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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2 (토) 11:41
분 류 사전2
ㆍ조회: 189      
[조선] 박세채 (한메)
박세채 朴世采 1631~1695(인조 9~숙종 21)

조선 중기 학자ㆍ정치가.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 명문세족의 가계(家系)로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 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49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 생활 2년 만에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원래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이 무렵 이이ㆍ성혼(成渾)의 문묘종사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그가 유직(柳稷)의 문묘종사 반대 상소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내었다.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거시험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자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서인측에 동조하였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측은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고, 그는 관직을 삭탈당한 뒤 유배생활을 하며 6년간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ㆍ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며 윤증(尹拯)ㆍ정제두(鄭齊斗) 등 학자들과 서신 교류를 하고, 양명학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을 밝히는 저술을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ㆍ좌의정을 거치며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와 같이 박세채는 국내외로 어지러운 시기에 태어나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

17세기 청(淸)나라가 등장하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적 상황과 관련한 그의 학문적 특징은 첫째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일, 넷째 사회규범으로서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저서로 《범학전편(範學全編)》ㆍ《시경요의(詩經要義)》ㆍ《춘추보편》ㆍ《남계독서기》ㆍ《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ㆍ《심경요해(心經要解)》ㆍ《학법총설(學法總說)》ㆍ《양명학변》ㆍ《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ㆍ《사례변절(四禮變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

<조동걸>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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