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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12:28
분 류 사전3
ㆍ조회: 1415      
[근대] 여운형 (정병준)
‘좌우합작 민족화합의 정치지도자’ 몽양 여운형(呂運亨)

정병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목포대 사학과 교수)

여운형을 둘러싼 논란

한국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정치인 가운데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 1886~1947) 만큼 찬반과 훼예(毁譽)가 양극적인 인물은 없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정치인을 이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사가 동원되었다. 공산주의자, 민족적 민주사회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그에게 적용되었다.

그에 대한 논란은 주로 해방후 그의 행적과 관련되어 증폭된 것이었다. 당시 좌파의 인물평에 따르면 여운형은 팔방미인형의 정치지도자였고 그 반면에는 강철의 혁명가 박헌영이 위치했다. 미군정의 비유법에 따르면 여운형은 병약한 약골 김규식의 파트너인 은도끼였다.

때에 따라 여운형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좌파는 혁명동지로 출발해서 회색적 기회주의자, 친미 허수아비에 이르는 극단적 평가를 오르내렸고, 미군정 역시 온건 민주주의 인사로부터 친공 친북주의자,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 친일 브로커에 이르기까지 양립할 수 없는 인물평을 내렸다.

어떻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단적이며 논란 그 자체일 수 있는가? 해방후 여운형은 양극단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도대체 여운형은 누구인가?

항일과 건국준비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이 겪은 20세기 한국사는 말 그대로 비극적이었다. 철들 무렵 봉건왕조는 몰락했고,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가 잠시 맛본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의 와중에서 그의 운명은 암살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제시기 여운형의 활동은 1929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 여운형의 주활동무대는 중국이었다. 일제의 강제합병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여운형은 1917년 신한청년당 결성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필두로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독립 호소(1920) 등 외교적 방법에 의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파리강회회의 실패를 겪은 후 여운형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과 가까워졌다. 상해의 초기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하기도 했던 여운형은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한 한국인이었다. 1921년 모스크바 극동노력자대회에 참가해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난 여운형은 이후 중국혁명운동에 가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의 특별당원이 되었다. 1929년 상해에서 마흔 네 살의 나이로 검거된 여운형이 출감한 것은 1932년이었다.

두 번째 시기의 활동무대는 국내였다. 1933년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 되었고, 이 신문은 베를린올림픽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최초로 주도했다. 이 시기 여운형은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조선체육회 회장이자 청년들을 사로잡던 당대의 웅변가로 합법공간에서 활동했다.

일제시기 마지막 여운형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비밀스런 조직을 꾸리고 운영했다. 비합법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은 1943년에 조선민족해방연맹이란 이름으로 출범했는데, 이는 각계 각층을 망라했을 뿐 아니라 국외 항일단체와도 연계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이었다. 건국동맹은 해방후 여운형이 정계의 핵심으로 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건국동맹은 명칭 그대로 일제의 패망을 당연한 전제로 삼아 건국을 준비한 국내 유일의 조직체였고, 이런 건국준비와 항일투쟁을 2년 이상 유지한 연륜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일제시기 여운형과 관련해서 별다른 논란이나 의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일제시기 여운형의 활동과 위상은 탁월하긴 했으나 독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해방후 여운형은 준비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렸고, 출범 한달만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를 둔 건준은 한국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

해방후 한국정치의 폭발성을 표현하는 정당 사회단체의 족출(簇出)과 대중의 혁명적 진출은 해방이라는 계기를 향도한 건준이라는 도약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곧바로 남한의 핵심적 지도자로 등장했다.

해방후 여운형의 활동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그가 가는 곳에서 민족통일이 논의되었고, 그는 모든 민족통일전선 결성시도에 빠지지 않는 대표주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후 최초의 민족통일전선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건준-인공의 합작의 중간역, 5당 코뮤니케의 주체, 좌우합작운동의 선봉, 5차례의 방북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방후 그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좌우합작운동만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반편, 비판자들은 인공 활동과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 등 좌익활동만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그의 친공산주의적 노선을 드러내는데 집착했다. 나아가 정보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는 여운형의 방북과 직계 가족의 월북을 거론하며 여운형이 북한의 5열이었다는 단행본을 간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해방후에 걸어간 노선은 짧게는 해방직전의 건국준비활동, 길게는 1920년대 상해의 망명시절부터 형성된 역사적 근원을 갖고있는 것이었다. 사상이나 노선만을 놓고 볼 때 여운형의 입장은 (반)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지식인 혹은 정치가가 선택하게 되는 이념적 모호성을 대표했고 특정한 사상 이념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때문에 여운형을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의 사상적 지향이나 이념적 경향성이라기 보다는 그의 실천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좌우합작 남북연합의 새로운 조명

지금까지 여운형의 해방후 활동과 관련해 찬반 양론자가 모두 주목했던 것이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본격화 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는 일제시대 신간회의 민족 통일ㆍ단결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지는 민족통일운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이었고, 부정적인 평가는 미군정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공작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종래에 중간좌파 여운형과 중간우파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은 단순히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연합을 목표로 한 것이며 좌익과 우익의 물리적 결합 혹은 동수연대의 방안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좌우합작운동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위한 합작이었고, 그 속에는 남한 내 좌우합작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표와 이에 기초한 남북연합이라는 또다른 목표가 존재하고 있었다.

즉 좌우합작운동은 본질적으로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남한내 좌우파의 합작, 이에 기초한 남과 북의 연대ㆍ연합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ㆍ남북연합으로 통일ㆍ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논의되지도 주목받지도 못한 지점이다.

1946년의 시점에서 남북연합의 구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와는 달리 이 시점의 남북연합 구상은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1946년에만 5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ㆍ김두봉 등과 십여 차례 이상 서신교환을 가졌다. 또한 여운형은 소련군 사령부의 고급장교들과 북한 정치지도자들과도 접촉했다. 이들 사이에선 남북통일문제가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운형을 만난 소련군 사령부는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문서를 남겼다. 남북연합은 단순한 구상의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도와 접촉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물론 남북연합은 남한 내 좌우합작의 완성에 기초해야 본격화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의 성격변화와 맞물려 공개적ㆍ전면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이후 그와 함께 남북연합을 추진했던 김규식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함으로써 그 경험적 유산이 이월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좌우합작운동의 내용적 핵심이 좌우합작ㆍ남북연합이었다는 점은 새롭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남과 북의 견해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은 좌우합작운동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여운형과 김일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 남한은 김일성과의 접촉은 가급적 비켜가며 좌우합작운동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길

해방직후 여운형은 단지 좌우합작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주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운형은 해방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ㆍ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ㆍ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가지 층위의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가능하다는 판단을 갖고있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좌익내부, 좌익-우익 간의 합작, 미군정과 소군정과의 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의 차원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은 좌익 내부의 통일에도 기여했지만, 분열에도 일조한 것이 사실이며 한편으로는 우익진영과 합작을 논의한 유일한 좌파였다.

미군정에 드나들었지만 소군정과도 접촉했으며, 때에 따라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은 유일한 남한 정치인이었다. 여운형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양론은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 중 일부분만을 과도하게 강조한 데서 극단적으로 입장이 갈라졌다.

과연 여운형은 정치적 기회주의자였던 것인가? 해방이후 암살(1947. 7.19)에 이르기까지 여운형의 활동은 미-소, 좌우, 남북간에 걸친 폭넓은 것이었지만, 그 중심은 민족 내부의 통일ㆍ단결 완성 혹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집중되었다. 여운형은 민족 내부에 대해서는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합리적 민주주의자의 입장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여운형이 합법 정치공간에서 대중정치가였다는 사실이다. 여운형은 비합법 조직가나 강철의 혁명가가 아닌 대중정치가였고, 선동가였다. 여운형은 원칙에 근거해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대외적으로 여운형이 강조한 것은 민족자주였지만, 여기서 여운형이 보인 모습은 극히 현실주의적 접근방식이었다. 내부적 힘을 강조해 외세를 경시하거나, 외세를 등에 업으려 하지도 않았다. 때에 따라 여운형이 미군정에 의해 흔들린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말처럼 여운형은 미소를 한반도의 주인이 아니라 물러나갈 ‘손님’으로 대접하고 사고한 것만은 분명했다.

한편 미-소, 좌-우, 남-북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여운형은 매우 다면적 접촉관계를 유지한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대립ㆍ갈등관계가 중첩되어 있던 해방후 정치상황에서 여운형은 동일한 이념적ㆍ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기 보다는 현실문제 타개방안을 중심으로 부동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합작-남북연합이 논의된 것은 그의 정치적 특징ㆍ장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반면 이데올로기의 진영 대립 속에서 공중분해될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여운형의 정치적 추종자와 반대파는 특정 사상ㆍ이념으로 그의 사상적 지향을 규정했지만, 이는 규정자의 상대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여운형의 사상적 지향ㆍ노선은 이미 체계화되고 일관된 논리를 갖춘 사상에 기초했다기 보다는 민족통일ㆍ독립을 위해 그의 말과 글, 활동을 집약시키던 형성과정에 놓여있었다. 여운형은 외세에 대해서 대외자주, 민족내부에 대해서 민족통일, 이념적으로는 친사회주의적이지만 비공산주의적인 경향을, 정치적으로는 합리성에 기초한 연합ㆍ연대를 추구했다.

여운형에게 중요했던 두 가지는 민족자주와 민주주의였다. 여운형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규정했는데, 이는 여운형의 사상ㆍ이념적 모호성 불명확성을 반증하는 한편 당시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정 이념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이 중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반대파나 비판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여운형의 모습은 분명 기회주의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있다. 미소라는 강대국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전장이 되어버린 한국현대사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현실주의적 접근마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연구 저, 신준영 편, 2001 『나의 아버지 여운형』 김영사 중에서)

출전 : 웹진 한국현대사-발굴 현대사-인물로 읽는 남북현대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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