, 상형토기(象形土器)와 같은 이형토기(異形土器)들이 상위의 고분에서 자주 출토되곤 한다.

[제작 기술]

신라 토기는 도자기 분류상으로 자기가 아닌 일종의 도기(陶器)에 속한다. 백색에 가까운 1차 점토를 사용하지 않고, 수성퇴적물로 여겨지는 2차 점토를 원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태토에는 순수한 점토뿐만 아니라 실트성 사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색깔도 회청색이나 적갈색으로 짙은 편이다. 이러한 원료점토는 경상도지방의 저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신라 토기 제작에 있어서 특별한 원료 점토의 가공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성형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비가소성 입자를 약간 혼입하거나 유기질과 같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형 방법으로는 물레를 돌려 점토덩이로부터 그릇을 뽑아 올리거나 점토띠를 물레 위에서 돌려 쌓으며 성형하는 방법을 썼다. 대개 중·소형토기의 제작에 적용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러한 발전된 방법이 개발된 것은 아니고 빨라야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경주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호와 같은 큰 토기의 제작에는 늦은 시기까지 점토띠를 쌓아올리는 방법이 쓰였다.

토기의 소성에는 적색토기나 회색토기 모두 밀폐할 수 있는 가마를 사용하였다. 토기가마는 바닥이 아궁이로부터 굴뚝까지 경사져 올라가는 터널형의 등요(登窯)구조를 갖추었다. 이 가마의 운영에는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므로 여러 가지 질의 토기가 함께 생산되었다. 적색토기는 가마를 개방한 상태에서 소성시간을 짧게 해서 구어 내 흡수성이 있고 유약하다. 회색토기는 소성 마지막 단계에 가마의 입구나 굴뚝 및 환기시설을 모두 막아 공기가 차단된 상태에서 소성을 마무리한 것이다. 즉, 산소가 부족한 환원 분위기에서 소성이 완료되어 회색을 띤다.

회색계 토기는 일반적으로 ‘도질토기(陶質土器)’라고 불리지만 소성의 조건은 불균일하다. 예를 들면, 매우 고온으로 소성되어 경도가 높고 표면에 녹색 계통의 자연유가 흐르는 것이 있고, 소성지속시간 짧아서 다공질에 무른 회색토기도 있다. 전자가 표면이 흑청색에 가깝고 벽심이 암자색을 띤다면, 후자는 대부분 벽심까지 회색을 띠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 5세기 전반대까지 신라토기에는 그릇의 벽이 두텁고 고온소성의 석기(stoneware)에 가까운 토기가 많다. 그러나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불충분한 소성의 회색토기가 다량으로 생산된다. 특히, 고분에서 많이 출토되는 고배 종류로부터 소성지속시간이 짧은 회색계 도기로 전환된다.

이는 고분에 다량 부장하기 위한 비실용적 토기 제작을 위해 경제적인 생산방식이 도입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6세기 말 이후, 특히 인화문토기가 출현하면서부터 고온소성의 견치한 도기 제작기술이 부활하게 된다. 이전에 있었던 소성불완전품(燒成不完全品)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

[발생]

신라 토기는 영남 지방의 김해토기 또는 원삼국토기로부터 발전되어 나왔다. 원삼국 시대의 목관묘나 목곽묘 등 분묘에서는 회색연질의 장경호류, 단경호류, 대부직구호, 노형기대, 고배 등이 압도적으로 출토된다. 그러나 취락지나 패총에서는 적갈색 연질의 장란형옹, 시루 바리, 중·소형옹 등과 회색 연질 또는 회청색 경질의 타날문단경호와 소형원저단경호 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4세기대에 들어서면 분묘에서도 회청색경질토기의 비중이 서서히 높아진다. 그 이유는 전문장인이 집단적으로 토기를 제조하는 생산체제에서 더 많은 양의 토기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타나는 회청색경질토기는 타날문단경호나 소형 원저단경호와 같은 액체 저장용 토기류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새로운 그릇종류인 컵형토기나 광구소호와 같은 음기(飮器)와 장경호류 등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아울러 종래에 회색연질이나 적갈색연질로 제작되었던 노형기대, 원통형기대, 고배 등도 점차 회청색경질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가 되면 신라·가야 지역의 고분 부장용 토기의 기종 구성(器種構成)이 완비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3세기대 이후 전통적인 적갈색 연질의 평저발이나 옹형토기들은 회청색토기로 바뀌지 않고 계속 제작되는 점이다. 그 원인이 의례적인 이유에 있는지, 아니면 적갈색연질로서도 충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토기양식의 분포라는 측면에서 신라토기의 발생과정은 자못 복잡하다. 5세기경 낙동강을 경계로 이동지역과 이서지역의 토기양식이 크게 대비된다. 서안지역은 다소 지역간의 양식차가 큰데 비해, 동안지역은 넓은 지역에 토기양식의 유사성이 극히 높은 편이다.

대개 4세기 말경에는 동안이나 서안을 막론하고 영남 전지역의 토기 양식은 유사한 편이다. 그런데 5세기대에 들어서면서 낙동강을 경계로 양 지역 토기의 양식차가 뚜렷해지고 그 지역 안에서는 양식의 유사도가 높아진다. 이러한 토기 양식의 분포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정치·경제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집단들 사이에서 토기 양식의 유사성도 높아진 결과로 간단히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정치 세력 범위와의 관련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4세기 전반경 영남 지역에서 여러 기종의 토기가 회청색경질로 제작되었던 지역을 현재의 발굴자료로 판단해본다면, 함안과 김해·부산이 후보지역이 된다. 이 두 지역은 영남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경질토기 생산이 성공을 거둔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4세기대의 경주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규모가 큰 대형 무덤에도 여러 종류의 경질토기들이 부장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을 부장하는 풍습이 없었던 데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중심지역에서 오히려 다양한 경질토기의 생산이 지체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4세기 초 영남 지방은 여러 정치 세력 집단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중 몇 집단에서 다양한 기종의 경질토기가 먼저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때 경질토기생산이 발달한 지역집단으로부터 미발달한 집단으로 토기생산기술이 파급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4세기 말경에는 광범한 지역에 토기양식의 유사성이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신라 토기는 4세기대 이러한 토기 생산 기술과 토기 양식의 교류를 통해 경주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체로 경주와 그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신라 지역 토기의 제작 기술과 기종 구성의 독자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는 5세기 전반경이다.

[지역적 분포]

삼국 시대 경상도 지방의 토기를 신라 토기와 가야 토기로 구분해볼 수 있는 시기는 5세기대로부터 6세기 전반대이다. 4세기대는 경질토기 양식의 분포를 뚜렷한 지역군으로 나누기 어려우며 6세기 중엽 이후에는 가야라는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라와 가야라는 정치 세력의 경계와 토기 양식군의 경계가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충분히 논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적인 지역도 있겠지만 결코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대세론을 따른다면, 5세기대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가야세력의 영역이 구분되고 토기 양식군도 그렇게 나뉜다고 한다. 그래서 낙동강 동안군과 서안군으로 먼저 구분하는 것이다. 서안군이라 하여 그 영역 안에 모든 지역의 토기양식이 균일하지 않은 것처럼 동안지역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5세기대 경주지역의 경질토기와 부산지역의 경질토기는 극히 유사하기는 하나 미세한 차이가 발견된다. 각 지역마다 자체의 토기 제작자집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는 당연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6세기 후반대 신라의 전 영역에서 매우 균일한 토기양식이 발견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현상이다.

신라 토기의 범위는 크게도 생각할 수 있고 작게도 설정할 수 있다. 광의로 5세기대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신라의 세력이 미치는 전영역의 토기라고 정의를 내렸을 때 신라토기는 낙동강 동안지역 전체를 포괄하게 된다. 그러나 협의로 신라세력의 중심지만으로 정의를 내린다면 신라토기의 영역은 경주분지와 그 주변으로 축소된다.

아무튼 낙동강을 경계로 상대적인 비교를 한다면, 신라토기의 양식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기종 구성면에서 신라 토기에 유개고배, 무개고배, 장경호, 단경호, 파수부배 등의 종류가 있는 점은 가야지역과 공통된다. 그러나 가야토기에는 유개장경호와 유대발형기대가 많은데 비해, 신라토기에는 유대장경호가 중요한 기종이다.

개별 기형(器形)면에서 비교해본다면, 차이점을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개고배의 경우, 신라토기는 그릇 뚜껑에 굽다리형 꼭지가 부착되고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지는데 비해, 가야토기는 단추모양 꼭지가 달리고 애벌레무늬가 찍혀 있다.

굽다리의 형태에서도 신라토기가 직선적인 사다리꼴의 굽다리를 이등분해 위·아래 엇갈리게 방형의 큰 투창을 대각 하단까지 뚫는다면, 가야토기는 보통 곡선적인 나팔모양 대각을 3단으로 구획하고 상·중 2단에만 세장방형의 좁은 투창을 상하 일직선으로 뚫는다. 물론 다른 기종에서도 이와 같은 대비는 뚜렷한 편이기 때문에 양 지역의 토기양식의 차이는 분명한 편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현상을 보이는 지역도 있다. 성주, 창녕, 김해 등이 대표적이다. 성주와 김해지역은 낙동강의 서쪽에 위치해 있음에도 전체적인 토기 양식이 신라 토기와 더 유사한 편이다.

성주의 성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를 보면 대각이 없는 유개장경호가 많고 장식문양도 가야토기와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그러나 유대장경호도 있고 신라 토기의 특징을 가진 유개고배들이 주종을 이룬다.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예안리고분군에서 출토된 5∼6세기대 토기는 시기를 달리하면서 가야토기와 신라토기가 교대되기도 하고 한 무덤에서 같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토기가 우세하다.

창녕은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면서 가야토기의 양식적인 특성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물론 6세기대에 들어서면 가야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창녕의 고총고분군인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의 5세기 토기에서는 가야양식의 특징을 일부 볼 수 있다. 고배 뚜껑에 애벌레무늬를 찍는다든지 가야식 유개장경호나 파배가 보이고 있어 신라토기에서 약간의 이탈되는 요소가 관찰된다.

성주와 김해지역을 포함시킨 낙동강 이동지역의 토기양식을 신라토기로 포괄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5세기 후반에 있어서 경주지역의 신라 토기 양식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역의 토기양식을 세부적인 수준에서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경주 지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신라 중심지역 토기양식과의 차이는 더 커진다.

경주·울산·포항·경산 등의 지역은 사실 경주지역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산이나 대구·칠곡 등의 지역에 이르면 조금씩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이 지역보다 멀리 있는 안동이나 창령·김해·성주 등의 지역은 꽤 큰 양식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지역적인 차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줄어들어 6세기 전반대가 되면 적어도 낙동강 이동지역에서는 양식적인 균일성이 보인다.

대개 5세기 중엽부터 경주지역과 구분되지 않는 형태의 토기들이 가까운 주변지역으로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각 지역 고분 부장토기의 일정한 양을 점하게 되고 그 비율은 점점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경주지역, 즉 신라 중심지역의 토기양식의 영향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결국, 경상도 전역의 토기가 거의 양식적 차이가 없이 균일한 신라토기로 통합되는 것이다.

[변천]

신라토기는 일정 시기동안 변화의 방향성 또는 경향성을 보인다. 전체적인 변천과정은 몇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고분에서 출토되는 신라토기에 국한해보았을 때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 회색경질토기의 종류, 즉 기종구성이 완비되는 시점은 5세기 중엽경이다. 그 대표적인 토기상을 보여주는 고분이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南墳)이다. 바로 이 5세기 중엽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100년간의 신라토기를 가장 전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를 신라토기 전성기 또는 중기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 시기 동안에 토기 외에 다른 문화적인 요소들도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고신라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묘제에 있어서도 왕묘의 형식으로 적석목곽고총고분이 가장 발전되고 완비된 양상을 보인다. 금공품, 무기, 기타 물질문화 요소들도 가장 전형적인 양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 이전은 전형적인 양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해당되며, 토기로 말한다면 신라 토기 발생기 내지는 형성기가 된다. 이 시기는 원삼국 토기 단계가 끝나는 4세기 초부터 5세기 중엽까지에 해당되며 이를 신라 토기 전기로 설정할 수 있다.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무덤의 양식에서 적석목곽분이 소멸하고 횡혈식석실분으로 전환된다. 또한 부장품의 양상이 간소화되고 명기화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신라토기의 양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6세기 중엽 이후부터 진행되는 신라토기의 변화는 통일신라토기로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동안 신라토기의 지역적인 분포의 변동은 신라통일의 전단계에서 이루어진 영토의 확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신라토기는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따라 낙동강을 건너 가야지역으로 확산되고, 한강유역에도 진출하며, 멀리 함경도지역에 이르기까지 출현하게 된다.

신라식으로 변형된 횡구·횡혈계 묘제와 함께 단각고배(短脚高杯)라고 하는 짧은 굽다리의 고배와 아가리에 이중으로 턱을 만든 부가구연(附加口緣)의 반구유대장경호(盤口有臺長頸壺)가 동반되어 신라의 영토확장을 따라 진출하는 것이다. 특히, 7세기 초쯤에 나타나는 찍은 무늬는 통일신라기에 대표적인 토기인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의 전주로서 이 시기에 있어서 신라토기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토기 후기의 하한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신라의 삼국통일(676)이라는 역사적인 변혁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지만 토기 자체의 변화상에서 통일신라로의 전환을 짚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7세기 중엽경을 신라토기 후기의 하한으로 삼아 통일신라토기단계와 구분하면 어떨까 한다. 신라 토기의 변천을 설명하는데 변화의 방향성 또는 경향성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전·중·후기와 통일신라기로 나누어 각 단계의 변천 경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전기의 기간은 기종구성의 분화와 개별 기종의 변이 축소의 과정으로, 둘째, 중기의 기간은 대·중·소형 토기의 규격화와 전반적인 소형화 현상으로, 셋째, 후기의 기간은 불필요하게 과장된 속성이 제거되고 기능성이 발전함과 동시에 고전적 균형미와 장식성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끝으로 신라 토기의 변천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고려해둬야 할 문제는 제 지역단위로 변천하는 과정을 어떻게 종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역사학적 연구를 통해 5세기대 신라는 여러 주변 소국을 복속시켜 낙동강 이동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재지적인 정치 세력은 존속되어 각 지역마다 고총 고분이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고 보여진다.

제 지역 정치 세력마다 토기 생산 체제를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생산 집단을 통해 전승되고 유지되어왔던 토기제작 전통이 있었다. 물론 각 세력집단들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 신라토기라고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양식적인 유사성이 인정되지만 각 지역의 토기제작 전통을 따라 나타나는 세부적인 차이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신라 토기를 편년하는데 있어서는 제 지역 집단 내에서의 변천 과정을 먼저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에 각 지역 집단의 편년을 종합해서 신라 토기 전체의 변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종합 편년의 작업이 가능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이다. 첫째, 각 지역의 토기 변천이 나름대로의 과정이 있지만 긴밀한 관련 하에 진행되어 결국 6세기대 신라토기로 수렴되기 때문이고, 둘째, 한 지역집단의 토기가 다른 지역에 유입되어 그 지역의 재지토기와 동반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그 동시기성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게 된다.

(1) 전기

4세기 초에서 5세기 중엽까지이다. 묘제상으로는 이 단계 초부터 신라 또는 사로국지역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토기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신라식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신라토기의 고유한 기종구성이 완성되고 신라토기양식이 정돈된다. 원삼국 시대 말기 분묘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와질토기라고 하는 회색연질계통의 대부직구호, 대·중·소형의 노형기대, 고배, 격자문타날단경호(格子文打捺短頸壺) 등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여기에 회청색경질의 승석문타날단경호(繩蓆文打捺短頸壺)와 소형 원저단경호(小形圓底短頸壺)가 출현한다.

신라 토기 전기가 되어도 회색연질토기의 부장은 지속되지만 점차 그 기종이 소멸되고 비중이 줄어들어 타날문단경호만 남게 된다. 4세기 중엽까지 대부분의 회색연질토기 기종은 소멸하지만 새로운 회청색경질토기의 기종이 나타나지 않아 이 시기의 고분 부장토기는 지극히 단순한 기종구성을 보인다. 이 때 대형의 신라식 목곽묘에는 토기가 주로 부곽에 부장되는데 다른 기종은 없고 단경호류만이 가득 채워져 있다.

4세기 중엽경부터 회청색경질토기 기종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손잡이가 달린 파배, 아가리가 넓은 광구소호, 소형 그릇받침, 단경호도 아니고 장경호도 아닌 어중간한 중경호 등이 나타난다. 4세기 후반이 되면 노형기대가 부활해 회청색경질로 제작되고 회청색경질고배도 출현한다. 이들 회청색경질토기류들은 영남지방에서 광범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들로 지역마다 미세한 차이는 존재한다. 4세기 말까지 신라토기의 고유한 기종구성이나 기형적인 특성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5세기 초가 되면 낙동강 이동지역 일대에서 토기양식의 유사성이 높아지고 신라토기의 특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현재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신라토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는 경주·울산·경산·부산 극히 일부 지역에서 확인될 뿐이다. 경주의 월성로 가-6호분와 가-13호분, 황남동 109호분 3·4곽, 울산 중산리 Ⅰ-A 51호분, Ⅷ-14호분, 경산 임당동 G-5·6호분, 부산 복천동 21·22호분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대형 고분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낙동강 이동의 어느 지역에서나 할 것 없이 신라토기의 기종구성과 형태적인 특징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제 지역에 4세기대로부터 유지되어온 기형이나 기종들이 있어 지역적인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인 토기의 변화는 신라식 토기로 가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고배의 변화를 예로 든다면, 4세기 후반까지 이른바 고식도질토기의 특징을 보이는 유개고배와 무개고배가 공존하다가 점차 유개고배는 소멸되고 무개고배가 신라식의 유개식무개고배로 발전해간다. 4세기대의 무개고배는 배신의 폭이 넓고 깊은 형태이고 굽다리도 통이 넓은 사다리꼴이다.

그러나 신라토기의 유개식무개고배로 발전하면서 대각에 사다리꼴 투창을 상하 엇갈리게 뚫거나 배신의 구연이 직립하고 구연부 하단에 돌대를 돌리는 형태로 변해간다. 이와 함께 경부가 직선적으로 올라가는 장경호, 직립구연유대호, 파배, 유대파수부완 등의 신라식 기종이 갖추어지게 된다.

(2) 중기

신라토기의 대표적인 기종구성이 갖추어지는 5세기 중엽경으로부터 단각고배가 출현하는 6세기 중엽경까지이다. 토기만이 아닌 묘제에 있어서도 완성형의 적석목곽고총고분이 나타난다. 황남동 109호분 3·4곽과 같은 경우 호석과 봉분을 갖춘 고총고분이나 적석봉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중기 초에 해당되는 황남대총 남분은 적석봉분을 갖춘 대형 고총으로 발전한 고분이다.

황남동 109호분 3·4곽의 유개식무개고배는 상하 엇갈린 투창이 뚫린 대각이 아직 나팔형이다. 반면에 중기 초에 해당되는 황남동 110호분이나 황남대총 남분의 것은 신라형의 직선적 대각으로 발전한다. 특히, 기종구성에 있어서 전자의 고분에서는 신라식의 유대장경호나 유개고배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고분에서는 유대장경호와 함께 굽다리형 손잡이가 부착된 뚜껑이 덮인 유개고배가 다량 출토된다.

이 중기의 기간에 신라토기에는 장식문양이 화려하게 발전한다. 열점문 또는 애벌레문이나 파상문이 전부인 가야지역 토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삼각집선문, 격자문, 송엽문을 비롯한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들이 선각된다. 또한 장경호를 중심으로 토우장식토기, 마각문토기, 영락장식토기 등의 장식성이 강한 제품이 생산된다. 가야지역보다는 훨씬 다양한 상형토기 및 이형토기들이 제작된다.

이 기간에 토기의 장식성이 크게 발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토기의 소성기술은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 제작기술상으로 물레의 사용은 성형공정을 현저하게 효율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5세기 후반이나 6세기 전반 토기의 소성공정에서는 회색연질에 가까울 정도로 소성지속시간을 짧게 하여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기간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일률적인 변화가 인지된다. 그것은 고배의 소형화과정이다. 배신이 축소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각이 원통형이나 사다리꼴에서 원추형에 가까워지고 약간의 곡선적인 흐름이 보이면서 짧아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이 기종들이 규격화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 단계에서는 장경호라고 하면 각각의 토기들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기 마련이다. 또한 경부에 돌대를 1줄 돌릴 수도 있고 2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중기단계가 되면 대·소형으로 규격이 정해지고 일률적으로 생산된 토기들이 늘어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생산의 체제나 공정에서 대량화되고 조직화되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론되며 제품의 표준화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토기생산은 후기단계에 들어서 완전히 정착되는 것 같다.

이 단계 후반, 즉 6세기에 들어서면 매장의례에서 토기의 부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감소하며 상위의 고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면, 황남대총 남분이나 천마총과 같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왕릉급 적석목곽분에는 그 동안 용기류를 다량 부장하기 위해 축조했던 부곽이 소멸되어 버린다. 특히, 대형 용기류인 대호나 옹 또는 단경호류와 같은 것이 상징적으로 소량 매납되기는 하나 고배나 장경호등 소형 용기류가 주종을 차지할 뿐 전단계처럼 다량 부장되는 일도 없다.

(3) 후기

신라토기 제 기종들의 형태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야기되는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 직전인 7세기 중엽까지이다. 물론 이 기간은 고신라시대에 속하지만 토기양식에 있어서는 고신라시대의 특징들로부터 전환해 통일신라토기로 발전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인다.

후기의 개시기인 6세기 중엽을 전후해서 율령의 반포, 불교의 국가적 공인, 가야지역 정복에 따른 영남 전역의 통합, 진흥왕의 영토확장 등 고신라의 체제개혁과 중앙집권화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갔다. 이와 같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변혁은 제반 물질문화 요소의 변화를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의 생산과 사용도 그에 수반되어 변형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적석목곽분의 소멸과 함께 이미 신라의 영토 내에 수용된 횡혈계 묘제들이 보편화되고 불교의 수용으로 화장묘도 성행했던 것 같다. 고분문화의 변동과 함께 토기의 부장양상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중기부터 진행되어온 토기의 소형화·명기화 경향과 개별 기종의 규격화현상이 더욱 진행된다. 고배와 장경호를 예로 든다면, 대각의 축소화에 따라 짧은 굽의 형태로 바뀌고 몸체도 납작하게 축소되는 경향이다. 그리고 종래의 기하학적 문양을 선각하던 전통에 새로이 찍은 무늬[印花文]가 조합되어 결국 후자가 전자를 대체하게 된다.

초기단계의 인화문은 2중원문이 주종이고 세장한 삼각집선문에 반원형 콤파스문과 조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점차 인화문의 종류가 늘어나 어린문, 화편문, 국화문, 연주문 등으로 다양화된다. 인화문토기의 등장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7세기 초에는 출현한 것으로 본다.

인화문토기의 출현과 함께 유개합이나 바리, 병 등과 같은 신기종(新器種)이 나타난다. 이 신문양과 신기종은 물론 통일신라시대에 대유행하지만 7세기대에 이미 출현해 발전하게 된다. 신라토기 후기단계에 있어서는 토기양식 자체의 변화보다도 분포의 변화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신라가 6세기 중후엽 가야지역까지도 통합함에 따라 신라토기는 낙동강 이서지역까지 확산되기 때문에 후기 신라토기의 상한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어왔다.

그러나 보다 실질적인 상한연대의 근거자료로서 제시된 것이 황룡사지(皇龍寺址)의 발굴에서 출토된 토기들이다. 569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한 황룡사 부지 매립토 속에서 나온 유물들은 후기 신라토기의 실연대를 추정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황룡사지 외에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토기는 영남 제 지역의 횡구·횡혈계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특히, 7세기대에 초기형의 인화문토기가 동반되는 고분으로는 경주 서악리고분과 충효리고분, 울산 화산리고분군, 창령 계성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4) 통일신라기

통일신라 토기는 고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자료처럼 일괄 유물로 발견되는 사례가 매우 적은 편이다. 특히,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융성으로 화장이 유행해 골호(骨壺)라고 하는 장골용기(藏骨容器)가 발달하게 된다. 인화문으로 장식된 골호가 마치 이 시기의 토기상을 대표하는 것처럼 되어왔다. 따라서 사실 통일신라 토기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와 그 주변 일대를 비롯해 전라도와 충남 지역에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 요지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각 처에서 성지나 생활유적이 조사되어 많은 통일신라 시대 토기들이 수집되었다. 그 중에도 안압지(雁鴨池)에서 출토된 자료는 통일신라 시대 토기의 실체를 인식하는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통일신라 시대 토기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낮은 편이다. 약 30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토기가 통일신라토기로 뭉뚱그려져 있을 뿐 토기의 자세한 변천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신라 후기토기로부터 통일신라토기로의 전환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직 뚜렷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연속성을 가진다. 경주 충효리 10호분이나 6호분, 창녕 계성고분군 등의 토기와 같은 것들이 대체로 7세기 후반대까지 편년될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이 단계 들어서면 고신라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종이었던 장경호는 실질적으로 소멸하고 고배는 명맥만을 유지한다. 그리고 후기 말경에 나타난 다양한 무늬의 인화문이 신기종에 찍히게 된다. 유개합과 유대완, 납작한 편구형에 긴 목을 가진 병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무늬가 없는 토기와 인화문토기로 대별되며 회백색의 묵서토기(墨書土器)도 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기종으로는 고배·유대완·유개합·접시·항아리와 단지·옹·병·시루·장군·편병·장경통형호·대형병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고배와 유대완, 장경통형호는 문양이 들어가지 않는 기종이고, 항아리와 단지, 소형옹 중에는 타날문이 찍혀 있기도 하다.

인화문이 가장 화려하게 시문되는 기종은 유개합과 병형토기들이다. 유개합의 경우, 보주형이나 굽형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덮여져 여러 종류의 인화문이 장식된다. 병형토기에는 소형 유병(油甁)과 같은 형식이나 편병(扁甁), 각병(角甁), 굽이 달린 대형의 반구장경병(盤口長頸甁) 등 다양한 형식들이 있다. 병형토기의 다양한 발전은 중국 당대(唐代) 기형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신라 지역에서 시유토기(施釉土器)의 사용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인화문토기의 출현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려하게 인화문으로 장식된 유개고배나 유개합, 골호 등에 갈색 혹은 녹색의 유약을 입혀 장식성을 배가하였다. 이 유약은 일종의 연유계통으로 저온유약에 속한다.

≪참고문헌≫

新羅土器의 硏究(金元龍, 乙酉文化社, 1960), 新羅土器(金元龍, 悅話堂, 1981), 皇南洞古墳發掘調査槪報(李殷昌, 嶺南大學校博物館, 1975), 新羅·伽耶土器 編年에 關한 硏究(李殷昌, 曉星女子大學校硏究論文集, 1981), 新羅土器의 發生에 對하여(申敬澈, 韓日古代文化의 諸問題, 1986), 新羅古墳硏究(崔秉鉉, 一志社, 1992), 古墳의 編年(安在皓, 金海禮安里古墳群 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3) 新羅·伽耶土器 科學的 分析硏究(李盛周, 國史館論叢 74, 1997), 新羅式木槨墓의 展開와 意義(李盛周, 新羅考古學의 諸問題, 1996), 경주 皇南大塚의 연대(李熙濬, 嶺南考古學 17, 1995), 昌寧 桂城里 桂城古墳群發掘調査報告(慶尙南道, 1977), 雁鴨池(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78) 慶州月城路古墳群(國立慶州博物館·慶北大學校博物館, 1990), 東萊福泉洞古墳群Ⅰ·Ⅱ·Ⅲ(釜山大學校博物館, 1983·1992·1996), 梁山 金鳥塚·夫婦塚(東亞大學校博物館, 1991), 昌寧 校洞古墳群(東亞大學校博物館, 1992), 世界陶磁全集 17-韓國古代-(小學館, 1979).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삼국] 삼국·가야 개관
아래글 [건축] 서양건축사 (두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1182 문화사 [삼국] 신라 토기 (민족) 이창호 2002-04-21 6637
1181 문화사 [건축] 서양건축사 (두산) 이창호 2004-05-03 6608
1180 문화사 [미술] 불교미술 (한메) 이창호 2005-01-16 6594
1179 문화사 [건축] 건축 (브리) 이창호 2003-06-15 6537
1178 문화사 [조선]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호암미술관) 이창호 2002-10-14 6473
1177 문화사 [구석기] 0140. 도구의 사용 방법 이창호 2001-06-02 6471
1176 문화사 [삼국] 0820. 삼국의 항쟁 지도 이창호 2001-06-05 6452
1175 문화사 [건축] 주심포 (민족) 이창호 2003-01-21 6440
1174 문화사 [미술] 회화-서양회화사, 동양회화사 (두산) 이창호 2002-04-06 6379
1173 문화사 [미술] 불상 (민족) 이창호 2002-04-05 6377
1,,,11121314151617181920,,,13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