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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28 (토)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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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28      
[근대] 민족독립운동 (한메)
민족독립운동 民族獨立運動

조선 말기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으로부터 일제강점 후 주권을 되찾고자 벌였던 일련의 반외세·항일운동.

[개항부터 1910년까지]

180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의 조선은 오랜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정치적·경제적 피폐상태에 있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집권과 함께 호포제실시·서원철폐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지만 무너진 기강을 바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서양열강의 통상요구는 날로 빈번해졌고 이에 대해 정부는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일관했으며 양반과 유생(儒生)들 사이에서는 외세배척의 움직임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이 일어났다.

이항로(李恒老)·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의 위정척사파들은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 가톨릭 등 서양의 그릇된 사상이 전파되어 조선사회의 전통질서가 파괴되고 나라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추진된 외국과의 통상조약체결과 개화정책은 서양과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의 길을 열게 되어 농촌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위정척사운동이 양반중심의 반외세운동이었다면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운동은 동학농민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탐관오리의 착취에 저항한 반봉건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촌경제피폐의 원인이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어 반외세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자신들에 반대하는 세력의 형성을 달가워하지 않는 청나라와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동학군의 진압에 나섰으며 동학군은 자신들을 탄압하는 외국군대와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무기와 숫적인 열세로 동학군은 패했지만 전국에 걸친 항일전쟁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깊게 하고 반외세 움직임을 고조시켰다.

이 무렵 단발령과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투쟁이 벌어졌다. 지방의 유생들은 주변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군사조직을 편성하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춘천(春川)의 이소응(李昭應), 제천(堤川)의 유인석, 이천(利川)의 김하락(金河洛) 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그 가운데 유인석 휘하의 의병은 수천에 달해 한때는 충주성(忠州城)을 점거하기도 했고 김하락은 남한산성까지 진군하여 서울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의병운동을 을미의병(乙未義兵)이라 부르며, 위정척사운동이 무력투쟁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을미의병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의 후퇴와 정부의 회유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을미의병운동은 국민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일본에 대한 무력항쟁의 길을 열어주었다.

무력저항운동 이외에도 스스로 힘을 길러 부국강병하여 외세를 극복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화파계열의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민권신장·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켜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의식형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거나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고, 서구시민사상의 영향으로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근대국가수립을 주장했다.

나라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해 처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집권세력의 보수성 때문에 해산을 명령, 독립협회는 해체당하고 말았다. 을사조약의 체결로부터 국권피탈까지의 구국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의병의 항일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의 항일전은 을사조약 직후 지방에 머물면서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유생들과 전직관리·해산군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항일의식을 가진 농민들을 축으로 일본군과 항일구국전쟁을 치렀다.

항일의병전은 1907년 군대해산을 기화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해산당한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의병군에 가담하여 의병의 무력을 일층 강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의병항쟁은 더욱 가속화되어 전국의 의병들은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13도창의군을 조직, 전국적인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의병들은 산간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대응했으나 남한대토벌작전을 당하여 수만의 사상자를 내고 쇠퇴해갔다. 나머지 의병들은 그 근거지를 만주지방이나 시베리아로 옮겨 무장독립운동군에 합세하였다.

이 시기의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개간 반대운동을 폈던 보안회(保安會,1904)를 비롯하여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1905)·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1906)·신민회(新民會,1907)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단체들은 회보발행·연설회·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신문발행을 통한 언론활동, 학교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부터 한국 경제의 종속화를 극복하고자 물산장려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벌여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언론활동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 《황성신문(皇城新聞)》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신문에는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등이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거나 국민계몽적 논설을 발표하였다.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에 대해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발표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민족의 울분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신채호·박은식 등은 전쟁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널리 보급하거나 《이태리독립사(伊太利獨立史)》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등 외국의 독립 혁명운동이나 패망의 역사를 소개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지와 역사의식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애국계몽운동은 국민대중에게 폭넓게 수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장저항 등을 통한 적극적 대항으로 발전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국권피탈에서 3·1운동까지]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육군대장을 총독으로 내세워 조선을 철저하게 수탈하기 위해 행정·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마련해나갔다. 무단통치시대 조선민족의 자존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으나 그럼에도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이었다. 일제의 국권침탈을 전후하여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그곳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길은 민족이 스스로 힘을 길러 적당한 시기에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라 믿고 연해주나 만주 등지의 한인거주지역에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군사조직인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이 시기에 건설된 항일독립기지는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이 건설한 서간도 싼위안푸[三源浦]의 한인거주지역, 북간도의 용정촌(龍井村), 소만국경지대(蘇滿國境地帶)의 미산부[密山府], 펑미산[蜂蜜山]의 한싱동[韓興洞] 등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서간도 하니허[哈泥河]의 신흥학교, 북간도 뤄쯔거우[羅子溝]의 대전학교 등이 설립되어 문무교육을 실시, 젊은이들의 독립의지를 키웠다.

이리하여 1914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동휘(李東輝)·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된 대한광복군정부가 세워져 의병항일전을 포용, 독립군의 무장항쟁 터전을 구축하였다. 독립군은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 국경경비대를 습격하거나 국내진공투쟁을 전개하였다.

반면 국내에 남아 있던 애국인사들은 안악사건(安岳事件)·105인사건 등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외의 세력과 연결하거나 혹은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비밀결사 이외에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한 애국교육활동은 3·1운동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일제의 무단정치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는 3·l운동으로 폭발하였다. 3·1운동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었고,19년 1월 고종의 독살소문과, 2월 8일 일본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항일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이 국민의 반일감정을 들끓게 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천도교·그리스도교·불교 등 종교계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고종의 국장일을 당해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그 시각 파고다공원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 날의 시위는 서울을 비롯 평양(平壤)·남포(南浦)·선천(宣川)·원산(元山) 등지에서도 함께 벌어졌다. 이 운동은 19년 3월 말부터 3개월 동안 전국 230개 부(府)·군(郡)에서 200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선민족의 반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내의 헌병·경찰은 물론 일본 본토의 경찰과 군대까지 파견하여 전국 곳곳에서 유혈학살을 감행하였다.

일제 관헌의 공식집계에 의하더라도 7500명이 학살되고 4만 6000명이 피검되었으며 1만 6000명이 부상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온 겨레가 참여했던 항일투쟁인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은 앞으로 전개될 항일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3·1운동의 타격으로 일제는 무력에 의한 강압통치를 그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또한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구심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을 통해 과시된 민족의 독립의지를 계승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하나로 3·1운동의 무저항 비폭력운동 노선의 한계를 지적하고 무력투쟁으로 나설 것을 주장하는 <무장투쟁론>이 대두되었다. 다른 하나는 강대국에 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독립을 하자는 <외교론>과 3·1운동의 실패를 조선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라 여기고 독립역랑을 기르자는 <실력양성론>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은 무력투쟁과 실력양성운동, 외교적 노력이 함께 활발히 진행되었다. 3·1운동은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인도 등의 민족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민족독립운동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임시정부와 독립군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체(政體)는 공화제였는데 이는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들이 지향하는 독립국가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초기의 연통제(聯通制) 실시와 외교활동에 있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국내와 간도지방과 연락을 취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조직망으로 이를 통해 많은 독립자금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1921년 일본의 탄압으로 기존의 조직마저 드러나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다.

한편 수립 초기부터 외교활동을 통한 외교론적 독립론을 지향하던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는가 하면 국제회의나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독립정부로서 승인받고자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임시정부의 노력들을 주의깊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에 반대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단체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서북간도에 군정부를 건립하고 만주나 연해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제의 전력을 약화시켰고, 때로는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홍범도(洪範圖)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金佐鎭)의 청산리전투였다. 이 무렵 활동한 독립군부대로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대한독립단의용군·광복군총영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중국군벌과 합작하여 벌인 혹독한 토벌작전으로 활동이 침체되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 몇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어 지속되다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민족연합전선의 기치 아래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으로 통일되었다.

한편 3·1운동을 겪은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 전시대에 비해 통제를 완화하여 신문발간 및 사회단체의 조직을 허락하는 등 유화정책을 취했다.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 민족지(民族紙) 발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일제는 조선민족의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조선민족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고 하급실무자 양성을 위한 기술교육에 급급하는 한편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설치조차 금했다. 이 때문에 고등교육기관의 설치를 민족의 손으로 이루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취지 아래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나 활발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책동으로 경성제국대학의 설치를 약속받고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조선인의 자본에 의한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발간과 《신천지》 《조선지랑》 등 잡지의 창간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 신문과 잡지들은 조선어로 발행되었고 민족의 항일감정을 대변하는 역할과 함께 브나로드운동 등의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독립의 정치적인 면에 못지 않게 경제적인 자립을 역설하며 벌어진 운동이 물산장려운동이다. 회사령이 폐지되어 기업설치가 자유로워지자 민족기업의 육성을 목표로 한 회사설립이 추진되었고 그 일환으로 국산품애용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전국민의 지지 속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절대적 궁핍상태에 시달렸던 국민들의 경제사정은 일본제품이나 국산품을 막론하고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지 못해 이 운동도 크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는 또한 다수의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들은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종의 친목회 형식이었으나 생활개선 등 지역주민의 계몽활동을 비롯하여 지역청년들의 결집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해방운동에 있어 하나의 조류로서 192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사회주의계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계획했던 6·10만세운동의 실패는 민족독립운동가들에게 조국광복의 대의를 위해서는 이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사회주의자들과 좌파민족운동가들의 좌우합작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로서 27년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신간회의 주요 참가자는 안재홍(安在鴻)·권동진(權東鎭)·조만식(曺晩植)·한용운(韓龍雲)·홍명희(洪命熹) 등이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지역별 순회강연을 개최하여 대중들에게 식민지지배의 본질을 고발하고 민족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전국에서 전개되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원하였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붙구하고 일본의 탄압과 좌우의 분열로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되었다. 신간회의 해체로 국내의 독립운동은 구심점을 잃게 되어 운동의 약화가 초래되었다.

일제의 조선지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가 심화되었다. 농민들의 80%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이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를 넘겨 주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의 농민들은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와 기타 부과금으로 생활이 날로 피폐해졌고 살던 곳을 떠나 도회의 임금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이에 농민들도 일제에 맞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소작료 인하 등을 내세우며 소작쟁의에 들어갔다.

1921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소작쟁의는 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중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률면(北栗面)의 소작쟁의는 대규모 쟁의였는데 1926년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극에 달했다.

1920년대는 또한 일제 식민지자산의 확장으로 공장이 다수 세워짐으로써 공장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난 시기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일제의 착취 아래서 생존권마저 위협받으며 살아갔다. 국민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한 국민계몽운동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이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착취자인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들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파업 등의 방법으로 일제에 맞서 싸워나갔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은 20년대 후반의 원산노동자총파업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이 같은 농민·노동자들의 일제에 대한 투쟁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하고 장기간에 걸쳐 지족될 수 있었고, 이는 아래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의 무장투쟁

이 땅에서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서 가장 끈질기고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무력을 통한 투쟁이었다. 1930년대의 무장투쟁은 이전의 투쟁경험을 토대로 한결 발전되었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회복하고자 준비하기도 했다. 또한 20년대의 의열투쟁을 지양하고, 대중 속에서 대중에 의거하여 전개되었다.

1931년 만주는 일본의 침공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중국·한국의 민족주의가 격돌하는 격전장이 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이청천(李靑天)의 지휘로 중국의 항일부대와 연합, 큰 전과를 거두었고 조선혁명당도 남만주를 무대로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여 일제와 싸웠으나 1933년 일본의 대공세로 중국 본토로 퇴각했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도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청천을 중심으로 한국민족혁명당이 조직되었고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 무장부대로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올바른 정치노선을 제시하지 못하자 반대파들은 조선의용대 제2지대를 중심으로 화베이[華北]지방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김무정(金武亭)을 중심으로 42년 조선독립동맹으로 발전, 조선의용군을 건설했다.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金枓奉)이 주석에, 조선의용군총사령관에는 김무정이 취임했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지구를 중심으로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등을 치루며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했고 북만주특별위원회를 조직, 북만주 유격근거지의 건설을 꾀하였다.

이들은 중국 팔로군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화베이·만주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한편 임시정부는 40년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편성했다. 광복군은 인도·미얀마전선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본전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미군과 연합전선을 이루어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외의 독립운동세력이나 국내의 건국동맹 등은 하나의 항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이근용>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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