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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16 (수)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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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58      
[서평] 김성윤의 조선후기 탕평정치연구 (김훈식)
서평 : 김성윤, [조선후기 탕평정치연구]
金成潤, 『朝鮮後期 蕩平政治硏究』 (서울, 지식산업사, 1997)

김훈식 金勳埴 (인제대학교 교수)

1960년대 이후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와 실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정치사 분야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사회의 다양한 부문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 역시 총체적 이해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사의 연구 상황은 그러한 방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식민주의사학이 만들어 놓은 당파성론의 영향과 현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맞물리면서 조선시대의 정치사, 특히 붕당 성립 이후의 정치사는 연구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그 후 1980년대에 들어와 당파성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붕당정치론이 제기되면서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물론 아직 그 내용이 제대로 채워진 것은 아니지만 붕당정치론이 조선시대 정치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 즉 16·17세기의 붕당정치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정치사 전체를 발전론적 입장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인식체계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80년대 이후 조선시대 정치사 연구는 많든 적든 간에 붕당정치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행되었다. 『조선후기 탕평정치연구』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탕평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애초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붕당정치론과 함께 이 책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관점으로는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을 들 수 있다. 국가재조론 역시 1980년대 후반에 대두한 조선후기사 연구의 새로운 인식체계로, 처음에는 농정이념에 대한 연구에 바탕을 두고 제기되었으며 그 후 유교사상, 국가정책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었다.

이 국가재조론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모순 가운데 토지제도와 부세제도의 문제를 특히 주목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정치가나 지식인의 입장을 지주제 옹호론과 소농민 육성론으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체계에서는 붕당정치론에서 명확하지 않았던 계급적 대립 갈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조선후기의 중요한 정치적 대립이나 학문적 대립은 결국 이러한 계급적 대립 갈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조선후기 탕평정치연구』에는 이러한 국가재조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탕평정치에 대한 관심은 붕당정치론에 바탕을 두고 있을지 모르나 그 설명에서는 국가재조론의 영향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서 저자의 연구에 붕당정치론과 국가재조론이 미친 영향을 강조하는 것은 그 연구의 독자적인 의의를 부정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정조대 정치사의 구체적 사실에 대한 그의 연구는 조선후기사 연구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중요한 성과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붕당정치론이나 국가재조론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한계를 지적하는 이유는 『조선후기 탕평정치연구』가 정조대의 정치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작이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들어와 정조대 정치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규장각,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 정국의 동향 등 정치사의 한 부문에 대한 연구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저자의 연구는 정조대 정치사 전반에 걸친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정치사의 새로운 인식체계를 모색하는 노력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또한 붕당정치론과 국가재조론의 조선시대사 인식은 서로 다르다. 따라서 그 두 가지 입장의 연구성과가 서로 뒤섞이게 될 경우에는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염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결론에서 탕평정치의 의의를 요약할 때, 관료제적 위계성의 강화, 붕당의 정치적 비중 축소, 정치참여층의 확대 등을 거론하면서, 본론에서 그렇게 강조한 보수와 개혁의 대립·갈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염려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제1장 '蕩平政治의 이념'은 제1절 蕩平의 개념과 蕩平論의 대두, 제2절 蕩平論者의 經世觀, 제3절 蕩平論의 推移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肅宗代부터 대두한 다양한 탕평론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크게 義理蕩平論과 實利蕩平論으로 구분하고, 실리탕평론을 다시 영조대의 調劑蕩平論과 정조대의 實事蕩平論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제까지의 연구가 탕평을 정치운영방식으로만 이해하여 붕당세력을 조정하는 '調劑保合'의 측면만을 강조해 왔다고 지적하고, 자신은 탕평을 정치운영론의 범위를 넘어선 총체적 개혁이념으로 상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개혁이념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양천 신분제의 폐지, 토지소유의 균등, 병농일치, 농공상 삼업의 균형적 발전, 부역의 균등, 붕당의 소멸, 부와 권력의 지역적·가문적 편중 지양, 인재등용의 개혁, 왕권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관료제, 文武竝進을 통한 强兵論 등을 들었으며, 이러한 내용의 탕평을 실학적 비판의식과 개혁구상이 정치에 투영되어 나타난 실학의 정치화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실리탕평론이라고 부른 정치이념의 내용이다. 경제적 실익의 증진과 그 이익의 균분성과 호혜성에 바탕하여 사회성원들간에 조화와 평안이 이루어진 상태를 탕평이라고 파악하는 그러한 탕평론이었다.

이에 반해 의리탕평론은 탕평의 상태를 주자학적인 의리명분론의 실현에 두며, 그 실현을 위해 是非明辨論과 君主修身論을 가장 중요한 정치운영의 원리로 설정하는 그러한 탕평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는 양반지주 중심의 綱常體制 수호론이며 세습적 신분의식에 바탕한 반개혁의 보수논리로서, 현실 정치에서는 국왕주도의 탕평에 반대한 反蕩平論이라고 하였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에서 우선 문제삼을 수 있는 것으로 의리탕평론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의리탕평론을 반탕평론이라고 하였다. 이는 의리탕평론은 탕평론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는 정치이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탕평을 부정하는 정치이념에 탕평론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저자가 의리탕평이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탕평론의 이론적 典範인 洪範九疇에 대한 논의를 모두 탕평론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실제 17세기 이후 유학자들 사이에는 홍범구주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은 저자가 파악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17세기 이후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을 주장한 정치이념을 탕평론으로 파악한다. 홍범구주에 보이는 탕평 개념에 대한 이해를 탕평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존재했던 정치이념을 가리켜 탕평론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탕평론의 내용을 국왕 중심의 정치운영에 한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개념이 사회개혁이념을 포함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탕평론을 홍범구주에 대한 유학자들의 견해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역사적 성격을 갖는 정치이념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저자 역시 "탕평이란 말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므로 누구나 탕평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17세기 이후의 정국에서 새롭게 탕평을 거론·주장한 측은 실리탕평론이었고, 의리탕평도 이에 맞서 탕평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국왕 주도의 (실리)탕평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반탕평론이었다. 따라서 이후 탕평론이라 기술하는 것은 실리탕평론을 지칭하기로 한다"(54쪽 註 62)고 했다.

의리탕평론이라는 것은 홍범구주에 보이는 탕평의 개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방식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는 유효하겠으나, 영·정조대의 탕평정치를 설명하는 데는 필요없는 개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의리탕평론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노론 정통주자학파의 世道政治論이라고 부르는 정치이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렇다면 굳이 그 정치이념을 의리탕평론이라고 개념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세도정치론의 홍범구주, 혹은 탕평 개념에 대한 이해라는 정도로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저자와 함께 탕평정치에 대한 연구를 대표하는 朴光用 교수의 경우에도 의리탕평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 두 사람이 의리탕평이라는 개념 속에 담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박광용 교수의 경우는 의리탕평론을 정조대의 탕평론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탕평정치에 대한 연구가 이제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활발한 토론을 통해 개념상의 혼란을 정리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저자가 의리탕평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실리탕평의 개념 역시 낯설게 느껴진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실리탕평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탕평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자가 굳이 실리탕평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데는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저자가 탕평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자는 정치운영론 차원에서만 탕평을 이해하는 기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변화하는 국가사회의 모든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 개혁적 정치이념으로 탕평을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탕평 연구의 새로운 과제는 그것이 가지는 사회개혁의 논리와 성격을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저자는 바로 그 사회개혁의 논리와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실리라는 개념을 채택하였다. 형식과 명분보다는 實事·實用에 의한 實益·實利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실리탕평론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실리탕평론의 현실적 목표는 "평등을 원리적으로 구현한 소농경제의 안정적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의 실현"(93쪽)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갖는 실리탕평의 개념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탕평을 총체적 개혁이념으로 파악하는 입장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저자는 탕평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 간의 상관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자체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다.

또 홍범구주는 皇極을 중심으로 9가지 범주가 유기적인 관련을 갖는 것이고, 따라서 九疇 가운데 하나인 八政의 범주에 포함된 사회경제적 내용이 황극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그리고 실제 朴世采, 梁得中, 吳光運 등의 탕평론자들은 사회경제적 개혁을 주장하였고, 또 영·정조대에는 개혁적인 정책이 논의되거나 시행되기도 하였다. 저자가 실리탕평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탕평이라는 말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탕평론자들이 사회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고 또 탕평기에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는 것과 탕평이 총체적 개혁이념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탕평이라는 개념이 과연 붕당타파나 왕권강화와 같은 정치적 지향과 함께 전제개혁, 노비제개혁, 부세제도개혁 등의 사회경제적 개혁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후기 당시에 탕평이라는 개념이 그러한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과 함께, 그러한 뜻으로 탕평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에 얼마만큼의 도움이 될 것인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탕평을 총체적 개혁이념으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실리라는 단어가 그 탕평론의 현실적 목표, 즉 개혁의 성격까지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좀 거친 표현을 사용하자면 저자가 의리탕평론이라고 불렀던 정치이념 역시 실리, 즉 양반지주층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의리탕평론은 형식·명분을 중시하며 실리탕평론은 실익·실리를 중시하였다는 대비는 지나치게 형식적이다. 실익이나 실리라는 단어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어느 일방의 이해관계를 담는 용어로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영·정조대의 탕평정치가 소농경제의 안정을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의 실현을 지향한 것이었는가는 별도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셋째는 실리탕평과 조제탕평·실사탕평과의 관계이다. 저자는 실리탕평론을 그 추이에 따라 두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영조대에는 당론의 조정에 따른 탕평 기반의 구축에 주력했다는 의미에서 조제탕평이라 하고, 정조대에는 탕평의 목표가 실제적인 정책으로 추구되었다는 점에서 실사탕평이라 하였다. 저자가 그러한 개념을 사용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리·조제·실사의 세 가지 개념의 상호 연관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조제탕평과 실사탕평이 과연 실리탕평의 하위개념으로 적당한 것인가, 조제탕평과 실사탕평을 같은 수준에서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는 좀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 책의 제2장 '正祖 정치사상의 구조와 전개'는 제1절 正祖 정치사상의 철학적 기반, 제2절 正祖 정치사상의 현실적 전개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대의 탕평정치를 이끌어 갔던 중심인물은 정조 자신이었고,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정조의 정치사상을 밝히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력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정조의 철학사상과 정치이념과의 연관성을 밝힌 것이다. 비록 충분한 자료는 아니지만 정조의 理氣論이나 心性論에 대한 언급을 재구성하여 그 특징을 밝히고, 이를 그의 정치사상의 철학적 기반으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정조가 氣의 가변성과 실제성을 강조한 것은 개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제도개혁을 지향하는 그의 時務論과 관련이 있으며, 太極의 有爲性을 강조하는 것은 군주주도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정조의 정치사상에 대해 깊이있는 이해가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한 인물의 철학사상과 정치이념, 혹은 철학적 논의와 현실 정치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작업은 좀더 체계적인 방법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기의 가변성에 대한 강조와 제도개혁론, 태극의 유위성과 군주주도 정치론의 상관관계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에 앞서서 정조의 철학사상 전체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부분적인 측면에서 발견되는 형식논리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정조의 철학사상과 정치사상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 것인지는 단정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울러 저자의 정조 철학사상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약간의 의문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는 "정조는 理를 전혀 도덕적 속성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데"(115쪽)라고 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理氣哲學에서 理의 실제적 내용은 윤리도덕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대로 정조가 理의 도덕적 속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理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주자학적인 이기철학과는 다른 철학적 세계관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바에 따르면 정조 역시 "크게는 君臣·父子, 작게는 사물의 세세한 것에까지 所以然·所當然의 리가 없는 것이 없다"(113쪽)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조는 과연 理를 전혀 도덕적 속성으로 파악하지 않은 것인가? 또 하나 저자는 정조가 "태극의 실질적 내용에 대해 氣를 중심으로 하여 파악하고"(115쪽)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태극이란 것은 象數 未形이면서 그 理를 이미 갖춘 것을 지칭한다"는 정조의 말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말은 태극이란 구체적 형태를 갖추지 않은 理 그 자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저자도 정조의 철학사상에서 태극의 개념과 '理一分殊'의 논리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一理가 곧 태극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명과 정조가 태극의 실질적 내용을 氣로 파악하였다는 설명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평자는 이러한 의문점들이 생기는 이유와 앞에서 제기했던 방법론적인 문제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조의 철학사상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없이 부분적인 진술에만 주목할 경우 자칫하면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다루어진 정조의 경세론과 정치운영론, 사회경제정책론 등에 관해서는 이 책의 제4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제3장 '권력체계의 개편과 蕩平基盤의 조성'은 제1절 관직운영의 개편, 제2절 권력구도의 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붕당정치기의 淸職中心體制(翰林·玉堂-銓郞·三司-文任職)를 무너뜨리고 大臣權-王權 중심의 권력구조를 만들었으며,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를 통해 친왕세력을 육성하고, 君主道統論 제기하면서 山林의 정치관여를 부정하였다는 것이 그 기본 내용이다.

탕평정치가 왕권강화 혹은 국왕주도의 정치운영을 지향하였다는 것은 모든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문제는 이 시기에 강화된 왕권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왕권의 강약은 군주제 하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왕권이 강해졌다, 약해졌다고 하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갖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조선시대 왕권의 성격, 나아가 우리 나라 전근대의 왕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우리 학계의 연구수준에서 다루기는 어려운 주제일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탕평기 왕권의 역사적 성격까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설명 가운데는 이 시기 왕권의 특징을 밝힐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부분을 좀더 자세하게 다룬다면 중요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왕권과 대신권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다. 잘 알다시피 조선 초기의 태종이나 세조대의 정치를 설명하는 데도 왕권강화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그 시기의 왕권은 대신권과는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저자는 정조대의 대신권 강화를 위한 몇 가지 조치를 거론한 뒤, 이러한 대신권의 신장은 곧 왕권의 신장과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왜 조선 초기 연구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립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왕권과 대신권의 관계가 이 시기에는 "대신권의 강화는 곧 왕권의 강화로 직결"(178쪽)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의 설명은 "대신권이 관료제 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관료체제의 위계성을 바탕으로 권한이 강화될 때 이는 국왕권의 신장과 연결된다"(178쪽의 주 74)는 것인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 초기의 왕권과 대신권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 시기의 대신권은 관료제 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인가. 관료제외의 영향력은 무엇을 의미하며, 관료체제의 위계성에 바탕을 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좀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왕권과 대신권의 관계를 설명한다면 탕평기 왕권과 조선 초기 왕권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탕평기 왕권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본 저서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정조대의 비변사 문제이다. 붕당정치나 세도정치의 권력구조를 다룰 때 비변사는 빠뜨릴 수 없는 주제이며, 그것은 곧 그 시기의 대신권과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탕평정치기의 비변사는 과연 어떤 지위에 놓여 있었으며, 이 시기의 대신권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비변사를 빠뜨리고 정조대의 권력구조와 대신권을 설명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정조대의 왕권강화를 설명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것이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를 통한 국왕 측근세력의 성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조의 측근세력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에까지 설명이 미치지 않는다면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왕권강화를 위해 국왕이 측근세력을 육성하는 것 역시 군주제 하에서 반복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 측근세력의 성격까지 밝히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정조의 측근세력이 고려말기의 사대부나 조선중기의 사림파와 같이 다음 시기의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정치집단인가, 조선후기의 새로운 사회세력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인가, 당시의 지배층인 世家大族, 京華閥閱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인가 등에 관한 의문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조의 측근세력이 어떠한 성격을 갖는 정치집단인지를 밝히기 위한 노력은 여러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들 개개인의 출신기반이나 경제적 처지, 학문적 성향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조의 측근세력이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대립 속에서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가를 명확히 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정조의 왕권강화를 군주도통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 자신은 이를 "이전의 의리관 속에서 군주의 위상이 높아진 것일 뿐, 왕권절대화의 논리가 새로운 의리론의 차원에서 확고히 정립되지 못하였다"(209쪽)고 하여 그 의미를 평가하는 데 제한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이념을 극복하고 그와는 다른 새로운 지배이념을 정립하는 작업은 처음부터 기존의 지배이념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교적 의리명분론의 극복은 불교나 도교 혹은 천주교의 가치관이나 사회관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교적 의리명분론의 형식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그 속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넣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결국에는 의리명분론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이나 사회관이 정립되는 것이다.

조선초기 양반관료제 하에서의 의리명분론과 조선중기 붕당정치 하에서의 그것이 서로 다르듯이, 붕당정치 하의 세도정치론과 정조대의 군주도통론은 같은 의리명분론의 형식을 가지면서도 전혀 그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정치이념으로서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평자의 입장이다.

세도정치론에서 산림도통론을 주장할 때 그것은 단지 산림이라는 인물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교이념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고, 그 권위는 현실정치의 최고 권력인 군주권까지도 규제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군주도통론에서는 그 관계가 역전된다.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초계문신제를 통하여 종래의 군신간의 관계가 사제관계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198쪽) 데 반해, 그 이전에는 그 성격이 달랐다.

산림은 군주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군주도통론은 세도정치론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의리명분론으로 왕권의 절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이 될 수 있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군주도통론은 "정조 개인이 절대화되는 데 도움을 준 것이지 왕권 자체의 절대화의 논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209쪽)고 보는 것은 그 의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제4장 '蕩平 실현을 위한 사회개혁 논의와 水原 육성'은 제1절 土地制·奴婢制 개혁논의, 제2절 華城 축조와 水原 육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정조대 권력 갈등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책 대립의 측면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노비해방이나 토지개혁에 대한 찬반을 둘러싼 대립에 주목하였으며, 노비해방과 토지개혁은 "조선의 중세적 질서 자체에 대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정조대 정국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326쪽)고 하였다. 조선사회의 기본 모순은 대토지소유와 소농경영의 결합·대립에 있었고, 따라서 토지개혁은 저자의 지적과 같이 조선의 중세적 질서 자체와 관련이 있다.

본 서평의 처음에 소개했던 국가재조론에서 조선후기의 사회개혁 논의를 지주제 옹호론과 소농민 옹호론의 흐름으로 양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입장과 관련이 있다. 저자 역시 제1장에서 탕평론자인 박세채·양득중·오광운의 경세관에서 특히 정전제 복구의 문제가 중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제2장에서는 정조 역시 토지소유 문제를 중심으로 당시의 토지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본장에서는 정조대의 토지개혁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영·정조의 탕평정치가 소농경제의 안정적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정전제에 대한 관심이나 정전제 복구의 주장이 과연 어떠한 성격과 의미를 갖는 것인지는 좀더 자세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전제에 대한 언급이 이전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거론하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현실개혁의 이념적 근거로 거론하는 것인가의 차이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실개혁론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十一稅, 兵農一致 등을 통해 부세제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 토지소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검토는 탕평정치의 정책적 목표가 부세제도의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지주제 옹호론인가, 아니면 토지제도의 개혁까지 포함하는 소농민 옹호론인가 하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탕평론자들 가운데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한 인물도 있고, 정조의 측근세력 가운데도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한 인물이 있다.

그러나 정조대에 토지제도 개혁이 정책적인 목표로 추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가 정조대의 토지제도 개혁에 관한 논의 가운데 중점적으로 거론한 것이 李錫夏와 申龜朝의 대립인데, 그 논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토지제도 개혁이 아니라 토지소유 상황을 호적에 올리는 문제일 뿐이다. 더구나 정조는 토지제도 개혁에 대해서 오히려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이 과연 "정조는 한편으로는 (토지)개혁론의 제기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부단히 연구를 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개혁을 위한 정치기반 조성에 심력을 기울였던 것"(153쪽)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정조대에 실제 논의된 대표적인 개혁정책은 토지개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비해방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역시 토지개혁보다는 노비문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의 입장은 "私賤까지 포함하여 대개혁을 단행하려" 하였으며 그 대신 "官·奴婢主와 노비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하여 세습은 인정하지 않는 것"(157쪽)이었다. 그러나 정조대에 개혁정책의 대상으로 실제 논의된 것은 공노비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 공노비 개혁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정조와 그 측근세력은 노비제 개혁에 찬성하였으나 노론 벽파 계열의 인물은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노론 벽파가 노비제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계열의 반대로 개혁이 저지되었다는 다른 연구자의 설명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다.

현재 평자로서는 서로 대립하는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저자가 이전의 연구 결과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조 사후에 노론 벽파가 집권한 상황에서 공노비제도가 혁파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조대의 개혁정책 가운데 또 하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으로 辛亥通共을 비롯한 상업정책이 있다. 저자는 이 상업구조 개편 시도를 화성 축조 및 수원 육성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는데, 특히 수원육성책과 관련하여 "私商都賈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계기가 허용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이들의 정치참여와 세력화가 이루어지면 미구에 조선정치 내지 국가권력 자체의 급격한 성격변화가 초래될 것"(260쪽)이라고 한 부분은 좀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에는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사회세력이 대두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사상도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성장세력들은 몰락양반이나 빈농, 임노동자들과는 달리 신분적·정치적 지위 상승의 가능성을 가진 세력들이었고, 새로운 정치체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을 정치참여층으로 포섭함으로써 안정적인 통치를 이룰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조 당시에 과연 이들 사상도고가 수원 육성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화할 가능성을 갖는 존재들인가는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제5장 '正祖의 蕩平 추진과정과 정국의 동향'은 제1절 老論 주도 정국과 蕩平策의 후퇴:즉위∼3년, 제2절 少論 주도 정국과 정치세력의 재편:4년∼12년 정월, 제3절 時派 우위 정국과 개혁추진:12년 2월∼17년, 제4절 국왕 주도 정국과 反蕩平의 도전:18년∼24년 6월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정국 주도집단의 향배, 정조의 탕평 추진의 단계성, 정치적 현안과 정치세력간 갈등의 성격을 주로 고려하여 정조대의 정국을 4시기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시기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을 노론·소론·남인의 범주와 時派·벽派의 범주에 의해 구분되는 정치세력과 관련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정조대의 정국을 설명하는 일반적 방식과 다를 것이 없으나, 그 가운데 붕당과 時·벽의 범주 사이의 관계를 정리한 부분은 특징적이다.

저자는 정조가 소론계를 부상시켜 老論專制를 견제한 것이 시벽의 분립을 야기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후 시벽의 대립이 당쟁적 성격에서 개혁에 대한 갈등이라는 정파적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시벽의 구도 속에서 종래의 붕당적 집단성이 해체되고 이에 대신하여 가문이 정치적 기본단위로 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왕·반개혁 세력인 벽파의 경우는 기존의 붕당적 기반을 충실히 유지한 반면, 시파는 국왕의 통합능력 외에는 내부적 통합을 유지할 새로운 조직원리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정조 사후 개혁세력이 급속하게 와해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저자가 본 연구를 수행하면서 가졌던 의도, 즉 '탕평정치는 왜 실패했는가'를 해명하려 했던 의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저자의 연구는 정조대의 정치사 전체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연구사적 의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본 평자는 이 시기의 정치사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까우면서도 서평의 형식을 빌어 저자의 연구성과에 대해 그 한계와 의문점을 지적하였다.

구체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주로 방법론적 측면이나 사실을 해석하는 입장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에서 제대로 된 서평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친 김에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쉽게 느낀 점을 밝히고자 한다. 저자가 탕평정치를 단순히 붕당정치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은 명확하다.

18세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진보적인 입장에서 수용하면서,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정치체제를 지향한 것으로 탕평정치를 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습이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 탕평정치와 사회경제적 개혁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지만, 그 결과 정조대의 정치적 대립이 진보세력과 보수세력의 대립이라는 측면으로 과도하게 단순화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정조와 親王勢力은 진보적 세력, 反王勢力은 보수적 세력으로 양분되면서 그 진보와 보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다양한 편차가 무시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연구사의 출발점에 있는 저자의 업적에 대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출전 : [지역과 역사] 제5호(19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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