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9-25 (화) 05:38
분 류 사전1
ㆍ조회: 1970      
[조선] 과전법 (두산)
과전법(科田法)

고려의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1391년(공양왕 3) 사전 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으로 삼은 토지 제도.

고려의 토지 제도는 경종 ·목종 ·문종 때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문종 때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의 제정 실시 후 사전의 확대와 과점(過占)의 모순을 자아냈다. 더욱이 무신란(武臣亂) 이후 권문 세족들의 농장 확대와 사원전(寺院田)의 팽창으로 국가 경제의 파탄과 농민들의 생활고는 극심하였고, 관료들에게 분급할 전지마저 부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종 때 급전도감(給田都監), 충선왕 때 전민추쇄도감(田民推刷都監),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문 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장 몰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근거하에서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는 사전 개혁을 주장하였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은 전제 개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온건한 개혁파 조민수(曺敏修) ·이색(李穡) 등의 반대가 있자 이들을 축출하고, 우왕(禑王)의 아들 창왕(昌王)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1390년(공양왕 2)에 종래의 공사 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1391년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 개혁은 귀족의 경제적 파괴이며 신흥 사대부에 의한 새 왕조인 조선조(朝鮮朝)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이다.

당시의 토지 결수(土地結數)를 보면, 경기도의 실전(實田) 13만 1755결(結), 황원전(荒遠田) 8,387결, 과전 ·공신전 ·별사전(別賜田) ·능침전(陵寢田)과 경기 내의 관아(官衙)에 속하는 공해전(公演田)으로 하고, 지방의 실전 49만 1342결, 황원전 16만 6643결은 공전으로 하여 군전(軍田)으로 삼았다.

과전법의 특색을 보면 개혁의 원래 취지는 전시과의 기본 원칙에 환원함으로써 관료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은 국유(國有)가 원칙이며,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며,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직산자(職散者)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고, 사전인 경우는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전시과와는 달리 시지(柴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전호(佃戶)가 전주(田主)에게 50 %의 조(租)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

과전법에 의한 토지 개혁은 경자 유전(耕者有田)에 의한 균등 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다. 다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과전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 ·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1417년(태종 17)에는 과전으로 지급될 땅 1/3을 하삼도(下三道: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급(移給)하였다. 세원(稅源)의 감소와 식량부족으로 1431년(세종 13)에는 하삼도 사전을 다시 경기로 이환(移還)하게 되었고, 1434년에는 공해전을 축소 정리하여 과전을 보충하였으며, 1443년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세(田稅)를 개혁하여 세율을 낮추고, 20년마다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양안(量案 :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호적을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곧 과전법의 폐단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1466년(세조 12)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현직 관료에 한하여 최고 110결~10결까지 과전을 지급하였다. 이 제도는 관료의 퇴직 후 또는 사후(死後)에 대하여는 아무 보장이 없는 제도였기 때문에 재직 중의 수탈(收奪)이 심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윗글 [고려/조선] 녹봉 (민족)
아래글 [조선] 근세 사회의 성격 (지도서)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 사전1 [고려] 고려시대의 과거 (두산) 이창호 2001-09-01 1432
29 사전1 [고려/조선] 녹과 (두산) 이창호 2002-09-11 1363
28 사전1 [고려/조선] 녹봉 (두산) 이창호 2002-09-11 1379
27 사전1 [고려] 녹과전 (두산) 이창호 2001-09-01 1013
26 사전1 [조선] 조선의 토지 제도 (두산) 이창호 2001-09-25 1162
25 사전1 [고려/조선] 녹봉 (민족) 이창호 2002-09-11 2110
24 사전1 [조선] 과전법 (두산) 이창호 2001-09-25 1970
23 사전1 [조선] 근세 사회의 성격 (지도서) 이창호 2001-06-20 2471
22 사전1 [고려] 조계종 (한메) 이창호 2001-06-03 1075
21 사전1 [고려] 조계종 (두산) 이창호 2001-06-03 1034
1,,,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