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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3 (금)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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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77      
[종교] 기독교=개신교 (민족)
기독교(개신교)(基督敎(改新敎))

종교개혁 이후 성립된 기독교 교단의 통칭.

개설

예수의 삶과 교훈이 후세에 편집되어 ≪성서≫로 정경화(正經化)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인류구원에 대한 유일한 진리로 받든다.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한 해석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차이가 생겨, 나중에 로마카톨릭교회·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3대 교회로 분리되었고, 프로테스탄티즘은 그 성격으로 해서 다시 300여 개의 교파로 나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하면 이들 모든 교파를 통괄해서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보통 천주교로 알려져 있고,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신교 또는 기독교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논하는 기독교의 개념은 프로테스탄티즘을 말하는데,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말은 16세기 개혁운동으로 생긴 개신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것은 로마카톨릭교회의 교리 및 제도와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개혁자들이 전개한 운동을 지지하는 독일의 소수파 군주들이 로마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다수파 군주들에 의해 국회에서 통과된 결의에 대해 항의(protest)한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신학적 측면은 성체성사(聖體聖事) 등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밖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공통된 신학적 측면을 취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원리는 카톨릭교회와 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성사는 성만찬과 세례의 두 가지로 줄이며, 종전의 교회법을 폐기하고 교회를 신도 중심의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공동체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또한, 만인사제(萬人司祭)의 원리에 입각해서 목사와 평신도 사이의 종교적·사회적 계층의 차이를 두지 않으며, 교회는 목사와 신도대표에 의해 자치와 자급의 원리에 서서 운영하고, 교회제도는 전통과 선호에 따라 감독제도나 장로제도, 회중제도(會衆制度)를 택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되 각기 독립과 자유를 보장받게 하며,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공통적 원리는 성서의 하나님 말씀을 교회 전통이나 회의의 권위 위에 두어, 누구나 이를 읽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자유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일반적으로 성서주의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여 자기의 신앙을 형성해갔으며, 신앙동지들의 자유로운 결사에 의한 교파의 형성이 쉬웠고, 기존 교파의 분열도 잦게 되었다.

이 결과 16세기에 개혁운동으로 생긴 프로테스탄티즘은 독일의 루터교회,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H.)와 칼빈(Calvin,J.)의 운동이 통합되어 생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하는 자유교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등으로 분파되었다.

이어 18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신학의 자유화운동으로 더욱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으며, 19세기 중엽으로부터 미국·영국, 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여러 교파가 세계 각지로 그 선교지역을 확대해나갔다.

기독교의 수용

기독교의 수용은 일찍이 1816년 영국출신의 홀(Hall,B.)에 이어, 1832년 독일 태생의 구츠라프(Gutzlaff,K.F.A.), 그리고 1866년 영국의 토머스(Thomas,R.), 1867년 스코틀랜드의 윌리암슨(Williamson,A.) 등에 의해 꾸준히 시도되었다.

그러나 성과 없이 내려오던 중, 1873년(고종 10) 조선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출신의 로스(Rose,J.)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McIntyre,J.)가 그곳에서 마침내 의주출신의 청년학자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盛夏)·김진기(金鎭基)·서상륜(徐相崙) 등을 만나, 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1876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882년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의 번역이 완료되어 만주 심양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1887년에는 마침내 ≪예수셩교젼셔≫라 하여 신약성서 전부가 간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례를 받은 1876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교회가 출발한 셈이다.

한편, 이수정(李樹廷)은 전직 통리아문협판(統理衙門協辦)으로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일행에 끼어서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기독교에 입교하고, 1885년에는 그가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羸≫가 요코하마(橫濱)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H.G.)가 일본에서 이 책을 구해서 1885년 4월에 인천에 상륙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서상륜이 1884년 봄 그의 고향인 황해도의 장연·송천(松川, 솔내)에서 전도하여 교회당을 세운 사실과 함께, 우리 나라의 기독교회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887년 9월에 서울에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을 통해서 이미 입교했던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의 선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먼저 착수하였는데,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선교사 알렌(Allen,H.N.)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2일이었다. 기독교선교의 외교적 허가가 외국과의 수호조약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처음에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하였다.

그는 그 해 갑신정변으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치료하여 민척(閔戚)과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어 1885년 4월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선교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인천에 왔으며, 5월에 북감리교의 스크랜턴(Scranton,W.B.)모자가 도착하여 그의 어머니는 곧 이화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86년 여름부터 개교하였다.

또한,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레이놀드(Reynolds,W.D.)·테이트(Tate,L.B.)·젠킨(Jenkin,W.M.) 등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고, 남감리교에서는 윤치호(尹致昊)의 기금이 자극이 되어 1895년 10월에 리드(Reid,C.F.)를 우리 나라에 파송하여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도 성공회는 189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선교부는 1889년에, 캐나다 장로교는 1893년에, 침례교(浸禮敎)는 1889년에, 제칠일안식교(第七日安息敎)는 1904년에, 성결교(聖潔敎)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특징 있는 선교를 전개하였다.

즉, 감리교는 선교역량을 교육과 부녀사업에 치중하였고, 장로교는 네비우스방법이라는 토착과 자립원칙의 선교정책을 적용하여 서북지방에서 복음전파를 중심으로 한 선교를 추진하였으며, 구세군은 처음부터 사회봉사와 자선사업에 치중하였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지방으로 선교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민족교회로서의 형질화

그러나 우리 나라의 초기 기독교회는 조선사회의 전통과의 이질감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척사위정파의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이념에 의한 기독교 배척의 상소가 잇달아 일어났다. 따라서, 기독교가 왜양이체임을 밝혀주는 민족체험이 필요했다. 그 첫 실증이 을미사변으로 이루어졌다.

명성황후 민씨 시해 때 선교사 언더우드·헐버트(Hulbert,H.B.)·아비슨(Avison,O.R.)·윤응렬(尹應烈)이 총을 들고 고종을 불침으로 지켰고, 알렌은 외교경로를 통해 일본의 만행을 미국과 세계 각국에 알려 그 비행을 규탄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1895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동학도들도 척양척왜의 기치에서 척양을 제외시키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기독교의 반일 태도를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교회는 민족과 왕실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1895년 11월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1896년 9월 고종탄신기념일의 축하예배 등을 통해서 교회는 철저한 민족교회로 그 형질을 굳혀갔다. 교회는 곳곳에서 그 때의 애국가를 찬양가로서 불렀고, 1905년에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에도 애국송과 황제송이 여럿 들어 있으며, 문서상 최고(最古)의 애국가도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1907년의 정미칠조약에 분격하여 자결한 홍태순(洪太順), 의병대장 우동선(禹東鮮)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을사조약 체결로 인한 나라의 비운을 맞아, 교회는 이에 대처해야 할 길을 물리적인 힘의 저항보다는 내적인 도덕적 역량, 그리고 외세 아래에서 겨레를 정신적으로 일치시키고 결속시키는 국민감정의 개발에서 찾았다.

군사적 저항은 그 구실로 인한 교회 자체의 생존도 문제이려니와 교회가 취할 바도 아니요, 따라서 기독교의 민족적 차원을 그 신앙적 가치에서 체계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구체화된 것이 1903년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하여, 1907년 1월 평양에서 성신강림(聖神降臨)으로 체험된 대부흥회이다. 그리고 그 부흥은 소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대부흥의 정신과 신앙이 그 후 한국교회 신앙형태를 정통화시켰던 것이었다.

이 부흥운동은 원산의 정춘수(鄭春洙)·전계은(全啓恩), 선교사 하디(Hardie,R.A.),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등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나, 그 부흥회의 체험은 강렬한 신비주의적 영감과 도덕적 갱신, 그리고 공동체 의식으로 구체화해서 전국 교회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이 대부흥운동에 대해 ≪대한매일신보≫가 침묵을 지킨 까닭은 교회의 피세지향 및 은둔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며, 안창호(安昌浩) 등 민족주의자들도 이 운동의 내면화에 반발, 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기독교회의 반일성과 애국성을 알고 있는 일본은 경술국치 이후, 조선통치의 장애물이 기독교라 단정하고, 비인도적인 날조와 탄압으로 그 근절을 꾀하였다. 1910년 말 일본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선천(宣川) 기착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이 암살을 음모했다고 날조하였다.

이 때 서북지방의 기독교인 지도자 157명을 검거하고 고문으로 공백서(供白書)를 작성, 더러는 고문치사하게 하고,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여 윤치호·이승훈(李昇薰) 등 기독교계 인사와 신민회 인사들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일본은 그 뒤 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 밖에 일본의 조합교회에 대한 총독부 비밀자금 지급으로 조선에서의 세력확장과 상대적으로 조선교회의 약세화를 도모했으며, 1915년의 포교규칙 제정, 같은 해의 사립학교규칙 강화를 통한 기독교계 학교의 약체화를 계속 밀고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장로교회는 1912년 총회를 조직하여 우리 나라 근대사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실현하였으며, 만주·시베리아·몽고에 대한 해외선교도 착수하였고, 감리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신학을 벌써부터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저력으로 3·1운동에 임하였다.

1919년 3월에 이르는 동안 교회는 일본의 식민정치를 통한 조선농민의 토지수탈, 심각한 채권의 행사, 더구나 아편생산과 판매, 도덕적 퇴폐의 조장 등에 의한 민족성 해체공작에 울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총독부의 아편생산은 막대한 양에 달했으며, 도시마다 유곽을 공금으로 건립하여 공창의 수는 한국 남자 60명에 한명 꼴이라는 놀라운 비율에 달했다.

사법 처우나 행정에서의 조선인 차별대우, 총독정치의 무단성, 만주로의 강제이민 등이 또한 3·1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교회는 독립선언의 기치를 내걸고 앞장서 이승훈이 천도교와의 교섭을 담당하고, 길선주·유여대(劉如大)·오화영(吳華英)·신석구(申錫九) 등 16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안세환(安世桓)은 일본 내각 총리대신에게 선언서를 전달했다. 이필주(李弼柱)는 국내 각 영사관에 선언서 전달했으며, 현순(玄循)은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국내 각지로의 선언서 배포 및 연락을 취하여 일제히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 주도하의 독립시위운동은 경기도 7, 강원도 9, 경상북도 13, 경상남도 10, 전라남도 4, 황해도 24, 평안남도 10, 평안북도 16, 함경북도 11, 함경남도 13회 등 모두 117회에 달하였다.

일본은 군인과 헌병·경찰을 총동원하여 1926년 가을까지 만행을 자행하였다. 1919년 5월 총독부의 발표에 따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이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밖의 교회당 손해 41동, 교회재산의 손실 3만 달러, 오산중학교의 손해 5천 달러였으며, 1919년 6월 현재 투옥된 사람의 수는 기독교인 2,190명, 천도교·불교·유교인 1,556명, 기독교 교역자 151명, 천도교 직원 72명이었다.

그러나 이 통계는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1919년 10월 장로교의 피해만 해도 붙잡힌 자가 3,804명, 사살 41명, 맞아 죽은 자가 6명 그리고 파괴된 교회가 12동이었고, 함경북도에서만도 26명의 학살자가 보고된 점으로 보아, 실제 희생자와 손실은 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훨씬 큰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계 여론에 보고되었다.

미국의 교회협의회는 ≪The Korea Situation≫을 간행하여 직접 목격담·사진·보고서 등을 수록하여 그 참상을 폭로하였고, 캐나다교회에서도 일본 정부나 의회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조선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쟁취, 군국주의의 종막을 위해서 1922년까지 계속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연합공의회에서도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하자 곧 행정개혁건의서를 제출, 일본의 총독정치에 정면 대결하였다.

사회·농촌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국내 침투가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나 교회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특히, 1925년 일본정부가 소련정부를 공식 승인함으로써 공산주의 활동이 본격화되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게 되었고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면서 부흥사 김익두(金益斗)가 부흥회에 난입, 구타와 파괴로 교회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반기독교적 만행은 함양·이리·간도 등지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교회는 처음 이들 사회주의개혁 기운에서 소박한 기독교 사회복음과의 일치점을 모색하려 했고 기독교가 바로 민중의 종교라고 외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일부에서는 교회 자성론까지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1928년 제3차 공산당사건을 계기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피신, 교회를 파괴하고 목사와 교인들을 학살하는 등 만행을 계속하였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농민들은 심각한 궁핍과 좌절을 겪고 있었다.

자작농은 1917년 21.7%에서 1932년 18.4%로 격감했고, 소작농은 같은 기간에 39.5%에서 50.2%로 늘어나, 토지는 계속 수탈되고 생산량의 반이 넘는 소작료를 강탈당한 소작농은 더욱 많은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으므로, 농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교회도 자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즉, 교회사상 처음으로 교인 누출현상이 나타나 교세는 줄고, 만주 이민으로 인한 교인의 격감 등으로 폐쇄되는 교회당이 계속 생겨났다.

게다가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인한 서구 및 일본의 유물주의 사조, 도덕적 퇴폐, 허무주의의 만연, 정치적·경제적 좌절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심리가 마치 병균처럼 사회에 전염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교회는, 1920년 장감연합협의회(長監聯合協議會)를 통해 사회적 봉사의 사명을 천명하고, 1925년에는 협의회 안에 사회부를 설치하여 사회의식화와 그 운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22년 남궁 억(南宮檍)은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부르며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를 외쳤고, 자본주의의 오류를 공격하며, 총독정치의 가혹한 민족차별과 궁핍화시책을 규탄하는 글들이 교회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농촌운동은 1925년부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27년 브루너(Brunner,E.S.)가 다음해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nference)에 제출할 ≪농촌한국≫이라는 방대한 조사연구보고서가 간행되면서, 교회는 농촌사업의 중요성을 역설, 계속 농촌전문가인 클라크(Clark,F.C.)·번스(Bunce, H.C.) 등을 초빙하여 농촌사업에 전력하였다.

1929년에는 예수교 연합공의회와 YMCA·YWCA 연합으로 대대적인 농촌강습소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조직, 1929·1930년에 전국 27개 도읍에서 대규모 농촌강습소를 개설하여 농촌개량·농사기술·협동조합·법률문제·의식화 교육 등을 진행시켜나갔다.

농민들의 사기를 일깨우고 도덕적 의식개혁을 도모한 이 운동이 점차 성공을 거두어가자, 일본은 조사원을 파견하여 감시를 하기도 했다. 때를 같이 하여 192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농촌부를 그 총회 안에 설치하였다.

장로교는 1933년에 농촌부를 상설기구로 하여 총무에 배민수(裵敏洙)를 임명하는 동시에 덴마크의 고등공민학교 유형의 농사학원을 개설하여 농촌향상에 진력하였는데, 1932년 9월에는 연합공의회에서 〈사회신경 社會信經〉을 제정하기까지 하였다. 그 중에서도 YMCA의 신흥우(申興雨)·홍병선(洪秉璇)·이순기(李舜基) 등은 농사실습집의 간행, 농촌 강연, 농민협동조합 운동의 추진 등으로 농촌개량사업에 진력하였다.

그 밖에 1923년에 결성된 기독교여자절제회의 금주단연(禁酒斷煙)·폐창운동(廢娼運動)과 구세군의 자선사업, 동사자(凍死者) 예방을 위한 시설, 장로교의 부산·대구·광주·여수 등지의 문둥병원, 감리교의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과 개성의 고려여자관 등이 있었다. 이 모든 농촌·사회운동은 사회적 위기에 직면한 교회의 역사 참여와 민족 구원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분파운동과 연합운동

1920년대의 사회변화는 교회의 사회대응 자세의 다변화를 필연적으로 가져와, 그것이 교회 안에서의 분파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1910년 정읍·부안에서의 최중진(崔重珍)의 자유교였다. 대개 그 계보를 따라서 분파들을 구별하면 다음과 같다.

즉, 1918년의 신학적 이단으로 나타난 봉산의 조선기독교회, 반선교사계로 자치교, 침례교의 성리교회(聖理敎會), 대동교회,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 반교권계로 감리교의 만주 조선기독교회, 성결교의 하나님의 교회, 조선기독교개혁단, 장로교의 자치교, 집사교(執事敎) 및 자유교 등이 있었다.

이러한 분파운동 중에서 ≪성서조선 聖書朝鮮≫ 운동을 벌인 무교회주의계의 김교신(金敎臣)·함석헌(咸錫憲)은 민족적 기독교의 실현과 민족구원을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에서 접속함으로써, 도덕적으로 갱신하고 자아의식이 뚜렷한 근대 시민종교로서의 퓨리턴적 기독교를 외쳤다.

함석헌은 역사로 김교신은 지리와 박물로 민족의 역사적 사명 및 신부(神賦)의 사명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반선교사적이긴 하나 친일이 아닌 강력한 민족기독교의 자주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 이용도(李龍道)는 김교신계의 도덕적 지성주의와 시민의식을 거부하면서, 1930년대 조선교회의 일제하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좌절을 극복하는 대중의 정서적 안정과 영적 위로를 약속하는 신비주의 신앙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구원의 현실감, 그리스도와의 일치에서의 구속(救贖) 체험을 지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였으며, 도덕적 행위의 보상이라든가 신앙 이후의 구원이라는 도식을 형식화로 공격함으로써, 지옥이든 천국이든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신비주의로 더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의 신비주의에는 언어의 효율성에 대한 불신이 컸고, 따라서 표현은 성애적 용어를 많이 끌어다 씀으로써 때때로 교회 내외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그의 신앙은 백남주계(白南柱系)와 이호빈계(李浩彬系)가 각각 따로 계승, 예수교회로 발전시켜왔으며, 소설가 박계주(朴啓周)와 전영택(田榮澤)이 순수문학의 동기로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래 무교회주의자였던 최태용(崔泰瑢)이 복음교회를 창설한 것은 1935년의 일이었다.

이렇듯 교회분파의 다산 및 교회 자체 내의 여러 형태의 분열조짐이 현실화하자, 교회 일각에서는 교회일치연합운동에 대한 염원이 성서의 교회론 재발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은총의 기능, 다양성 등의 자극 때문에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선교 초기부터 조선교회는 선교구역의 우호적 분할에 의한 중복의 기피와 같은 사실상의 연합운동(에큐메니컬운동)이 있어 왔다.

더구나, 1905년부터는 한국기독교의 교파 다양성이 유럽·아메리카 기독교회의 직접 이식으로 인한 주체성 부재로 인식되면서, 교파의 다양성이 없는 단일 민족교회로서의 열망도 점차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파 교회 발전의 선교정책으로 해서 그 실현이 지연되는 가운데, 교파 일치는 아니지만 협력관계의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1917년 5월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장감연합협의회가 창설되었다.

이 조직은 더 많은 교파와 교회기관을 망라하여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연합운동은 1929년을 고비로 해서 교파의 단일성 수립은 민족역사의 과제라는 인식이 높아져, 민족자주성과 토착 신경(信經)의 문제들을 들어, 교회연합의 민족사적 과제의식이 점차 깊어갔다.

YMCA·YWCA·조선기독교교육연맹·성서공회·여자절제회 등은 특수사업을 위한 이러한 교회연합운동의 한 체계적 표현이었다.

신사참배 저항과 그 시련

1921년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불가 진정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바 있었으나, 일제는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1932년에는 평양에서 기독교학교들에 대한 참배강요 공문을 보내 교회는 이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이때 신사참배 거부의 자세를 굳혔는데, 이는 기독교 유일신에 대한 예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근거에서였다.

그러나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절대 통제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해 교회를 굴복시키려 했다. 이에 그들의 강요와 위협에 견디다 못한 장로교총회는 1938년 신사참배 국민의례의 형식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가결하였고, 이어 감리교와 다른 교파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교회는 이미 1936년 기독교학교 대부분의 교육 인퇴(引退)를 가결하여 신사참배에 저항했고, 주기철(朱基徹)·최봉석(崔鳳奭) 등은 이때 순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폐쇄되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고 50여 교역자들이 순교하였다.

한편, 전쟁 말기가 되자 일본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져,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선교사들은 1942년 6월 연희전문학교의 언더우드 등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우리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1938년 YMCA와 YWCA를 해산시켜 일본 YMCA 종속시켰다.

그 해에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또한 해산되어 조선기독교연합회로 변질되었으며, 농촌운동·절제운동은 〈치안유지법〉 저촉혐의로 금지되고 관련 인사들은 모두 구금되었다. 일제는 1940년에는 침례교를, 1943년에는 안식교와 성결교회를 각각 폐쇄시켰으며, 신학교는 황도정신연성소(皇道精神鍊成所)로 교회당은 군수공장 또는 헌병사령부로 징용하였고, 교회로 하여금 전향 성명을 내도록 강요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회의 실질적 말살을 꾀하였던 일본은 마지막 남아 있던 교회들마저 강제로 해체, 병합하여 조선교단(朝鮮敎團)을 만들어 일본 기독교단에 종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학교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폐쇄된 평양신학교 대신에 관인신학교가 설립되고, 또 서울에서는 김재준(金在俊)을 중심으로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8·15광복과 6·25전쟁

8·15광복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재생과 부흥의 계기를 약속하였다. 일부에서는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기왕에 형성된 단일 조선교단을 기구 그대로 존속시키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시련이 너무나 컸고, 더구나 전향과 용역의 회개와 속죄문제가 제거될 수 없어서, 결국 민족항일기 말기 교회 교권 지도급의 회개를 요구하면서 각 교파의 환원이 이루어졌다.

더욱이 광복 후 새로운 선교지로 등장한 우리 나라에 대한 해외 여러 교파 선교사들의 입국으로 말미암아 교파 교회로서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러한 교파의 열의에 의한 수적 확장에는 성공했으나, 반면 교회론의 기본적 약화를 초래하는 교회 불일치의 부정적 면은 제거하지 못하고 말았다.

북한에서는 이기선(李基宣)을 중심으로 1946년 복구파 교회를 조직, 기성교회를 공격했고 남한에서는 감리교의 이규갑(李奎甲) 등이 재건파 감리교회를 확립하고 부흥파를 공격했다.

장로교에서는 신학교 문제로, 즉 조선신학교의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교육 문제로 1947년 학생 51명이 연서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김재준계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출옥성도 한상동계(韓尙東系) 또한 총회를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서 점차 질서를 찾아 순수성과 전통성 문제 해결의 단서를 포착하려던 때에 6·25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를 미국의 주구로 민중의 착취자로 몰아 탄압하고, 교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때 손양원(孫良源)·조민형(趙敏衡)·정일선(丁一善) 등이 순교하였고, 남궁 혁(南宮爀)·양주삼(梁柱三)·박현명(朴炫明)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 납북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6·25전쟁으로 인해 교회가 입은 피해는, 교회의 파손·손실에서 장로교가 152개 교회, 감리교가 84개 교회, 성결교회가 27개 교회, 그리고 구세군영이 4개 교회, 그 밖의 교파 교회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그리고 순교, 납치된 기독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에 달했으며, 전라북도의 옥구 원당교회에서는 75명의 교인 중 73명이 학살당하는 무참한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대구·부산으로 피난할 수 있었던 교회는 거국적으로 구국기도회를 열어 하나님의 역사 관여를 기원하였으며, 각 교파 연합의 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국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메시지를 전달, 구호사업과 유엔군 증파를 요청하는 한편, 국제 교회기구를 통한 난민구제사업을 벌여 전시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 장로교는 1953년 전란중에,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로 분립하여, 각각 오늘에 이르렀고, 1951년에는 이미 고려파(高麗派)가 교회의 순수성을 위해 법통(法統)총회로 갈라섰다. 신사참배 교회에 대한 이들의 정리는 이것으로 일단 결말이 난 셈이었다.

감리교는 1954년 총리원파의 감독중임 요구관철과 호헌파(護憲派)의 감독경질 선거요구로 충돌하여 결국 양파로 분립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은 전통교회의 태도 불신 등이 겹쳐, 소종파운동이 창궐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종파적 운동들은 현실적인 욕구충족의 동기 명시, 체험적 신앙의 확실성, 생활의 소규모 집단적 경제이익공동체의 구성이나 기성교회에 대한 거부 형태로 대중 침투의 방향을 잡아, 그런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박태선(朴泰善)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와 문선명(文鮮明)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이다.

한국적 신학과 교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4·19혁명과 격동과 5·16군사정변의 충격을 겪었고, 현실의 변동과 신흥 종파의 창궐은 교회에 자성의 기운을 가져다주었다. 교회는 이때부터 분열 극복의 신학을 성서적 근거에서 재발견하고 에큐메니컬운동에 정진하였다.

1966년에는 초동교회에서 신·구교가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예배를 드리고, 1971년에는 부활절을 기해 신·구교 공동번역의 ≪신약성서≫가 간행되었으며, 1977년에는 ≪성서≫ 전부가 완역, 간행되었다.

신학교육에서의 초교파적 연합운동도 1964년 4월 연세대학교 안에 연합신학대학원을 설치하여, 어느 교파 출신이든 함께 교수하고 배우게 함으로써 구현되어나갔다.

1965년에 창설된 한국신학대학협의회나 강원룡(姜元龍) 주도의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대화운동, 중간집단운동 또한 이 연합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5년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전국 교회가 다 함께 단결하여서 추진한 ‘전국 복음화 운동’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선교의식의 발현과 촉진에도 중요했지만 에큐메니컬 정신의 실현이라는 면에서 괄목할만한 이정표를 남겼다.

교회가 역사 참여에 깊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1년부터이다. 교회는 그때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짐하였으며, 월남전에 대해서는 세계교회의 미온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참전의 의미 및 반공의 결의를 세계에 과시하며, 양심과 겨레의 이름으로 그 수행에 전교회적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8년 스웨덴에서 열렸던 세계기독교협의회(WCC)에서도 중공문제와 월남전 문제에 대해 강력한 반공적 발언을 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교회는 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민족교회로서의 처지를 천명하였다. 이는 한국적 신학의 모색 현상에서 나타난 것이다.

한국교회의 독특한 신학이 재래의 종교적 심성의 깊은 연구나 한국문화사 및 제종교에 대한 연구 그리고 토착화에 관한 토론, 신조나 찬송가의 형성과 예배, 건축의 토착화과정이 추구, 모색되었다.

한편, 북한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변해 지하에 숨어 있는 교인들의 고난과 그 실상은 알 길이 없고 다만 간혹 전해오는 사건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북한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외곽구조만을 갖춘 대외선전용 기구를 1948년에 조직한 이래, 한국정부를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1974년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을 실천하는가 하면, 1975년에는 이른바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 기독교회의가 아닌 공산당의 정치선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내에서도 기독교인들의 항쟁은 지하에서나마 꾸준히 계속되어, 1957년 이른바 최고인민회의대의원 선거를 기피한, 용천의 이만화(李萬化) 목사의 지하서클사건, 1959년 박천의 여교사 찬송가보급사건, 1960년 원산 철도공장에서 십자가가 발견됨으로써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사건, 1968년 평안남도의 박 목사 처형사건 등 교인들의 항쟁이 계속 이어졌다.

현황과 전망

기독교는 1984년으로 선교 100주년을 맞았다. 그 동안 교회는 선교 초기 위정척사라는 명목하에,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민주주의의 근원이라는 죄명 아래 수없는 박해를 받았으며, 공산주의에 의한 모진 형극을 겪으면서도 모습을 정립해 왔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의 유일한 발전교회로 꼽히고 있는데, 미국 교세의 증가도 한국 이민교회의 발전에 따른 수치에서 나타날 정도이다.

1995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1985년 개신교인이 총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6.1%였던 것이 1995년에는 19.7%로 10년 사이에 무려 35%의 증가세를 보였다.

교회들도 점차 대형화추세를 보여 순복음교회, 광림교회, 영락교회, 금란교회, 충현교회 등 여러 대형 교회들이 2만여 명에서 80만여 명에 이르는 교인을 확보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개신교 교파수만도 1995년 현재 83교단에 달함으로써 개신교는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성장과 교파분열이라는 이중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이 같은 수적인 확장과 발전에는 전국적 조직체로 단일이념을 가진 역사 1백년의 민족교육 및 정신순화기관이 따로 없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1960년 이후의 산업화로 상실된 자아정체의 확인욕구, 사회적 긴장과 갈등·불안·핍박감의 극복을 위한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갈망이 교회에 몰려드는 추세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취동기를 추구하는 교회가 늘고, 종교적 신앙의 심화보다는 외형적·통계적 수치에 신경을 쓰는 목회 형태가 퍼지면서, 일부에서는 교회의 상업화 풍조를 비판하고 동시에 신앙의 기복 동기, 반지성적 엑스터시의 종교체험이 피안적 위로로 마비되는 경우가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치의 전도를 바로잡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오염되어 기업화와 대형화, 사리추구로 교회를 오도한다는 비판과 함께 교역자들의 권세와 선망 등이 그 부조리로 지적되고 있다.

교회의 거대화·대형화는 반드시 그 내적 순수성과 신앙의 도덕적 차원, 사회정의 실현의 주체적 동력원이라는 차원에서 그 구조적 형태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이다.

교회는 하나의 세속적 국면이 있고, 인간집단의 사회성을 면할 수가 없다. 전통 신학사상 속에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명제가 담겨 있다. 따라서 교회의 결백을 포괄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핵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바로 전하는 기능을 충실히 다하여, 그 힘으로 선교를 하며, 사회의 부정을 신의(神意)로 고발하여 심판을 선포하고, 건전한 민족역사의 동반자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겨레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자각과 그 행동의 동력을 동원할 수 있으면 된다.

따라서 교회는 더욱 민족·사회·역사에 대한 예언자적 안목과 의지로 정의와 평화실현, 신뢰의 인간관계 확립, 신학의 민족적 확립을 위해 교파의 경쟁적 다양성을 지양하며 상호협력으로 국민발전과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계기를 신의 수행의 기회로 삼아, 섬기고 돕고 밝히고 함께 가는 민족의 교회로 더욱 형질을 굳혀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長老敎會史典彙集(郭安蓮 編, 서울耶蘇敎書會, 1918), 韓國基督敎解放十年史(金良善, 大韓예수敎長老會總會, 1956), 大韓基督敎浸禮會史(金容海, 大韓基督敎浸禮會總會, 1964), 韓國基督敎長老會五十年略史(韓國基督敎長老會, 1965), 韓國改新敎史(白樂濬,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4), 韓國監理敎會史(基督敎大韓監理會總理院, 1975),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전택부, 정음사, 1978), 韓國基督敎史(李永獻, 컨골디아社, 1978), 韓國基督敎會史(閔庚培, 大韓基督敎出版社, 1982), 韓國基督敎社會運動史(閔庚培, 大韓基督敎出版社, 1987), 한국교회사(민경배,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The Christian of Korea(Moffett,S.H., New York, Friend-ship Press, 1962).

<민경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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