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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12-08 (수)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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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42      
[조선] 조선3 (두산)
조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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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경제구조

조선은 고려 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파탄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경험을 살려 초기부터 국가를 부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대폭 개편하였다.

국초부터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내세워 농업발달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함께 양반관료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정책에 유의하였다.

1. 토지제도

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科田法)을 토대로 하였다. 과전법에 의해 관료들은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국가로부터 지급받았으며, 퇴직자들도 별도로 정해진 바에 따라 토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 토지를 실제로 경작한 사람들은 농민들이었고, 관료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로부터 경작의 대가로 조(租)를 거두어 생활하였으며, 국가는 다만 관료가 농민들의 경작권을 마음대로 빼앗지 못하게 보호하였다. 이러한 과전은 1대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공신전(功臣田)ㆍ휼양전(恤養田)ㆍ수신전(守信田) 등은 자식이나 아내에게 세습되기도 하였다.

한편, 왕권이 확립되고 국가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관료의 수와 세습되는 토지가 늘어나, 새로 관료가 되는 사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였고, 성종 때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의 토지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되어 많은 양반관료들은 농장(農莊)을 소유하고 그들의 경제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농장의 확대는 상대적으로 과전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명종 때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기에 이르러 관료들은 오직 녹봉(祿俸)만을 받게 되었다.

2. 조세제도

조선의 국가재정은 주로 조세(租稅)수입으로 조달되었다. 조세수입은 전세(田稅)ㆍ역(役), 그리고 공납(貢納)이 그 기본이었다. 전세는 농토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과전법에서는 1결에 최고 30두(斗)까지만 받게 하였고, 세종 때에는 이를 더 낮추어 1결에 최고 20두, 최저 4두를 받되,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으로 구분하여 수취하였다. 정확한 전세의 부과를 위해서는 농토의 정확한 파악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양전(量田)사업이 20년마다 실시되어 양안(量案)이라는 토지대장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란으로 토지가 황폐하고 토지대장이 소실되어 왜란 전의 토지결수(土地結數)에 비해 왜란 후에는 1/3로 감소되었다. 그리하여 개간사업이 진행되고 양전사업이 실시되면서 숙종 때에는 140만 결까지 증가되었는데, 이것은 거의 세종 때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은결(隱結)이나 면세지(免稅地)의 증가로 국가의 전세수입은 별로 늘지 않았다.

또 전세제도가 인조 때 영정법(永定法)으로 개편되어 세율이 1결마다 4두로 경감되었고 이와 같이 수세지와 수세율의 감소로 국가의 전세수입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이를 메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부가세가 징수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부 지방에서는 부가세와 수수료를 합치면 1결에 100두, 즉 수확고의 반 이상이 되는 많은 양을 징수하였다. 게다가 관리들은 황폐한 진전(陳田)에서도 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를 백지징세(白地徵稅)라고 하였고, 또 사적으로 횡령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 하여 정액 이상의 세금을 종종 징수하였다.

역(役)에서는 국가의 토목사업 등에 동원되는 요역(沓役)과 국방을 맡는 군역(軍役)의 두 가지가 있다. 역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60세까지의 정남(丁男)이었고, 16세기에는 역의 대가로 군포(軍布) 2필을 납부하였는데, 1년에 2필의 포를 납부한다는 것은 무거운 부담이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어린아이를 정남으로 편입시켜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죽은 자에 대하여도 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의 부정이 유행하였고, 무거운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는 경우에는 이웃이나 친척ㆍ동리에 부담시키는 인징(隣徵)ㆍ족징(族徵)ㆍ동징(洞徵)이 가해졌다.

이에 영조 때에는 군포 2필을 1필로 반감시켰으며, 그 부족액을 어세(漁稅)ㆍ염세(鹽稅)ㆍ선박세(船舶稅) 등과 결작(結作)의 징수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악습은 여전히 자행되어 농민은 유망(流亡)하게 되고 마침내 민란의 원인이 되었다.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세납으로, 각 고을을 단위로 하여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을 그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고 거두어서 바쳤다. 공납은 현물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납입ㆍ저장ㆍ운반에 어려움이 많았고, 이를 계기로 이른바 방납(防納)이라는 부정이 행해져 국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이에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전세수입의 감소로 인한 재정 보완을 위해 광해군 때부터 100년간 대동법(大同法)을 추진, 대동미(大同米)라는 이름으로 토지 1결에서 미곡 12두를 징수하게 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거의 모든 조세가 전세화되었으니 1결의 토지에서 전세 4두, 삼수미(三手米) 1두 2승, 대동미 12두, 결작 2두 등 20두(斗)에 이르렀다. 이들 세곡은 17세기 이래로 화폐제도가 실시되면서 금납화(金納化)되기도 하였으나, 대개 관선(官船) 또는 사선(私船)을 통해 서울로 조운(漕運)되었으며, 조운을 위하여 연해안 또는 수변에 조창(漕倉)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조세 제도는 갑오개혁 때에 모두 금납화되어 갔다.

3. 환곡제도

조선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농민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초부터 의창과 상평창 제도를 정비하였다. 환곡(還穀)이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평시에 양곡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대여하고 추수 후에 회수하는 것인데, 이는 의창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의창은 원곡(元穀)이 부족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물가조절기관인 상평창이 이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환곡을 회수할 때 모곡(耗穀)이라 하여 10%의 이자를 함께 받았는데, 이것이 점차 고리대(高利貸)로 변하여 갔고 전세수입이 감소되자 환곡이 국가재정의 주요한 기반이 되어 갔다.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들은 이를 기화로 허위장부를 작성하는 번질[反作], 저축해야 할 양곡을 사사로이 대여한 가분(加分), 겨나 돌을 섞어서 한 섬을 두 섬으로 불리는 분석(分石), 창고에 없는데 실물이 있는 듯이 보고하는 허류(虛留) 등 작폐가 매우 심하여 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환곡은 오늘날 농업협동조합에서 실시하는 양곡방출제도의 기원이다.

4. 농업

농업을 주요한 경제기반으로 하는 조선은 국가적으로 농업을 장려하였다. 먼저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토지개간, 수리시설 확충, 종자개량, 농사기술 혁신 등에 주력하였다. 북방개척과 해안지방의 개간, 그리고 내륙의 황무지를 적극 개간하여 건국 초기에 100만 결에 지나지 않던 농토가 세종 때는 160만 결로 늘었다. 그리고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가 수천 개소로 늘어났다. 또, 바람과 가뭄에 강하고 일찍 수확되는 벼 품종들이 새로 개발되기도 하였다.

영농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모내기법이 남부지방에서 실시되고 보리와 벼의 2모작이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시비법(施肥法)의 발달로 휴경지(休耕地)가 없어졌으며, 면화재배가 확대되고, 각종 원예작물 및 과수의 재배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러한 농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왜란과 호란의 대전란을 겪으면서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이에 조정과 농민의 거국적 노력으로 18세기 초에는 차차 복구되었다. 왜란 직후 양안(量案)에 등록된 토지 면적이 54만 결이었으나, 18세기 초에는 약 140만 결로 늘어났다.

경지면적의 확장과 동시에 수리시설도 크게 개선되었다. 제언사(堤堰司)가 설치되었고, 제언절목(堤堰節目)이 공포되어 수천 개소의 저수지ㆍ보가 수리 또는 신축되었다. 대규모 저수지로는 수원의 서호(西湖),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홍주의 합덕제(合德堤),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등이 있다. 수리시설의 확장으로 수전(水田)농업을 발전시켜 밭농사를 논농사로 바꾸어 갔고, 이앙법(移秧法)과 견종법(륭種法)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1인당 경지면적이 크게 늘어나 광작(廣作)이 나타났다.

한편, 18세기에는 상품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업분야에서도 상품작물이 재배되었다. 특히 인삼ㆍ담배는 가장 인기 있는 작물로서, 인삼은 개성을 중심으로 담배는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재배가 성하였으며, 그 밖에 면화ㆍ피마자ㆍ약재ㆍ고추ㆍ호박ㆍ과실 등의 상품작물도 재배되었다. 그리고 기근에 대비한 구황작물(救荒作物)로 고구마ㆍ감자가 널리 재배되었다. 고구마는 조엄(趙,)이 일본에서 가져오고, 감자는 청나라에서 종자가 전해져 보급되었다.

5. 공업

조선의 공업은 수공업(手工業) 단계로서, 농민들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한 가내수공업(家內手工業)과 전문적 기술자가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을 제조하는 관영수공업(官營手工業)이 행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관영수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원칙적으로 장인(匠人)은 공장안(工匠案)에 등록되어 일정기간 동안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제조하는 관장(官匠)이었다. 관장의 수는 서울의 경공장(京工匠)이 2,800명, 지방의 외공장(外工匠)이 3,500명이었다.

이들 관장은 일정기간 동안의 의무를 끝내면 자유활동이 허용되어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을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관수품은 무기ㆍ화약ㆍ활자ㆍ의복ㆍ문방구ㆍ그릇 등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관장 중심의 관영수공업이 점차 쇠퇴하고,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는 납포장(納布匠), 즉 사장(私匠)의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종이ㆍ화폐ㆍ유기ㆍ자기 등의 제조부문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안성의 유기, 통영의 칠기, 해주의 먹, 전주의 부채, 나주의 종이, 원주의 목기 등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와 같은 전근대적 수공업은 개항과 더불어 공장제수공업 형태로 확대ㆍ발전되어 갔다. 즉, 1880년대에 정부는 기기국(機器局)ㆍ전환국(典窩局)ㆍ직조국(織造局)ㆍ조지국(造紙局)을 설치하고 그 직영 공장을 운영하였다. 민간에서도 근대적 기계공업을 일으켜 대한직조공장(大韓織造工場)ㆍ종로직조사(鐘路織造社)ㆍ한성제직회사(漢城製織會社) 등이 동력직기(動力織機)를 갖추고 상품생산에 기계화를 도입하여 갔다. 그러나 자본이나 기술면에서 우세한 일본인들이 한국의 공장계를 장악하였다.

6. 광업

조선은 초기에 광업을 국가가 경영하여 사적인 광산 경영을 막았으나, 점차 사채(私採)를 허용하면서 세금을 받아내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광산의 개발이 촉진되었는데, 특히 대청(對淸) 무역에서 은(銀)의 수요가 늘어나고 조총의 탄환 주조가 활발해지면서 은광의 개발이 활기를 띠어 17세기 말에는 70개소에 가까운 은점(銀店)이 설치되었다.

이와 더불어 금광의 개발도 이루어졌으며, 놋그릇과 무기ㆍ농기구ㆍ동화의 원료로서 동광(銅鑛)ㆍ철광의 개발이 촉구되었다. 이들의 채광기술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개항이 되면서 특히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이권침탈이 자행되면서 금광ㆍ은광을 비롯한 주요 광산채굴권이 열강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근대적 채굴기술로 광맥을 모두 채굴하여 갔다.

7. 상업

조선은 상업에 대하여도 초기에는 규제를 강화하여 규모가 큰 것은 점포의 크기, 상품의 종류, 수량, 가격 등을 국가가 통제하였다. 서울의 중심가인 운종가(雲從街)에는 규격이 통일된 시전(市廛)이 설립되어 90여 종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판매하였다. 그 중에서도 비단ㆍ무명ㆍ명주ㆍ모시ㆍ종이ㆍ어물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렀다. 이들 상인들은 특정상품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받는 대신, 국가에 대하여 관수품(官需品)을 바쳐 납세에 대신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업이 크게 일어나고 화폐가 보급되면서 난전(亂廛)이라 불리는 사상(私商)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이래로 서울에는 이현(梨峴)ㆍ칠패(七牌)ㆍ종루에 새로운 상가가 번창하여 시전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貢人)들의 상업활동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관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부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세곡운송을 통해서 교역로를 확보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이 한강을 중심으로 미곡과 어물의 수송과 판매를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또 개성의 송상(松商)들은 전국에 송방(松房)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인삼을 판매하며 대외무역에도 깊이 참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국초부터 보부상(褓負商)이라는 행상단이 있어서 생활필수품을 향촌에 공급하였는데, 16세기 이래로 장시(場市)가 생겨나면서 장시를 순회하며 거래하였다.

장시는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상품과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일부 장시는 점차 상설시장화하여 장시가 발달하자 강경ㆍ대구ㆍ안동은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이들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 도매업과 위탁판매업ㆍ창고업ㆍ운송업ㆍ숙박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客主)나, 여각(旅閣)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업계도 개항 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자행되면서 크게 위축되어 갔다.

8. 화폐제도

상공업 활동을 규제하여 거래가 부진하였던 조선에서는 화폐의 보급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추진되었다. 태종 때에 발행한 저화(楮貨)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세종 때에 조선통보(朝鮮通寶), 세조 때에 화살로 겸용할 수 있는 팔방통보(八房通寶)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상업활동의 부진과 화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미곡과 포목으로써 물물교환식 거래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공업이 발달하고 화폐에 대한 수요가 커지게 되자 인조 때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동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는데, 숙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에는 세금이 금납화되면서 화폐는 1차적 유통수단이 되어 상품유통을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종 때의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국고가 부족하자, 이를 보충하고자 당백전(當百錢)이란 악화를 발행하여 경제적 혼란을 가져 왔다. 이러한 조선의 불안전한 화폐제도는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적 은본위제도(銀本位制度)의 확립과 더불어 개선되었으나, 이때를 전후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더불어 일본화폐의 횡행으로 통화계에 혼란이 일게 되었다.

9. 교통ㆍ통신

조선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과 더불어 교통ㆍ통신, 그리고 운수조직을 정비하였으므로 경제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들의 기능도 크게 증대되었다. 먼저 운수조직은 조운제(漕運制)에 의하였는데, 조운이란 국가재정의 근원인 세곡(稅穀)을 선박으로 해안과 하천을 따라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것을 말한다. 각지에 조창을 설치하고 일정한 기간에 여러 고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였는데 해상운송을 맡은 조창을 해운창(海運倉), 강상운송을 맡은 조창을 수운창(水運倉)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해운창으로 아산의 공진창(貢津倉), 용안의 덕성창(德成倉), 영광의 법성창(法聖倉), 나주의 영산창(榮山倉)과, 수운창으로 강음(江陰)의 조읍포창(助邑浦倉),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원주의 흥원창(興元倉),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등 9개 조창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 진주의 가산창(駕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등 3개 조창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로 사선(私船)에 의한 세곡의 임운(賃運)이 행해지고, 운송은 경강상인의 경강선(京江船)과 훈련도감의 도감선(都監船)이 주로 담당하였다.

한편, 육상교통으로는 역참제(驛站制)에 의해 서울에서 지방 각지로 역로(驛路)가 마련되었고, 역로에는 대략 30리에 역(驛)을 설치하여 역마와 숙박시설을 갖추어 놓고, 공문전달ㆍ공물수송 및 출장 관리의 편리를 돕도록 하였다. 이때 출장관리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마패(馬牌)를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교통의 요지, 인가가 적은 곳에 원(院) 또는 관(館)을 설치하였고, 민간인들의 숙박을 위해 주막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원에는 원주(院主)가 있고, 원주전(院主田)이라는 토지를 받아 경비에 충당하였는데 세조 때에 전국에는 1,220개소의 원이 있었다.

또한, 통신시설로서 봉수제(烽燧制)가 운영되었는데,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다른 봉수대에 서로 연락하는 것으로, 각 지방 또는 국경에서의 변보를 서울의 목멱산(木覓山:南山) 봉수대로 알렸다. 신호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하여 식별을 용이하게 하였고, 봉수대마다 10명 내외의 봉수군(烽燧軍)을 두었다. 신호 방식은 횃불 하나면 평시에 무사함을, 둘이면 적의 모습이 나타남을, 셋이면 적이 국경에 접근해 옴을, 넷이면 적이 침공해 옴을, 다섯이면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뜻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파발제(擺撥制)를 통한 직접통신의 방법이 쓰이기도 하였다. 즉, 변방과 서울을 오가는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을 위하여, 30리 내외에 1참(站)을 설치하여 릴레이식 전달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말을 타는 기발(騎撥)과 걸음이 빠른 사람을 통한 보발(步撥)의 방법이 있었다.

교통ㆍ통신시설은 개항 이후 크게 변모되었다. 교통ㆍ통신시설은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당시 일반 국민에게는 경외의 존재였는데, 점차 그 편리함을 알게 되었다. 먼저 철도에서는 경인선(京仁線)이 부설되고 이어서 경부선(京釜線)ㆍ경의선(京義線)이 개통되었고,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가 서울에 전차를 부설하여 운행하였다.

통신시설은 청나라에 의해서 서울∼인천과 서울∼의주 간에 전신선이 가설되었고, 이어서 정부가 일본과 합작하여 서울∼부산 간에 전신선을 가설하고 전보총국(電報總局)을 설치하여 통신업무를 기계화하였다. 전화는 처음에 궁중 안에 먼저 가설되었고 이어서 서울∼인천 간에 시외전화가 개통되었고 뒤이어 서울 시내에 일반 전화가 가설되었다. 독립협회에 의해 계몽운동이 전개되면서 일반 국민들은 근대문물에 대한 각성이 높아졌다.

(뒤에 계속)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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