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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05 (토) 06:57
분 류 사전3
ㆍ조회: 930      
[근대] 일진회 (민족)
일진회(一進會)

1904년 유신회를 개칭해 조직되었던 친일단체.

[조직]

민씨(閔氏) 일파의 박해를 받아 10여 년간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宋秉畯 : 野田平次郎)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오타니(大谷喜藏) 소장을 따라 군사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정국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하였다.

서울에서 전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빈번한 접촉 끝에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임시회장에 윤시병을 추대하였다. 20일에 다시 특별회를 개최해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경무사(警務使) 신태휴(申泰休)에게 그들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일본헌병들이 막았고 오히려 경무청 순검(巡檢)을 검속한다고 위협해 그들의 회합을 옹호하였다.

이 회는 발족과 동시에 ① 황실을 존중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공고하게 할 것, ②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할 것, ③ 정부의 개선정치를 실시하게 할 것, ④ 군정과 재정을 정리하게 할 것 등 4개 강령을 내걸었다.

그 주지를 정부에서 실시하도록 권고하기 위해 정부에 헌의서(獻議書)라는 것을 제출하였다. 그 매조목에 총대위원 한 사람씩을 선정,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일진회의 탄압에 대해 문책하기도 하였다. 또, 회원은 모두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을 하는 등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당시 각종 사회단체는 서울을 무대로 활동했을 뿐 전국적인 지방 조직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진회의 활동 역시 서울을 무대로 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대중 기반을 가지지 못하고 일제의 보호 아래 명백만을 유지해갔다.

이 무렵, 송병준은 이용구(李容九) 등이 동학(東學)의 잔여 세력을 규합해 이 해 9월 하순에 조직한 진보회(進步會)가 전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음에 착안해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하였다. 이 해 12월 2일에 진보회를 매수, 흡수해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용구는 지방지부 회원의 거의가 진보회의 회원이라는 미명 아래 13도지방총회장직에 앉게 되었다. 배후에서 일진회를 조종하던 송병준은 이듬 해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취임하였다.

송병준은 일제의 계략적인 흉계에 호응해 윤시병을 멀리하고 이용구를 매수하였다. 1905년 12월 22일 총회에서 다시 회장에 이용구, 부회장에 윤시병, 지방총회장에 송병준, 평의원장에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였다. 또 일본인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한편,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송병준이 본래 품었던 야심대로 반민족적 망동(妄動)을 서슴지 않았다.

일진회의 회원은 창립 당시 300명이었으나 진보회와 통합한 뒤에는 곧 수만명으로 늘었고,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1910년경에는 이른바 100만의 회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실제는 10만명쯤 되었다고 한다.

[배후]

일진회의 운영의 재정 염출은 표면상으로는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달리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없었다. 창립 발기 초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기밀비로 망동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진회가 친일적인 행위의 기치를 점차 선명하게 내세움에 따라 일제는 5만원을 몰래 지원하였다. 러일전쟁 중 일진회원들의 일본군을 위한 수송·정탐·노역 등에 대한 일본군으로부터의 총영수고금(總領收雇金) 8만 9940원, 전쟁 종료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의 기밀보조금, 이 해 5월 15일 일본육군성으로부터 10만원을 각각 교부받았으며, 이 해 8월에는 통감 이토(伊藤博文)로부터 보조금으로 26만원을 받았다.

송병준이 이토와 가쓰라(桂太郎)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이토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때 일진회가 이토·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이따금 금품을 받아 반민족적인 경거망동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일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일진회의 규칙에는 고문을 두도록 되어 있지 않으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제,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배후를 조종하였다. 이 회가 창립 발기된 때부터 해산될 때까지를 전후해서 사세(佐瀨熊濕)·가무치(神鞭知常)·가미야(神谷卓男)·모치쓰키(望月龍太郎)·우치다(內田良平)·미내키시(峰岸繁太郎)·다케다(武田範之)·스기야마(杉山茂丸) 등이 막후의 조종자나 고문으로서 일제의 침략과 일진회의 반민족적인 망동을 위한 비계(秘計)를 전수하였다.

[행적]

일진회는 일제의 한국침략에 대한 방향과 병행해, 1904년 10월 22일 평의원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일진회의 취지가 일본군략상에 조금도 방해가 없다는 뜻을 의결해 이 날 주한일본군사령관 육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好道), 헌병대장 다카야마(高山逸明),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게 공함(公函)을 전달하였다.

이어 일본군의 북진을 위한 함경도 지방의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였고 함경도로부터 간도에 이르는 일대를 출입하면서 러시아군 동태를 정찰하였다.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일본이 급격히 서두르자, 일진회원들은 자진해서 이 공사의 노역에 거의 무료봉사를 하였다. 이 때 적지 않은 사상자까지 냈다.

그 동안 러일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종결되어, 영국·미국 등과 이해 대립없이 미국과 태프트·가쓰라각서(Taft-桂太郎覺書, 1905.7.)가 체결되고, 영국과는 영일동맹(英日同盟)이 개정되고(1905. 8.),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Portsmouth條約, 1905.9.)이 성립되었다.

한국을 보호국화한다는 불길한 내용이 전국민에게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일진회는 을사조약 체결에 앞서 이 해 11월 6일 ‘외교권의 이양을 제창한’ 이른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서는 일진회의 매국적인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선언서가 발표된 지 10여 일 뒤인 17일, 드디어 일본군의 위압 아래 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1906년 3월 통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일진회는 군부와의 관계를 끊고 통감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매국적인 망동에 더욱 광분하였다.

조약이 체결된 지 2개월 뒤에는 일진회원이 군수로 임명되기 시작하다가 반년 뒤에는 관찰사에까지 기용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매국주구를 등용하여 침략정책을 무난히 수행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일진회는 기관지 ≪국민신보 國民新報≫(1906. 6.)를 통해 온갖 친일적인 망발을 퍼뜨렸다. 송병준은 이완용(李完用) 내각과 결탁, 농상공부대신으로 입각해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하였다.

1907년 7월 고종의 양위와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항일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막대한 병력과 군비를 투입하고 무자비한 살육작전을 폈다. 이 때 일진회도 의병을 진압할 이른바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해 의병 탄압에 앞장섰으며, 심지어 의병을 폭도시(暴徒視)하였다.

이와 같은 일진회의 망동은 일제 이상으로 분격을 사서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입은 그들 회원의 피해는 사살자 9,260명, 부상자 140명, 소각가옥 360호, 재산손해액 5만 501원 31전에 이르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사살되자 일본 내의 급진파로 하여금 여론을 조작해 이른바 합방이라는 강경책을 요구하게 하였다. 소네(曾窟荒助) 통감이 무능하다 하여 물러나고, 이듬 해 5월에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으로 임명되면서 병탄의 시기가 단축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일본은 한국인 스스로가 이른바 합방을 원하고 있다는 형식상의 합법성을 날조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른바 합방이 한국인 스스로의 의사라고 가장하기 위해서이다.

일제의 대한과격파인 가쓰라·야마가타(山縣有朋) 등을 비롯해 그들의 고문인 우치다·다케다·스기야마 등이 1909년 12월 4일에 발표된 “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 양국은 합방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조작하였다.

이는 일제에 의한 병탄이 강압적으로 단행되기 약 8개월 전의 일로, 일제가 조작한 여론환기 수단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것이었기에 한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는 이를 노회선언(奴會宣言)이라 혹평했을 뿐만 아니라, 중추원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이용구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했으나 일제의 비호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진회의 간부나 회원 중에서 탈퇴하는 자가 속출해 불과 수일 만에 90여 명에 달하였다. 또 이용구와 우치다도 일본헌병대에 신변을 보호받아야만 할 처지에 있을 만큼 일진회는 성토와 규탄의 대상이었다. 이와 같이 일진회는 일제의 한국병탄을 위해 매국적 소임을 다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데라우치 통감에 의해 이 해 9월 26일 해체되었다.

[결과]

일진회는 조직·배후관계·행적 상황을 통해 볼 때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일제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조직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일제는 정부 상대의 음모와 병행해 일반 국민에게도 마수를 뻗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진회로 하여금 관제 민의를 조작하게 하여 한국민의 여론을 혼란하게 하고, 동시에 일제 침략을 한국민이 찬성하는 것처럼 가장해 한국민의 구국항쟁을 분열, 감퇴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진회의 지나친 망동은 저돌적 친일매국경도(親日賣國傾倒)로 떨어져 일반국민의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말사회의 각계각층으로부터 빈축의 표적이 되었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大韓季年史, 駐韓日本公使館記錄(國史編纂委員會所藏本, 미공개자료), 日韓倂合始末 3卷 4冊(內田良平, 國史編纂委員會所藏本寫本), 一進會會報(1904. 8.), 元韓國一進會歷史 4冊(李寅燮, 文明社, 1911), 韓末社會團體史論攷(趙恒來, 螢雪出版社, 1972), 朝鮮の保護及倂合(朝鮮總督府, 1917), 朝鮮倂合史(釋尾東邦, 朝鮮及滿洲, 1926), 日韓合邦秘史 上·下(葛生能久, 黑龍會. 1930), 韓末一進會硏究(趙恒來, 一潮閣,199?)

<조항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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