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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08 (화) 09:20
분 류 사전1
ㆍ조회: 362      
[조선] 유수원 (민족)
유수원(柳壽垣)

1694(숙종 20)∼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菴). 형조정랑 성오(誠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상재(尙載)이고, 아버지는 봉정(鳳延)이며, 어머니는 김징(金消)의 딸이다.

[관직 활동]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서울에서 벼슬하던 일가 친족의 집에서 자랐다. 스승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714년(숙종 40) 21세 때 진사가 되고, 25세 때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의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벼슬길은 매우 불우하였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1723년(경종 3) 2월에 정언(正言)으로서 조정의 혁신을 요청하는 글을 경종에게 올렸다가, 원로대신을 함부로 비난했다는 조정 중신들의 성토를 받아 파직되는 불행을 맞았다. 하지만, 당시 그의 집안이 집권당인 소론(少論)이었기에 그 해 7월에 낭천현감(狼川縣監)으로나마 다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老論)이 득세하기 시작하자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임인안옥(壬寅按獄 : 1722년에 노론의 네 대신을 처형한 정치 재판)의 주모자로 종숙부 봉휘(鳳輝)가 노론에 의해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30대 시절 10여 년 간을 줄곧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옮겨다녔고, 심한 병을 얻어 귀머거리가 되는 신체적 불행까지 맞았다. 스스로 ‘농암’ 또는 ‘농객(聾客)’이라는 호를 쓰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보인다.

[저술과 말년의 생활]

그는 불우한 처지에서 치미는 울분을 연구와 저술로 달랬다. ≪우서 迂書≫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이 잘살게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개선해야 할 것인지를 강구하고 기술한 것이다.

이 위국경륜(爲國經綸)의 저술은 곧 관계 인사들의 관심을 모아 영조에게까지 소개되었고, 그로 인해 1737년(영조 13) 다시 조정으로 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노론의 규제가 풀리지 않아 정언에 임명되는 데 그쳤으며, 뒤이어 장령(掌令)을 거쳐 사복시정으로 승진하기는 했지만 끝내 벼슬을 물리고 서소문(西小門) 밖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1741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經筵)에 들면서 부호군(副護軍)에 다시 임명되었다. 그는 〈관제서승도설 官制序陞圖說〉을 지어 바치면서 영조와 붓으로 토론하는 진기한 경연을 벌였고, 그 결과 그 해 3월에 홍문관 관원에 대한 회천법(回薦法)을 폐지하게 하였다.

그 뒤 영조의 특명으로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속오례의≫ 편찬에 종사하다가 1744년에 다시 벼슬을 물리고 은퇴하였다. 이로부터 10년 간 초야에서 지내던 그는 1755년 5월에 반역을 모의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해 2월에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괘서(掛書 : 반역을 선동하는 익명의 벽보)사건과, 이 사건의 주모자들을 처형한 뒤 특별히 시행한 과거시험에서 변서(變書 : 변란·혁명을 예고·주장한 글)가 나타난 사건 때문에 소론에 대한 숙청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는 몇 차례의 심문 끝에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사형되고, 가족은 모두 노비로 수용되었다. 오늘날 그의 행장(行狀)·연보 같은 전기 자료가 하나도 전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평가]

그는 당쟁에 희생되어 불우하게 일생을 보냈지만, 학문과 경륜만은 당시에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학문은 당대의 석학 이덕수에 버금갈 정도였고, 경륜은 ≪우서≫를 읽고 난 영조가 “우리 나라의 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옛 학자의 말을 따르고 모으면서 기교만 구하는데, 이 사람은 모두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생각을 기술했으니 참으로 귀중하다.”고 찬탄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그가 대역부도의 죄로 세상을 떠나고, 또 노론의 집권이 한말에 이르도록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의 글과 사상은 널리 퍼지지 못했고, 이름 역시 크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의 문명(文名)과 학문·사상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저자를 잃어오던 ≪우서≫가 그의 저술임이 밝혀지면서 학문·사상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전개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선구적 인물로 자리하게 되었고, 또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富國安民論)을 주창한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에 대한 이 같은 이해나 평가가 그의 개혁안 가운데 특출한 일면, 즉 상공업안이나 화폐 정책안 등에만 치우쳐 살핀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앞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해가 요망된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柳壽垣의 迂書(韓榮國, 創作과 批評 11, 1968), 朝鮮後期商業의 問題點-迂書의 商業政策分析-(姜萬吉, 韓國史硏究 6, 1971), 朝鮮後期貨幣流通構造의 改善論의 一面-柳壽垣의 現實的貨幣論을 중심으로-(元裕漢, 歷史學報 56, 1972), 柳壽垣의 身分改革思想(韓永愚, 韓國史硏究 8, 1972), 국역 우서해제(한영국, 민족문화추진회, 1982).

<한영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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