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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26 (목)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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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564      
[근대] 이광수 (브리)
이광수 李光洙 1892 평북 정주~1950. 10. 25 자강도 강계.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사상가.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계몽주의·민족주의 문학가 및 사상가로 한국 근대정신사의 전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본관은 전주.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

생애와 활동

아버지 종원(鍾元)과 어머니 충주김씨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장사를 하던 중 11세에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고 먼 친척집에 맡겨졌으며 어렵게 기식하면서 고대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03년 동학에 입도해 박찬명 대령 집에 머무르며 심부름하다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타이세이[大成] 중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에 접하고 홍명희·최남선 등과 사귀었고, 1906년 학비 곤란으로 일단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건너가 장로교 계통의 메이지[明治]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 미션 학교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교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에 심취했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그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1913년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고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에 잠시 머물렀고, 이듬해 러시아에 들러 교포신문을 주간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행이 중지되자 귀국하여 다시 오산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1915년 김성수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편입한 후 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재학중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고 이후 〈자녀중심론〉 등의 계몽적 논설을 발표함으로써 문명을 날리는 동시에 봉건적 계층으로부터 많은 질타를 받았다.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허영숙과 베이징[北京]으로 애정도피를 했다.

이후 일본에서 '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21년 단신으로 상하이에서 귀국, 선천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1923년 동아일보사 객원이 되어 언론에 관계하기 시작하고 그해 〈조선문단〉 주재로 옮겨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가 1933년 사임하고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당대 브나로드 운동이 확산되는 와중에 장편 〈흙〉을 발표했는가 하면, 1934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자하문 밖으로 이사, 〈법화경〉 번역과 독서 및 영화감상으로 소일하며 시름을 달래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어 안창호와 함께 수감되었다.

반 년 만에 풀려나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고 이른바 '복지황군위문'에 협력하는 친일행위를 했다. 1940년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개명하고 학병권유차 도쿄[東京]에 다녀왔으며, 8·15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다. 1949년 반민특위법으로 수감되었다가 곧 병으로 석방되고, 6·25전쟁중 병상에서 북한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해 10월 북한에서 병사했다. 그가 1970년대까지 북한에 생존했다는 설도 있었으나 1991년 미국에 살고 있는 셋째 아들 이영근이 북한에 가서 아버지 묘소를 찾아 1950년에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은 50년이라는 지속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소설 외에도 시가·평론·수필 등 전영역에 걸친 방대한 규모를 드러냈다. 그러나 주류는 역시 소설이며 더불어 문학사적 가치를 1차적으로 결정해주는 것은 1910년대 계몽주의 소설들이다. 이 시기의 장편 〈무정〉(1917)은 우선 시제의 정확한 구별과 새롭고 의욕적인 문체 등으로 형식 면에서 근대소설로서의 획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전의 신소설과 달리 당대인들의 삶과 성격을 실감나게 그렸고, 사회현실에 대응하는 젊은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근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또한 시대적 이념이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 계몽주의 입장에서 자유결혼 및 근대적 자아각성의 문제 제기를 통해 전통적 인습·윤리를 반대하고, 신교육·신문명을 통한 자강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타난 추상적 계몽주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인식의 결여는 〈무정〉을 진정한 의미의 근대소설로의 평가를 유보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정〉과 같은 계몽소설의 연장에 놓이는 〈흙〉은 농촌계몽소설로서, 브나로드 운동 등의 민족적 교화운동의 일환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광수의 농촌현실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앞선 1916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농촌계발〉이라는 논문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이 글에서 우리 농촌의 결점 중의 하나로 '교육이 없음'을 지적하며 선각자적 지식인이 농촌계발에 앞장서야 함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정신에서 나온 〈흙〉은 농민과의 정신적 연대성이 고조되던 당대의 상황을 반영하며 주인공 '허숭'은 자신의 신분(변호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이상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한편 이광수의 작품 중 상당수가 남녀의 애정을 다루고 있는데 〈유정〉(1933)·〈그 여자의 일생〉(1934~35)·〈사랑〉(1938) 등에 나타난 남녀간의 애정은 통속적인 애정소설과는 달리 정신적인 이상주의를 지향하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면 〈사랑〉에서와 같이 남녀간의 애정은 애욕을 초월한 종교적인 사랑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이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을 토대로 한 것이냐는 문제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광수는 〈단종애사〉(1928~29)를 포함한 다수의 역사소설을 발표해 역사소설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가 역사소설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이며,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항이 어려워지자 현실적인 소재보다 역사소설의 비유적 기능을 빌려 현실을 비판하고 이에 항의하려는 역사소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인 〈이순신〉(1931~32)·〈이차돈의 사〉(1935~36)·〈공민왕〉(1937) 등은 옛 것을 재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역사를 대중화한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복고주의에 흘러 당대 현실에 대응한 실현적 관심을 제기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광수의 시가는 문학사적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은 없다. 민족주의·계몽주의를 주장하는 대중교화적인 성격을 띠는 작품이 대부분이며 자유시로의 모색을 시도했으나 후기에는 시조 형식으로 퇴보했다. 대표적 시집으로 〈3인시가집〉(1930)·〈춘원시가집〉(1940) 등이 있다.

이광수의 대표적 평론은 초기의 〈문학의 가치〉(1910)· 〈문학이란 하(何)오〉(1916)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 평론이라 할 수 있으나 명확한 문학관에 입각하여 하나의 문학적 주의를 이론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서구 문학의 여러 주의를 체계 없이 나열한 한계를 드러낸다.

초기의 잡다한 주의들은 그후 톨스토이 예술론의 영향 아래 공리주의 내지 계몽주의에 뿌리를 내렸고 이후의 문학론들은 대개가 '인생을 위한 예술' 및 '도덕과 예술의 일치'를 강조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그의 논설은 항상 세간의 주목이 되었고 당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가령 〈자녀중심론〉은 자아 중심주의를 주장하며 유교의 근본요소인 '효'를 신랄한 논조로 비판하여 강력한 유교윤리의 지배를 받던 당대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조혼의 악습〉(1916)·〈혼인에 대한 관견〉(1917)· 〈숙명론적 인생관에서 자력론적 인생관에〉(1918) 등은 모두 부르주아 계몽주의를 토대로 유교적 전통에 얽매인 민족사상과 관습의 불합리를 비판하고 있다.

한편 〈민족개조론〉(1922)은 우리의 온갖 민족적 불행의 원인을 민족의 윤리적·도덕적 약점 탓으로 돌려 민족성의 개조를 통한 민중교화를 주장한다. 이 글은 안창호의 준비론 또는 실력양성론을 기초로 했으나 민족불행의 정치적 원인이 제거된 채 민족에 대한 부정과 자학으로 흘러 민족 허무주의로 귀착되는 문제점을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외에도 이광수는 유려하고 친근감 있는 대중적인 필체로 많은 수필 및 시론을 발표해 다수의 독자 대중을 확보했다. 그의 수필들 역시 논설과 마찬가지로 대중에 대한 도덕적 교화와 관습개량을 다룬 것이 상당수이다. 그런가 하면 〈육장기〉(1939)는 현세적인 것을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떠나 불교세계에 귀의하는 고고한 초속주의를 드러내고, 〈금강산유기〉(1922) 같은 기행수필은 단순히 풍물기행에 그치지 않고 불교적 초속의 세계를 희구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평가

이광수는 개화·식민지 시대의 선구적인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한국 근대문학사와 정신사 전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계몽주의 문학과 사상은 여러 가지 한계와 미숙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이던 당대 사회관습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의 문학이론과 소설도 기존의 낡은 문학유산을 극복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바른 역사의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친일의 과오를 범했고, 한편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관념성과 단편성으로 대중에 대하여 사고의 합리화를 저해한 점도 없지 않다. 그외 소설집으로 〈개척자〉(1922)·〈마의태자〉(1928)·〈혁명가의 아내〉(1946) 등과 수필집으로 〈금강산유기〉(1924)·〈인생의 향기〉(1936)·〈반도강산〉(1939)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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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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