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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11-18 (일) 10:01
분 류 사전1
ㆍ조회: 3321      
[조선] 태조 이성계 (실록)
태조의 가계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단(旦)이요,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그전의 휘(諱)는 이성계(李成桂)요,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의 10대(代) 손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휘(諱)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僕射) 휘(諱)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가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를 낳고, 아간이 사도(司徒) 삼중 대광(三重大匡) 휘(諱)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휘(諱)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이긍휴가 휘(諱)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휘(諱)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이승삭이 휘(諱)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휘(諱)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이 휘(諱)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휘(諱) 화(華)를 낳고, 화가 휘(諱)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휘(諱)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휘(諱)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內侍執奏) 휘(諱) 이인(李隣)을 낳고, 집주가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

목조(이안사)→익조(이행리)→도조(이춘)→환조(이자춘)

태조실록 001 총서 /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태조의 시책과 시보

섭태부(攝太傅)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 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어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빈전(殯殿)에 올리게 하였다.

시책(諡冊)에 이르기를, “왕업(王業)을 창건(創建)하고 자손에게 모유(謀猷)를 남기는 것은 실로 대덕(大德)으로 말미암고, 이름을 바꾸어 시호(諡號)를 정하는 것은 오직 지공(至公)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공경하여 옛법에 따라서 아름다운 칭호[徽號]를 드립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대행 태상왕(大行太上王)께서는 신성(神聖)한 자품(資稟)을 타고나시고 관인(寬仁)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전조(前朝)의 쇠퇴한 말년을 당하여 능히 많은 난(難)을 평정하시고, 상천(上天)의 두터운 권우(眷佑)에 응하여 큰 기업(基業)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위(武威)를 바람과 우뢰처럼 떨치고 문치(文治)를 해와 달처럼 밝히셨습니다.

공경히 황제(皇帝)의 명령을 받아 국호(國號)를 고쳐서 새롭게 하였고, 신도(神都)를 달관(達觀)하시어 백성의 삶을 길이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무강(無彊)한 운수(運數)를 열어주었으니 실로 호생(好生)의 마음에 근원한 것입니다. 정사(政事)는 곤궁한 사람을 먼저하고 은혜는 동식물(動植物)에 미쳤습니다. 외람히 간대(艱大)함을 계승하매 백년을 영양(榮養)할까 하였더니, 어찌 빈천(賓天)의 수레를 재촉하시어 홀연히 땅을 치는 슬픔을 남기셨습니까? 마땅히 추숭(追崇)의 예(禮)를 거행하여 귀미(歸美)의 정성을 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칭호를 지어서 후세 자손에게 전하여 보입니다. 삼가 모관(某官)을 보내어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합니다. 우러러 바라옵건대, 충감(퀖鑑)은 정충(精衷)을 굽어살피셔서 거듭 많은 복(福)을 주시어 자손을 천억년(千億年)에 보존하고, 가만히 홍조(洪祚)를 도우시어 천지(天地)와 더불어 구장(久長)하게 하소서.” 하였다.

시보(諡寶)는 전자(篆字)로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 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쓰고, 체제(體制)는 봉숭(封崇)하는 금보(金寶)의 예(例)를 썼다.

태종실록 016 08/09/04(기유) / 태조의 시책과 시보

태조의 지석

임금이 좌대언(左代言) 이조(李?)를 건원릉(健元陵)에 보내어 지석(誌石)을 묻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영락(永樂) 6년 5월 24일 임신에 우리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갑자기 군신(群臣)을 버리시었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하심이 망극(罔極)하여 양암(諒闇)으로 예(禮)을 다하시고, 삼가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봉상(奉上)하여 이해 9월 초9일 갑인에 성(城) 동쪽 양주치(楊州治) 검암촌(儉巖村) 건원릉(健元陵)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예(禮)이다.

삼가 선원(璿源)의 유래를 상고하면 신라씨(新羅氏)로부터 대대로 달관(達官)이 있고 누인적덕(累仁積德)하여 뒤의 경사(慶事)를 넉넉하게 하였다.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미쳐 비로소 원(元)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어 4세(世)를 습작(襲爵)하였는데, 사졸(士卒)이 즐겁게 붙따랐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젊어서부터 기국(器局)이 있어 용략(勇略)이 뛰어났고, 활달 대도(豁達大度)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度量)이 있어, 지극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일찍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여러 벼슬을 거쳐 장상(將相)에 이르고, 중외(中外)에 출입하여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국민을 편안하게 하였다. 군사를 행하는 것이 정숙(整肅)하여 추호(秋毫)도 범하는 바가 없었고, 대소 백여 번을 싸웠는데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왕성(王城)을 수복(收復)한 것과, 임인년에 납씨(納氏)를 쫓은 것과, 경신년에 운봉(雲峰)의 대첩(大捷)이 더욱 칭도(稱道)되는 것이다.

공민(恭愍)이 사자(嗣子)가 없이 갑자기 죽으매, 그 신하 임견미(林堅味) 등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토전(土田)을 강탈하여, 탐오(貪汚)하는 바가 한도가 없었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분(憤)하게 여겨 주륙(誅戮)을 행하고 우리 태조(太祖)로 수시중(守侍中)을 삼았으니,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영(瑩)이 또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망령되게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려고 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경상(境上)에 핍박(逼迫)해 보내었다.

우리 태조께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고금(古今)에 통한 의리이다. 상국(上國)에 득죄(得罪)하고 생민(生民)에게 화(禍)를 끼치는 것보다는 권신(權臣)을 제거하여 한 나라를 편안히 하는 것이 낫지 않으냐?’ 하고, 곧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의리에 의거하여 회군(回軍)하고 영(瑩)을 잡아 물리쳐서 그 죄를 바루고, 왕씨(王氏)의 종친(宗親)인 공양군(恭讓君)을 가려 왕으로 세우고, 충성을 다해 광보(匡輔)하여 어진 인재를 임용하고,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경계(經界)를 바루고 쓸데 없는 관원[冗官]을 태거(汰去)하여 명기(名器)를 중하게 하고 기강(紀綱)을 세워, 규모(規模)가 넓고 커서 전조(前朝)의 폐정(弊政)을 모조리 제거하니, 중외(中外)의 민심(民心)이 흡연(翕然)히 쏠리었다.

공양(恭讓)이 혼미(昏迷)하고 꺼리는 바가 많아서 불리(不利)한 것을 꾀하려 하므로, 홍무(洪武) 25년 임신(壬申) 가을 7월에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말을 합[合辭]하여 추대(推戴)하였다. 우리 태조께서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군정(?情)에 못이겨서 마지못해 보위(寶位)에 오르고, 밀직(密直) 신(臣) 조반(趙쮐)을 보내어 명나라 조정에 아뢰었다. 이에 고황제(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아 국호(國號)를 고치는 것을 허락하여 조선(朝鮮)의 칭호를 회복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 9월에 병환이 있어 상왕(上王)에게 내선(內禪)하였고, 경진년(1400, 정종2) 겨울 11월에 상왕이 또한 병환이 있어 또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자, 우리 태조께 존호(尊號)를 올려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 하였다. 춘추(春秋)는 74세이고 왕위(王位)에 있은 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듣지 못하고 영양(榮養)을 받은 것이 11년이었으니, 종시(終始)의 애영(哀榮)이 이것으로 갖춘 것이다.

수비(首妃)인 한씨(韓氏)는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휘(諱) 경(卿)의 딸인데,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추시(追諡)하였다. 6남(男) 2녀(女)를 낳았는데, 맏은 이방우(李芳雨)로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으나 먼저 죽었다. 다음은 상왕(上王)이고, 우리 전하(殿下)가 다섯째이다. 방의(芳毅)는 세째인데 익안 대군(益安大君)을 봉했으나 역시 먼저 죽었다. 이방간(李芳幹)은 네째인데 회안 대군(懷安大君)을 봉했고, 이방연(李芳衍)은 여섯째인데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딸의 맏이는 경순 궁주(慶順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출가하였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출가하였다. 상왕(上王)은 적자(嫡子)가 없다. 우리 중궁(中宮) 정비(靜妃) 민씨(閔氏)는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휘(諱) 제(霽)의 딸인데, 4남(男) 4녀(女)를 낳았다. 아들 맏이는 세자(世子) 이제(李?)이고, 다음은 이보(李補)인데 효령군(孝寧君)이며, 다음은 금상(今上)【휘(諱).】인데 충녕군(忠寧君)이고, 다음은 어리다. 딸 맏이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인데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출가하였다. 역시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인데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인데 길천군(吉川君) 권규(權?)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태종실록 016 08/11/11(을묘) / 건원릉에 지석문을 묻다

태조의 비문

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치운(治運)을 열어 주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이적(異蹟)을 나타내어 그 부명(符命)을 밝게 하니, 하(夏)나라에서는 현규(玄圭)를 내려 준 일이 있었고, 주(周)나라에서는 협복(協卜)의 꿈이 있었다. 한(漢)나라 이후로 대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모두 천수(天授)에서 나온 것이요, 인모(人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덕(功德)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도 또한 나타났었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 하였으니, 하(夏)나라의 현규(玄圭)와 주(周)나라의 꿈과 동부(同符)하다고 하겠다. 또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書雲觀)의 옛 장서(藏書)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朝鮮)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說)은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臣)이 삼가 《선원록(璿源錄)》을 살펴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성(望姓)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손(世孫)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13세손 황고조(黃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된 뒤, 4세를 습작(襲爵)하였는데,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었다.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여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다.

지정(至正) 신축년(1361, 공민왕 10)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의 서울[王京]을 함락하니,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 수복(收復)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첩서(捷書)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1362, 공민왕 11)에 호인(胡人) 나하추(納哈出)를 쳐서 패주(敗走)시켰고, 또 이듬해 계묘년(1363, 공민왕 12)에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았다.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러 중외(中外)에 출입하였으나, 경사(經史)를 읽기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읽고 게으르지 않았으니,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度量)과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薨)하자 이성(異姓)이 왕위에 오르니, 권간(權奸)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해적(海賊)이 나라 안 깊숙이 들어와 군현(郡縣)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1380, 우왕 6)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1388, 우왕14)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左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正義)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名儒)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權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狂悖)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隙)을 만들어,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禍亂)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이색(李穡)이 말하기를, ‘지금 공의 의거(義擧)는 중국을 높인 것인데, 집정 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불가(不可)합니다.’ 하고, 날을 받아 명나라 서울로 가려 하매,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를 골라 이색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였더니, 고황제(高皇帝)가 가상(嘉賞)히 여겨 돌려보냈다.

기사년(1389, 공양왕 1) 가을에 황제가 이성(異姓)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하였으므로, 태조께서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宗親)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용관(冗官)을 도태시키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였다. 공(功)이 높아지자 시기(猜忌)를 받아, 참소(讒訴)와 간계(奸計)가 번갈아드니, 정창군(定昌君)이 자못 의혹하였다. 태조(太祖)는 지위가 성만(盛滿)하다고 하여 노퇴(老退)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쪽 지방에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는데, 이 틈을 타서 모해(謀害)하는 자들이 일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전하(殿下)가 시기에 응해 변(變)을 제압하여, 모든 모해(謀害)가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조 1)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왕으로 추대(推戴)하니, 신료(臣僚)들과 부로(父老)들이 모의하지 아니 하고도 모두 뜻을 같이하였다. 태조(太祖)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집의 섬돌을 내려오지 아니하고 한 집안을 나라로 화(化)하게 하였으니, 하늘이 유덕(有德)한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지 아니 하고서야 누가 능히 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쮐)을 중국에 보내어 주문(奏聞)하니, 황제가 조(詔)하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을 높였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각각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이는 상제(上帝)의 명(命)이다.’ 하였다. 또 칙명(勅命)하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고쳐 호칭하려 하는가?’ 하였으므로, 즉시 예문 학사(藝文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또 조(詔)하기를,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근본으로 하여 지었으면 좋겠다.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기르고, 길이 후사(後嗣)를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의 위엄(威嚴)과 명성(名聲)과 의열(義烈)이 천자(天子)에게까지 높이 들려서 황제(皇帝)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고명(誥命)을 청하자 문득 유음(兪音)을 받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을 지난 갑술년(1394, 태조 3) 여름에 나라를 모함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入朝)시키라고 명하였다. 태조께서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命)에 응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부주(敷奏)한 것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종묘(宗廟)를 세웠으며, 일찍이 4대(四代)를 추존(追尊)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으로,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로,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로, 황조(皇祖)를 도왕(度王)으로,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로, 황고(皇考)를 환왕(桓王)으로,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로 하였다. 예악(禮樂)을 닦고 제사하는 일을 삼가며, 장복(章服)을 정하여 관등(官等)의 위의(威儀)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고, 소송(訴訟)을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守令)을 신중히 뽑았다. 피폐한 정치를 모두 개혁하고, 여러가지 업적이 빛나니,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이 평안하여졌다. 우리 태조(太祖)의 높고 넓은 성덕(盛德)은 참으로 이른바 하늘이 주신 지용(智勇)·총명(聰明)·신무(神武)·웅위(雄偉)의 임금이라고 하겠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문(表文)의 글 때문에 중국 조정의 견책(譴責)을 받게 되자, 명(命)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 8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편찮은 틈을 타서 어린 얼자(헡子)를 끼고 자기의 뜻을 펴 보려고 하였는데, 우리 전하가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이들을 섬멸하여 없애고, 적장(嫡長)이라 하여 상왕(上王)을 세자(世子)로 세우도록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은 까닭으로 상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계사(繼嗣)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이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고 하여, 곧 세자로 책립(冊立)하였다. 경진년(1400, 정종 2)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太祖)에게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호(號)를 올렸다.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을 봉양(奉養)하는데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 8)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在位)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哀慕)함이 망극(罔極)하여 거상(居喪) 중에 예(禮)를 다하였다.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호(號)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성동(城東) 양주(楊州)의 경내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고, 능(陵)을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여 파조(罷朝)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의 예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은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였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순종하고, 의(義)을 들어 충성을 다하여 공순히 사대(事大)하기를 힘쓰며, 한 지방의 백성을 보호하고 긍휼(矜恤)히 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내렸다. 왕의 뛰어난 공덕(功德)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으리라.’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칙유(勅諭)하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다. 남달리 사랑하는 은전(恩典)을 극진히 하여 유감(有感)됨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태조(太祖)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이어 받드는 효성이 전후(前後)에 서로 이어서, 천심(天心)을 잘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종(始終)의 즈음에 있어 하늘과 사람이 위 아래에서 돕는 것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아아, 거룩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였다. 처음에 시호(諡號)를 절비(節妃)라고 하였다가, 뒤에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의 호(號)를 더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이는 이방우(李芳雨) 진안군(鎭安君)인데 먼저 졸(卒)했고, 세째는 방의(芳毅) 익안 대군(益安大君)인데 역시 먼저 졸(卒)하였다. 그 다음 네째는 이방간(李芳幹) 회안 대군(懷安大君)이고, 여섯째는 이방연(李芳衍)인데 과거에 올랐다가 곧 죽으니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였다. 장녀(長女)는 경신 궁주(慶愼宮主)인데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선 궁주(慶善宮主)인데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이방번(李芳蕃)이니 공순군(恭順君)을 증직하였고, 다음은 이방석(李芳碩)이니 소도군(昭悼君)을 증직하였다. 딸은 경순 궁주(慶順宮主)이니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모두 먼저 졸(卒)하였다. 상왕(上王)의 비(妃)는 김씨이니,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며, 증 문하 시중(門下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로서 자식이 없다.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인데,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시(諡)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세자(世子) 이제(李?)이고, 다음은 이보(李補) 효령 대군(孝寧大君), 다음은 이도(李퍉) 충녕 대군(忠寧大君)이며, 다음은 어리다. 장녀는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역시 같은 이씨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 길천군(吉川君) 권규(權?)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연(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복근(福根) 봉녕군(奉寧君), 다음은 덕근(德根) 원윤(元尹)이다. 익안 대군(益安大君)은 증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석근(石根) 익평군(益平君)이다. 회안 대군(懷安大君)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맹중(孟衆) 의령군(義寧君)이다.

신이 역대(歷代)의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을 보건대,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간책(簡冊)에 밝게 나타나서 그 빛이 끝없이 흐르는데,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거룩한 덕과 신령한 부명(符命)이 옛보다 빛남이 있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위(位)를 얻고 또 수(壽)를 얻었으니, 넓은 기업(基業)을 더 높이고 큰 복조(福祚)를 이어받아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다. 신 권근(權近)이 외람되게 비(碑)에 새길 글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덕(盛德)을 드러내서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지 않으리오! 그러나 신은 글재주가 비졸(鄙拙)하여 성(盛)하고 아름다운 덕(德)을 드러내서 밝은 뜻을 남김없이 칭송하기에는 부족하와, 삼가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것만을 찬술(撰述)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드리노라. 그 글[詞]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사목(司牧)을 세워, 기르고 다스리실 제 유덕(有德)한 이 돌보시네. 하늘이 순순(諄諄)히 말하지 않건마는 명(命)은 혁혁(赫赫)하게 나타나 있나니, 우(禹)임금은 현규(玄圭)를 내려 주고, 주(周)나라의 꿈은 협복(協卜)일세. 우리 조선 처음 왕업(王業)을 여실 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으니, 부록(符폌)이 먼저 정해지고, 천명(天命)이 아주 분명하였네, 고려 운수 이미 다하매, 임금은 어둡고 재상은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 일으켜 중국(中國)과 흔극(?隙)을 일으켰네, 우리 군사 의(義)의 깃발 돌이키니, 죄인(罪人)들 복죄(伏罪)하여 벌받았네. 충성이 위에 들려 황제 마음 기뻐하였네. 천운(天運)이 돌아오고 여정(輿情)이 절박(切迫)하여, 대업(大業)은 이미 이룩되었건만, 저자[市肆]는 바뀌지 아니하였네. 고황제(高皇帝) 조(詔)하기를, 「그대 나라를 세웠으매, 백성들 병화(兵禍) 없고 하늘이 준 기쁨 즐기네.」 하였고, 이어서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회복하여 주었네. 땅을 골라 도읍(都邑)을 정하니 한강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인 바라. 궁실(宮室)은 높디 높고 종묘(宗廟)는 으젓하네. 임금 어진 마음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고, 정사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온갖 제도 갖춰지고 모든 교화(敎化) 흡족하네. 정사에 지치시어 적사(嫡嗣)에게 선위(禪位)하니, 공 있는 이에게 양보하셨네. 밝고 밝은 우리 전하 기미(幾微)를 밝게 살펴, 화란(禍亂)을 두 번이나 평정하니,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시킨 것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대명(大命)을 사양하기 어려워 신기(神器)를 부탁받았네. 양궁(兩宮)을 공경히 받드니, 경건하고 공순함이 더욱 지극하도다. 효제(孝弟)가 신(神)에 통하여,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더욱 우악(優渥)하네. 태조의 상(喪)을 만나 근심에 잠겨, 애모(哀慕)의 슬픈 정 몸부림치네. 황제가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며, 칙명(勅命)하여 후부(厚賻)하고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裝)하니, 휼전(恤典)은 온전히 갖추어졌네. 하늘의 도우심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어, 큰 복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여, 종사(宗祀)가 유구(攸久)하여 하늘처럼 무궁하리라.’”

이 글은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쓰고,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구(鄭矩)가 전액(篆額)을 쓰니, 성석린에게는 안마(鞍馬)를, 정구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였다.

태종실록 017 09/윤04/13(을묘) / 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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