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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2 (토)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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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42      
[근대] 간도 귀속 문제 (민족)
간도(귀속문제)

세부항목

간도
간도(역사)
간도(귀속문제)
간도(독립운동)
간도(현황)
간도(참고문헌)

[배경]

청나라 태조는 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여겨 장백산 일대를 그들의 성역(聖域)으로 삼았다. 청나라 태종은 병자호란 뒤에 백두산과 북쪽 간도 일대를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장책(長柵)의 변장(邊墻)을 설치해 동북 지역으로의 입주를 엄금하였다.

그 뒤 청나라 성조는 봉금지역의 남방 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경선 획정을 위한 교섭을 전개해 마침내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즉,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대표인 오랄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과 우리측 대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이선부(李善溥)가 양국 경계의 공동 조사를 위해 혜산진에서 회동하였다.

목극등의 제안으로 백두산 일대를 실지 답사해 국경을 작정하기로 하고, 목극등 일행과 조선측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일행이 백두산에 올라 현지 조사 끝에 이른바 백두산정계비(중국측 지도에는 穆碑로 표시)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동으로는 압록강, 서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목극등이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송화강 상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간도 지방은 곧 토문강과 송화강의 동쪽 지역으로,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해 놓았던 것이다.

목극등의 주장에 의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을 때 우리 역관(譯官)이 백두산 도면 한장을 요청하자, 그는 서슴없이 “대국산천(大國山川)은 다 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너희 나라이니 어찌 주기가 어렵겠느냐” 하고 건네주었으니,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한 언동이 아닐 수 없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간은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월경 농경을 하는 조선 농민은 주거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에 두고 두만강을 넘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촌 경제의 악화와 지방관의 탐학이 날로 심해지면서 아예 두만강 너머로 주거를 옮기게 되었고, 조선 관료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간도 깊숙이 들어가서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생활 근거를 잡은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도 이주민은 날로 늘어갔다.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자, 먼저 이주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게 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발단]

1881년 10월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은 간도 지방을 개간하고자 이 지방을 답사하였다. 그는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청나라 정부는 1882년 초에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러나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 등 만주 지역의 청나라 관리들은 기왕 이주한 조선인들의 입주를 기정 사실화 하되, 조세의 징수, 호적의 정리, 그리고 범죄자를 청나라가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해 왔다.

그런데 1883년 4월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은 9월 수확 후, 태도를 급히 바꿔 간도의 우리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해 왔다.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의 현지 관료들의 태도가 이처럼 경화되자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던 간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는 한편,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종성 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을 호소해 왔다.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이보다 앞서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한편,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우리 정부도 청나라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였으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되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하게 되니, 이제 간도 문제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간도 귀속 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을유·정해감계회담]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회담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나라가 응해 온 것으로,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7월 우리 정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하였고, 1월에 청나라 측 대표인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 독리상무위(督理商務委) 진영과 회동하게 하였다.

이때 이중하는 정계비를 먼저 사감(査勘)하고 강의 발원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원(江源)을 먼저 조사해야 하며 정계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두만강 상류를 도문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들 주장대로 우리측을 승복시키기 위한 강변이었다.

회령 제2차 회합에서는 강원을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백두산으로 현지 답사를 실시, 강원 지역과 정계비를 답사하고 무산에 내려와 의견 조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정계비의 표지가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임을 확인하고서도 양국의 경계가 원래 도문강이고, 또한 본국 정부로부터 도문강의 사감만을 지시 받았다는 청나라 측의 강변과 비문의 토문은 문자대로 토문강이니 간도는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우리측 주장이 맞서 끝내 타결되지 못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청나라는 서울 주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토문감계문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내세워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고 강변하며 다시금 감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다시금 토문감계사로 기용해 현지로 출발하게 하였다.

토문감계의 제2차 토문현지회담인 정해감계회담은 1887년 4월에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측 대표인 독리길림조선회 판변방영무처(督理吉林朝鮮會辦邊防營務處) 진영, 혼춘승판처 덕옥,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 방랑(方郎) 등과 회담한 이중하는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내세워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지 답사에 나선 청나라는 홍단수(紅丹水)를 가지고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며 군대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쌍방간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 국경선 전체를 획정 지을 수가 없었다.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가 합류하는 지점 이하로 경계를 가결정하려는 노력을 폈으나,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888년 정초에 청나라 측이 다시금 감계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였다.

이중하는 현지답사 때의 청나라측 협박에 의한 협상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양국 정부의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본국 정부로 하여금 홍단수를 경계로 하자는 제의를 공사 위안스카이에게 타진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측이 현지 회담보다도 앞으로는 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게 되어 토문감계의 교섭은 자연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의 적극 대책]

청일전쟁 후 독립협회의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 운동이 활발해지고,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발족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 국가에로의 움직임에 따라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간도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현황 파악을 위해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趙存禹)에게 백두산정계비와 그 일대의 분수령의 강수(江水)에 관해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조존우는 현지 지세를 답사해 도본(圖本)과 대요 설명서인 담판오조(談判五條)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1898년에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李鍾觀)에게 재차 현지 조사를 시달하였다. 이종관은 경원 군수 박일헌(朴逸憲)과 관찰 부사 김응룡(金應龍)을 파견해 철저하게 현지를 답사, 보고하게 하였다.

두 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 정부는 토문강 상류로부터 하류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는 강줄기의 동쪽에 위치한 땅인 간도와 더 나아가 청나라가 1860년 러시아 제국에 할양한 연해주(沿海州) 땅까지 우리의 국토임을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을 토대로 1901년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고, 1902년에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해 간도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범윤의 적극 대책의 건의를 받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의 “간도주민보호관의 파견이 필요하다.”라는 건의가 있자,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범윤은 간도 주민을 보호함에는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의 군대가 출동하면 국제분쟁이 야기될 염려가 있다고 보고, 사병(私兵)을 모아 병영(兵營)을 이루어 실력으로 간도의 우리 주민들을 보호하기에 힘썼다.

이로 말미암아 청나라 측과 자주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나라가 우리 정부에 대해 이범윤을 소환할 것을 거듭 요구해 오므로, 조선 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하였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 관들이 국경 문제의 정식 해결에 앞서 잠정적인 선을 정하기로 하여, 선후장정(善後章程)이라는 잠정적 문서로 합의하였다.

내용은 두 나라의 경계는 백두산정계비에 증빙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양국 대표의 감계를 기다려야 하고, 그 이전에는 예대로 도문강을 격해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해 경작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분쟁 야기를 피하기 위한 임시 조처요, 양국 감계에 의한 국경 획정까지의 잠정 협정이었다. 이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자 주청일본공사(駐淸日本公使)가 청나라에 대해 전쟁 기간에 감계문제를 들고 나와 조선과 분쟁을 야기함이 좋지 않으니, 감계교섭의 재개 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양국이 이 종용에 따름으로써 감계 문제는 중단되었다.

[통감부 간도 출장소와 간도협약의 모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문제로부터 러시아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분할 정책을 이용해 영국과 미국에게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력을 배경으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른바 보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간도 문제 처리를 위해 그들의 무력을 배경으로 간도의 실질적 확보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1906년에 참정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통감부에 간도 거주 우리 나라 사람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하자, 통감부는 1907년 간도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간도 출장소의 설치는 일본 정부가 간도 문제에 있어 종래 조선 정부가 취해 온 입장을 시인한 뒤의 조처였다. 물론, 그것은 일본 나름대로 대륙 침략의 세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처였으나, 어쨌든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승인하고 난 뒤의 행정 조처였다.

간도 파출소가 편찬한 〈한청국경문제의 연혁〉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은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서 두만강과 관계가 없으며, 두만강이 결코 천연의 국경선일 수 없다고 여러 조항에 걸쳐 논증하고 있다.

또한, 간도 출장소에 소장으로 취임한 일본 육군 중좌 사이토(齋藤季次郎)는 “간도는 한국 영토라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을 성명했다. 조선 통감부는 1909년에 청나라의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綠貞)에게 간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통첩하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성명하였다.

비록, 일본이 간도의 우리 나라 영유를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은 서로 달랐다. 즉,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땅을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로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도가 분명히 우리의 영토라고 조선 통감부가 성명하였고, 청나라에 통첩한 일제가 1909년 9월 7일 돌연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 : 延吉에서 會寧間 철도)의 부설권을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간도 협약에 의해 일제는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무순(撫順)·연대(煙臺)의 탄광 문제, 영구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침략 야심에서 본다면 만주 지배를 위해 군사력을 만주 깊숙이 진주시켜, 마침내 만주를 무력 점령하였을 때, 간도 지방도 다시 지배하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취해진 예정된 조처였다.

그러므로 간도 협약은 우리 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인 우리 영토의 할양이었고, 이 협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 문서인 것이다. 협약에 의해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 문제는 28년만에 일제에 의한 불법적 할양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절차를 가지고 간도 귀속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원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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