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0 (수) 08:06
분 류 사전3
ㆍ조회: 1598      
[현대]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서중석)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역사적 접근)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1. 머리말 - 광주민주항쟁과 유신체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서 외쳐진 키워드(key word)는 무엇일까. 시각에 따라 다르게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광주민주항쟁의 과정에서 나온 선언문 등 각종 문건을 가지고 볼 때 유신잔당과 유신잔당의 한 부분인 전두환 신군부의 타도와 민주화였다.

1980년 5월 19일 광주시민 민주투쟁회 명의의 [호소문]에서는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의 공수특전단 놈들"로, 같은 날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의 [민주시민아 일어나라]는 글에서는 "저 개 같은 최규하, 신현확, 유신잔당 놈들과 유신독재자의 아들 전두환 놈"으로, 전남민주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전남민주청년연합회, 전남민주구국학생연맹 공동명의로 5월 20일 나온 [선언문]에서는 "유신잔당과 전두환 쿠데타 일파"로, 이 세단체가 21일 발표한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에서는 "저 흡혈귀 살인마 전두환과 유신잔당 놈들"로, 21일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 전·조대학생혁명위원회 공동명의의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에서는 "저 악랄한 유신독재자 박정희놈의 하수인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놈의 만행을 보라"로 되어 있다.

이 시기 자료중 어느 것은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로, 어느 것은 '전두환 등 유신잔당'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유신잔당의 범위나 강조점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광주에서도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1980년 5월에는 어느 것이나 시위 학생과 민중들은 유신체제를 철저히 타파하고, 그것과 대각선상에 있는 진정한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민주항쟁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1980년 5월 25일자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말하여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너무나 불평등하고, 몇 사람의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총력을 부르짖는 소위 유신이라는 강권주의를 영원히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분기하였던 것입니다."

유신잔당 전두환 신군부의 타도와 함께 핵심 키워드로 시위대에 대한 잔혹한 탄압, 곧 학살을 강렬히 고발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시위학생과 시민들은 이러한 학살이 유신잔당 전두환 신군부의 본질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학살이 자행된 이후의 광주민중항쟁에서는 이러한 학살을 자행한 유신잔당 전두환 신군부를 타도하자는 주장이 주조를 이루었다.

광주민주항쟁은 단일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쟁이었다. 광주민주항쟁이 이렇게 대규모로 격렬히 전개된 데에는 유신체제, 유신잔당들의 지방색과 김대중 체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지방 갈등 조작으로 인하여 낙선하였고, 김대중이 유신체제에서 받은 핍박은 호남인들의 피해의식과 결부되어 있었다. 광주민주항쟁에서 유신잔당의 처단 문제가 유난히 강조된 것은 유신독재가 특정한 지역의 군인과 관료, 재벌로 유지되었다는 점, 호남이 몹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박정희 살해 - 유신체제 전복 - 민주화의 촉진은 한반도의 재생을 의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주의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특정지역 출신의 유신잔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화를 좌절시키고 유신체제를 다시 강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광주민주항쟁의 규모와 강도는 유난히 클 수밖에 없었다.

유신잔당, 학살에 대한 고발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기 때문에 광주민주항쟁에서 별반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유신잔당 처단의 함성속에는 통일의 촉진, 외국에의 경제예속 특히 일본에의 경제예속의 탈피,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보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에 서울이든 광주든 다른 지역이든 학생과 민주·민족세력들은 유신체제의 타도를 외치면서 박정희식 경제 건설을 거부하고, 박정권의 반민족적 행태를 규탄하였던 것이다.

이 소론에서는 필자한테 주어진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중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많이 언급된 바 있는 민주화운동보다는 유신체제의 성격과 지향을 주최측이 주문한 대로 역사적 접근을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겠다. 먼저 이승만과 박정희의 권력을 비교 검토한 것은 박정희권력의 구조, 나아가서 유신체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이승만권력과 박정희권력의 비교 검토

이승만권력과 박정희권력을 비교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컨대 두 정권의 지도자 및 간부들의 성분을 친일파와 연관지어 그들의 정치성향을 분석하는 방법도 있다. 이승만의 극우반공독재나 1960년 3·15정부통령부정선거는 친일파들의 성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친일파들은 일제의 극우반공 파시즘에 순치되어 있었고, 일제의 극우반공통치에 한몫을 하였다. 1954년경을 전후로 하여 자유당간부와 정부의 장차관에는 친일파 진출이 현저해졌던바, 이승만의 백색독재는 이 시기에 한층 강화되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신들의 영도자에게 맹종하는 친일파의 생리가 큰 역할을 하였다.

박정권 18년을 관통하는 군국주의적 획일성과 영도력의 강조는 '천황의 간성'이었던 박정희 및 쿠데타군인들의 - 쿠데타를 주동한 육사 8기나 9기는 일제에 군인으로서 복무하지는 않았지만 체질면에서는 그것을 이어받았다 - 군국주의 체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박정권의 극우반공주의 또한 상당부분을 일제군국주의로부터 이어받았다.

한일협정체결 때 국무총리였던 정일권도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장, 민주공화당 의장 등의 요직을 맡았지만, 백두진이 3선개헌 이후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유신쿠데타시기에는 국회의장이었고, 그 이후에는 유정회의장, 국회의장으로 유신체제를 앞장서서 찬양한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이승만의 반공운동의 일환이자 권력강화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일운동과 박정희의 태생적 친일과 일본군국주의침략자였던 극우세력과의 유착이 한국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비교 연구하는 것도 흥미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절에서는 이승만권력과 박정희권력을 정치판 또는 정치구도의 면, 정당과 국회운영 등 제도와 관련된 면, 정보정치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의 극우반공독재와 박정희의 그것과의 중요한 차이의 하나는 전자는 일정하게 혁신계의 정치활동을 용인하였지만, 박정희통치기에는 혁신계가 철저한 탄압으로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극우반공주의자들은 그들의 노선을 반대하는 자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는 이승만·자유당이나 민주당도 비슷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좌익은 물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승만정권은 조봉암과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 벌였는데도 불구하고, 1955년의 범야신당운동을 계기로 조봉암은 김규식이 이끌었던 민족자주연맹계 및 젊은 진보세력 등을 규합하여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6년의 5·15정부통령선거에 나섰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엄청난 투개표부정에도 불구하고 발표에 의하더라도 유효표의 30%에 해당하는 216만여표를 획득하였다. 결국 민의원총선을 앞둔 1958년초 조봉암·진보당사건이 터지어 조봉암은 사형에 처해졌고 진보당은 해산당했다.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키고 주동자들이 맨 먼저 한 일의 하나가 혁신세력, 청년·학생운동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일이었다. 극우반공세력과 대조적으로 혁신계에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이 많았고, 혁신계와 진보적 청년·학생들은 통일운동을 펴고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쿠데타권력은 이들을 특수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여 '단죄'하였다.

혁신계와 청년·학생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받았는가는 혁명재판에서 잘 드러난다. 혁명검찰부에서는 특수반국가행위로 225건 608명을 수리하였는데, 그 반면 3·15부정선거 원흉들은 163건 396명이 수리되었을 뿐이었다. 재판후에도 사형 등 중형선거를 받은 부정선거 원흉은 1-3년내에 석방되었으나, 혁신계와 청년·학생들은 오랫동안 투옥되었다.

석방된 혁신계 인사들은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의 감시와 위협에 시달렸다. 박정권 18년 동안에는 보수반공세력만이 정치판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로써 진보적이고 민족적·민중적인 정치 활동은 주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떠맡겨지는 파행현상이 일어났다.

이승만·자유당정권에서는 지역 갈등 현상이 미약하였는데, 박정권은 1960년대 중반 이른바 근대화정책을 추진하면서 권력의 기반을 상당 부분 지역분할정책에 의존하였다. 이것은 박정희권력의 기반이 그만큼 협애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영남재벌을 적극 육성하였고, 새로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데에도 울산 마산 등 영남지역에 과도하게 편중하였다.

정부와 경찰, 검찰, 군의 요직과 각종 정부기관, 기업체의 중요 직위도 특정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 심지어 1960년대에는 귀하였던 비료나 농약의 배분도 경상도를 우선하였고, 1968, 69년에 한발이 심하였을 때 필자가 직접 목격하였는데 양수기도 전라도에는 늦게 공급되었다.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고도성장기에 들어간 1967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후보는 박력도 없고 공약도 신선하지 않아 유권자의 짜증 어린 시선을 받았는데도 박정희후보는 영남표에 의존하여 당선되었다. 서울 경기도 충남 전남북 등 서쪽지역에서는 윤후보가 우세하였지만, 경남북, 부산에서 박후보가 윤후보보다 136만여표나 더 많았다. 전국의 표차는 116만여표였다.

1971년의 대통령선거는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처럼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40대의 김대중후보는 박력과 신선하고 진보적인 공약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박후보측은 종반전에는 흑색선전까지 퍼뜨리면서 지역감정을 유발하였고,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4월 25일 장충단유세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이며 후계자를 기르겠다"고 말하였다.

개표 결과 1967년과 비슷하게 서울 경기 전남북에서는 김후보가 우세하였으나, 전체로는 박후보가 94만여표 더 많았다. 경상도에서 몰표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경북은 8 대 2, 경남은 7.3 대 2.7, 부산은 6 대 4로 박후보가 더 득표하여, 이 지역에서 무려 150여만표나 더 많았다. 박정희는 지역 대통령이었다. 그가 남긴 지역갈등은 망국병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유신체제 이전에도 박정희는 민족주의적 민중지향적 진보세력을 정치권에서 배제하고, 극우반공세력 또는 보수반공세력 일색의 정치판을 만들었고, 국가 운영의 엘리트를 특정지역에 편중하여 충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제도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는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대해서 일별하기로 하자.

이승만과 박정희 모두다 정당정치를 혐오하였으나, 두 정권의 정당 창당은 차이가 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초기에 한편으로는 정당에 초월하여 군림한다는 제스처를 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족처럼 사용할 정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런데 제2대 국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하자 정당 조직에 발벗고 나섰다.

그리하여 1951년 12월 부산에서 초기에는 원외자유당으로 더 많이 불린 자유당이 급조되었던바, 이 정당을 조직하고 '팽창'시킨 데에는 한국의 여당답게 관권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 자유당은 족청계 당으로 불린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민족청년단의 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주공화당은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된 계엄령 상태에서 비밀리에 조직되었던바, 김종필이 부장인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특수한 상황에서 관권, 그것도 특수조직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었다. 그리고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다수의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제한하였다. 그야말로 더티한 불공정 게임이었다. 정치자금은 증권파동 워커힐 빠찡꼬 새나라자동차 부정 등 세칭 4대 의혹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 공화당 창당에 즈음하여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공화당 총재로서 나는 모범적인 정당을 만들어볼 참입니다. 당내에 언쟁도 없고 더구나 하극상은 절대로 허용될 수가 없지요. 저 야당의 꼴을 보세요. 야당원이 당 지도자를 마구 비난하고 대들지 않아요. 내가 지도하는 민주공화당은 완전히 규율이 서고 통일된 당으로 만들어보려고 해요."

박정권하에서의 국회를 '거수기' '행정부의 시녀' '통법부' 등으로 불렀는데, 그 점은 이승만정권에서도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제헌국회와 2대 국회에서 수세에 몰린 적이 많았고, 그가 국회를 장악한 것은 1954년 5·20 민의원선거 이후였다. 주요 법안의 위헌적인 기만적 통과도 이승만정권에서는 사사오입개헌을 별도로 본다면 24파동이 있는 정도다.

이승만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1958년 12월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때, 법사위원회에서는 야당 의원이 식사하러 나간 사이에 3분만에 통과시켰고, 본회의에서는 24일 무술경관으로 하여금 농성중인 야당 의원들을 끌고나가게 하고 통과시켰다.

박정권은 어떠하였나.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경 공화당의원 등 개헌 '찬성'의원에게만 비밀히 연락하여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통과하였다고 선포하였다. 그 점은 1971년 12월에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서도 같았다. 공화당의원들은 21일 새벽 2시 40분경 제4별관 뒷문으로 들어가 1분만에 법사위원회를, 2분만에 본회의를 통과하였다고 방망이를 두드렸다. 유신 전야였다.

박정희는 정당정치와 의회주의를 혐오하였을 뿐 아니라, 아예 제도 자체를 없애기도 하였다. 후계자 역할을 하는 부통령제가 박정권에서는 없었다. 지방자치제도 아예 없애버렸다. 농업협동조합도 농지개량조합도 간선제이거나 임명제였다. 박정희에게는 자치나 자율이란 낯선 세계였고, 상명하복이 이념이자 신조였다. 이 점에서 이승만이 제도 자체를 없앤다는 발상을 하지 못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이승만은 헌법과 실정법을 유린하는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5·16쿠데타, 유신쿠데타를 이승만이 목도하였더라면, 결국 자신의 절대권력을 붕괴시키고만 3·15부정선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러나 박정희정권이 이승만정권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박정권이 정보정치를 통하여 군림하였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기껏해야 사찰계 경찰을 동원하여 국민을 감시하였고, 청년조직이나 깡패가 테러를 자행하도록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승만정권에서 공권력을 이용한 테러와 박정권의 그것은 수준이 달랐다.

이러한 정보정치, 억압정치의 총본산이 중앙정보부였다. 중앙정보부는 정보와 수사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어 미 CIA와 FBI의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정보도 CIA와는 달리 국내 정보도 맡고 있었으며, 오히려 후자에 치중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광범위한 국가 통제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과 각 행정부서의 보안상태를 감시, 감독하는 권한도 막강하였다.

국내 구석구석까지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군 단위에서 중요 직장에 이르기까지 파업 등 여러 문제에 대비하여 조직된 '대책회의'를 주도하였다. 실제 정보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치분야에 대한 통제였고, 정보정치라는 말도 여기서 생겨났다. 진보세력, 학생운동세력 등을 감시하고 공작하였으며, 야당을 사쿠라로 만들고 감시하였는데, 아마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당에 대한 통제력일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월권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971년 10·2항명파동, 김대중납치사건이 말해주듯 고문 납치 협박 등 테러를 수없이 자행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테러의 마왕부(魔王府)였다. 박정희의 권력은 중앙정보부로부터 나왔다.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다음의 실력자라는 말을 들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3. 절대권력의 메커니즘

그렇다면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듯 박정권에서 '민정기'(1963-1972)와 유신독재기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그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기 전에 먼저 유신체제 성립의 메카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시민의식, 다원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곳에서는 균형과 견제가 약하여 1인한테 국가권력이 집중화되고, 권력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초기에는 그래도 민주주의제도가 일정하게 기능하지만 후기에 갈수록 그것은 형해화되고 장식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권력이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이다.

두 경우 모두 집권자가 처음부터 절대 권력을 추구하였고 영구집권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권력 의지가 1인권력체제를 만들어낸 점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주종관계 등 전근대적 의식이 잔존한 상태에서의 파시즘적, 군국주의적 의식의 만연속에 시민사회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국가권력이 견제 또는 통제되지 못한 면을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과두권력에 참여한 자들이나 그 세력이 1인유일영도체제로 몰고간 메카니즘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박정희의 절대권력 추구는 이미 군정기에 표출되었지만, 1인한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1960년대 말부터 나타나 1971년의 경험을 겪으면서 그 다음해 유신쿠데타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공화당의 경우 초기에는 당내 분열이 심했지만, 대체로 김종필 지지자가 주류를 형성하여 박정희-김종필라인에 의하여 국회가 행정의 시녀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영구집권을 둘러싸고 박정희와 김종필 추종세력은 분열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3선개헌을 앞두고 박정희가 손을 쓴 것이 1968년 5월의 국민복지연구회사건이었다.

친김종필세력은 1969년 3선개헌을 앞두고 다시 저항하였으나, 과두권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비서실의 개편 요구 수락으로 끝났다. 그 뒤 1971년 10·2항명파동으로 김성곤 길재호를 위시하여 공화당의원 23명이 정보부에 끌려가 무참히 고문당함으로써 반김 4인체제가 끝났고, 박정희친정체제가 확고히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권력에 대한 견제는 부분적으로 언론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승만시기는 대구매일테러사건과 같이 언론에 대한 테러는 있었으나, 극우반공의 테두리에서 상당히 자유가 있어 이승만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일역을 맡았다. 4월혁명의 분위기도 작용하여 박정권 초기는 어느 정도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5년 6·3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언론 옭죄기에 나섰다.

1960년대 후반에는 최영철기자테러사건 등 기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1968년말 신동아 필화사건은 언론 탄압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차관과 부실기업, 정치자금의 상호관계를 다룬 차관기사로 여러 사람이 연행되었고, 홍승면 신동아주간 등이 구속되었다. 1969년 3선개헌에서 동아일보만이 단 한번 후일의 기록을 위해 개헌을 반대한다는 약한 논조의 사설이 나갔을 뿐 그밖의 신문은 끝내 소신을 밝히지 못했다.

송건호는 이때 언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또 하나의 심한 타격은 10·2항명파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1971년 12월 8일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사설을 통하여 의문을 제기한 동아일보 주필 이동욱과 전 주필 천관우는 사임을 강요당했고, 이 사설을 쓴 논설위원 송건호는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1978년 9월 서울대학교에서 나온 한 선언문에는 국민교육헌장을 "일제시대의 망령 교육칙어의 재판"이라고 단정하였지만, 신동아필화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였던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어 영도자 논리가 내재된 국가주의를 고취시켰다. 일제때 교육칙어, 1950년대에 '우리의 맹세', 군정기에 혁명공약을 낭독하였던 학생들과 군인, 공무원 등은 이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다. 1968년은 향토예비군설치법과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신민당 등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통과된 해이기도 하다.

박정권의 주된 대항세력은 학생들이었다. 1971년에 들어와 학원을 병영화하려는 조치가 적극적으로 취해졌다. 이에 맞서 학생들은 교련 강화 반대시위를 벌였고,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였다. 이해 10월 군인들이 고려대학교 등에 난입하여 테러가 난무하였다. 10월 15일에는 위수령이 선포되어 한때 1,889명의 학생이 연행되었고, 23개 대학에서 177명이 제적되었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군대에 끌려갔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3선개헌을 전후로 하여 박정희의 권력이 부쩍 강화되고 있었고,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권력의 경직화 과두화 현상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게 한 데에는 총통제설이 무성하였던 1971년의 대통령선거도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1971년 12월 6일 초헌법적인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12월 21일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통과를 강행하였다. 유신쿠데타의 전주곡이었다.

유신쿠데타는 1인의 절대 권력을 위한 쿠데타였다. 1972년 8월 쿠데타 추진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었던 정일권 공화당 신임 당의장은 하비브 주한미대사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박정희는 임기가 끝난 후에도 대통령에 있으려고 한다는 것이 그와 비공식 대화를 통해 얻은 명백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10월 17일 유신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하비브는 미국무장관에게 김종필이 "이번 일이 내포하는 뜻은 박대통령이 평생 동안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음을 보고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신체제는 이승만과 추종자들이 정권 초기에 일민주의를 내걸고 영도자국가를 꿈꾸었던 것, 군정기에 박정희 김종필 등이 영도자국가를 꿈꾸었던 것이 1인 권력 집중의 강화와 함께 1972년에 실현을 본 것으로, 그것은 일본 육군내 파쇼집단이 1932년 5·15사건, 1936년 2·26쿠데타에서 기도했던 것과 흡사하였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욕은 이미 5·16쿠데타 직후부터 엿보였다. 국내외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일민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기는 어려웠고, 영구집권욕도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쓴 [혁명정부의 사명]에서 "의상(衣裳)만의 민주헌법 형태만의 민주국가체제"를 비판하고, 치졸한 의회정치가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 빠트렸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민정이양기였던 1963년 3·16성명에서 4년간 군정 연장을 제기한 것은 그의 저의가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4월혁명의 분위기와 미국의 간섭은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 장준하는 이 시기에 마키아벨리즘적 습성을 탈피치 못한 소수 엘리트에 의해 파시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유신체제의 성립은 그에 관한 몇 가지 논의를 검토함으로써 그것의 성격을 더 명확히 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유신체제의 성립에서 1971년의 사회적 위기를 주목한다. 1971년에는 박정희 근대화노선의 문제점이 여러 형태로 분출하였고, 민주화운동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대통령선거와 의정사상 초유의 균형국회를 성립시킨 국회의원선거, 대학가의 시위, 대학교수와 기자들의 집단적인 민주화 요구, 사법부 파동 등에서 각계 각층의 민주화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또 이해에는 광주대단지사건, 인턴과 레지던트의 파업, KAL빌딩난동사건 및 실미도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운동과 여러 사건이 유신체제를 필요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에는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시위나 투쟁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 민주화는 상당히 진전되었다. 확실히 1971년은 선택의 해였다. 권력을 집중해가고 있었던 박정권은 민주화 대신 절대권력의 추구, 권력의 성격 등이 작용하여 반대의 길을 택했다.

1970년대 초반의 동아시아에서의 국제 관계가 유신체제를 성립시켰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미국의 화해, 중-일 국교 수립 등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냉전에 편승하여 남북간의 대립, 갈등을 극단화시키고, 그것과 극우반공논리로  권력을 유지하고 자본축적을 해왔던 극우반공세력은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데탕트는 대만의 장경국정권처럼 극우세력한테 변신의 기회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동아시아의 데탕트가 유신체제 성립의 기본요건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유신쿠데타의 명분으로 그것을 내세우지 못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풍년사업'이라는 암호명으로 밀실에서 유신공작을 벌였던 이후락은 쿠데타 직전에 미국측에 그 사실을 알렸던바, 미국은 닉슨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유신의 동기처럼 오해될 수 있으니 그 부분을 빼달라고 주문하였고, 일본 또한 일-중 수교와, 다나카의 중국방문을 빼달라고 요구하여, 박정희가 중얼거린 대로 알맹이는 빠진 채, 대단히 풍자적이지만, 남북대화 추진이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동기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군국주의 파시즘적 사고와 절대권력 추구의 논리는 1971년에 대한 선택에서처럼 반동의 길로 나아가, 데탕트의 국제조류와 남북긴장완화 - 통일에 대한 민족의 염원을 거부하고 시대에 역행하는 극단적인 냉전이데올로기로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경제와 유신체제 성립과의 관계는 더 좀 상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경제 때문에 유신체제가 성립하였다거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발독재'가 필요하였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왜 1972년까지는 독재국가라고는 말하지 않는 상태에 있었는데, 1972년의 시점에서 이승만독재와도 전혀 차원이 다른 파시즘적 영도자국가가 나타나게 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해명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또한 경제 발전과 개발독재와의 관계도 구체성이 없이 일반론적인 주장을 할 뿐이다.

유신체제의 성립과 경제와의 관계를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부실기업으로 상징되는 경제의 위기현상을 가지고 설명하거나, 중화학공업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그렇지만 1969년에서 1972년에 이르는 시기의 부실기업 문제 등의 경제 위기는 이 시기에만 나타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또 설사 그것이 위기라고 하여도 경제쿠데타로 불려지는 1972년의 8·3사채동결조치 수준의 변칙처방으로도 해소가 가능하였다.

중화학의 경우 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꼭 유신체제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중화학공업의 추진은 유신쿠데타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시작되었다. 1973년 1월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여, 5월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밑에 시행업무를 총괄하는 중화학기획단을 두었다.

박정권은 5·16쿠데타에서부터 정통성 도덕성이 결핍되어 있었고, 민주주의로나 통일, 자주성 등 민족문제로는 내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 발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경제 발전을 위해 5·16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은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유신쿠데타도 비슷하였다. 유신체제 존립을 위해서 결국 유신체제를 붕괴시키는 경제적 요인이 될 중화학공업에 매달리게 된 것이었다. 마침 일본 등에서는 중화학공업이 사양산업이어서 한국 등에 그것을 이전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유신체제가 경제 문제 때문에 성립한 것은 아니었고, 재벌은 아직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재벌 등 독점자본은 그들의 생리상 유신체제를 지지하였다. 유신체제에 대한 수동적 지지였다고 할까. 그들은 유신체제하에서 정경유착속에 각종 특혜를 받아 세계적 규모의 거대 재벌로 성장하였다.

노동의 조건을 보아도 경제와 유신체제 성립과의 관계는 상관성이 약하다. 한국의 기업은 언제나 노동자를 종속상태에 두고자 하였는데, 1972년의 시점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역량은 강한 것이 아니었다. 1970년에 전태일분신자살투쟁을 제외하면, 이 시기에는 노동자 투쟁으로 꼽을 만한 것이 적었다.

노동자는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어서 농민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에 차 있었다. 1980년대처럼 프로패셔날한 노동운동가도 없었다. 또한 노동조합의 활동은 유신체제가 없었더라도 국가보위법에 의해서 강력히 제약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는 아직 예비노동력이 넘쳐 흘렀다는 점이다. 1970년에 전체 고용노동자가 378만여명이었고, 10인 이상 사업체에 고용된 노동자가 108만명이었는데, 그것이 1980년에는 각각 648만여명, 297만여명이었다.

유신체제와 경제발전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좋은 글은 찾기가 쉽지 않다. 이것에는 시위 등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한 사회적 비용, 남북대결 비용 등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한가지 지적할 것은 동시대 중남미의 예가 말해주듯 '개발독재'는 경제를 망친 경우가 많지만, 장개석·장경국의 대만과 프랑코의 총통은 한국처럼 이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루었으나, 그것의 내용이 달랐다는 점이다. 두 나라 다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스페인이 특히 그러하였지만, 차관 도입 등 외부에의 의존도가 약했다. 정경유착, 그것과 표리관계에 있는 부정부패도 미약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민정기와 유신체제의 성격이 질적인 차이가 있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유신체제 존립을 위한 박정희의 국가운용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또 광주민주항쟁에서 외친 바와 같이,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자들한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인간적 반문명적 독재체제다.

유신체제는 이승만정권이나 민정기와 달리 외형적인 3권 분립도, 의회제도 부정된 유일영도체제다. 권력이 임명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가 주된 '의회'기능을 맡았고, 1선거구 2인 선출로 국회의원을 뽑게 되어 있고, 국회의 기능은 대폭 축소되었다.

모든 권력은 '통대'에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대통령은 헌법개정안 발안권, 주권적 수임기구인 통대의장으로 통일정책의 결정이나 변경을 통대에 부의할 수 있는 권리 등 국가'지도'의 '최고수임자'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그리고 국회해산권, 법률안거부권, 긴급조치권을 가지며, 헌법위원회위원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등 각급 공무원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구속적부심제도 폐지되었고,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삼아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였으며, 법관추천회의도 폐지하여 모든 법관임명권은 대통령에게 귀속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바로 김상현 등 13명의 야당의원들을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구속하는 등 정치계에서 추방하였으며, 다른 야당의원들은 유신체제 지지의 각서를 썼다.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제 주요 언론기관, 노총 등 주요 기관에는 정보부원이 상주하였고, 반유신운동자는 끝까지 추격하였다. 반유신투쟁에서 유신철폐와 함께 정보부 해체, 정보공작정치 근절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긴급조치하에서 언론이 어떠하였는가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학도호국단이 부활하였고, '유신이념' 교육과 반북·반공이데올로기의 주입이 극단적으로 행해졌고, 교수들은 학생시위 저지에 갖가지 형태로 동원되었다.

반공법,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는 1960년대말부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민족주의적인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모는 사태가 빈번하였다. 사문화되었던 전향요구가 모진 고문을 동반하며 감옥마다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1975년에는 사회안전법이 만들어졌다. 같은 시기에 일제말의 애국반을 상기시키는 반상회가 조직되었고, 초중고의 반장에서부터 시골의 구장, 반장까지 위에서 임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디에서나 얘기를 하려면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유지를 위하여 취한 국가운용은 유신체제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유신체제의 사회적 비용을 평가하는데 도움을 준다. 박정희의 유신체제 운용책은 권력의 핵으로서 군과 중요 기관을 어떻게 통제하였나,

그것의 일환으로 하나회가 어떻게 생겼나 등의 문제,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군 장성, 정보기관 요원, 관료 등 권력의 주요 직위에 있었던 자들에서부터 군수나 지방 유지에 이르기까지 '촌지' 등으로 어떻게 회유하고 포섭하였으며, 김형욱의 최후가 말해주듯 '배반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하였나 등의 문제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엄청난 중복투자로 유신후기에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은 중화학 투자 등 경제정책에 관해서도 논의할 수 있으나, 억압, 감시의 체제, 외부의 적 등에 대한 증오감 부추기기,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한 충격적인 폭탄선언이나 그와 유사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서술하겠다.

유신체제는 물샐틈 없는 전체주의적 감시·규제체제였다. 출판물, 음반, 영화, 연극 등의 제한이나 장발 단속 등도 그러한 감시와 규제의 일환이었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조직, 세력에 대해서는 잔혹한 탄압을 가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소위 인혁당사건이란 조작된 사건으로 8명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날 새벽에 처형한 학살극은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감시와 탄압만으로도 유지될 수가 없었다. 긴급조치 1, 4, 9호가 대표적이지만, 유신독재기의 대부분은 말할 수 있는 자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한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있었다. 유신체제는 긴급조치가 없으면 존속될 수 없는 특수 체제였다.

나찌가 전형적으로 유태인이나 공산당, 슬라브족 등 외부의 적을 만들어 증오심을 고취시켜 그 적과 대항할 수 있는 유일영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하도록 하였지만, 민족분열적인 지방갈등 야기로 대통령이 되고, 민족의 염원이 어린 7·4공동성명을 유신쿠데타의 빌미로 악용하고 짓밟은 박정희는 극단적인 반북·반공 선전을 끊임없이 하였다.

이미 1971년 12월 비상사태령에서 "북괴의 적화 야욕이 고조되고 있다"고 역설하였는데, 1970년대 내내 박정희는 당장에 북이 남침할 것처럼 강조하였고, 미국은 남침의 가능성이 없는데도 박정희의 요구 때문에 맞장구치는 일이 많았다.

사실 이승만정권에서는 보도연맹원 학살, 거창양민학살 등 군·경이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겠지만, 한국전쟁에서의 학살문제를 별반 거론하지 않았고, 그 점은 1960년대에도 비슷하였으나, 유신정권에서는 6·25날이 아니더라도 라디오나 TV의 드라마 등 여러 매체와 각종 교육기관을 통하여 학살만행을 일면적으로 과장하여 쉬지 않고 선전하였다.

1975년 발간된 문교부의 {사상교육(반공교육)지도자료집}에는 교육의 목표로 "6·25사변중에 보여진 북괴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하여 증오심을 가진다"를 제시하였고, 지도내용에서 "40세 미만을 전멸시킨다는 남침 초기의 기본계획" 등을 열거하였다. 사람들은 북한 하면 붉은 이리떼, 학살 만행 등을 떠올렸다.

한국은 병든 사회였다. 아동들은 반공교육으로 병들고 비인간화되었다. 어느 여중생은 글짓기에서 "너희들(북의 주민)은 이 세상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는구나"라고 썼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남과 북의 벽은 천리만리였고, 동족은커녕 밥을 먹는 인간으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유신시기에는 충격적인 발표가 잇달았다. 박정희는 충격적인 발표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1973년 8월 8일에 있었던 김대중납치사건도 충격적이었지만, 1974년 4월에 엄청난 사건으로 발표된 민청학련사건도 큰 충격을 주었다.

성격이 다르지만, 그해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있은 박대통령부인 육영수저격사건이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진상을 밝혀 해명되어야 할 터인데, 이 사건이 준 충격도 대단하였다. 그것의 직접적인 파장으로 9월에는 규모가 큰 반일시위가 일어나 국민의 시선을 쏠리게 했는데, 이 시위는 관제의 성격이 강했다.

박정희는 1976년 1월 15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영일지구에서 양질의 석유가 발견되었다고 공표하였다. 1975년 연말부터 유포시켰던 소문이 대통령에 의해 '확인'된 것이었는데, 한국인들은 석유가 나온다는 발표에 몇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더구나 이 시기는 세계 오일쇼크로 1974년 상반기까지 고도성장을 하던 경제가 침체되고 국제수지가 악화된데다 도매물가 상승이 1974년 42.2%, 1975년에 26.5%나 되어 살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석유만 나오면 우리도 잘 살 것이라는 기대가 더 엄청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석유가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경제성이 없는 극소량밖에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유신체제를 위하여 그러한 발표를 한 것이었다. 포항 석유 시추 시설은 놀랍게도 정보부가 관장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그 주위를 얼씬도 할 수 없었다. 1년이 조금 지난 1977년 2월 10일 박정희는 이번에는 임시행정수도건설 구상을 발표하였다.

정부소식통은 지역은 천안-대전권이 될 것이고 청사 이전은 1982년 이후라고 언명하였다. 박정희의 발표로 사람들의 관심이 한동안 그리로 쏠렸고, 인플레 등이 가세하여 붐을 일으키던 투기는 한층 확대되었다. 투기는 아파트 등 주택으로 번졌으며, 서민들도 가세하였다. 또 하나의 망국풍조였다. 대북관계 때문에도 행정기관 일부는 옮길 수 있어도 서울을 상업도시로 만들고 행정수도는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3월 7일 또 다시 새 행정수도 건설은 빠르면 80년대에 들어서 착수한다고 발표하여 다시금 들뜨게 만들었다.

4. 반유신 민주화운동

반유신 투쟁을 가장 강력히 벌인 것은 대학생이었다. 반유신운동은 1973년 4월 남산부활절 예배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규모가 큰 민주화운동은 그해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2월 7일 박정희가 굴복하여 구속학생 전원석방, 처벌 백지화를 지시할 때까지 전국 수십개의 대학에서 학생들은 시위투쟁 동맹휴학 시험거부 등의 형태로 투쟁하였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 등이 선포되었지만 지식인 종교인 등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학생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일시에 반유신 투쟁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다가 3월말부터 검거되었고,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어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민청학련 관계 학생들은 전국적인 조직을 통하여 투쟁을 전개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계 등 각계의 반유신세력과 공동투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203명이 구속되었다.

서릿발같은 긴급조치 4호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9월부터 다시 움직였고, 다음해 3월 하순부터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8일 긴급조치 7호로 고려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렸고,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포되었으나, 5월 22일 서울대 학생들은 규모가 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인도지나사태로 정국이 얼어붙고 학도호국단 등을 만들어 학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됨으로써 시위의 공간이 좁혀졌다.

학생들은 '5분작전'이라고 해서 위험한 난간에 매달려 학생들을 모아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77년 하반기부터 부쩍 늘어난 반유신 투쟁은 1978년에 들어와 광화문 등의 '요지'에서 여러 대학생들이 시민들을 끌어들이며 투쟁을 벌이는 방식이 자주 등장하였다.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은 부산대를 위시한 부산·마산 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의 대규모 투쟁이었던 부마항쟁으로 절정에 올랐다.

반유신 투쟁에는 지식인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이 활발히 참여하였고,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는 대학과 더불어 반유신 투쟁의 성소(聖所)였다. 이미 박형규목사 등은 남산부활절 예배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여 유신철폐운동의 봉화를 들었다. 학생들의 투쟁이 전개되던 1973년 11월 5일에는 김재준 천관우 등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등 15인의 시국선언이 있었고, 이와 비슷한 활동은 12월에도 계속되었다. 12월 4일에는 장준하가 주도하여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발기인대회가 열렸고, 이러한 운동이 열렬한 환영을 받자 박정희 등은 당황하여 협박성 발표를 하다가 긴급조치를 선포하였다. 장준하와 백기완은 긴급조치 1호로 바로 구속되었다.

민청학련관련 학생과 지학순주교 등 200여명에 대한 폭압적 대량 구속은  기성세대의 민주화운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인권변호사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였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조직되었던바, 후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와 함께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74년 하반기에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동아일보 광고사태까지 발생하였으나, 사주측이 권력에 굴복하여 기자들을 집단 해고하였다. 그러나 기자들은 굴하지 않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거리투쟁 등 반유신투쟁을 집요하게 계속하였다.

1976년에 있은 명동성당 3· 1절기념미사에서 낭독된 3·1 민주구국선언은 윤보선 김대중 등과 개신교 가톨릭 성직자 등이 서명한 것으로 국내외에 반향이 컸다. 또한 1977년에는 해직교수 13인이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하였고, 다음해 6월에는 송기숙 등 전남대교수들에 의해 [우리의 교육지표]가 나왔던바,  교육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는가를 실감케 한 선언이었다.

이 시기에는 민주화투쟁세력의 범위가 한층 넓어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기독자교수협의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양심범가족협의회 등이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민주운동단체들은 통일전선체를 만들어 싸우기도 하였다. 1978년 7월 5일에는 민주주의국민연합이 발족되었고, 1979년 3월 4일에는 그것이 한 단계 더 강화되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출범하였다.

유신강압기에는 유신 타도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당면한 최대 과제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양한 편이 아니었고, 1980년대와 같은 이념적 계급적 지향은 약하였다. 1973년 서울대 문리대에서의 10·2투쟁에서는 파쇼통치 중지, 대일 예속화 중지, 중앙정보부의 즉각 해체, 기성 정치인 언론인의 각성 등이 제시되었다.

유신 후반기에는 노동자 농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통일문제가 빈번히 거론되었다. 전자의 경우 그 만큼 노동자 농민문제가 심각해졌고, 그것에 학생 재야가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후자는 반유신 투쟁을 벌이며 자연히 민족의식이 각성된 것도 주요 요인이었지만, 국외에서의 통일운동도 한몫을 하였다.

이 시기에 고양된 의식의 흐름도 계속 나타났다. 10·2투쟁에서도 민중, 민족 생존이 언급되었는데, 민청학련의 [민중·민족·민주선언]은 '민중'이 맨 앞에 나와 있거니와, 말미에서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음을 천명하였다. 유신말기에는 박정희정권의 성격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겠지만, 민족해방론적 시각도 꽤 나온다.

1978년 9월 고려대 시위에서는 한국 근현대의 민족사를 "반제국, 반봉건, 반독재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파악하였다. 서울대에서 1979년 9월 20일에 나온 [근로민중생존권 투쟁]에서는 "근로민중의 피땀을 딛고 서서 외국신식민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현정권의 반민중적 반민족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종속론이 급속히 퍼져가고 있었다. 1979년 10·26 직전에는 남민전사건이 터졌는데, 급진적 이념과 급진적 투쟁노선을 가진 단체였다. 이 역시 유신체제의 산물이었는데, 1980년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노동운동 농민운동도 반유신운동과 궤를 같이 하여 전개되었다. 1970년대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 활동이 눈에 뛰었고, 후반기에는 동일방직노동조합의 투쟁, YH여공들의 투쟁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대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거나 여자노동자들이 도시산업선교회 등과 손을 잡고 노동조합 탄압에 맞서거나 직장 철폐에 맞서는 수준이었다.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등 여러 기업의 노동자들이 이념적 성격을 띠고 연합투쟁을 벌인 것과 같은 양상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나타났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 노동자가 대폭 증가하여 점차 질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패셔널한 노동운동가가 현장에 파고 들었고,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는 노동교육, 농민교육이 펼쳐지고 있었다. 1976년에 일어난 함평고구마사건은 수십년간 잠들어 있었던 농민운동에 불을 지폈다. 농민운동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에 나온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이성과 우상},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등은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탈춤 활동은 대학가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 운동 또한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극단 광대는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앞 광장에서의 궐기대회에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몫 하였다.

5. 맺음말 - 경제난·학살·민주항쟁

유신체제는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결단으로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붕괴되었다. 이후로 어느 누구도 유신체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본질과 붕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는 경제의 파탄이라고도 할만한 경제난이다. 학생 시위에 부산 마산의 상인들을 위시한 시민들이 적극 가세한 일은 근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불황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미 1978년 12월 12일의 총선에서 놀랍게도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득표율이 1% 앞선 것은 서민들의 불만을 말해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1979년 6월 이후 김영삼의 대(對) 박정희 투쟁을 가속화시킨 기관차였다.

박정희는 중복투자와 국내외의 경제 사정으로 중화학공업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도,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979년 1월 1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86년까지 중공업을 세계 10대 강국에 올려놓겠다는 이른바 웅비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복투자로 인한 재원의 축소, 제2 오일쇼크 등으로 5월 25일 중화학투자 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자신이 키워놓은 재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처방은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은 대개가 가동률이 무려 50%에서 30%를 오르내렸다. 이러한 여파로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5.2%로 추락하였던바, 최악의 경제상태였던 1951년 -6.1%성장 - 1952년 이후에는 마이너스성장이 없었다 -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둘째는 학살이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자신이 부산사태를 보고하자 박정희가 "이제부터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하겠다"라고 말했고, 그러자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거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만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광주항쟁이 7개월 앞당겨 일어났다면 경상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엄청난 학살극이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최근에 베트남에서의 학살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4월혁명후 보도연맹원 대학살, 거창양민 등의 학살 등 전쟁기에 군·경에 의한 대규모 주민집단학살(Genocide)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유족회에 대하여 5·16쿠데타권력이 군·경에 대한 증오심을 조성케 하고 용공적 사상을 고취하였다고 구속하고 무덤을 파헤친 행위, 인혁당사건 8명에 대한 학살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대규모 민주·민중항쟁의 유발과 유신잔당의 말기적 준동이다. 비인간적 반문명적 파쇼억압체제는 여러 가지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되어 있다. 특히 심한 경직성은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인 자동조절기능을 상실케 하여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일 수도 있지만 돌연한 사태나 대규모 민중항쟁의 유발로 표출될 수도 있다.

10월 17일부터 학생과 시민의 항쟁으로 번진 부마항쟁의 경우 부산에서만 경찰차량 6대 전소, 12대 파손, 21개 파출소 파손 또는 방화, 도청 세무서 방송국 신문사가 파손되었다고 정부는 발표하고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죽은 것도 유신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탄광도시인 사북에서 공권력이 마비되고 광원들이 지서를 점령한 것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유신잔당에 의한 학살을 포함한 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신체제의 끝물로 1980년대에 유신잔당들이 한 행위도 보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에 대항하여 80년대 내내 격렬히 싸운 민주항쟁 또는 민주·민족운동도 세계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출전 : 전남대학교 5.18연구소-학술회의-학술대회 발표논문-5·18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윗글 [근대] 간도 귀속 문제 (민족)
아래글 [현대] 서울올림픽대회 (두산)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788 사전3 [현대] 북한-경제 (두산) 이창호 2003-11-30 1628
2787 사전3 [현대] 반민족행위처벌법 (법률) 이창호 2004-01-09 1626
2786 사전3 [현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 이창호 2004-01-09 1623
2785 사전3 [현대] 조지훈 (브리) 이창호 2004-01-02 1622
2784 사전3 [현대] 반민족행위처벌법 (두산) 이창호 2004-01-09 1613
2783 사전3 [현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브리) 이창호 2004-01-09 1611
2782 사전3 [현대] 신동엽 (민족) 이창호 2004-01-06 1611
2781 사전3 [현대] 김수영 (리브) 이창호 2004-01-05 1611
2780 사전3 [근대] 간도 귀속 문제 (민족) 이창호 2003-03-22 1602
2779 사전3 [현대]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서중석) 이창호 2003-12-10 1598
1,,,2122232425262728293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