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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2-08 (수)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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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4 (두산)
조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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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학문

조선의 정치ㆍ사회의 안정과 국력의 충실은 조선왕조로 하여금 초기부터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였는데, 특히 유학을 정치ㆍ사회ㆍ문화의 바탕으로 삼게 되면서 학문활동이 매우 진전되었다. 게다가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1. 국어국문학

조선의 국어ㆍ국문학은 훈민정음의 창제를 계기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녔으나 조선 초까지 우리의 고유한 문자를 갖지 못하고 한자(漢字)를 써오다가 훈민정음의 창제로 비로소 독립적인 문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우리 고유의 언어에 알맞으며, 자유로이 생각하는 바를 적을 수 있고, 배우기 쉬운 글자를 창제하기 위하여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1443년 28자의 표음문자(表音文字)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새 문자의 시험을 위하여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첫 시도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보고, 창제한 지 3년 후 반포하였다. 그 후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天江之曲)》이 지어졌고, 이어 《동국정운》을 간행, 훈민정음을 가지고 당시의 어지럽던 한자음(漢字音)을 본바탕에 따라 바로잡아 놓았다. 이후 훈민정음은 광범하게 이용되고 이에 따라 국어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세조 때에는 많은 불경을 언해(諺解)하여 훈민정음 보급에 힘썼다.

성종 때 지은 《내훈(內訓)》은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중종 때에는 최세진(崔世珍)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간행하고, 후기에 이르러 실학사상에 입각한 주체의식이 고양되면서 국어학의 연구도 활기를 띠었다. 신경준(申景濬)은 음운연구에, 유희(柳僖)는 한글의 음리(音理)ㆍ음가(音價)를 밝힘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 밖에 이성지(李成之)ㆍ이의봉(李義鳳)ㆍ정약용(丁若鏞) 등이 한글의 어휘를 수집하는 데 힘썼다.

국어학 연구는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민족의식이 싹틈에 따라 새로이 진전되었다. 정부에서는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립, 주시경(周時經)ㆍ최광옥(崔光玉)으로 하여금 국어를 정리토록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국어의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시조와 가사문학 등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문학의 새로운 발달을 가져왔다. 우선,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서사시는 민족문학사에 있어 획기적 디딤돌이 되었다.

시조문학은 초기부터 발달, 김종서ㆍ남이(南怡)의 작품은 패기와 자신에 넘쳤고, 길재(吉再)ㆍ원천석(元天錫) 등의 시조는 유교적 충절을 읊고 있다. 16세기에는 특히 시조가 발달하였는데, 황진이(黃眞伊)의 시조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을 꾸밈없이 노래하였고, 윤선도(尹善道)는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은둔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18세기의 시조작가인 김천택(金天澤)과 김수장(金壽長)은 역대 시조와 가사를 모아 《청구영언(靑丘永言)》과 《해동가요(海東歌謠)》를 각각 편찬하였다.

가사문학의 선구자는 정극인(丁克仁)이며, 그의 작품 《상춘곡(賞春曲)》은 가치가 높다. 가사문학의 대표적 작가는 16세기의 정철(鄭澈)인데, 그는 풍부한 우리말의 어휘를 마음껏 구사하여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將進酒辭)》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 후 박인로(朴仁老)ㆍ김인겸(金仁謙) 등이 이름을 떨쳤다.

국문학은 조선 후기에 특히 발달하였는데, 한글 소설의 보급은 국문학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허균(許筠)은 최초로 한글소설을 지었는데, 당시 사회비판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한 《홍길동전(洪吉童傳)》은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소설로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가 유명하고, 군담소설로서 《임진록(壬辰錄)》 《임경업전(林慶業傳)》 등이 널리 읽혔다. 18세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춘향전》은 고대소설의 대표작품으로 인간평등의 사회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애정소설이다.

그 밖에 교훈적이고 사회풍자적인 《심청전》 《흥부전》 《장끼전》 《두꺼비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 등 작품이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이후로는 잡가(雜歌)와 판소리가 국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잡가로는 타령ㆍ육자배기ㆍ사랑가ㆍ수심가 등이 애창되었고, 판소리로는 춘향가ㆍ심청가ㆍ토끼타령ㆍ가루지기타령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개화기에 이르자 고대문학은 신문학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2. 한문학

한글이 창제되고 보급되었다고는 하여도 조선의 지배계층에서는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의 한문학은 사장(詞章)을 좋아하는 관료 문신들에 의해 발달하였는데, 서거정은 《동문선(東文選)》을 펴내 한국의 역대 시문을 정리하였다. 한편, 고려 이래의 설화문학이 계승 발전되었으며, 특히 《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화(東人詩話)》 《용재총화(傭齋叢話)》 등은 대표적 작품들이다.

설화문학을 크게 발전시킨 이는 김시습(金時習)으로, 중국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모방하여 한국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16세기에는 어숙권(魚叔權)이 《패관잡기(稗官雜記)》를 지어 당시 사회를 비판하였으며, 임제(林悌)는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시와 산문을 써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유학자들의 사대사상을 비판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한문학은 크게 발달하여 문장에서는 이정구(李廷龜)ㆍ신흠(申欽)ㆍ장유(張維)ㆍ이식(李植) 등이, 한시에서는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ㆍ이서구(李書九) 등이 문호로서 이름을 떨쳤다. 18세기의 박지원(朴趾源)은 문학창작의 주체를 양반뿐만 아니라 서민에까지 확대시켰고, 그 형식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양반전(兩班傳)》 《민옹전(閔翁傳)》 등이 유명하다. 19세기에는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이 많은 작품을 남겼다.

3. 성리학

조선 유학의 특징은 성리학(性理學)의 발달에 있다. 성리학은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것으로서 자구(字句) 해석에 치중하던 종래의 유학과는 달리, 우주와 인간의 근본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유학인데, 고려 말에 한국에 전래되었다. 조선을 세운 신진사대부들은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내세워 유학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정치지도 이념으로 정착시키는 동시에 사회개혁과 국가운영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특히 세종ㆍ세조에 의해 주도되어 개성이 강한 관학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관학파는 훈구파(勳舊派)라고도 하는데, 국가창업 과정에 기여한 정도전ㆍ하륜(河崙)ㆍ권근(權近) 등과 그의 제자들로서, 집현전ㆍ홍문관을 중심으로 관찬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으며, 특히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신숙주(申叔舟)ㆍ양성지(梁誠之)ㆍ서거정 등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편, 조선의 개창을 둘러싸고 길재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왕조 교체가 유교적 윤리와 의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역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김종직에 이르러 그 수가 크게 늘어 영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림파를 형성하였는데 사장 중심의 훈구파와 달리 경학(經學)에 치중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사림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일손(金馹孫)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만,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불가피하였고, 그러한 갈등 속에서 사림들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사림들은 초야에 은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에만 힘쓰고자 하는 기풍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16세기 이후 심오한 철학적 논쟁이 피어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의 철학적 조류는 크게 경험적 세계를 중요시하는 주기파(主氣派)와 원리적 문제를 중요시하는 주리파(主理派)의 두 계통으로 발전하였다. 주기파는 서경덕(徐敬德)에서 비롯되어 이이(李珥)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경험적 현실세계를 존중하여 정치ㆍ경제ㆍ국방 등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주기파는 이이의 벗인 성혼(成渾)ㆍ송익필(宋翼弼)과 그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등 이른바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한편, 주리파는 이언적(李彦迪)에게서 비롯되어 이황(李滉)에 의해 대성되었는데,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요시하여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규범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리파는 이황ㆍ조식(曺植) 이후 김성일(金誠一)ㆍ정구(鄭逑)ㆍ허목(許穆) 등 영남학파에 의해 계통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성리학은 17세기에 이르러 신분질서의 안정에 필요한 의례를 중요시하여 상장제례(喪葬祭禮)에 관한 예학(禮學)으로 발전하였는데, 기호학파에서는 김장생ㆍ송시열이, 영남학파에서는 정구ㆍ허목이 이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은 기호학파가 정권을 주도하면서 주기설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는 인간의 심성문제를 둘러싸고 큰 논쟁을 펴기도 하였다. 한원진(韓元震)ㆍ이간(李柬) 등이 당시 심성론(心性論)의 대가였다. 그러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의 자극을 받는 과정에서 주리설이 대두되어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의 철학적 기반을 부여하였다. 이항로(李恒老)ㆍ기정진(奇正鎭) 등은 19세기 중엽의 대표적 위정척사 운동가였다.

성리학의 발달과 아울러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운동도 일어났는데, 윤휴(尹稶)ㆍ박세당(朴世堂)ㆍ정약용 등은 유교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정제두(鄭齊斗)를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江華學派)에서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조선사회에서 그 지위를 굳히지 못하였다.

4. 실학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그 지도이념의 한계성이 노출되고 자기 전통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길이 모색되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문화의 한계성을 깨닫고,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달성함으로써,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운동은 학술과 종교ㆍ문학ㆍ예술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였지만, 특히 학술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기풍을 실학(實學)이라 한다. 실학운동에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ㆍ정약용 등이 주도한 중농적(重農的) 실학파로서 농촌사회의 안정과 농민의 이익을 강력하게 대변하고자 하였고, 다른 하나는 유수원(柳壽垣)ㆍ박지원ㆍ박제가에 의해 주도된 중상적(重商的) 실학파로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개발을 역설하였다.

중농적 실학파에서는 농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는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여 유형원은 균전론(均田論)을, 이익은 한전론(限田論)을, 정약용은 정전론(井田論)과 여전론(閭田論)을 각기 그들의 저서인 《반계수록(磻溪隨錄)》 《성호사설(星湖僿說)》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에서 정치ㆍ경제ㆍ군사ㆍ자연과학ㆍ철학ㆍ언어학ㆍ지리학ㆍ의학 등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중상적 실학은 18세기 후반에 와서 크게 발달한 상공업과 급속히 성장한 청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하였는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고 하여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고, 물질문화에 특히 관심이 많았으므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라고도 한다. 중상적 실학파에서는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극복하고 상공업을 일으켜 농업에만 치우친 유교적 이상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5. 역사학

조선의 전통문화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욕은, 특히 역사학에 반영되어 왕성한 사서(史書)의 편찬을 보였다. 조선 초기에는 먼저 실록(實錄)의 편찬에 큰 노력을 기울이는 등 관찬(官撰)의 사서가 많이 출간되었다. 태종 때에 《태조실록(太祖實錄)》이 편찬된 이래로 역대 제왕의 실록이 차례로 이루어져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조선시대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고 있다.

또 고려문화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도 계속되어 기전체(紀傳體)의 《고려사》와 편년체(編年體)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간행되었고, 통사(通史)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동국통감》으로 나타났으며,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엮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의식이 강하게 나타나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던 때였으므로, 통사에서는 으레 단군조선을 민족사의 기원으로 서술하였다.

그 후 16세기에는 사림들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사서가 편찬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은 박상(朴祥)의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유희령(柳希齡)의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이다. 한편, 사림들은 왕도(王道)의 숭상과 관련하여 왕도의 창시자로서 기자(箕子)를 높이 추앙하였는데, 윤두수(尹斗壽)의 《기자지(箕子志)》와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는 그러한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17세기에서도 16세기와 같이 유교문화 중심으로 사서가 편찬되었으며,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이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래로 만주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국사에 대한 체계적 인식과 역사를 실증적 바탕에서 이해하려는 새로운 역사연구가 이루어졌다.

즉, 허목(許穆)ㆍ북애노인(北崖老人)은 각기 《동사(東事)》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지어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임상덕(林象德)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서 고대의 강역과 단군에 관한 사실을 고증하였으며, 이어서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는 가장 우수한 개설서를 저술하여 선배 역사가들의 연구내용을 종합하고 새로운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한국 고증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이종휘(李種徽)와 유득공은 각기 《동사(東史)》와 《발해고(渤海考)》를 써서 고구려와 발해사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는데,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으로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기에 힘썼다.

19세기 초에는 한치윤(韓致奫)이 《해동역사(海東繹史)》를, 이긍익(李肯翊)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펴냈는데, 《해동역사》는 500여 종의 외국자료를 인용하여 국사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연려실기술》은 400여 종의 자료를 참고하여 조선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것으로,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서술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후 개항을 맞아 근대적 역사의식이 일어나고, 열강의 침탈로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역사연구가 전개되었는데, 장지연(張志淵)ㆍ신채호(申采浩)ㆍ박은식(朴殷植)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민족사의 성찰을 통한 애국심의 함양을 제시하였다.

6. 지리학

조선왕조는 중앙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 국토의 자연환경과 인문지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정부가 주도하여 초기부터 각종의 지도와 지리서를 제작ㆍ편찬하였다. 먼저 태종 때에는 세계지도로서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와 전국지도로서 《팔도지도》를 제작하였다. 특히 《혼일강리도》는 현재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세계지도로 알려져 있다.

세종 때에는 과학기구를 이용하여 더욱 정밀한 지도인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였고, 지리서로서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성종 때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각 고을의 연혁ㆍ지세ㆍ인물ㆍ풍속ㆍ성씨ㆍ고적ㆍ인구ㆍ토지ㆍ산물ㆍ교통 등을 자세히 수록하여, 당시 국토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수준을 크게 높였다.

조선 후기에도 문예가 크게 진흥됨과 아울러 전국 규모의 지리서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 《동국문헌비고여지고》가, 정조 때에 《여지도서(輿地圖書)》가 간행되었다. 개인 저술로는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가 유명하다. 이 밖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誌)》와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등이 상업 혹은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간행되었다.

지도 제작에서는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김정호의 《청구도(靑丘圖)》 및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가장 뛰어나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산업ㆍ경제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ㆍ하천ㆍ목장ㆍ제언ㆍ항만, 그리고 도로망이 매우 정밀하게 표시되어 있어 상인들에게 널리 이용되었다.

7. 과학기술

조선 초기에는 새 왕조 창건사업과 관련하여 각 방면의 과학ㆍ기술이 발달하여 여러 가지 저술과 발명이 이루어졌다. 먼저 중농정책과 관련하여 농학(農學)이 발달하였는데, 세종 때에는 한국 풍토에 맞는 농사기술과 품종의 개량을 위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의 강희맹(姜希孟)은 금양(衿陽:지금의 시흥) 지방에서 직접 경험하고 들은 농경방법을 《금양잡록(衿陽雜錄)》에 소개하였다.

농학의 발달과 관련하여 농업에 관련된 천문ㆍ기상ㆍ역법(曆法)ㆍ측량ㆍ수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리하여 천체ㆍ시간ㆍ기상ㆍ토지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각종 기구가 발명ㆍ제작되었다. 천체관측기구로서 혼천의(渾天儀)ㆍ간의(簡儀) 등이 제작되고, 시간측정기구인 앙부일구(仰釜日晷)ㆍ자격루(自擊漏) 등이 만들어졌는데, 그 성능이 매우 우수하였다. 특히, 세종 때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하여 전국 각지의 강수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였다.

한편, 역법도 한국 실정에 맞게 재구성되어 세종 때에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라는 달력을 펴냈다. 또, 세조 때에는 토지의 높낮음ㆍ거리 등을 측량하는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를 제작하여 양전사업(量田事業)과 지도제작에 이용하였다. 한편, 천문ㆍ역법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토지조사ㆍ조세산출 등의 필요에 따라 수학이 발달하였는데, 당시 수학 교재로는 《상명산법(詳明算法)》 《산학계몽(算學啓蒙)》 등이 있다. 의학ㆍ약학에서는 세종 때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편찬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풍토에 알맞는 약재와 치료방법을 개발ㆍ정리한 것이며, 같은 때에 펴낸 《의방유취》는 의학백과사전이다.

국방강화정책과 관련하여 무기제조기술도 크게 혁신되었다. 사정거리 1,300보(步)의 화포, 로켓포와 비슷한 화차(火車)가 제조되고, 병선으로는 작고 날쌘 비거도선(鼻居刀船)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전투선인 거북선이 제작되었다. 편찬사업의 융성은 인쇄문화와 제지술의 발달을 촉진시켜, 태종 때의 계미자(癸未字), 세종 때의 갑인자(甲寅字)는 정교하기로 이름났다. 종이 만드는 원료만도 20여 종이 개발되고 그 생산량도 많았다.

그러나 15세기에 발달된 과학기술은 16세기 이후 기술을 천시하는 풍조가 유행하면서 침체에 빠졌고, 그 후 17세기 이래로 다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과학ㆍ기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이루어졌다. 먼저, 농학분야에서는 효종 때 《농가집성(農家集成)》이 편찬된 이래로 많은 농서(農書)가 출간되었는데, 박세당의 《색경(穡經)》,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褻)》, 서호수(徐浩修)의《해동농서(海東農書)》 등이 유명하다. 이들 농서에서는 조선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농경방법을 제시하였다.

천문학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 새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미 17세기 초의 이수광(李磎光)은 일식ㆍ월식ㆍ조수(潮水)의 간만 등에 관심을 보였고, 김석문(金錫文)ㆍ홍대용(洪大容)ㆍ정약용 등은 지구의 자전설(自轉說)을 주장하여 전통적인 천동설(天動說)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의학 분야에서는 광해군 때 허준(許浚)이 《동의보감》을, 허임(許任)이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하여 진료에 이바지하였으며, 정약용은 마마를 연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고, 종두법(種痘法)을 처음으로 실험하였다. 그 후 이제마(李濟馬)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저술하여 체질에 맞는 진료법인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발달은 조선 초기의 성과를 계승ㆍ발전시킨 것이나,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서양 과학ㆍ기술 문명의 영향도 크다. 즉, 선조 말년 이래로 서양인이 만든 세계지도ㆍ화포ㆍ망원경ㆍ시계ㆍ천문서적 등이 전해졌다. 19세기 초의 정약용은 기술의 진보가 사회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고 믿고 스스로 많은 기계를 제작하거나 설계하였는데 한강의 부교(浮橋) 설계와 수원성 축조를 위한 기중기 고안은 그 대표적 성과이다. 과학ㆍ기술의 발달은 개항 이후 도약을 보였으며 서양의 근대과학문물과 기술이 도입되어 교통ㆍ통신을 비롯하여 전기ㆍ의료ㆍ건축ㆍ산업 등 각 분야에 새로운 시설이 생기고 생활양식이 변모하였다.

(뒤에 계속)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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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