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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11:57
분 류 사전3
ㆍ조회: 1170      
[근대] 여운형 (민족)
여운형(呂運亨)

1886(고종 23)∼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출생 및 초기활동]

본관은 함양(咸陽). 아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생. 아버지는 정현(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그는 14세 때에 용인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4년 만에 사별하고, 그 뒤 충주의 진씨(陳氏)와 재혼하였다.

15세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으나 1년도 못 되어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로 옮겼다가 1903년 다시 관립우체학교(官立郵遞學校)로 옮겼다.

그러나 졸업 한 달을 앞두고 그 학교마저 그만두었다. 그 뒤 1907년부터 시작한 성경공부를 하여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1908년경에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連, Clark,C.A.) 목사와 친분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세웠다. 1910년 봉제사(奉祭祀)의 집안 전통을 혁신하고 노복들을 풀어주는 등 안팎으로 변혁을 일으켰으며,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또 중퇴하고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이 학교 역시 중퇴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民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또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이 우리 나라의 자치문제를 타진해오자 찬부양론이 있는 가운데 동경으로 건너가 당시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인 고가(古賀廉次造)를 비롯하여 노다(野田) 체신대신, 무단정치가의 중심인물인 다나카(田中義一), 그리고 미즈노(水野鍊太郎) 정무총감 등과 일련의 회담과 의견교환을 하고 돌아온 일도 있다.

1920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遠東民族勤勞者大會, 또는 遠東被壓迫民族大會라고도 불림)에 참석하였고, 상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1922년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한중상호협조를 위한 남방혁명군(南方革命軍)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였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에 인도, 3년간 복역한 뒤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도 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직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인민당 창당 및 좌우합작운동]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하여 스스로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는 인민당(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앉았다.

그러나 인민당은 인민공화국 선포,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1945.12.27.),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1946.1.19. 결성), 미소공동위원회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보조를 같이하였고, 또한 1946년 5월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좌익을 대표하여 중간적인 위치에 선 일이 있다.

이 좌우합작운동은 우익의 강력한 반탁운동과 공산당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북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인민당의 비여운형계가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과 합동하여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에 여운형은 1946년 10월 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기관설치 반대’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월 12일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정세로서는 사회노동당에 대한 좌우양쪽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큰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게 됨에 따라 1947년 5월 24일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으로 개편하였는데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의 노선을 모색하였고,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현실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 주기가 어려웠다. 또, 이러한 노선의 추구 때문에 자연히 인물본위의 정당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세의 청년으로부터 2발의 권총사격을 받아 절명하였다. 그는 호방담대하면서도 관용적이고 인자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참고문헌≫

呂運亨先生鬪爭史(李萬珪, 民主文化社, 1946), 夢陽呂運亨(呂運弘, 靑廈閣, 1967).

<이정식>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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