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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5 (화) 02:30
분 류 사전2
ㆍ조회: 1124      
[조선] 민정중의 졸기 (숙종실록)
《 숙종 024 18/06/25(계묘) / 전 좌의정 민정중의 졸기 》

전(前)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벽동(碧潼)의 적소(謫所)에서 졸(卒)했는데, 65세였다.

민정중은 자(字)가 대수(大受)로 사람됨이 영특(英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제현(諸賢)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國子監)의 장관(長官)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 내는 데에 매우 공효가 있게 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그 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있고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하지 않고 교도(敎導)하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북(關北)을 안찰(按察)하게 되어서는, 북쪽의 풍속은 오로지 무예(武藝)만 숭상하고 문사(文事)에는 소홀하여 진실로 친상 사장(親上死長)하는 의리에 어두우므로, 비록 재질과 능력이 강건(强健)하여도 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자신이 솔선 시범(率先示範)하며 선비들의 교화(敎化)를 크게 천명(闡明)하므로, 얼마 되지 않아서 빈빈(彬彬)해져 볼 만하게 되었다.

그 뒤에 윤휴(尹 )와 허적(許積)이 나라의 일을 맡아 보게 되면서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輿望)은 더욱 높아져, 오늘날의 진요옹(陳了翁)이나 유원성(劉元城)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경신년의 경화(更化) 때에는 제일 먼저 태부(台府)에 들어오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몇 해 동안 한결같이 임금의 덕을 바로잡는 것과 선비들의 공론을 붙잡기에 주력하고, 여타의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만년(晩年)에는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하는 것을 보자, 김수항(金壽恒)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옳음과 그름을 구별하여 밝히므로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힘입는 바가 있게 되었다. 기사년의 변(變)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뒤에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원전】 39 집 267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출전 : 숙종실록 024권 숙종 18년 6월 25일 (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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