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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6 (토)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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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28      
[불교] 한국 불교계의 종권 분쟁 1 (김경호)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

김경호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아동문학가. 21세기 전략 아카데미 상임운영위원. 민중불교 운동엽합 기획위원장. 개혁회의 홍보과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연구과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불교정보전략 연구실 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의 저울>이 있다.

- 목 차 -

종권분쟁, 무엇이 문제인가
시기별 종권 분쟁의 양상
종권 분쟁의 주요 동력
분쟁을 극복할 대안은 없는가

1. 종권분쟁,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 사는 세상에 다툼과 대립이 없을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상황을 보는 입장과 견해가 다를 수 있고 때로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서로 대립될 수도 있다.

종단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향’할 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영역’에 속해 있기에 대립과 갈등은 밥먹고 숨쉬는 일처럼 당연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이 상식을 뛰어넘고, 내지는 세인들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면 당연히 문제가 된다. ‘인천(人天)의 사표(師表)’인 스님들의 행동이 긍정적인 모범이 되지 못하고 지탄과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분쟁’이 되는 이유는 ‘분쟁’의 원인이 추악한 ‘이권’과 ‘세력다툼’이고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된다는 데 있다.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멀면 중생들은 당연히 비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권 분쟁’의 다음과 같은 면을 주목하고자 한다.

1. 제도적 틀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분쟁에 주목한다. 세속법에 제소하는 법적 송사는 물론 초법적 전통인 승려대회 등, 혹은 두 개의 총무원 등으로 갈라서는 것을 ‘종권분쟁’의 가장 일반화된 유형으로 본다.

2. 폭력을 수반한 분쟁에 주목한다.폭력적인 방법으로 총무원을 접수하려는 시도만이 아니라 사찰 접수과정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폭력도 ‘종권분쟁’의 한 유형으로 파악된다. 그 까닭은 ‘폭력’이야말로 불교계의 분쟁이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며, 사찰을 놓고 벌이는 공방의 총화가 종권분쟁이라는 중앙권력다툼으로 현상화되기 때문이다.

3. 이권을 둘러싼 분쟁에 주목한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울지라도 분쟁의 배경에 이권이 놓여있다면 감추어지지 않는다. 폭력과 더불어 지탄받는 2대 주제이기 때문에 거론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모든 이권 분쟁은 종단 권력의 총화인 ‘종권 분쟁’으로 발전하고 수렴된다.

이러한 시각으로 조계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단 한 해도 종권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권분쟁과 관련한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2년 종회의원 비율문제로 대처측 간부 전원 사퇴/대처측 ‘새종헌 무효 및 이효봉 비종정 확인 청구소송’ 제기

1963년 흥천사 사찰 점유권 다툼 1964년 대처측 종헌 무효소송 제기

1965년 비구 대처 ‘종헌 및 종정추대 무효 확인 소송’ 공방 1966년 종헌 및 종정이 유효하다고 비구측 승소

1967년 비구 대처 통합논의 불발 / 종정 이청담, 총무원장 손경산 사표 수리

1968년 비구 대처측 동국대 총장 후임 선임 문제로 다시 불화 / 봉은사 임야 불법 매각 / 감찰원 조사과장이 단청공사 경리부정 건으로 불국사 주지 불법 감금 / 대처측, 월정사 법흥사의 풍치림 남벌사건, 불국사 부정 및 난동사건 등 비구종단의 부패상 공격

1969년 보현사 주지 쟁탈 시비 / 이청담, 재건안이 종회에서 거부되자 조계종 탈퇴 선언 이후 선학원측과 총무원측 대립 / 선학원측 전국 비구승 대표자 대회 개최 실권 장악.

1970년 내장사 명도 집행에 대처측 할복 소동 / 순천 선암사 접수 / 증심사 분규 / 대처측 한국불교태고 창종, 문교부에 등록 / 봉은사 토지 매각 물의 / 조계종 감찰원장 총무원장 선출방법, 재산처리에 반발 종단 탈퇴 선언

1971년 관악산 염불암 매각 물의 / 동화사 승려, 부패에 항의 뱀이 담긴 소포 총무원에 발송 / 안동 봉정사 주지 임명 파동

1972년 대법원 통합종단 종헌 적법 최종 재확인 / 총무원장 강석주 사직, 지지파와 반대파 대립 1973년 총무원 감찰부장 특별분담금 시비로 남해 보리암 주지 폭행 / 동화사 수좌승 총무원에서 농성 / 종정 고암, 종단의 총화와 질서 확립을 위해 종회 기능을 잠정 유보 발표 1974년 중앙종회 집단 난투극 / 불국사 주지 분규 / 전국승려대표자대회(대회장 월하) 개최, 고암종정 사퇴 / 종권수호회측과 집행부 대립

1975년 조계종 20여 개 사찰의 점유권을 위해 소송제기. 실력 행사/ 승주 선암사 점거/ 종정과 총무원장 대립/ 총무원 재무, 교무부장 및 수종사 주지 사기혐의로 구속/ 관음사 대성암 토지부정사건으로 총무원장 손경산 구속, 집행부 기능마비/ 종정중심제로 종헌 개정/ 김대심 이도일 등 20여 명의 사이비승려 총무원 강제 점거. 종권탈취 기도

1976년 내장사 조계종 명도 집행. 대처측 주지 분격하여 자살기도/ 구의동 영화사 접수 시도. 태고종 승려들과 충돌/ 서옹 종정에 반대하는 종회의원 24명, 해인사서 임시종회 개최. 종정추대 취소 및 종헌 종법 개정 결의

1977년 종헌 종법 개정을 제의한 재야측과 종정중심제 주장하는 총무원측 대립 동화사 신도들. 동화사 주지 경질에 반발 총무원 인사조치 규탄대회 개최 종헌 개정을 위한 종회가 유산되자 집행부 참여 없이 49회 임시종회가 열려 ‘종정추 대취소결의안’을 통과, 종정은 비상종령 37호로 중앙종회 해산. 원로회의는 〈종단재건회의〉를 구성하여 사태수습을 위한 종헌종법개정에 착수.

1978년 종회측의 개운사, 종정측의 조계사총무원으로 분열.

1979년 김병옥(김대심의 동생) 등 승려 6인, 조계사 주지 감금 폭행, 금품 갈취 경국사 주지 2중 발령 / 개운사 조계사 총무원 대립 지속

1980년 개운사측 승소 / 분규 쌍방 종회와 총선거 합의로 17대 총무원장 송월주 당선 분규로 부처님 오신날 범불교연합 봉축행사 취소 10월 27일 계엄사령부 총무원 및 전국 주요사찰에 계엄군을 투입. 153명 연행 10월 28일 계엄사령부 ‘불교계 각종 비리와 부패, 범법행위 등을 자행해 온 사이비 승려와 상습폭력배 46명을 연행 조사중’이라고 발표. 10월 30일 계엄사령부 전국 사찰에 은신하고 있는 용공분자, 범법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18개 종파 3,000여 개 사찰에 군인 및 경찰을 투입 수색. 이 과정에서 낙산사 주지 원철 사망 11월 5일 정화중흥회의 출범. 종헌개정, 중앙종회 해산, 산하기구 해체 11월 13일 계엄사령부, 비리승려 18명 구속. 32명 승적 박탈. 200억 6천만 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종단에 환수 조치한다고 발표

1981년 정화중흥회의, 총무원장중심제, 종정임기 10년의 새종헌 종법 제정 임시중앙종회, 성수 총무원장 불신임/ 초우 총무원장 취임 후 신흥사, 불국사 석굴암, 낙산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지정/ 불국사, 월정사 주지임명 파동, 8명 구속 / 12월 초우 총무원장과 서의현 종회의장 인책 사퇴

1982년 동학사, 새주지 임명에 반대하여 단식 기도/ 불국사 신흥사 교구본사로 환원 결의/ 흥국사 분규

1983년 8월 6일 설악산 신흥사 신임주지 혜법 부임 과정에서 폭력사태 발생, 사망 1명 중경상 6명/ 한국청년불교도연합회 및 젊은 승려들 농성/ 원로회의 개최, 집행부와 종회의 즉각 사퇴 해산 및 전국승려대회 개최/ 비상종단운영회의 설치

1984년 성철 종정사퇴 성명/ 해인사 전국승려대표자대회, 새종헌 무효 선언, 비상종단체제 폐지/ 비상종단운영회의의 서벽파, 김지형 등 승려 30여 명 총무원 청사 9시간 강제 점거, 조계사 신도 700여 명에 의하여 축출.

1986년 녹원 총무원장 사임, 후임에 서의현 취임/ 9월 해인사 승려대회 개최 2천여 명 참석, 불교제관계법 철폐 및 전면 개정 요구

1987년 승주 선암사 조계종 승려 및 민간인 40여 명 강제 점거, 검찰 조계종 승려 연행/ 부산 선암사 주지 이취임문제로 분규, 괴청년 20여 명 난입, 신임주지 등 승려 10여 명 집단 폭행 도주, 이 과정에서 범인 중 1명 사망 중앙종회 총무원장 서의현 불신임시도 실패, 총무원 4부장 경질

1988년 총무원장 중심제 종헌종법 개정, 회의도중 폭력사태 봉은사 주지 변밀운 직위해제, 신임주지 이성문측의 부임과정에서 충돌, 10여 명의 중경상자 발생/ 변밀운, 황종진, 서의현 총무원장 상대로 총무원장 직무집행 가처분 신청/ 변밀운측 비상종단운영회의 상임위원회 개최, 별도의 조계종 총무원 결성, 12월 27일 봉은사 경내에 총무원 현판식 거행 총무원 청사에 김대심 등 승려 청년 50여 명 난입

1989년 봉은사측 조계종 전국승려대회를 통도사에서 개최/ 중앙종회, 총무원장에게 봉은사 사태 해결 위임, 변밀운등 해종행위자 중징계 결의/ 서의현, 변밀운 봉은사문제 합의서 발표, 각각 소송취하 유감 표시/ 본사주지협의회 결성, 총무원장 서의현 지지파와 반대파 대립 9월 통도사에서 전국승려 및 불교도대회 개최, 600여 명 참석, 총무원장 및 집행부 퇴진. 중앙종회 해산, 종단 제도개혁 실시 등 결의 / 강남 총무원 출범

1992년 강북 강남 양 총무원 문화부 중재로 임시 중앙종회 개최 원로 스님과 개혁위원회 강남북 합의문 배제 및 원로회의 주도의 개혁안 마련 결의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 3선 문제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 조계사서 구종법회 입재/ 경찰 구종법회 대중 강제 연행 / 27대 총무원장에 서의현 선출/ 4월 10일 전국 승려대회 개최, 총무원 점거 몸싸움/ 개혁회의 출범, 원로회의 전국승려대회 추인, 중앙종회 서원장 불신임결의, 종회 전권을 개혁회의에 이양하고 해산 / 서암 종정 사퇴, 탈종 발표/ 총무원장 선거로 송월주 당선/ 개혁회의 해체

1995년 선학원 이사회 개최, 조계종 종회 ‘선학원 특별위원회’의 정관개정요구 거부 1997년 월하 종정 사표 제출/ 불교방송 이사장, 사장 공금횡령사건 책임지고 사의 표명/종회 일부 의원 총무원 불신임 성명서 발표

19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대립 발생 / 정화개혁회의 총무원 청사 점거 / 경찰 투입으로 강제 해산

1999년 총무원장 선출과정 문제로 자격시비 / 고산 총무원장 중도 사퇴

2. 시기별 종권 분쟁의 양상

1) 종권분쟁의 전사 ‘불교 정화’

조계종단의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단 출범 전사(前史)인 50년대의 이른바 ‘불교정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조계종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전개되어 비구측의 대처승측 사찰 접수로 진행되었다.(때문에 불교정화라는 용어보다는 사찰정화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또 이때 밀려난 대처측에서는 이것을 ‘법난(法難)’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의 정화 유시도 모 사찰을 방문하던 중 절 경내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내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1)

불교정화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구 대처 분규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과의 밀착, 삼보정재 탕진, 무자격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는 등 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불교 정화의 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년유여를 두고 끌어오던 「정화분쟁」 동안에 대처 비구 양측이 탕진해버린 방대한 불교재산은 현재 고갈상태에 있다. …… 한때는 득의양양했던 「비구승」들도 「승리의 기쁨」을 거품과 같이 날려보내고 지금은 「암중모색」의 고배를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2)

비구측이나 대처측 모두 정화과정은 처절한 생존권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비구측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통사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러나듯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조계종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성립한 것이다.

조계종이 명실상부하게 한국불교의 대표권을 확보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이다. 4·19혁명 후 이승만정권하에서 억압당했던(?) 대처측의 반격으로 불교 분규가 심각하게 재연되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불교 정화로 야기된 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 1월 18일 비구측과 대처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이어 1962년 3월 22일 문교부 주선으로 재건비상종회(대처측 불참)에서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조계종 종헌을 3월 25일에 공포하였다. ‘불교정화’의 구체적 진행과정은 사찰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것은 통합 종단으로 조계종이 성립한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형태를 달리하여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현대 한국불교가 기반하고 있는 경제적 토대가 사찰로 현상화되기 때문이다. 사찰을 장악하는 것은 명분과 공간을 확보함은 물론 사찰이 보유한 경제력과 사찰에 헌납되는 보시금, 입장료 수입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종교집단으로서 조계종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즉 불교정화의 전 과정을 통해 승리의 관건은 명분도, 신도 대중의 지지도 아닌 원초적 폭력을 동반한 승려의 동원력에 기반하고 있으며, 또한 정부권력의 묵인, 방조 내지는 적극적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의 조계종을 일군 ‘불교정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각이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불교는 이처럼 계속되는 宗權鬪爭, 財産分爭 등을 내외적으로 노출시켰으며, 정화운동 자체가 신앙적인 종교운동의 패턴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권력 지향적인 방법으로 이뤄짐으로써 자주적 역량의 마비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3)

이것은 출세간의 도덕적·윤리적 행위가 아닌 가장 세속적이며 비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뿐만 아니라 불교재산의 엄청난 망실, 불교에 대한 불신감, 승려자질 저하, 사회교화·사회복지·교육사업 등의 정체 및 정권에의 예속 심화를 가져왔고, 게다가 분종이라는 갈라서기 결말로써 그후 수많은 종파들이 난립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한국불교의 특징을 낳게 되었다.4)

2) 60년대의 종권 분쟁

종단 출범 후 70년까지는 비구와 대처 싸움이 송사와 사찰접수 시도 등으로 지속되며, 통합 종단 내에서는 종정과 총무원장 간의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다. 이들 대립 중에서 비구와 대처 간의 대립은 1970년 대처측이 분종을 선언하면서 종단 외적인 공방으로 바뀌고 조계종은 비구측이 온전히 장악한 채 내부 권력분쟁으로 양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최초 종헌에서는 종단의 모든 권력이 종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즉 종정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반면 총무원장은 종정 보좌에 불과했다.5) 이는 비구 대처 분규 와중에서 종정을 비구측이 맡기로 했기 때문에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비구측이 취한 방안이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구측의 한 개인이 종단이라는 거대 집단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이 방식에는 권력 소외층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약점은 종단 오너인 종정과 전문경영인적 권한 밖에 행사할 수 없는 총무원장 간의 갈등으로 곧 증명되었다. 67년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 간 대립 내분이 발생한다.

‘인사문제나 재산의 처분 등 종단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데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통합종단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된 청담 스님은 종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 하였고 손경산 총무원장 스님은 종정이 지나치게 실무를 장악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었다.

청담 스님은 손원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동국대학교 재단의 4천여 만 원의 재정손실 의혹을 들어 손원장의 사퇴를 주장했다. 결국 청담 스님의 사퇴로 경산 스님도 사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6)

청담 스님은 퇴진 후에도 ‘내부정화’를 강력히 제기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불교유신재건안’이 총무원측에 의해 거부되자 조계종 탈퇴를 선언하였고 이후 조계종은 청담 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과 손경산 스님 계열로 대립하게 되었다. 청담 스님은 비상종회를 통해 다시 원로원장으로 복귀하였고. 이후 봉은사 땅 매각 문제로 월산 총무원장이 사퇴하자 직접 총무원장을 맡아 종권을 행사하다가 1971년 입적하게 된다.

3) 70년대의 종권분쟁

청담 스님을 뒤이어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강석주 스님의 경우는 파벌색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실제 권력을 뒷받침할 세력이 없다는 점 때문에 1년여 만에 사퇴하게 된다. 종단의 주요 권력 축인 종정과 총무원장, 종회의 대립 속에서 1974년 이서옹 스님이 5대 종정으로 취임한 이후 1975년 총무원장을 퇴임시키며 종정중심제를 구축하게 된다.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는 다시 일단의 소외세력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자 했다. 이 결과 78년에는 종정측의 조계사와 종회측의 개운사 2개의 총무원으로 분열하는 극도의 혼란상을 3년간 지속하게 된다.

70년대는 또한 봉은사 부지 매각, 연주암 부지 매각 등 각종 토지처분과 관련한 사건은 물론 특별분담금 문제로 경남 보리암주지를 폭행하는 등 이권과 관련한 각종 물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해프닝은 75년 김대심 일파가 종정을 감금 폭행하고 종권 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4) 80년대의 종권분쟁

80년대는 개운사와 조계사 총무원의 분열이 종식되고 송월주총무원장이 취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 노력은 군화발로 전국 사찰을 짓밟은 신군부의 80. 10. 27 법난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송월주 총무원장은 사퇴를 강요받았다. 80. 11. 5 정화중흥회의 출범 이후 종헌을 개정하여 81년 1월 6일 개정종헌을 공포한다.

개정 종헌은 총무원장 중심제이며 종회는 원로원과 중앙종회의 양원제로, 사법기능의 호계위원회를 신설하여 3권 분립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후 실권이 없어진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보다는 종단 대표권자인 총무원장과 대의기구인 종회와의 대립이 80년대 대립의 축으로 기능하게 된다. 종회의장이 종회 때마다 바뀌고, 총무원장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한 강화를 꾀하다 성수, 법전, 황진경, 정초우, 다시 황진경 스님으로 계속 바뀌었다.

그 이면에는 전국 주요사찰의 예산을 총무원에서 조정, 승인하려는 ‘주요사찰예산조정’ 신설(65회 중앙종회, 81년 4월), ‘직영사찰관리법’(68회 종회, 불국사, 신흥사, 석굴암, 낙산사, 능인정사를 총무원 직할로 제정하여 본사와 대립) 등 재정과 인사권과 관련한 제세력 간의 알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단의 중앙권력 다툼은 83년 신흥사 살인사태로 파국에 이르게 된다.

83년 8월 6일 신임주지로 부임하기 위해 신흥사에 들어가던 전 총무원 규정부장 혜법 스님 일행 14명은 신임주지 부임을 반대하던 신흥사측의 습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주지다툼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자 여론은 들끓고 당시 문화공보부는 속초시장을 신흥사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하고 불교계 정화를 요구했다.

83년 9월5일 조계사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운영회의가 설치되었으나 비상종단의 새 종헌안에 대해(종정을 상징적인 위치로 한정하고 총무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며, 본말사를 폐지하는 중앙집권제 제도개혁안) 성철 종정이 사퇴하고 원로회의에서 인준을 거부하는 등 원로 중진의 지지를 못 받아 1년여 만에 좌초하게 된다.

86. 8월 22일 오녹원 총무원장이 사퇴하고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선다. 이후 88년의 종헌안 개정은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94년 종단 개혁 때까지 서의현 총무원장의 독주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5) 90년대의 종권분쟁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6) 분쟁의 특징

조계종 종권분쟁에서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권위의 실종

― 일상화된 갈등과 대립을 중재할 권위가 없다. 분쟁이 벌어지면 모두가 분쟁 당사자가 되어 버린다.

2) 지루한 법정송사

― 합법성과 정당성 판별을 세속법에 의존한다. 비구대처 분쟁시기부터 고도화된 불교계의 송사 기법은 한국사회에서 정상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 쪽에서 선거나 임명절차의 문제점을 들어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면, 다른쪽은 직무방해금지 가처분을 제청하고, 다시 출입금지 가처분신청으로 대응하는 등 법적 공방이 끝날 줄 모른다. 일례로 94년 종단개혁으로 출범한 송월주 총무원장이 자격에 관련한 법적 송사에서 최종 승리한 것은 임기만료를 불과 몇 개월 남겨 놓았을 때인 1998년이다.

3) 총무원 건물을 둘러싼 중세적 공방전

― 조계사 내에 위치한 총무원 공간을 확보하면 종단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상심리가 종단에는 팽배하다.

4) 폭력으로 쉽게 비화

―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 중심주의로 말미암아 과정에서의 폭력 동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것도 폭력을 유발하는 한 요인이다. 이는 아마도 비구대처 분쟁의 경험이 누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전임 주지가 사찰을 쉽게 양도하지 않으려고 하면 인원을 동원하여 접수하러 가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 경우 세력 과시가 실패하면 물리적 충돌밖에 남는 것이 없다.

5) 분쟁에 필요한 실제 동력은 비구승

― 물론 승려대회 등에는 비구니는 물론 재가신자들도 조직적으로 동원되지만 비구의 숫자가 가장 중요하다. 초기 교단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권위가 존재했기 때문에 지도력에 대한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한때 데바닷다를 중심으로 하는 도전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이 교단을 떠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부처님 입멸 후 교단은 남기신 가르침과 율장을 근거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평등한 공동체로 유지되었다. 상가(Sangha, 僧伽)라고 불리는 불교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평등한 권리와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대중공사(大衆公事), 혹은 산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라는 전통으로 근세까지 남아 있었다. 동시에 수행과 깨달음의 권위가 교단 내에 엄존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권력과 이해를 향한 다툼은 내부 구성원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제어해 왔다.

이러한 민주적 전통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사찰령(寺刹令)으로 파괴되고 만다. 즉 전체 대중의 민주적 합의라는 전통 대신 주지 1인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고 주지 1인에 대한 승인권을 총독부가 쥠으로써 효과적으로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30본산제와 ‘주지 1인의 전횡’이라는 악습은 지금까지도 형태만 달리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조계종은 불행하다.

근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내부적으로 존경할 만한 권위를 형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단의 출발부터 분쟁타협의 부산물이었다. 비구측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 급선무가 돼 방법에 대한 불교적(율장에 근거한) 성찰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다. 이러한 불행한 출발이 현재의 모순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전통을 말하는 한국불교에서 선지식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는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입적을 계기로 전 국민의 시선을 모았던 성철 종정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선적 깨달음의 절대화를 부르짖지만, 실제 검증되지 않은, 또한 검증될 수 없는 권위에 대한 대중적 냉소가 한 몫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권위의 부재를 제도와 법적 질서로 대치해야 하는 것이 조계종의 상황이다.

권위가 실종된 상황에서 남은 것은 천박한 이해관계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계종의 ‘신성(神聖)을 상징하며 종통(宗統)을 승계(承繼)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종헌 제19조)를 지닌 종정 스님을 살펴보자. 종정 자리 또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종정 추대문제로 내분이 발생한 90년 당시의 〈‘진흙밭의 개싸움’ 또 시작인가〉라는 제하의 불교기자협회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한편 종정 추대문제가 발단이 돼 현재 9개월째 접어들고 있는 조계종 사태의 양 당사자들은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라며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세간의 여론은 그 어느 쪽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보다 ‘또 시작됐구나’ 하는 정도의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 50년대의 소위 ‘정화운동’을 제외하고 ‘61년 통합종단 이후 벌어진 조계종 분규의 양상을 익히 알고 있는 불자들이 그렇게 쉽게 분규의 어느 한 쪽을 지지하지 않으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그도 그럴 것이 62년부터 86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취임까지 24년간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됐으나 거의 대부분이 세간의 불자들이 이해할 만한 명분이 없는 승려들끼리의 자리다툼의 모습으로만 비쳐졌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30여 년 간 세간의 시선을 끌었던 굵직한 종단내 사건들이 결국은 단순한 종권, 주지권, 이권 다툼이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7)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는’ 종정 추대문제를 ‘진흙밭의 개싸움’이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것도 객관적 시각을 유지해야 하는 언론이기는 하지만 불교에 대한 애정과 신심을 가지고 있는 불교계의 기자들이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공공연할 정도로 조계종의 역사는 분쟁과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이 기사는 종단의 모든 사건이 ‘종권’ ‘주지권’ ‘이권다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한 몸이다. 주지 자리와 이권을 결정짓는 총체적 권력은 바로 ‘종권’이며 종권을 향한 무리수가 계속 두어지는 것은 종권을 획득함으로써 얻어지는 실질적 효과가 주지 자리와 이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가사회가 자기 정화를 위해 취하는 노력이 구성원들에게조차 동의 받지 못하는 한심한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분쟁에서 승리한 측은 패배한 측에 대해 멸빈, 제적, 공권정지 등 중징계를 취하지만, 징계를 당하는 측은 이권다툼에서의 패배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여전히 자기 문중과 지역에서 활보하며, 뒷전에서는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금 화해하며 새로운 분쟁을 기다리며 분쟁을 획책하고 있다.

출전 : 불교평론 2001/02/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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