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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3 (일) 06:43
분 류 사전2
ㆍ조회: 1405      
[조선] 민영익 (민족)
민영익(閔泳翊)

1860(철종 11)∼1914. 조선 말기의 문신·개화사상가·예술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며, 아호·당호 40여 개를 사용하였다.

태호(台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1875년(고종 12) 승호(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민비의 친정 조카로 이른바 ‘죽동궁(竹洞宮) 주인’이 되었다.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그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別技軍)의 교련소당상으로,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전까지 윤웅렬(尹雄烈) 등과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다.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 인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다. 그리고 군란 진압 후 박영효(朴泳孝)를 정사로 하는 사죄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富敎司協辦)이 되었다.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H.)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대통령 아서(Arthur, C.A.)를 두 차례 만나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주며,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세계박람회·시범농장·방직공장·의약제조회사·해군연병장·병원·전기회사·철도회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 국장 이턴(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소개받았다. 그리고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 받았다. 그 밖에 우편제도·전기시설·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뒤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육영공원 교사 선발을 국장 이턴에게 의뢰하여,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B.)·번커(Bunker, D.A.)·길모어(Gilmore, G.W.)의 3명이 파한되었다.

또한, 볼티모어시에서 가우처(Goucher)여자대학 학장인 가우처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 기금을 희사할 것을 요청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 약용 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 교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타작기·벼베기기계·저울 등 농기구 18품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당시 부사는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은 변수(邊樹, 邊燧)·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1884년 5월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摠辦)·이조참의·금위대장·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84년 10월 친군영(親軍營) 실시 뒤 우영사(右營使)로 있으면서 개화파를 압박하였다. 그런데 그 해 12월 개화당의 김옥균 등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었다.

그러나 홍영식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H.N.)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친군영에 복직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였다.

1885년 초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납치,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회국 의사를 표명해 온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톈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뒤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서 지리국(地理局)·군무국(軍務局)의 총판을 겸직하고, 이어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를 지냈다. 1886년 정부의 친로거청정책(親露拒淸政策)을 반대하는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이러한 사실를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껴, 1887년 내탕금(內帑金)을 가지고 홍콩과 상해(上海) 등지를 전전하였다.

귀국하여 통위사(統衛使)가 되었고, 1888년 6월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로서, 학교의 운영 담당 위원이 되어 한규설(韓圭卨)·이종건(李鍾健) 등에게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1889년 5월 관세를 담보로 외무 고문 데니(Denny, O.N.)와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200만냥의 차관 계약을 맺어, 그중 130만냥으로 종래 차관을 청산하고, 나머지 70만냥으로 정부재정을 재건해 보려고 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당상이 되었으나, 그 뒤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행서에 능하였으며, 많은 묵화 중 묵죽도(墨竹圖)·석죽도(石竹圖)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났다. 인영(印影)을 즐겨, 중국 문인화의 대가이며 전각(篆刻)으로 유명한 오창석(吳昌碩)과 30년의 교류중 300여 개의 인장을 받아 썼으며, 그 가운데 213개가 ≪전황당인보 田黃堂印譜≫와 ≪오창석인보 吳昌碩印譜≫에서 확인된다.

≪참고문헌≫

日省錄, 承政院日記, 高宗實錄, 甲申日錄,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使和紀略(朴泳孝), 陰晴史, 近世朝鮮政鑑(朴齊炯), 湖巖全集 Ⅲ(文一平), 日韓그리스도敎交流史(吳允台, 新敎出版社, 1968), 韓國開化史硏究(李光麟, 一潮閣, 1969), 開化黨硏究(李光麟, 一潮閣, 1973), 新朝鮮史(朴殷植, 博英社, 1975), 한국사 14·16(국사편찬위원회, 1975), 韓國史講座 Ⅴ-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2), 閔泳翊의 藝術과 生涯(金晴江, 月刊文化財 8, 1976).

<이현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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