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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23 (월) 18:43
분 류 사전2
ㆍ조회: 2178      
[근대] 경제-개항후 식민지시기의 경제 (민족)
경제(개항 후 서구문화의 수용과 시련)

세부항목

경제
경제(고대 한민족의 경제생활)
경제(중세봉건제하의 사회경제)
경제(근대산업사회로의 발돋움)
경제(개항 후 서구문화의 수용과 시련)
경제(한국자본주의의 전개)
경제(참고문헌)

[개화기의 경제]

서구제국의 상선이 우리 나라에 나타나 통상을 요청한 것은 19세기 초부터이다. 1822년(순조 22) 영국상선이 충청남도 해상에 나타나 통상을 요청한 것을 비롯해, 그 뒤 프랑스·미국·독일·러시아의 상선이나 군함이 여러 차례 우리 연안에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세도정치 아래에서 내정이 문란하고 민심도 불안하여 정부가 뚜렷한 정책으로 이에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구의 통상요청에 대해서도 거부로만 일관했으며 문을 열어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1863년 정치의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내정개혁에는 크게 힘을 기울였으나 대외정책은 여전히 쇄국을 견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구의 기술문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기선과 무기의 우수성을 높이 찬양하여 국내의 기술자에 명하여 그 제조를 종용한 적은 있으나, 적극적인 문호개방은 단행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엄중히 지켜왔다.

한편,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체결하고, 1868년 절대왕권인 메이지정권(明治政權)을 세우면서 서구제국과의 교역에서 입은 손실을 한국에서 보상하려고 일찍부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해 왔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이 시기를 틈타 일본의 한국침략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1876년 한국은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상인들에게 부산항을 개항했으며, 1880년대 초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러시아 등 서구제국과도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수도 한성에 외국공관이 상설되었으며, 부산·인천·원산·목포·군산·진남포 등 국내 주요 항구가 외상(外商)에 개방되었다. 서구문화는 개항장을 통해 물밀듯이 흘러들어왔고, 한국의 전통적 정치·경제·사회·문화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서구의 근대공장제 상품은 일본상인과 청나라상인의 중계무역으로 대량 유입되었으며, 개항장에는 일본과 청나라상인의 상사가 설치되었다. 특히, 인천항에는 미국·영국·독일 등 서구상인이 진출하여 상사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들의 경제활동은 조직면에서나 상거래방법에 있어서 한국의 전통적인 상업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따라서 서구자본주의의 유입은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경제활동에 큰 변화를 주었다.

개항 후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을 맞아 개항장의 상인들은 개항 초기부터 그러한 서구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로 그것을 수용하였다. 그들은 외상으로부터 수입한 공장제 상품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 교역을 했고, 또 그들로부터 서구식 상업조직과 방법을 도입해 자신들의 혁신을 기도하였다.

한편,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에 대응해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혁신운동의 하나로는 우선 상회의소(商會議所)의 결성을 들 수 있다.

이 상회의소는 개항장에 진출한 일본인 상회의소에 대응하여 결성되어 일본상인의 상권침탈을 방어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으나, 일본상인을 무조건 배격하지는 않았다.

우선, 정치적 강세와 때로는 무력의 배경 밑에서 부당한 상권확장을 기도하는 일본상인들의 횡포를 민족상인들이 단결된 힘으로 막아내려 하였고, 대자본력을 갖고 침투하는 일본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자본을 모아 회사를 조직하여 그에 맞서야 했다.

그들은 서구회사를 본떠 상업조직을 혁신하고 영업방법을 개선하며 상업정보를 교환함으로써 변화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상호 협조하였다.

그리고 민족상계(民族商系)의 열세는 자본력이 약한 데 있다고 하여 민족계 금융기관의 설립을 촉구했고, 또 수출입상품을 외국무역업자에게 의존하기 보다, 민족상인이 외국선박을 구입 또는 임대하여 해외시장에 직접 진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기술을 도입하여 국내에 생산공장을 건설할 것을 종용하면서 그에 대한 참여를 적극 장려하였다.

이와 같이, 개항 후에 조직된 민족상인의 조합은 서구자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상회의소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1880년대 초부터 각지 개항장에서 결성되었다.

1882년 원산항에서 조직된 원산상의소는 문헌으로는 최초의 민족상업회의소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그와 때를 전후하여 상인조합이 결성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부산의 객주조합(客主組合), 인천의 신상협회(紳商協會), 한성의 상업회의소, 목포의 사상회(士商會) 등은 모두 1880년대에서 189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상인단체였고, 그 밖에 전국 각 군·읍에서도 한국인상업회의소가 결성되어 일본인상업회의소와 경쟁하였다.

서구자본주의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전개된 혁신운동의 또 하나의 모습으로는 상업회사의 설립을 들 수 있다. 상업회사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1882년 유길준(兪吉濬)의 〈상회규칙 商會規則〉에서 촉구된 바 있고, 또 1883년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사설에서도 역설되었다.

한편, 상인측에서도 청나라와 일본상인에 의한 상권침투가 격심해지자, 하루속히 서구의 발달된 상업조직과 방법을 도입해 외상과의 경쟁에 이겨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것 같다. 그리하여 1880년대초 이미 상업계에서는 상사회사의 설립운동이 활발해졌다.

1884년 4월 19일자 ≪한성순보≫에는 당시 국내에 설립되고 있는 회사로서 서울에 장통회사(長通會社) 등 16개사, 인천에 공흥회사(共興會社) 등 6개사, 부산에 해산회사(海産會社) 등 6개사 등 모두 28개사를 소개하고 있다.

초기의 상사회사는 그 명칭에 부합되는 근대적 주식회사 조직을 가진 것이 적었다고 하더라도, 개항 후 몇 년만에 그러한 회사 및 상회의소의 설립을 본 것은, 상인들의 의식이 근대지향적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한다.

개항장의 객주·여각(旅閣) 및 보부상들이 서구자본주의문화에 접하여 ‘변화에 대한 창조적 반응’을 보이면서 혁신을 기도한 것은 근대적 기업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민족상인의 회사설립은 1890년대에 들어와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의 회사조직이나 운영은 근대기업회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업종도 상사회사와 더불어 산업의 각 부문에 걸쳐 회사가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구자본주의문화의 유입은 정치 및 행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혁신파 인사들이 다수 행정관료로 등용되면서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이 추진되었고, 관제도 개편되어 상공부가 독립된 관서로 승격되었다.

상공인 중에서도 유능한 사람은 실무관료에 채용되는가 하면, 관료출신이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상공업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정부는 개항 후 1880년대 초부터 정부 내의 관서를 개편하고 근대공장건설을 추진해왔다. 1883년 정부는 기기국(機器局)과 전환국(典珤局)을 설치하고, 1885년 직조국(織造局)을, 1887년 조지국(造紙局) 및 광무국(鑛務局)을 신설하여 그 산하에 정부직속공장을 설립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무기의 위력은 이미 체험해온 바 있어, 흥선대원군섭정 때의 쇄국정책에서도 서구식 근대무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제조를 시도한 바 있었다. 개항 후 서구문화의 도입이 허용되자 제일 먼저 무기공장건설에 힘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정부는 개항 후 제1차 수신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였을 때도 일본의 무기공장과 조선소를 특별히 돌아보았고, 1881년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로 파견하였을 때는 당시 영선사 김윤식(金允植)이 국내청년 69명을 대동하고 톈진(天津) 기기창(機器廠)에서 신무기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그 때 톈진에서 기술을 수련한 청년기술자가 근간이 되어 1883년 서울 삼청동 북창(北倉)에 기기창을 건립했으며, 그 공장에서는 소총 등을 제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부는 또 1883년 전환국을 신설하고 그 관장하에 서구식 조폐공장이 건립되었다.

이 조폐공장은 처음에 서울 원동(苑洞)에 설립하였다가 그 곳이 좁아 뒤에 남대문 서편으로 옮겨 거기서 최초로 서구식 화폐를 주조하였다.

당시 이 전환국에는 독일인 묄렌도르프(M─ llendorf,P.G.von)를 총감독으로 영입했고, 독일의 기계를 도입하면서 독일기술자 2명을 초청해 기술지도를 담당하게 하였다. 전환국은 1890년 인천에 공장을 건설한 바 있었고, 1896년 인천공장을 폐쇄하고 서울 남대문에 있던 공장은 용산으로 옮겼다.

용산공장은 분석소(分析所)·금속용해소·조각소·철공소·기계소 등을 설비한 근대식 화폐주조공장으로는 손색이 없었으나 을사조약 이후 폐쇄되었다.

1883년 박문국(博文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인쇄기를 도입해 정부의 간행물을 인쇄하는 한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으며, 또 직조국을 두고 그 관장하에 모범 직조공장을 세웠으며, 조지국을 설치하고 제지공장을 건립하였다.

1887년 광무국을 두고, 미국 광산기술자 3명을 초빙하여 전국의 광산을 조사하는 한편, 역시 미국으로부터 광산기계를 수입해 채광작업의 혁신을 기도한 바 있었다.

그 밖에도 정부는 권연국(捲烟局)·양춘국(釀春局)·철도국(鐵道局) 등을 설립하고 제도와 기술면에서 서구문화를 도입해 정부직영으로 운영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은 당시 창의성이 높은 다수의 경제관료들에 의하여 발의되고 실천에 옮겨졌다.

한편, 갑오경장 후 서울에서는 여러 은행이 설립되었다. 1896년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설립되고, 다음 해 한성은행(漢城銀行), 1899년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그리고 1906년 한일은행(韓一銀行)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은행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영업을 계속하였던 것은 아니나, 그 중 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한일은행의 3개 은행은 경영주가 여러 차례 바뀌기는 했으나, 민족계 기업체로서의 계보는 이어져왔다.

이러한 은행의 창립은 관료와 상인자본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은행에 따라서는 상인이 설립을 주도하면서 관료 및 귀족을 참여시키거나 관료가 중심이 되어 상인자본을 규합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개항 후 서구문화의 유입에 자극을 받아 한국사회에서는 개화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으나, 당시의 근대화작업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의 혁신정책이 봉건적 한계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890년대부터 정부는 국정개혁을 시도하였고, 특히 식산흥업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책으로는 서구의 기술은 적극 도입하면서도 경제적 자유민주질서의 도입은 의식적으로 기피하였다. 그것은 당시 비교적 혁신적이라 불리던 관료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개화기의 상공인들이 근대기업의 경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였다는 점이다. 1890년대부터 한성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읍에서는 근대적 기업회사 및 생산공장이 다수 건립되었고, 회사나 공장들의 조직은 서구기업을 본떴으나 경영은 전통적 방법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대서구식 부기(簿記)가 기업회사에 도입된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1903년에 개편된 한성은행에서 비롯된다.

셋째, 일본군국주의의 거센 침략행위에 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내정간섭은 심화되고 대자본이 적극 진출하였으며, 러일전쟁 후 한국의 정치·경제의 대권은 사실상 일제의 수중에 들어갔다.

1905년의 일본인 재정고문의 지휘로 단행된 화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일본통감부 주도하의 각종 경제개혁과정에서 민족자본은 몰락하였고, 극소수의 잔명을 유지하던 민족기업도 결국 일본인 대자본에 예속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의 근대기업]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으로 병합된 뒤 우리 민족의 근대적 발전은 크게 제약받았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직후 〈조선토지조사령 朝鮮土地調査令〉과 〈조선회사령 朝鮮會社令〉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제법령을 발표했다. 1912년에 공포된 〈조선토지조사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8년여에 걸쳐 전국토의 세부측량을 단행했다.

이 조사사업에서 일제는 토지소유권이 분명하지 않다는 구실로 전체 경작지의 12.3%인 35만7000여 정보, 전체 임야의 58%인 294만 정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방대한 조선총독부 소유의 토지와 산림은 일본의 우리 나라 통치에 있어 주요 재원이 되었고, 또한 우리 나라에 진출하는 일본인에게 그 일부를 헐값으로 불하하여 그들의 경제활동 기반을 닦아주었다.

일제는 또 한국농촌에 대해서는 봉건적 현물고율소작료(現物高率小作料)를 근간으로 하는 소작농체제를 그대로 유지 강화함으로써 농민경제의 향상을 억제하였고 농촌의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구의 75%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상황을 보면 55.2%는 순소작인이며, 25.6%는 자작 겸 소작인으로서 그들의 경작규모는 1호당 1정보 미만의 영세농이었다.

1910년 12월에 공포된 〈조선회사령〉은 일제의 조선상공업정책을 집약적으로 표명한 것으로서, 이 법령이 목적한 것은 조선에 근대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있었다.

즉, 조선은 일본공업에 대한 원료제공지요, 상품판매지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령이 실시된 1910년대에는 조선 내에 진출한 일본인기업의 절대다수는 상사회사였고, 그 밖에 광공업 분야에서는 광산개발과 수출원석을 처리하는 제련공장, 수출면화를 위한 조면공장(繰綿工場)이거나 또는 수출미곡을 위한 정미회사(精米會社)가 고작이었다.

이 〈조선회사령〉은 1920년에 철폐되었으나 당시 그 철폐의 경제적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일본 내의 유휴자본을 조선에 옮겨놓고자 한 것이다.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었어도 조선의 공업건설은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유휴자본은 군소자본이었고, 그들은 고율소작지대가 보장되고 있는 토지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근대공장공업의 건설은 부진하였다.

1929년 말 조선의 공업노동자수가 10만190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근대공업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당시 조선 내 근대공업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제지표를 들 수 있다.

즉, 1929년 말 조선의 산업생산액 중 농림·수산업은 전체의 78.6%, 광공업은 겨우 21. 4%였다. 그리고 당시 제조회사의 업종비율은 염직공업(染織工業) 4.7%, 화학공업 15.6%, 기계공업 7.1%, 식품공업 43.7%, 기타 잡공업 28.9%였다.

이와 같이 〈조선회사령〉이 철폐된 뒤에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는 큰 변동이 없었으며,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량기지와 상품판매지로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에 변화가 온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방을 장악하게 되자, 조선은 대륙전진기지로의 새로운 전략적 시각으로 재검토되었으며, 그때부터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전을 개시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 내의 경제체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물자생산을 위한 정책으로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량증산계획의 재실시와 산금(産金)5개년계획(五個年計劃) 및 조선의 중화학공업기지화계획이라는 세 부문에 걸쳐 집중적 개발을 단행하였다.

식량 특히 미곡증산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조선건설의 기본정책이었고, 따라서 병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의 중점사업으로 진행되어왔으나, 1930년대 초 일본농민이 조선미 수입을 심하게 반대하자 조선산미증산정책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을 개시하면서 대륙에 진출한 일본군대의 군량충당을 위해 조선미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38년 다시 산미증식10개년계획을 세우고 강력히 추진시켰으나, 당시는 전시중이어서 화학비료생산의 부진, 농민징용에 따른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미곡증산계획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보유미곡의 징발을 강화하여 군량미를 보충했다.

산금정책(産金政策)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팽창되는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1938년 조선 내에 산금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그 개발을 감행해나갔다. 중화학공업기지화정책은 일본 대재벌의 진출에 따라 1930년대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창설하고 영월과 삼척탄전 개발에 착수했고, 1937년 이래 종래의 일본제철주식회사·겸이포제철회사 외에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청진제철소·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朝鮮理硏金屬株式會社) 인천공장에서 제철공업이 착수되었다.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주식회사도 창설되었다.

이와 같은 국방자원개발과 아울러 금속공업·조선공업·철도차량공업·무수주정공업(無水酒精工業)·화약공업·인조섬유공업 등 중공업이 전력자원과 지하자원과의 연결하에 북조선 일대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전쟁이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은 소위 결전체제(決戰體制)로서 경제운영의 근본을 규제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국력을 이에 경주할 태세를 갖추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치하에서 우리 나라는 하나의 국민경제단위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경제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은 점차 높아졌고, 또 대중 속으로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참여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의 발로였다.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되고 일본의 군소자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각종 산업 분야에서 기업활동을 전개할 무렵, 우리 민족은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전국적 규모로 펼쳤다.

이 운동은 단순한 일화배척(日貨排斥)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위한 근대기업활동에의 참여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한편, 당시에 민중의 경제저항투쟁도 활발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소작인의 소작쟁의가 일어나 봉건적 고율소작료에 반대하였고, 광산·부두 및 공장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치열하였다.

1920년대 초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민족은 근대기업계로 활발하게 진출했는데, 그것은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의식이 높아진 까닭이다.

1938년말 현재 우리 나라 기업회사 총수는 5,413개 사였고, 그 중 민족계 회사수는 2, 278개 사로서 전체 회사수의 40%였다.

이것은 1920년말 현재 한국인 소유회사수 비율이 18.2%에 비하면 그 동안 민족계 회사의 증가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계 기업회사의 성장은 극소수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영세기업회사의 수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의 민족계 회사 2,278개 사 중 공칭자본금 50만 원 이상의 회사는 50여개 사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는 자본금 10만 원 미만의 중소기업회사였다.

193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일본인 소유 1개 회사당 평균자본액은 30만5000여 원이었으나 한국인소유회사의 평균자본액은 5만3000여 원이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의 근대기업계 진출이 활발해졌던 것은, 영세자본에 의한 중소기업 분야에서 겨우 그 활로를 개척해나갔음을 말해 준다.

1937년 일본이 중국본토 침략전쟁을 감행하였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전시경제체제는 강화되었고,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대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그에 통합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1942년의 〈중소기업정리령 中小企業整理令〉은 특히 조선인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의 몰락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조기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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