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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6 (화) 09:1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5842      
[미술] 고구려 고분 (두산)
고구려고분 高句麗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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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의 무덤.

고구려 영역 내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조성되었을 터이지만, 초기의 중심지인 압록강 유역과 후기의 중심지인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특히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 지안[集安] 일대에는 수만기의 고구려고분이 곳곳에 널려 있다.

고구려고분은 외형상의 특징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돌로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이고, 다른 하나는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다. 양자 중 전자가 먼저 나타난 무덤양식으로서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며, 후자는 AD 4세기경에 비로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돌무지무덤에 대해 살펴보면, 주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혼강(渾江), 독로강(禿魯江) 유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왔으나 대체로 랴오둥[遼東]반도에 분포하는 고조선시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축조방식이나 용재(用材)의 차이에 의해 다양한 세부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단(基壇)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아 무기단 돌무지무덤과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대별하고 있으며, 후자는 다시 외형상의 특징을 통해 단순기단식과 계단식으로 구분되고, 또 계단식의 경우 내부 매장주체시설의 차이에 따라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돌방무덤[石室墓]으로 세분된다. 이러한 무덤양식들은 돌무지무덤의 시기적인 변화를 반영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같은 시기에 있어서는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은 강가의 모래바닥에 냇돌을 사각형으로 깐 뒤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냇돌을 덮은 간단한 형식의 것으로, 고구려 국가의 성립 이전인 BC 3세기경부터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땅을 고른 후 그 위에 넙적한 판석 등으로 기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인 기단식 돌무지무덤은 AD 1∼2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며, 강가뿐만 아니라 산기슭에도 만들어져 있고, 이에 따라 무덤축조의 재료로서 냇돌 외에 모난 산돌도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3∼5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단 위에 덧널의 구획을 잡고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그 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덧널의 둘레에 다시 돌을 쌓아 마치 새로운 단을 만든 것처럼 해놓고, 덧널의 윗부분을 몇 겹의 돌로 덮은 것이다. 이로 인해 무덤의 테두리를 이루는 기단 즉 첫째단과 덧널의 벽체를 이루는 둘째단, 덧널의 상층부를 이루는 셋째단이 외형상 계단 모양을 취하게 된다.

장군총과 같은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계단의 숫자가 3단이 아니라 7단까지 이르기도 하며, 이 경우 시체가 묻히는 장소는 둘째단이 아니라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다. 내부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은 거의 대부분이 매장주체부를 지하나 지면에 바로 두지 않고 돌무지부 중에 마련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매장주체시설로는 흔히 돌덧널[石槨]이 설치되는데, 원래는 시체를 위로부터 묻는 구덩식[睾穴式]이 기본이었으나,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굴식[橫穴式]에서 볼 수 있는 널길[羨道]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하며, 장군총이나 태왕묘(太王墓) 등의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는 실제로 연도가 딸린 굴식의 돌방이 조성되어 있다.

한편 축조 재료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주로 냇돌이나 산돌 등의 막돌을 이용한 것이 많았지만, 계단식 돌무지무덤 단계에 이르면 정성들여 다듬은 절석(切石)을 사용한 것이 출현한다. 이러한 절석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무덤축조에 들인 공력의 측면에서 다른 무덤양식을 압도하며 장군총의 예에서 보듯이 초대형인 경우가 많아, 대체로 왕이나 최고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다양한 무덤양식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결국 돌무지무덤 축조방식의 발전과 분화는 신분에 따른 차별이 무덤양식에도 엄격하게 가해지는 모습, 즉 고구려 사회내의 계층분화가 심화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평양지역에서 먼저 출현하였으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지안지역과 평양지역을 가릴 것 없이 고구려 지배층의 주된 묘제가 된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봉토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매장주체시설로서 지상이나 반지하에 연도가 딸린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이 아닌 흙을 덮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축조방식은 재래의 돌무지무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봉토무덤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북한학계의 경우 돌무지무덤으로부터 자체 발전하였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되어 있으나, 자체 발전으로만 보기에는 묘제의 변화상이 너무 심해, 랴오둥지방의 중국 한(漢)나라 돌방무덤이나 낙랑의 벽돌무덤의 영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4세기 중엽 고구려의 장악하에 있던 평양 부근에서 안악(安岳) 3호분과 같이 중국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벽화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축조되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봉토무덤은 4세기 이후 1세기 이상 돌무지무덤과 공존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다양한 무덤양식을 파생시키는데, 예컨대 재래의 돌무지무덤에서와 같이 돌로 기단을 두른 후 흙으로 덮은 봉토돌방무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봉토무덤처럼 돌방을 지상에 설치하고 돌을 덮은 돌무지무덤, 즉 소위 봉석돌방무덤[封石石室墓]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완전한 봉토가 아닌 토석혼봉(土石混封)의 돌방무덤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묘제상의 혼효는 봉토돌방무덤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사회에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으로 나타난 것이고, 고구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봉토돌방무덤 일색이 되고 만다. 봉토무덤은 규모의 대소, 널방[墓室]의 숫자, 널방의 축조재료, 널방천장의 조성방식, 벽화의 유무 등을 기준으로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봉토무덤의 발전과정도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른 무덤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서술의 편의상 소형분과 대형분으로 대별하여 양자의 특색을 살펴보면, 먼저 소형분의 경우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평면을 가진 외방[單室]을 반지하에 설치한 것이 대부분인데, 흔히 할석(割石)이나 괴석(塊石)을 여러 겹 포개쌓거나 다듬지 않은 거친 판석을 세워 벽면을 조성하였다. 천장조성방식으로는 널방 상부에 1장 또는 수 장의 큰 판석을 그냥 얹어놓는 평천장식이 많이 쓰였고, 벽화와 같은 내부장식은 거의 없다.

한편 대형분은 널방을 대규모의 외방으로 조성한 것이 많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것 중에는 전후 2방 구조 혹은 앞방[前室] 좌우에 옆방[側室]이 붙는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있고, 3방구조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널방의 벽면은 할석 등을 쌓은 후 회를 발라 다듬거나, 곱게 간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하였으며, 여기에 벽화를 그려 장식한 경우가 많다. 옆방의 천장은 평천장도 많지만, 벽면이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 천장의 폭이 좁혀지는 궁륭식 천장과 네 벽의 상부 중앙에서 이웃한 벽의 상부 중앙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평면 공간을 커다란 판석 등으로 덮어 네 모서리를 계속 줄여나가는 모줄임[抹角藻井]천장 등도 유행하였다.

또 대형분에는 널방 내에 널받침[棺臺]이 갖추어진 것이 상당수 있고, 널방 바닥에 배수시설이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왕릉급의 초대형분의 경우 무덤 둘레에 잘 다듬은 돌을 깔아 묘역을 조성한 것들도 있다.

이상에서 고구려고분의 변천과정을 개관하였는데, 총괄해 볼 때 고구려고분은 다음과 같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선, 돌무지무덤과 봉토무덤을 막론하고 외형상 사각방대형(四角方臺形) 혹은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을 취한다는 점인데, 이는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나 가야의 구덩식 돌덧널무덤[睾穴式石槨墳]이 대부분 원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크게 차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매장 주체부가 대부분 지상에 위치한다는 것으로, 이 점은 돌덧널이나 돌방이 고분의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돌무지무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제외하고는 매장주체시설이 대부분 땅을 파고 지하에 마련된다. 이러한 특색과 함께 고구려고분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벽화를 그린 무덤이 대단히 많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분은 90여 기에 이르는데, 평양 일원에서 65기, 지안 일대에서 23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돌무지무덤인 지안 우산하(禹山下) 41호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의 벽화분의 출현은 대략 4세기 무렵임을 추측 할 수 있으며, 아울러 벽화의 아이디어는 봉토무덤의 아이디어와 함께 랴오둥 지방의 벽화가 그려진 중국 돌방무덤에서 취해 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벽화의 내용은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초기에는 묘주(墓主)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행렬도 ·배례도(拜禮圖) 등 그의 생전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4세기 후반의 안악 3호분, 5세기 초의 덕흥리(德興里)고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여기에는 사후에도 생전에서와 같은 부귀와 영화를 계속 누리기를 염원하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5세기 이후 고구려 지배층에 불교가 파급됨에 따라서 불교적 내세관이 벽화에도 나타났는데,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나 예불도(禮佛圖)가 인물풍속도와 함께 그려지거나 아예 인물풍속도 없이 연꽃무늬만이 사방에 그려지기도 하였다.

5세기 전반의 무용총, 5세기 중엽의 장천(長川) 1호분, 산연화총(散蓮華塚)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어 6세기 이후에는 도교사상의 확산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진 사신도(四神圖)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1호분, 지안 사신총(四神塚)을 비롯한 많은 고구려 후기의 봉토무덤이 사신도를 벽화의 주제로 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이처럼 고구려 사회의 사상적 변화상이 잘 표현되어 있어, 문헌사료가 부족한 고구려사 연구에 귀중한 연구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벽화무덤은 남쪽의 백제 ·신라 ·가야에도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서 공주의 송산리(宋山里) 6호분이나 부여의 능산리(陵山里) 1호분, 순흥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 및 읍내리(邑內里) 벽화고분, 고령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 등에서도 연화문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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