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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5 (토)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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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52      
[남북국] 발해 (한메)
발해 渤海

한반도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沿海州)에 걸쳐서 존속한 나라.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9년에 동북지구의 당(唐)나라 세력이 쇠퇴한 틈을 타 백두산(白頭山) 동북지방에 근거를 둔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와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창건하였으며 926년 멸망하였다.

[건국과 성쇠]

<건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나라가 옛 고구려와 한반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약 20년이 지난 696년에 랴오시지방[遼西地方]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약소민족의 자각심과 주체의식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인 대조영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무리를 이끌고 영주(營州;지금의 朝陽)에서 북동으로 빠져나와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처음에 회유책을 썼으나 실패하자 이해고(李楷固)를 시켜 이들을 추적하게 하였고, 걸사비우는 당군에게 참살되었으나 대조영은 추격을 물리치고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둔화청[敦化城] 밖의 육정산(六頂山)으로 빠져나와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잡았다. 대조영은 성력(聖曆;698~700) 연간에는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예종(睿宗)의 선천(先天) 2년인 713년에 발해군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진국(震國)을 발해국이라 하였으며, 대조영의 아들을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성쇠>

대조영의 정책과 치적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진국을 세우고 당시 한창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과 서로 통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716년(개원 4) 묵철이 살해되고, 당나라가 영주를 되찾아 랴오시의 경영에 활기를 띠게 되자, 대조영은 당나라의 초무(招撫)를 받아들여 건국 초에 발해 외교정책의 기본인 평화적외교의 기틀을 잡았다. 한편 수도는 아직 동모산(東牟山;지금의 육정산 부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당이 그를 군왕(郡王)으로 책봉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국 초의 발해는 추장국(酋長國)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719년(개원 7) 대조영이 죽고 맏아들 대무예(大武藝), 즉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올가강유역에 이르는 연해주 남단을 발해의 영토로 만들었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수교하였으며, 그 뒤 북동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文王)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으며,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고 관무역을 활발하게 하여 대외관계에서는 평화외교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무왕 때까지 수도로 되어 있던 동모산인 이른바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로 천도하였다가, 천보(天寶;742~755) 연간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다시 정원(貞元;785~794) 연간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기는 등 잦은 천도가 있었다.

문왕의 재위기간 중 당나라는 762년(보응 1)에 그를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하였고, 이것은 발해의 국력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완전히 굳힌 문왕이 죽고, 그 뒤 제10대 왕 대인수(大仁秀), 즉 선왕(宣王)에 이르기까지의 25년(793~818)간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15년간 재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위기간이 짧아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5대 성왕(成王)의 재위기간 중 수도가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겨진 점이다. 이와 같은 발해의 침체상태를 벗어나 왕국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것이 선왕이었다. 그는 발해의 영토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까지 확장하여 이른바 <방 5천리(方五千里)>를 이룩하였으며, 제3대 문왕시대에 알려진 3경 외에 다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하여 <5경 15부(府) 62주(州)>의 이름으로 전국을 통치하였다. 재위 10년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한 선왕은 830년에 죽었다.

한편 묵철이 죽은 뒤 세력이 약화되었던 거란의 수령은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이후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를 멀리하고 역시 오르혼강을 근거로 옛날의 돌궐과 같은 경로를 밟아 남하하던 위구르에 복종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의 선왕 대인수의 무렵에는 북류쑹화강[北流松花江] 부근을 경계로 하여 발해와 겨루는 형세로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중국본토 진출에 앞서 발해경략의 전략을 감행하였다.927년 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은 발해가 거란을 방비하기 위하여 최전선에 구축한 부여성(扶餘城;지금의 昌圖 부근 西面城)을 뚫고 곧 국도 상경용천부를 포위, 공격하여 불과 20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제15대왕 대인전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대조영에서부터 15대 220여 년 간 건재하던 발해는 멸망하였다.

[강역과 교통로]

<강역>

전성기의 강역은 《신당서》 <발해전>에 대체적인 방향과 주의 이름 등이 적혀 있으나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종전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남계(南界):《신당서》 <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압록강 하구에서 약 130리의 상류에 있는 박작성(泊작城)이 발해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다. 이 박삭성은 지금의 주롄청[九連城]의 북동 약 20리에 있는 압록강에 흘러 들어가는 포석(蒲石) 하구에 있었다. 그러나 북동에서는 발해, 남쪽으로부터는 신라의 세력이 북상하여 이 지방에 있어서는 발해와 당나라는 직접 경계를 접하는 일이 없었으며, 압록강과 청천강을 갈라놓은 산맥이 이 양국의 경계선이 되어 있있던 것으로 믿어진다. 발해의 동쪽은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德源) 근처의 용흥강(龍興江)으로 믿어지는 이하(泥河)가 신라와의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⑵ 서계(西界):《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의 전성기인 선왕 대인수시대까지는 그 서쪽 경계의 국경선이 압록강 하류 주롄청 부근인 박작성에서 북으로 휘발하(輝發河)유역의 산성자(山城子) 서변을 거쳐 창도의 서변을 이어 눙안[農安]까지의 일선(一線)으로 보인다. ⑶ 북계(北界):《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발해 15부의 위치 이름을 보면, 발해의 북방경계선은 대체로 동류쑹화강까지이고 이와 헤이룽강의 합류점 북동에서 하류까지는 흑수말갈이 건재하여 발해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연해주 남부에서 싱카이호[興凱湖] 일대와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이 합류하는 지금의 산성까지의 선이 발해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경과 주요 교통로>

발해의 5경에 대하여 각각 그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경용천부 : 지린성 닝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는 고성지(古城址)가 그 유적이다. 제3대 문왕이 742~755년에 중경현덕부에서 이곳에 천도하였다가,785년부터 문왕이 사망한 794년까지 다시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나, 제5대 성왕에 이르러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와 927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130여 년 간 발해의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② 중경현덕부 : 발해가 건국의 터전을 마련한 이른바 <구국>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둔화현 육정산 오동성에서 제3대 문왕 때에 처음으로 천도하여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기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이 중경현덕부의 유적지 추정은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되어 휘발하와 쑹화강의 합류점인 <나단포로설(Nadan foro說;那丹佛勒說)>,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의 <소밀성설(蘇密城說)>과 <둔화현설> 등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논거를 가지고 그 정당성을 고수한 바있었으나 둔화현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정실화(正說化)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전개되어 상경용천부와 겨룰 만한 유적으로서 두만강에 유입하는 해란하(海蘭河)와 차오양강[朝陽川]의 중간지점에 있는 서고성자(西古城子)의 유적으로 비정(比定)하게되어 정설화되고 있다.

③ 동경용원부 : 발해의 제3대 문왕이 중경현덕부에서 천보 말년에 상경현덕부로 천도하였다가, 정원 연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제6대 강왕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신당서》 <발해전>에 확실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아 그 위치의 비정에 여러 설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초의 발굴 결과 젠다오[間島]의 훈춘현[琿春縣] 반라청[半拉城]의 유적에 비정되어 정설화되고 있다.

④ 남경남해부 : 남경의 위치에 대하여는 함흥설(咸興說)을 비롯하여 함경북도의 경성설(鏡城說), 또는 종성설(鐘城說)ㆍ북청설(北靑說) 등이 있으나, 함흥설이 거의 정설시되고 있다.

⑤ 서경압록부 : 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도 《신당서》 <발해전>의 설명이 없어, 정약용(丁若鏞)의 평안북도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 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편 발해의 중요한 교통의 간선에 대하여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상경현덕부를 중심으로 각 방면에의 교통로를 알 수 있는데, 동경용원부는 동해를 항해하여 일본의 쓰루가[敦賀] 등 북륙(北陸)지방의 각 항구로 향하는 선박들의 출항지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남경남해부는 신라와의 국경도시인 이하, 즉 함경남도 덕원에서 신라로 들어가는 교통로였다.

한편 서경압록부가 조공도(朝貢道)인 것은 당나라로 가는 조공사(朝貢使)가 상경에서 중경현덕부를 거쳐 린장[臨江]ㆍ통구지방을 통과하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의 연안을 따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에 상륙한 뒤, 육로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부여부는 거란도(契丹道)라고도 하여 거란으로 가는 경로로 이용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사회 구조]

발해의 사회구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사료로는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일본의 승려 영충이 견문을 적어 남긴 기사(記事)를 들 수 있다. 즉 스가하라[管原道眞]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에 수록되어 있는 영충의 견문담에 따르면 토인(土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고구려족이 곳곳의 촌락의 촌장을 비롯한 지배계층으로 나타나 있으며, 촌락의 구성원인 주민들은 거의 말갈계였다. 즉 소수의 고구려계 유민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말갈족을 통치하는 복합민족국가 같은 모습을 띤 사회였다. 그러나 극소수였지만 말갈계의 참여가 전혀 막혔던 것은 아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신고(臣考)>에도 적혀 있는 수령관함(首領官銜)의 이알기몽(已閼棄蒙)이라든가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의 부사격이었던 이진몽(已珍蒙) 같은 말갈계의 사회참여도 찾아볼 수 있다. 발해의 유력한 성으로는 고ㆍ장ㆍ양(楊)ㆍ두(竇)ㆍ오(烏)ㆍ이(李) 등 모두 한족식의 성을 가진 고구려계였다. 이와 같은 발해의 사회구조는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하여 그 관제와 정교면(政敎面)에 발전을 거듭하여 내려오던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신분계층에 관한 큰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점이 발해가 지니는 사회구성상의 취약점이었다.

즉 혈통과 문화ㆍ언어ㆍ역사의 공동체의식을 느낄 수 없는 족적관계(族的關係)가 이익을 달리하면서 한 국가를 형성하고 거기에 다시 종족적 차별이 노출되어 피지배종족까지도 국민의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이나 운명공동체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취약성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이 거란에게 멸망하게 된 시기로서 국력이나 군사력에서 패한 것이 아니고, 사회 모순의 취약성에 기인한 결과였다.

[산업 경제]

발해의 산업과 경제활동은 분명하지 않으나, 발해가 남만주의 심장부인 랴오양[遼陽]ㆍ선양[潘陽]ㆍ카이위안[開原] 등지의 평야지대를 점거하지 못한 채 당나라에 점유되고, 그 북동의 산악지대를 개척하면서 천연자원의 활용에 힘을 기울였던 자취는 당과 일본과의 무역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인삼ㆍ우황(牛黃)ㆍ황명(黃明) 등의 약재류와 몇 가지의 특산물의 수출은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중요 생산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주(顯州)의 포>

현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6주 가운데 수주(首州)이다.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옛 북옥저(北沃沮)인 두만강 하류의 어느 지점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옥저의 특산물인 맥포(貊布)와 발해가 후당(後唐)에 공품(貢品)으로 수출한 세포(細布) 등은 현주의 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포는 심[麻]을 원료로 한 직물이었을 것이다.

<옥주(沃州)의 면(綿)>

옥주는 남경남해부에 영속된 주이다. 남경남해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여 옥주도 이 부근으로 짐작된다. 면은 누에의 일종에서 만들어내는 실로 짠 직물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강원도지방인 동예(東濊)에서 양잠을 하여 면을 만든다는 기사가 있다.

<용주(龍州)의 주(紬)>

용주는 상경용천부에 영속된 수주이며, 지금의 지린성 닝안현 부근이다. 주는 면포를 말하는 것으로 앞서의 강원도지방의 양잠이 남경과 중경현덕부를 거쳐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유역인 닝안현의 특산물로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주(盧州)의 벼>

발해의 산도지(産稻地)로 《신당서》 <발해전>에 적혀 있는 노주는 중경현덕부에 영속된 주로 해란하 유역의 평야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 지역은 만주 북동부에서 가장 비옥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위성(位城)의 철>

발해의 철생산지로 알려진 위성은 중경현덕부에 영속된 철주(鐵州)의 수현(首縣)이다.<철주>란 이름도 철의 생산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중경현덕부의 서고성자는 BC 4세기의 제철유적지가 발견된 두만강 남쪽의 무산(茂山)과 매우 가까우며, 지금도 이 부근에 천보산(天寶山) 같은 만주 북동부 굴지의 철광산이 있다.

[대외 무역]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을 대상으로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활발히 계속하였다. 일본과는 제2대 무왕이 727년 처음으로 대사(大使) 고인의(高仁義) 이하 24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국교를 청한 이후 점차 관사무역(官私貿易)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발해는 상리주의적 입장에서 능숙한 외교술을 구사하면서 일본에는 주로 모피류 및 인삼을 수출하고 그들로부터는 견포(絹布)를 수입하였다. 발해는 713년(개원 1) 왕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호시(互市)의 자유로운 출입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후 당나라는 산둥반도인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의 관하에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를 두어 등주 같은 항구에 신라와 발해의 무역선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대종(代宗;763~779) 이후는 칭저우[靑州]에 발해관(渤海館)을 두어 발해 사신과 무역선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매년 발해에서 명마(名馬)의 수입이 끊이지 않았다는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사에서 미루어 보아도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것 같다.

[문물 제도]

<행정 기구>

발해의 중앙정부 통치기구는 당나라의 3성(省)ㆍ6부(部)ㆍ9시(寺)제를 본받아 3성ㆍ6부ㆍ1대(臺)ㆍ7시ㆍ1원(院)ㆍ1감(監)의 관료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발해의 3성은 조칙(詔勅)을 기초(起草)하는 당의 중서성(中書省)을 중대성(中臺省)이라 하고 조칙을 심의하는 당의 문하성(門下省)을 선조성(宣詔省)으로, 상서성(尙書省)을 정당성(政堂省)이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상서성에 속하는 이(吏)ㆍ호(戶)ㆍ예(禮)ㆍ병(兵)ㆍ형(刑)ㆍ공(工)의 6부를 충부(忠部)ㆍ인부(仁部)ㆍ의 부(義部)ㆍ지 부(智部)ㆍ예부(禮部)ㆍ신부(信部)로 그 기능은 당의 것과 같았으나 명칭을 달리하였다. 지방행정기관으로는 부ㆍ주ㆍ현을 두고 도독(都督)ㆍ자사(刺使)ㆍ현승(縣丞) 등의 지방관을 두었다.

<수도의 짜임새>

상경용천부는 성왕이 동경용원부에서 다시 이곳으로 천도한 뒤 135년 간의 수도로서 지금의 지린성 닝안현 동경성이다. 발굴조사 결과 그 규모는 동서길이 약 4.6㎞, 남북 약 3.3㎞의 큰 도성으로 당나라의 장안을 본뜬 것 같은 토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궁성은 이 외곽성의 중앙에서 약간 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석축으로 쌓은 둘레 약 3990m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궁성은 동ㆍ서ㆍ북ㆍ중심의 4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중심구(中心區)는 둘레가 2680m가 되며, 남ㆍ북에 두 문이 있다.

왕성은 궁성 남쪽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큰 가도(街道)가 가로놓여 있고, 동ㆍ서ㆍ남의 3문이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에 비하면 그 규모는 약 반밖에 되지 않으나 일본의 평안경(平安京)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밀림지대였던 만주 북동의 구석진 곳에 이와 같은 대도시를 건설한 국력과 역량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교 미술>

불교신앙은 사료가 없어 체계를 세워 설명하기 어려우나, 발해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발해의 상류층이 불교신앙을 지녔다는 점 등은 부분적으로 기타의 자료를 통해 짐작되고 있다. 또한 승려 중에는 조수(鳥獸)의 언어에 능통하여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는 함통(咸通;860~873) 연간의 살다라(薩多羅)나, 멸망 후 고려에 투항하였다는 재웅(載雄) 등 60여 명의 기사로 보아 발해의 승려수는 결코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불교유물로는 지금 남대묘(南大廟)로 불리는 옛 발해사지에 남아 우뚝 솟아 있는 높이 2m가 넘는 용암제(熔岩製) 석등은 발해가 남긴 문화재의 대표적 유물로 손꼽히고 있다.

<윤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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