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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10 (토) 11:56
분 류 사전1
ㆍ조회: 2162      
[조선] 권근의 졸기 (태종실록)
《 태종 017 09/02/14(정해) / 길창군 권근의 졸기 》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졸(卒)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권근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세자에게 문병하도록 명하여, 세자가 막 떠나려고 하였는데, 권근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권근의 자(字)는 가원(可遠)인데 뒤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호(號)는 양촌(陽村)이고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고려 정승 권부(權溥)의 증손이며, 검교 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그칠 적이 없었다. 홍무(洪武) 기유년(1369, 공민왕 18)에 나이 18세로서 병과(丙科)에 뽑혀 춘추 검열(春秋檢閱)에 제배(除拜)되어 왕부 비자치(王府 者赤)가 되었다. 계축년에 과거(科擧) 향시(鄕試)에 3등[第三名]으로 합격하였으나, 나이가 25세 미만(未滿)인 까닭에 경사(京師)에 가서 응시하지 못하였다.

갑인년(1374, 공민왕 23)에 성균 직강(成均直講)과 예문 응교(藝文應敎)에 제배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이 갑자기 죽자, 원조(元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반사(頒赦)하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예(禮)로 접대하기를 강요하니, 권근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원나라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곧아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국정을 담당한 자들이 이들을 모두 무고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내쫓았으나, 권근은 나이가 어려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면할 수 있었다.

임술년(1382, 우왕 8)에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제배되어, 위주(僞主) 우왕(禑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음희(淫戱)로 절도가 없었으므로, 상소하여 극진히 간하니, 우왕이 이에 말을 받아들이고, 간초(諫草)를 써서 병풍에 붙이도록 명하였다. 갑자년(1384, 우왕 10) 겨울에 대언(代言)에 궐원(闕員)이 생겼는데, 당시 재상이 권근의 이름을 올려 추천하였더니, 우왕(禑王)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찍이 간관(諫官)이 되어 나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하였다.” 하고, 필(筆)을 잡아 그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무진년(1388, 우왕 14) 봄에 최영(崔瑩)이 국정을 담당하여 중국에 대항할 뜻을 가지고, 무릇 중국 조정에 보내는 글에 사대(事大)의 구례(舊例)를 쓰지 아니하고 초격(草檄 : 격문처럼 과격한 언사를 쓴 글-각주)으로 이자(移咨)하려고 하니, 권근이 면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해서 마침내 초격(草檄)으로 이자(移咨)하려고 하니, 권근이 면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해서 마침내 초격(草檄)을 쓰지 아니하였다. 여름에 태조(太祖)가 의(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매, 좌대언(左代言)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곧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이은(李垠) 등 33인을 뽑았다.

기사년(1389, 창왕 1) 봄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승진하였고, 여름에는 문하 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가을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1통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국구(國舅) 이임(李琳)이 당시에 좌상(左相)이 되어 묘당(廟堂)에 나와 앉아 있었으므로, 그 자문(咨文)을 넘겨 주었다.

우리 태조는 우상(右相)이 되었으나 마침 신병으로 인하여 집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틈을 타서 태조께 진언하기를, “예부(禮部)의 자문은 이성(異姓 : 辛氏. 곧 昌王-각주)이 왕이 된 것을 문책한 것인데, 권근이 홀로 이임과 더불어 뜯어 보았습니다.” 고 하였다.

10월에 대간(臺諫)에서 이숭인(李崇仁)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서 재물을 모은 죄를 탄핵하여 폄출(貶黜)되었는데, 권근이 이숭인의 뒤를 이어 경사에 갔던 까닭으로, 이숭인의 무고(誣告)를 당한 사실을 알고 상서(上書)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히니, 대간에서 권근이 죄인의 편을 들고 언관(言官)을 헐뜯는다고 탄핵하여 우봉(牛峯)으로 폄출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卽位)하게 되자 대간에서 탄핵하기를, ‘권근이 사사로이 자문(咨文)을 뜯어서 먼저 이임(李琳)에게 보였으니, 이는 이성(異姓)을 편든 것이라’고 논죄(論罪)하여, 영해(寧海)로 옮겨 유폄(流貶)시켰다.

경오년(1390, 공양왕 2) 봄에 대간에서 다시 논핵(論劾)하여 극형(極刑)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구원하여 줌에 힘입어 장(杖)을 맞고 흥해(興海)로 양이(量移)되었다. 그해 여름에 이색(李穡) 이하 여러 폄소(貶所)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淸州)의 옥(獄)으로 잡혀 와 갇혔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에 들어와서 공해(公廨)가 모두 물에 잠겼었다.

여러 문사관(問事官)들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으므로, 갇힌 자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다. 권근만은 홀로 꼿꼿이 앉아서 신색(神色)이 자약(自若)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죄가 있으면 마땅히 천벌(天罰)을 받을 것이고, 만약 죄가 없으면 하늘이 어찌 나를 물에 빠져 죽게 하겠느냐?” 하였다. 이때 죽음을 면하여 한양(漢陽)으로 돌아왔다가 익주(益州)로 옮겼었는데,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신미년(1391, 공양왕 3) 봄에 자편(自便)을 얻어 충주로 돌아갔다. 《예경(禮經)》을 찬정(撰定)하다가 이룩하지 못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고를 쓸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계유년(1393, 태조 2) 봄에 태조가 계룡산(鷄龍山)에 거둥하여 권근을 특별히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나오게 하여, 정총(鄭摠)과 더불어 능묘(陵墓)의 비문(碑文)을 찬정하도록 명하였다. 갑술년(1394, 태조 3) 가을에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제배(除拜)되었다.

병자년(1396, 태조 5) 여름에 명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표전(表箋)에 희모(戱侮)의 글자가 있다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인 정도전(鄭道傳)을 부르니, 정도전이 병이 있다고 칭탁하였다. 내사(來使)가 날마다 독촉하니, 권근이 자청(自請)하기를, “표(表)를 짓는 일에 신도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사신을 따라 경사(京師)에 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부르는 명이 없다고 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권근이 다시 아뢰기를, “전조(前朝) 말엽에 몸이 중한 죄를 입어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는데, 다행히 전하의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仁德)에 힘입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고, 이제 국초(國初)를 당하여 또 거두어 써 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재조(再造)의 은덕(恩德)이 하늘처럼 망극(罔極)하오나, 신이 보답한 공로가 없습니다. 원컨대, 경사(京師)에 가서 하늘 같은 복(福)으로 변명(辨明)을 하여, 성은(聖恩)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까 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남몰래 황금(黃金)을 하사하여 행자(行資)로 쓰도록 하였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니, 사신 발라(孛羅)가 여러 재상(宰相)들에게 중국 조정에 들어가 대답할 말을 물었는데, 권근에게는 묻지 아니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어찌하여 오로지 나에게는 말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발라(孛羅)가 낯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부르는 명령이 없는데도 자진하여 가니, 나라의 충신(忠臣)입니다. 황제께서 무슨 물을 말이 있겠으며, 그대 역시 무슨 대답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9월에 중국 조정에 들어가니, 그 이튿날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들을 억류(抑留)하기 위해 본국(本國)으로 자문(咨文)을 보내고, 칙명(勅命)으로 권근을 불러서 자문(咨文)의 초(草)를 보여 주었다. 권근이 고두(叩頭)하며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사대(事大)함에 있어 표문(表文)이 아니면 하정(下情)을 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해외(海外)에서 자라서 학식이 통달하지 못하여, 우리 임금의 충성을 능히 주광(黈纊)에 각별히 사뢰지 못하였사오니 진실로 신 등의 죄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우례(優禮)로 대접하고, 시제(詩題)를 내어 시(詩) 18편(篇)을 짓도록 명하였다.

시 한 편을 지어 올릴 때마다 황제가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주찬(酒饌)을 준비하고 기악(妓樂)을 갖추어 사흘 동안 유람(遊覽)하게 하고, 또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다. 황제가 이에 장률시(長律詩) 3편을 친히 지어 하사하고, 문연각(文淵閣)에 출사(出仕)하도록 명하여 한림 학사(翰林學士)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경청(景淸)·장신(張信)·대덕이(戴德 ) 등과 더불어 서로 교유하게 하였다. 매양 우리 태조의 회군(回軍)한 의거(義擧)와 사대(事大)하는 정성을 칭송하니, 황제가 듣고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노실수재(老實秀才)’라고 일컫고,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돌아오자, 정도전(鄭道傳)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정총(鄭摠) 등은 모두 구류(拘留)되었는데 혼자서만 석방되어 돌아왔다는 이유로써 탄핵하여 그 죄를 거듭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천자가 진노(震怒)한 때에 몸을 일으켜 자진하여 가서 좋은 말로 전대(專對)하여 능히 황제의 노여움을 풀게 하였으니, 공이 실로 적지 아니한데, 도리어 죄를 주라고 한단 말인가?” 하였고, 권근도 또한 글을 올려 스스로 적은 노고를 서술하였으므로, 이에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 칭(稱)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외우(外憂)를 당하였다. 기묘년(1399, 정종 1)에 기복(起復)시켜 첨서(簽書)에 제배(除拜)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정당 문학(政黨文學) 겸 대사헌(大司憲)으로 천전(遷轉)되어, 상소를 올려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하였다.

경진년(1400, 태종 즉위년) 11월에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추충 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임오년(1402, 태종 2) 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 33인을 뽑았다. 중국의 사신이 반드시 권근의 안부를 먼저 묻고, 서로 대해서는 공경하는 예를 더하였다. 어사(御史) 유사길(兪士吉)과 내사(內史) 온불화(溫不花)가 사명을 받들고 왔을 때도 역시 압록강에서 권근의 안부를 물었다.

도성(都城)에 이르자, 전하가 사신에게 위호하는 잔치를 베풀어, 여러 재상들이 차례로 술잔을 돌리는 예를 행하였는데, 권근이 예를 행하게 되매, 유사길과 온불화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가 말하기를, “천사(天使)께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시오?” 하니, 유사길이, “어찌 가히 사문(斯文)의 노성 군자(老成君子)를 만홀(漫忽)히 대하겠습니까?” 하고, 온불화는, “태조(太祖) 황제께서 공경하는 분입니다.” 하였다. 온불화는 바로 발라( 羅)이다.

계미년(1403, 태종 3)에 표(表)를 올려,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한 데에 나아가 《예경(禮經)》 절차(節次)를 상고하는 일을 마치겠다고 애걸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하였으나 벼슬을 사임하지는 아니하였다.” 하고, 곧 삼관(三館)의 선비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날마다 권근의 집에 나아가서 글 쓰는 일을 돕도록 명하였다. 책이 이룩되자, 선사(繕寫)하여 한 본(本)을 바쳤다.

을유년(1405, 태종 5) 봄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제배(除拜)되고, 겨울에 내우(內憂)를 당하였다. 병술년 봄에 기복(起復)을 명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제수하니, 두 번이나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마치기를 애걸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가을에 임금이 세자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하니, 상서(上書)하여 선위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또 병중에 예궐하여 계달(啓達)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그의 가슴속에서 일을 결단함이 이처럼 정밀하고 정확할 줄은 몰랐다.” 하였다.

정해년(1407, 태종 7) 여름에 임금이 친히 문사(文士)를 시험하였는데, 권근과 좌정승 하윤(河崙)을 독권관(讀卷官)으로 명하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무자년(1408, 태종 8) 겨울에 병이 위독하였었는데, 임금이 노하여 대간(臺諫)의 관원을 장차 극형(極刑)에 처한다는 말을 듣고 상서(上書)하여 간절히 간하니, 임금이 이에 석방하였다. 병들어 누운 날부터 임금이 약(藥)을 하사하고 문병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58세였다.

임금이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으며, 사제(賜祭)하고 조뢰(弔 )하고, 부증(賻贈)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중궁(中宮)도 중사(中使)를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세자가 친히 관구(棺柩)에 나아가 제사지냈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최함(崔咸) 등이 삼관(三館)의 선비들을 거느리고 소뢰(小牢)의 제사를 지냈다.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권근이 검열(檢閱)에서부터 재상이 되기까지 항상 문한(文翰)을 맡아서 관각(館閣)의 직임을 두루 역임하고, 일찍이 한번도 외직(外職)에 임명되지 아니하였다. 타고난 성질이 정수(精粹)하고 온아(溫雅)하며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평상시에 비록 아무리 다급할 때일지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빛이 없었고, 배척을 당하고 폐출(廢黜)되어 사생(死生)이 목전(目前)에 있었던 때에도 태연하게 처신하고, 일찍이 상심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경세(經世)의 문장(文章)과 사대(事大)의 표전(表箋)도 또한 모두 찬술(撰述)하였다. 문집(文集)이 약간 있어 세상에 전한다.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아들과 사위를 불러 모아 놓고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아들과 사위들이 치상(治喪)을 일체 《가례(家禮)》대로 행하고 부도법(浮屠法)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넷이 있으니, 권천(權踐)·권도(權蹈 : 뒤에 제(踶)로 고침-운영자 주)·권규(權跬)·권준(權蹲)이다.

【원전】 1 집 474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출전 : 태종실록 017권 태종 9년 2월 14일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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