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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7 (토)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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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08      
[근대] 신채호 (브리)
신채호 申采浩 1880 충남 대덕~1936. 2. 21

독립운동가·역사가·언론인.

한말 언론·교육·신민회(新民會)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망명 후에는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또한 역사연구를 통해서 한국근대역사학의 방법론과 인식을 성립시켰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박철(朴鐵)·옥조숭(玉兆崇)·윤인원(尹仁元).

계몽운동기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정언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았고, 10여 세에 사서삼경과 〈통감〉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1897년(광무 1)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면서 신구서적을 섭렵했으며,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남규(李南珪)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사귀었다.

그해 10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01년 신규식이 설립한 문동학원(文東學院)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04년 6월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신규식·신백우 등과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폈다.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사퇴하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에 입사했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등을 실어 무기정간을 당하자, 1906년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에 들어가 주필이 되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의 논설과 〈독사신론 讀史新論〉 등 역사관계 논문, 시론인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고, 〈대한협회월보〉·〈대한협회회보〉 등에 〈대한의 희망〉·〈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했다. 번역서로 〈이태리건국삼걸전〉·〈을지문덕〉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교육용 한글잡지인 〈가정잡지〉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언론활동과 더불어 1906년 3월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결성된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에 참가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운동이 어려워지자 1907년 양기탁·이동녕·이회영·이동휘·안창호·전덕기·이갑·이승훈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통해서 운동을 고무하는 한편 스스로 담배를 끊어 돈을 기탁하기도 했다. 1909년 윤치호·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했다.

망명활동기

1910년에 들어 일제의 한일합병 정책이 노골화되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구축을 계획한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4월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산둥[山東] 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신민회의 '청도회의'에 참가했다. 회의는 북만주지역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후신인 〈대동공보 大東共報〉에 관여한 후 〈청구신문 靑丘新聞〉도 발행했다. 1911년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함께 조직한 광복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같은 해 12월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로서 교민들의 산업진흥과 민족의식의 고양, 그리고 교민 사이의 대립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주필이 되었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의 교민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고 이무렵 신규식·문일평·박은식·정인보·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청년교육을 위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웠다. 1914년 대종교 관계자인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만주 펑톈 성[奉天省] 화이런 현[懷仁縣]으로 가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사〉 집필에 착수했다.

그리고 장차 독립군 양성도 꾀할 겸 백두산에 오르고, 남만주 일대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광개토왕릉을 답사하기도 했다. 1915년 3월 이상설·신규식·박은식 등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서의 한중합작을 도모하는 한편 효율적인 독립투쟁을 위해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일단의 동지가 검거되고 국제정세가 여의치 않아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6년 베이징[北京]에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다. 그해 8월 대종교 교주인 나철(羅喆)이 죽자 통분하여 〈도제사언문 悼祭四言文〉을 지었다. 1918년경 베이징의 푸퉈옌[普陀庵]에 머무르며 〈조선사〉를 집필하면서 〈중화바오 中華報〉·〈베이징르바오 北京日報〉에 논설을 기고했다.

임시정부 활동기

1918년 1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국외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 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서울의 한성정부, 만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함께 4월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서울에서 발표된 한성정부에서도 평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들 여러 정부를 통합한 상해 임시정부의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지명에 대해 그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들어 반대했다. 그해 4월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식의원으로 선출되고, 7월 제5회 전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았으나 초기부터 이승만의 외교노선에 반대하면서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퇴했다.

이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10월에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을 전제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을 주창하며 발간된 〈신대한 新大韓〉의 주필이 되었다.

〈신대한〉이 일제와 임시정부의 방해로 휴간되자 1920년 9월 박용만·신숙 등과 만주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군사통일촉진회를 발기했지만 당시 독립군 활동이 일제의 만주토벌에 따라 침체에 빠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보합단(普合團)의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內任長)에 추대되었다.

1921년 1월 김창숙과 함께 시사논설과 한국사론을 다루는 한문잡지 〈천고 天鼓〉를 발간했다. 그해 4월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인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사실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기초하여 김창숙·장건상 등 54명의 서명을 받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갔다.

1921년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준비회를 열고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불신임과 임정의 해체를 주장하는 통첩을 발송했다. 5월 군사통일회의에서 결의된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위해서 김정묵(金正默)·박봉래(朴鳳來)와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했다. 이들의 주장이 여운형·안창호 등의 호응을 받아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그는 창조파로 활약했다.

무정부주의 활동기

의열단의 선언문을 기초해달라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1923년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그가 이회영·김창숙·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 등 무정부주의에 공명하는 사람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이 선언에는 무정부주의적 양상이 나타난다.

이무렵 그는 베이징대학교 도서관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연구하며, 리스쩡[李石曾]·리다자오[李大釗]와 관계를 맺었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규준(李圭駿)이 창단한 다물단(多勿團)의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해 3월 베이징 근처 스덩옌[石燈庵]에서 수도승 생활을 하며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여, 1925년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전후삼한고〉·〈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등을 연재 발표하기도 했다.

1927년 2월 민족통일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타이완[臺灣] 사람 린빙원[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고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는 한편 기관지인 〈동방 東方〉에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무렵 무정부주의 이념을 소설화한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했다.

1928년 5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잡지 발간과 폭탄제조소의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타이완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다롄[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복역중이던 1931년 신백우와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조선사〉·〈조선상고문화사〉가 연재되었다. 1936년 2월 감옥에서 뇌일혈로 죽었다.

역사연구

신채호의 초기 역사연구는 한말 언론활동 등의 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으며, 〈독사신론〉 등의 역사논문, 이순신·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영웅들에 대한 전기를 비롯해서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등의 역사관계 논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망명 후에 본격적인 역사연구를 하여 1920년대 이후 〈조선혁명선언〉·〈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집필했다. 그의 역사학은 이념과 방법론에서 중세의 왕조 중심의 역사관과 편년체 등의 방법론을 극복하여 근대적 역사학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역사인식은 영웅중심적 사관에서 점차 민중주체의 역사관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조선혁명선언〉에서 일제 타도와 독립쟁취는 민족과 민중의 힘에 의한 조직적 투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독립은 사회 내부의 불평등한 여러 요인도 제거하는 것을 전제로 함으로써 역사의 주체가 민중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역사의 본질을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하여 대외적으로는 아의 단위인 우리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내부적으로는 각 시대의 여러 역사적 현실간의 모순상극은 투쟁으로 지양된다고 하여 이를 사회발전의 계기로 보는 변증법적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역사서술은 민족의 성장발달의 상태와 상대자인 타민족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그 위에 경제생활, 계급대립의 대세, 정치, 외세침략의 영향을 주조로 하여 전개했다. 한편 종래의 역사서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사료비판과 고증을 중시하고,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사실의 종합적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보는 근대적 역사방법론을 전개했다.

그의 한국사 저술은 주로 고대사에 치중되었는데 종래의 삼한과 신라 중심의 기술에서 벗어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체계를 세우고 그 무대를 한반도에 한정하지 않고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종래 한반도에 있었다고 본 한사군을 반도 밖에 있었거나,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고대사 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적으로 보고 발해의 역할을 강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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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 신용하, 한길사, 1984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 : 최홍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3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 신일철,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1
단재 신채호전기 : 임중빈, 단재신채호선생추모사업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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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신채호전집 :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편, 을유문화사, 1972
단재신채호와 민족사관 〈단재신채호선생탄신100주년기념논집〉 : 김철준 외,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0
한말 신채호의 역사의식 〈손보기박사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 정창열, 지식산업사, 1988
한말 신채호의 역사관과 역사학 〈한국문화〉 9 : 박찬승,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8
단재의 민족주체사상 〈아세아학보〉 18 : 윤사순, 아세아학술연구회, 1986
1910년대의 신채호의 역사의식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 한영우, 지식산업사, 1981
한국근대역사학의 성립 〈한국의 역사인식 하〉 : 김용섭, 지식산업사, 1976
단재사학의 이념 〈세계〉 2-4 : 홍이섭, 국제문화연구소, 1960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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