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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2 (토)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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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73      
[근대] 간도의 독립운동 (민족)
간도(독립운동)

세부항목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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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독립운동)
간도(현황)
간도(참고문헌)

[기지의 건설]

1910년을 전후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독립전쟁론이란 일본인의 침략 근성과 제국주의적 식민지 팽창 정책이 한국을 강점한 데 이어, 중국·러시아·미국 등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수립된 대일 항쟁 방법론이다.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인은 대일 독립 전쟁을 감행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민은 무장 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첫 단계 사업은 집단적으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안은 신민회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그 대상지는 간도였다.

간도를 이주 지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반도와 두만강·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둘째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점, 셋째 이 지역에는 일본의 권력이 미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를 탐지한 일제가 1910년 12월말부터 1911년 1월초에 걸쳐서 약 600명의 민족운동자를 체포, 투옥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황해도의 안명근(安明根), 신민회의 양기탁(梁起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기지 설립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금도 꾸준히 계속되어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은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였다. 아울러 이곳에 군사교육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치해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특히,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나아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4년제의 본과 이외에 속성과로서 6개월간의 장교반과 3개월간의 하사관반을 두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결과 3·1운동 때까지 7백∼8백명 안팎의 사관을 양성하였다. 이들이 곧 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행해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이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독립운동 기지로서는 우선 명동촌(明東村)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다음으로는 왕청현의 나자구(羅子溝)를 들 수 있다. 1913년에 이 지역에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 동안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소만 국경 지역인 밀산(密山)에서는 신민회의 이동휘(李東輝)가 깊은 산 속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포 청년 1,500명을 훈련시켜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 기지들은 이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확대, 발전인 것이다. 아울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3·1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 전쟁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그 의미가 있다.

[전개]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을 무렵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려 했지만, 이것은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을 간과한 비현실적인 투쟁 방략이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고,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각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속속 출현한 독립군 부대들은 현지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 침투해 일본군 국경 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과 1920년 두해 동안 국내로 진입한 독립군의 무장 투쟁의 일례를 살펴보면, 우선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삼엄한 국경 수비에도 불구하고 혜산진을 점령하고 갑산으로 진격하였다. 이어서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다. 아울러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이 국내로 진격해 회령을 점령하는 등 크게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한반도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이들 독립군 세력을 조기에 제거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1920년 10월에 이른바 ‘간도 출병’을 단행하였다. 그들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여단(2개 연대) 규모의 정규군을 두만강 대안(對岸)의 간도 지역에 투입하였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와 북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를 동원해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간도 지역인 길림성과 연길도 일원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사이의 접전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국내 침공 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전투이다.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봉오동으로 유인, 급습함으로써 적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회 교전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독립군 측도 6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두 전쟁은 3·1운동 후에 행해진 독립 전쟁 가운데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독립군이 크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승리는 간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재만 한인은 물론, 한민족 전체에게 독립 전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울러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승리가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청산리와 봉오동독립전쟁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군대를 대거 간도 지역에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력과 무장면에서 열세였던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소만 국경 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한 뒤였다.

이에 분격한 일본군은 화룡현과 연길현 등지에 재만 한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죄 없는 양민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구 살상하였다.

한편, 밀산 지역으로 이동한 재만 독립군은 일단 진영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군단 병력은 약 3천 5백명 정도였다.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曺成煥), 사령관은 이장녕(李章寧)이 각각 담당하였다.

밀산에서 겨울을 지낸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다시 이동을 시작해 소련령 연해주와 흑룡주일대(黑龍州一帶)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文昌範)과 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을 받아 소만 국경의 하천인 우수리 강을 넘어 이만(Iman)에 도착하였다.

이만은 소만 국경에 연한 소련령의 도시로서, 당시 하바로프스크 이북의 흑룡주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파스크(Spassk)에 이르기까지의 연해주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백군(白軍) 및 일본군 세력과의 완충 지대에 들어 있었다.

3월 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간도 독립군들은 무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여망에 따라서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1년 4월 중순에 대한독립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 세력으로부터 항일 공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아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 결과 김좌진·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동만주의 밀산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홍범도·최진동·지청천(池靑天)·안무(安武) 등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서로군정서계열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라고 불리고 있던 알렉세브스크(Alekseevsk)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독립군들은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갈라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이를 계기로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속한 대한의용군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1922년말경부터 다시 간도 지역으로 복귀해 효과적인 대일 항쟁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단체의 정비]

1920년말을 전후해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군 부대들이 소련으로 이동한 뒤에도, 간도 지역에는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잔류해 비록 위축된 상황에서나마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단체로는 대한독립단·광복단·광복군총영·혈성단·백산무사단 등이 있다. 이들은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위해 1921년 1월부터 각 단체간에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이듬해에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대한독립단의 일부와 광한단·한교회(韓僑會) 등의 단체가 통합에 합의함으로써 대한통군부가 발족하였다. 총장은 채상덕(蔡相悳), 비서장은 고활신(高豁信), 사령관은 김창환(金昌煥)이 각각 담당하였다.

그 해 6월에는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던 단체들 사이에 문호를 개방해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가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재개되어 많은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그리해 8월 23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8개 단체의 대표 81명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고 산하에 무장 부대인 의용군을 두었다. 관할구역은 16개의 지방구와 3개의 특별구로서 편성되었으며, 행정·입법·사법기관을 설치해 임시준칙·헌병조례·검찰법규 등의 법률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의 조직이 비대해지자, 신진 소장 세력과 보수 노장 세력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노장 세력이 별도로 의군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함에 따라 소장 세력들은 대한통의부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3년 12월 민사 계통의 부서를 축소, 조정하고 군사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비록 군사 분야는 확대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군사부 중심 체제로 축소되었다.

대한통의부가 내부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 세력이 생기는 등 분열의 위기에 직면해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무장 부대인 의용군은 중립을 지키면서 고유 임무에 충실하였다. 특히 1923년에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1,030명의 대원으로 소단위 부대를 편성해 실시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의 일본 경찰의 주재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거나 친일파의 숙청, 군자금의 모금 활동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한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서간도와는 달리 조직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통합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에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큰 타격을 입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북간도 일대에서 조직의 재정비와 복원에 주력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출병을 단행하자 북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련령으로 이동해 갔다. 그러나 일부 독립운동 세력은 항일 활동을 중단하고 뒷날을 기다리며 북간도의 오지(奧地)에 잔류하였다.

소련령으로 이동하였던 독립군들은 1921년 6월에 자유시 참변을 겪고 이듬해 7월에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채 다시 북간도로 돌아왔다. 따라서, 일본군의 간도 출병 이후로 북간도 지역에 흩어져 잔류하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독립군들과 소련령에서 돌아온 독립군은 옛 근거지인 북간도 지역에서 다시 합류해 부대의 재건을 모색하게 되었다.

[3부의 형성과 발전]

1922년 8월말에 서간도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로 갈려 대립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의 군사 조직인 의용군은 당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한통의부와 의군부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점차 심화되자,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의용군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제휴하게 되면서, 1923년 8월 의용군의 대한통의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되었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관할 구역은 집안현(集安縣)·장백현(長白縣)·안도현·무송현(撫松縣)·통화현(通化縣)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이었다. 참의부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1924년 5월에 국경(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 총독 사이토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5월 19일 사이토가 선박을 이용해 압록강의 국경선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 대안의 절벽 위에 저격병을 매복시켜 사이토를 암살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 독립군의 매복 지점과 순시선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몇 분 동안 저격병이 총격을 가하였으나, 거리가 미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당시에 완벽한 치안 상태를 자랑하던 조선 총독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편, 대한통군부가 확대, 개편된 대한통의부는 이탈 세력들이 의군부와 참의부 등을 조직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통의부를 비롯해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광정단(匡正團)·노동친목회 등의 단체들은 1924년 7월 10일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고 재통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의성단·변론자치회·고본계(固本契) 등의 단체가 더 참여한 가운데 8개 단체의 대표 25명이 11월 25일에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정의부는 행정기관으로서 민사·군사위원회 등 9개 위원회로 구성된 중앙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입법기관으로서 의회를, 사법 기관으로서 사판소(査判所)를 중앙과 지방 구(區) 등에 각각 설치하였다.

그런데 정의부의 국내 진입 활동은 참의부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정의부의 군사 단체인 의용군의 본부를 화전현(樺甸縣)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참의부는 본부를 집안현에 설치하였다.

즉, 정의부의 군사활동은 1925년 7월 4일에 의용군 7명이 평안북도 철산 경찰서 소속 차련관 주재소(車輦館駐在所)를 습격해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한 경우와 같이 일본 경찰과 소규모 전투를 전개하는 데 그쳤다.

한편, 1925년 3월 10일에 북만주 지역의 영안현 영안성(寧安縣寧安城)내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그 주축은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이다.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8월에 복벽주의자 이범윤과 공화주의자 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동녕현(東寧縣)에 조직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20년 말에 밀산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의 후신이었다.

그런데 신민부조직에 참가한 것은 북로군정서출신인 김좌진 계열이었다. 대한독립군정서는 1924년 3월에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던 현천묵(玄天默)·조성환 등이 중심이 되어 동빈현(同賓縣)에서 조직된 공화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서 북로군정서의 후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민부는 표면적으로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의 합작이었지만, 실제로는 북로군정서의 후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민부의 조직 당시에 참가한 구성원의 특징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종교적인 면을 보면 대부분이 대종교의 신자이며, 특히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원 가운데 북로군정서의 출신이 그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력은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와 신흥학교 등 군관계 학교의 출신과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한 인물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서 신교육을 받은 인물이 무관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모두 북로군정서의 출신이었으며, 그들의 출신 지역은 전국에 걸쳐 있었다.

1927년 12월 25일에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민부의 구성원은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각 파의 구성원의 특징을 살펴보면, 군정파는 북로군정서에서 김좌진과 함께 무력 투쟁을 하였던 인물들로서 대부분 대종교의 신자였고, 무관학교출신들이 많았으며 신분상으로는 양반 가문의 출신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지역별로는 경기도·충청도·함경도 지역 출신의 인물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한편, 민정파는 일반 대중을 위한 자치 활동에 주로 관여하였던 인물들로서 최호(崔灝)가 중심이었다. 대부분 대종교의 신자로 양반 가문의 출신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한학을 배웠다. 지역별로는 평안도와 경상도의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신민부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를 추종하던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단군을 정점으로 한 단군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보다 계급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또한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때문에 공산주의자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출신 성분 또한 양반 가문의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침투를 저지하고 대종교적 민족주의 이념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공화제의 실시를 표방하였고 위원 제도와 당제도 등을 추구하였다.

신민부가 애초에 추구하였던 독립운동의 방법론은 무장 투쟁을 우선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단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김좌진이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장 투쟁을 이끌어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요 구성원 가운데 무관학교의 출신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방법론과 관련해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민부에서는 농촌의 계몽과 교육 및 산업의 보급과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민부는 재만 한인에게 항일 민족 의식 및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학교의 설립과 ≪신민보≫의 간행 등을 추진하였다.

반면, 산업의 진흥을 위해 공농제(公農制)의 실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의 설치 등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신민부에서는 효과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군자금의 모집과 독립군의 양성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군자금은 재만 동포의 의무금 및 모연대에 의한 모연금으로써 충당하고자 하였으며, 군구제(軍區制)의 실시, 둔전제의 실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의 설치 등을 통해 독립군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의 모금은 북만청년총동맹과 적기단(赤旗團) 등 공산주의 단체의 방해 공작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독립군의 양성 또한 중국의 마적 및 지방민들의 비협조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제와의 무장 투쟁 또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만, 국내 진입을 위한 예비 공작과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친일 한국인 암살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 통합운동]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으로부터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에는 50여 개에 이르는 각 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 각기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실천에 옮기며 일제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통합,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1925년에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5년 6월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중국동북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조건이 악화되자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민당과 소련의 공산당의 영향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만이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으며, 근대적인 정당정치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경·상해·남경·광동 등지와 간도, 그리고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일제의 방해 공작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는 독립운동계 자체 내의 문제가 더 큰 요인이 되었다.

즉, 개인 본위 조직론과 단체 본위 조직론이라는 방략상의 의견 대립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이었으며, 그밖에 사상대립·지연·혈연 등 봉건적인 요소들의 대립 등도 실패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한 세력은 민족유일당협의회로 발전하였으며, 중심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이에 반해 개인본위조직론자들은 민족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경상도 및 강원도 출신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측이었던 김동삼(金東三) 등은 1928년 4월 신민부의 김좌진을 방문하고 3부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다시 한번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에 가담하고자 하였던 세력으로는 이른바 정의부 탈퇴 파인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의 군정파, 그리고 참의부의 주류인 김승학(金承學) 계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줄기찬 방해 공작과 신민부와 참의부 자체 내의 내분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독립 운동가들은 계속해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만이 일제를 한국으로부터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28년 12월 정의부측의 김동삼, 참의부의 김승학, 신민부의 김좌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잠정적인 조직으로서 혁신 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한편, 혁신 의회에 참가하였던 인사들, 특히 신민부의 군정파인 김좌진 등은 1929년 7월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무정부주의를 수용해 한족총연합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한편, 1929년 4월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심용준파(沈龍俊派), 그리고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이탁(李鐸) 등이 길림에 모여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국민부는 그해 9월 20일에 개최된 제1회 중앙 의회에서 ‘국민부는 동포 사회의 자치 행정만 담당하고, 혁명 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수행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2월에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당군(黨軍)으로서 조선혁명군을 창군하였다.

1931년에 일제가 동북사변(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지역을 장악하려 하자,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각각 간도 지역의 중국 항일군과 제휴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1932년 3월에 시작해 그해 7월에 끝난 영릉가(永陵街) 및 흥경현전투(興京縣戰鬪)는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병력 1만여 명은 중국 의용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여 적의 맹공을 물리쳤던 것이다. 결국, 관동군의 공습작전에 못 이겨 퇴각하였지만, 이때 일본군의 사상자수는 막대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독립군이 중국군 군대와 협동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를 들 수 있다. 이 전투는 비록 한중 연합군에 의한 전투였다 하더라도 주도권을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이 가지고 있었으며, 동북사변 이후 위세를 떨치고 있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중 연합 작전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역이 완전히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한국독립군은 1933년에 그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혁명군은 그 뒤에도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1938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해체는 곧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투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자 재만 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끝까지 항쟁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주선으로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설반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후일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헌하였던 것이다.

<박영석>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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