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1-10 (수) 10:38
분 류 사전2
ㆍ조회: 387      
[조선] 동서 분당 (브리)
동서분당 東西分黨

조선 시대 선조 때 사림(士林)이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金孝元)을 추종하는 동인(東人)으로 분열된 사실을 일컫는 말. 이를 보통 붕당 정치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동서 분당의 배경

붕당의 형성은 사림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으로 야기되었다. 사림은 고려 말기 온건 개혁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급진적인 개혁이나 역성 혁명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며, 급진 개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개창하자 지방에 은거하면서 향촌의 교화와 교육에 전념했다. 조선을 건국한 급진 개혁파는 중앙 집권에 입각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약 1세기가 지난 세조 때에 이르면 주도권을 장악한 훈구파는 이미 대지주가 되어 있었고, 권력의 남용에 의한 비리가 향촌의 안정을 파괴하는 상황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촌의 주도층인 사림들은 자구책으로 중앙으로 정치적 진출을 모색했는데, 이는 훈구의 독주 속에서 친위 관료를 필요로 하는 성종의 요구와 부합하여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사림은 중앙 정치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의사가 수렴될 수 있는 정치 구조의 변화를 추진했다.

먼저 성종 때는 홍문관을 중심으로 언론권을 강화하여 훈구 세력의 독주와 비리를 견제했다. 중종 때는 낭관권을 형성하여 재상들의 독주를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부터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견제 구조를 확보했다. 이러한 권력에의 참여를 확보하면서 사림들은 재야 사림들을 중앙 정치에 수용할 수 있는 천거제를 시행했고, 나아가 공론을 통해 재지 사족들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지방의 운영에도 관심을 기울여 성종 때는 유향소 복립(留鄕所復立)을 통하여 향사례(鄕射禮)ㆍ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실시해 향촌의 자치를 보장하려고 노력했고, 중종 때는 향약의 실시를 통해서 향촌의 자치적인 역량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기득권자인 훈신들과의 첨예한 갈등의 소산인 무오사화(戊午士禍)ㆍ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당하게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종 중기부터 명종 말기까지는 권력 구조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권력을 대변하는 권신(權臣)이 출현하여, 사림 정치의 형성이 저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림들이 주장하는 정치 이념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설득력이 있었으므로, 이해를 대변하는 광범위한 재야 사림의 재생산 구조를 기반으로 사화의 무력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권신을 도태시키면서 주도권을 강화해갔다.

동서 분당의 형성

이러한 배경 위에 명종 말기 권신들이 도태되자, 사림은 언관권과 낭관권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재정립했고 그 과정에서 재상들과 낭관들 사이에 갈등이 노출되었다. 이는 이황(李滉)을 종주로 하는 기대승(奇大升) 등 신진들과 이준경(李浚慶)ㆍ김개(金鎧) 등 선배들 사이의 알력이었다. 당시 이를 노소당(老少黨)으로 지목하기도 했으나 이들의 대립은 붕당은 아니었고 재상과 낭관의 대립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준경 등은 물러났고, 사림이 서서히 재상직에 진입하면서 1575년(선조 8) 이후부터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무렵 서서히 붕당의 조짐이 나타났다. 사림의 선배 집단이 재상의 지위를 확보해가자, 이들과 낭관권ㆍ언권을 바탕으로 하는 후배 집단간의 소속 권력 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구조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다.

이 두 집단간의 갈등은 서서히 표출되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이 김효원과 심의겸의 개인적인 대립이었다. 이 대립의 발단은 심의겸이 전랑(銓郞)으로 있으면서 김효원의 천거를 막았으나 수년 뒤에 김효원이 전랑에 오르면서 비롯되었다. 즉 김효원이 심의겸을 비난하면서 그 갈등은 드러났고, 김효원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전랑에 천거해주지 않아 이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이러한 대립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관계에 불과했으나 잠재했던 구조적인 긴장 관계를 노출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직 이때까지는 선배 집단이 재상권에 진입해가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둘 사이는 수시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분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양자의 충돌을 빌미삼아 집단적인 대결의 양상이 나타나자 이 문제가 조정에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이(李珥)의 중재에 따라 김효원과 심의겸은 외직으로 내보내졌다. 그러나 이들의 충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개인 차원에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임의 임명에 대해서 김효원당에서는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조처했다고 생각했고, 심의겸당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김효원당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획책하여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어갔다.

시간이 흘러 1578년(선조 11) 무렵에 이르면 김효원당이 완전히 낭관과 언관을 장악하고, 이이ㆍ이산보(李山甫) 등 중립적 위치에 있던 이들을 심의겸당으로 몰아붙이면서 선배당인 서인과 후배당인 동인으로 분리되어 구체적으로 붕당을 형성했다.

재상권에 기반을 둔 서인들은 이이를 주축으로 동인을 붕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공격의 초점은 낭관권의 결집핵인 자천제(自薦制)와 언관권의 이념적 토대인 공론(公論)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는 사화와 권신들의 압력 속에서 유지ㆍ강화되어온 언권과 낭권의 성장과정을 생각해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인은 이이의 죽음으로 세력이 위축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인이 성장해오면서 새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언관권과 낭관권을 인정하고 서인과 동인이 기본적으로 동질 집단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인의 입장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이귀(李貴)의 상소로, 그는 "서인도 사류(士類)이다"라고 전제함으로써 서인도 공론지인(公論之人)으로 자처하는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재상권을 토대로 하면서 낭관권이나 공론을 부정하던 서인이 낭관과 언관의 토대로 인식되었던 공론과의 연결을 주장하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이것은 당시 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고 생각되는데, 결국 이로 인해 공론에 입각한 붕당 정치가 정립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었다. 이는 사림이 추구해왔던 공론 정치의 이상이 새로운 정치의 운영 방식인 붕당 정치를 통해서 정립되는 현상이었다. → 동인, 서인, 붕당정치

최이돈(崔異敦)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윗글 [조선] 붕당정치 (브리)
아래글 [조선] 세도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800 사전2 [근대] 국민대표회의 (위키) 이창호 2013-07-15 1011
799 사전2 [조선] 서원철폐 (두산) 이창호 2012-05-25 911
798 사전2 [조선] 서원철폐령 (위키) 이창호 2012-05-25 1478
797 사전2 [고려] 귀법사 (민족) 이창호 2012-02-18 891
796 사전2 [현대] 신탁통치반대운동 (브리) 이창호 2011-09-13 872
795 사전2 [근대] 송진우 (브리) 이창호 2011-09-13 968
794 사전2 [근대] 송진우 (한메) 이창호 2011-09-13 870
793 사전2 [근대] 송진우 (두산) 이창호 2011-09-13 931
792 사전2 [근대] 송진우 (민족) 이창호 2011-09-13 866
791 사전2 [근대] 수신사 (한메) 이창호 2011-04-24 998
12345678910,,,8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