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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8-27 (금) 10:26
분 류 사전2
ㆍ조회: 365      
[고려] 신진사대부 (브리)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

고려말에 등장하여 체제를 개혁하고 조선 건국을 주도해간 관료를 일컫는 말.

'신흥사대부'ㆍ'신진관료'ㆍ'신흥유신'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고려 중기에는 무인이 집권하면서 기존의 문신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관료를 선발하여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 원의 간섭기에는 관료 정치를 재정비함으로써 기존의 지배 체제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 예컨대 도평의사사 체제는 관료의 정치 의사 결정의 폭을 넓힌 것으로 전에 두었던 도감(都監)이나 중방(重房) 체제보다는 확실히 관료 정치를 향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료층의 등장 바탕에는 향리층이 있었다. 고려 전기 이래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향촌 사회의 지배 세력이던 향리층은 후기의 사회 변동 속에서 과거 시험과 첨설직(添說職) 등을 통하여 관인 또는 그에 준하는 품관(品官)으로 그 지위를 상승시켰다. 이들이 보통 신진사대부층의 출신 기반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권문세가의 농장 확대와 수취 체계의 문란 등으로 농민들이 대거 유망하게 되어 신진사대부들의 재지기반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신진사대부의 주된 활동은 친원세력의 배제와 농민 문제에서의 개혁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 노력은 새로운 유학의 수용과 함께 이미 충선왕대와 충목왕대에 한 차례씩 시도되었다.

충선왕대에는 사림원(詞林院), 충목왕대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중심으로 반원적인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이 두 차례의 개혁 뒤에는 새로운 유학의 소양을 지닌 학자 관인층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운동은 실패로 끝났는데, 당시 원나라 세력의 저항을 뛰어넘을 만큼 개혁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간섭기에는 보다 논리적ㆍ경세적인 유학과 불교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특히 원과의 문화교류 과정에서 실천 윤리를 강조하는 성리학이 지식층에게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수용되었다. 원간섭기에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安珦)ㆍ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 등은 비록 자신들의 출신 기반이 권문세족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경세적인 유교를 통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중소지주나 하층민을 이해하는 보다 개량된 입장을 취했다.

조선 개국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신진사대부층이 공민왕대 이후 급성장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① 공민왕 때 최고 유학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요시하고 유학교육을 장려함으로써 새로운 유학에 대한 이해를 학문적으로 심화시켰다. 이색ㆍ정몽주ㆍ김구용ㆍ박상충ㆍ박의중ㆍ이숭인ㆍ이존오ㆍ정도전 등이 바로 성균관을 통해서 성장한 학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향리 가문의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관원이었으며 삼남 지방에 중소 지주적 경제기반을 가진 전형적인 신진 세력이었다.

② 공민왕 이후의 잦은 전란 속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세력이 급속히 성장함으로써 사대부는 문무 합작을 이룰 수 있었다. 이성계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급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무장이었다. 문인 사대부들이 무장 세력과 제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보수 세력을 제거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실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공민왕대 이후 한량 또는 산관ㆍ품관으로 불리는 재야 사대부 계층이 형성되었다. 직함은 있으나 직사가 없는 관원인 한량이나 동정직(同正職)ㆍ검교직(檢校職) 등은 향촌에 거주하면서 독서 계급으로 하나의 사회 세력을 형성했다. 이는 향촌 사회에서 지배 계층으로 행세한 첨설직처럼 실직은 낮지만 높은 산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부류의 신흥 계층들은 넓은 의미의 사대부층을 형성했다. 하층민을 압박하는 이른바 '향원'(鄕愿)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고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켜나가는 중소지주였다. 특히 권문세가에 의한 대토지 집적과 노동력 집중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농민들을 위해서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였다. 이 시기 토지 문제는 사전(私田)에 집중되고 있었다. 사전 문제에 대한 수습 방안은 크게 3계열로 나타났는데, 즉 정부측의 대책, 사전 개선론, 사전 개혁론이었다.

정부의 대책은 녹과전(祿科田) 제도의 신설ㆍ운영과 같은 새로운 급전 제도를 마련하는 것과 사전 점유 분쟁에 대한 법률적 처리와 피역, 투탁민에 대한 추쇄 작업의 추진이었다. 사전 개선론은 점유상의 분쟁에서 야기되는 농민 수탈의 과중ㆍ중복을 개선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운영상의 문제를 제거하자는 것이다. 사전 개혁론자들은 사전을 경기사전(京畿私田)의 원칙에서 재분배하고자 했다. 이렇듯 각 입장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첫번째 개혁 운동은 1356년(공민왕 5)에 시행되었는데, 이때 기철 등 친원파가 거세되고 원에게 빼앗겼던 북방 영토를 되찾았으며 관제도 문종 때의 관제로 복구했다. 그러나 왕과 일부 사대부의 주도하에 시도된 공민왕초의 개혁 운동은 권문세가의 반발로 목적한 바를 모두 달성하지는 못했다.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에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사회ㆍ경제ㆍ문화 전반에 걸쳐 제2차 개혁 운동을 단행했다. 이때의 주요 개혁 사업은 ① 불법으로 약탈한 권문세가의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고, ② 국역을 기피하면서 향촌 사회에서 하층민을 괴롭히는 한량관을 군사 조직에 편속시켜 거경숙위(居京宿衛)를 맡게 했으며, ③ 유교 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과거시험을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바꾸어 유학의 성격을 혁신한 것 등이다.

이 개혁 정치에는 정몽주ㆍ이숭인ㆍ윤소종ㆍ정도전 등 소장파 신진사대부들의 협력이 뒷받침되었다. 하지만 당시 소민층의 몰락에 의한 예민화와 유리걸식은 중소 지주의 지주ㆍ전호 관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고 이때 재개된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우왕대를 고비로 하여 크게 2개의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고려를 유지하면서 온건한 제도 개선을 추진하려는 일파와 역성 혁명까지 내다보면서 제도 개편을 통하여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려는 일파가 그것이다.

이 두 파는 서로 대립했으나 위화도 회군 뒤에 후자의 입장이 득세했다. 그것이 곧 1391년(공양왕 3)에 단행된 전제 개혁과 과전법의 성립이다. 정도전ㆍ조준ㆍ조인옥 등 전제 개혁자들이 원래 구상했던 개혁안은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일단 공전으로 만든 다음 인구 비율로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모든 농민을 자작농화한다는 이른바 '계구수전'(計口授田)을 실현하고 이로써 토지 겸병과 병작제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득권자들의 거센 반발로 완전한 시행은 하지 못하고 수정하여 과전법으로 법제화했다. 이렇듯 고려말에 새로 일어난 신진사대부는 그 자신이 몸담은 고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사대부가 주도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참고문헌

고려후기사류층의 현실의식 <창작과 비평> 44 : 김태영, 창작과 비평사, 1976
신흥사대부의 대두 <한국사 8> : 김윤곤, 국사편찬위원회, 1974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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