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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5 (화) 20:16
분 류 사전3
ㆍ조회: 1472      
[근대] 개항 (두산)
개항 開港

항구나 공항을 개설하여 외국과 통상을 허용하는 일.

I. 개관

외국의 경우는 일반개항 ·특별개항 ·불개항(不開港)으로 구분하여, 수출입 전부를 허용하는 항구나 공항을 일반개항이라 하고, 수출만을 허용하는 항구나 공항을 특별개항이라 하며, 해난(海難) 등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선박이나 항공기의 출입을 금하는 항구나 공항을 불개항이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구분은 하지 않고, 개항은 관세법 제58조에 의거한 대통령령, 즉 ‘개항지정령(開港指定令)’으로 지정되어 있다. 동령(同令)에 따라 지정된 항구로는 부산항 ·인천항 ·마산항 ·여수항 ·목포항 ·군산항 ·제주항 ·묵호항 ·울산항 ·충무항 ·삼천포항 ·장승포항 ·포항항 ·장항항 ·옥포항 ·삼일항 ·북평항이고, 공항으로는 김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및 제주국제공항이 개항으로 지정되어 있다.

ll. 역사

개항은 역사적으로 보아 한국에서는 개국(開國)을 뜻하여 개국과 거의 동의어(同義語)로 사용되었으며, 쇄국(鎖國)에 대응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1800년대 조선 말기의 개항은 쇄국정책에서 국제적 문호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근대적 서구 문물의 수용이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정치·경제 및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자주적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외세(外勢), 특히 일본의 강제에 따라 불평등조약을 감수하는 등의 굴욕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외세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 조선전기

조선 조정은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막고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 제포(薺浦:熊川의 乃而浦) ·부산포(富山浦:釜山의 東萊) ·염포(鹽浦:蔚山) 등 3포와 가배량(加背梁:固城郡)을 개항장으로 지정하여 여기에 왜관(倭館)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사절(使節) ·상왜(商倭) ·수직왜인(受職倭人)들이 내조(來朝)하였고, 이들의 내조는 궁극적으로 무역에 목적이 있었다. 이들 개항장은 포소(浦所)라 하여 왜인의 물화(物貨)는 이곳에서 교환해주고, 진상품(進上品)은 서울로 올려와 진상과 하사(下賜)라는 형식을 통하여 물물교환의 무역관계가 성립되었다.

법규상 1년 동안 개항장에 입항이 허용된 왜선은 일본의 대조선외교(對朝鮮外交) 및 교역을 대리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세견선(歲遣船) 50척을 비롯하여 모두 204척~218척이었다. 내왕 인원은 5,000여 명에서 5,600명에 이르렀으며, 이 중 상경이 허용된 왜인은 700명~1,400명 정도였다.

이 왜인들이 진상 등의 명목으로 들여오는 물품은 소목(蘇木 :약재) ·단목(丹木:염료) ·유황 ·백반 ·계심(桂心:계피 속부분) ·천궁(川芎:약재) ·감초 ·서각(犀角:무소뿔) ·장뇌(樟腦:화약 ·약재) ·기린혈(麒麟血) ·침향(沈香) ·곽향(藿香) ·사탕(砂糖) ·후추 ·육두(肉豆) ·상아 등의 염료 ·약재 ·향료와 기타 남양산(南洋産) 물품 등이었으며, 조선은 쌀 ·콩 외에 호표피(虎豹皮) ·초피(貂皮:담비가죽) ·채화석(彩花蓆) ·면포(綿布) ·저포(苧布) ·인삼 ·오미자 ·봉밀(蜂蜜) ·송자(松子) 등을 주었다. 이러한 물품들의 교역은 개항장의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교역을 시행하는 개시일(開市日)도 처음에는 1개월에 3회(3 ·13 ·23일)로 하였으나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6회(3 ·8 ·13 ·18 ·23 ·28일)로 늘렸다.

교역과정을 보면 무관(武官)이 왜관문을 경호하고, 조선 상인은 미리 관(官)으로부터 인(印)이 찍힌 패(牌)를 받아 물화를 가지고 왜관에 와서 수문(守門)에서 훈도(訓導) ·별차(別差) ·수세관(收稅官) ·개시감관(開市監官)에게 제시하면 검품(檢品)하여 개시대청으로 들어간다. 대청에 모인 상인들은 양국 관리들에게 일제히 배례하고 차례대로 교역한 뒤 모두 끝나면 동시에 돌아갔다.

조선의 왜관 상인들은 호조(戶曹)에서 문권(文券)을 받은 관허 상인들로서 1691년(숙종 17)에 정한 것을 보면 30명이었다. 왜인들이 가지고 온 진상품의 경우는 예조낭청(禮曹郞廳)이 왜관에 나아가 왜인과 같이 앉아 간품(看品)하여 그 물품에 알맞은 물품을 하사의 형식으로 주었다. 이와 같은 무역 형태는 실상 물물교환이었으며, 그것도 우리는 상용목적(商用目的)으로 일본에 간 예가 없고 일본 상인들이 물품을 가지고 온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에 당시 대일교역의 특징이 있다.

개항은 초기부터 곡절이 많아 1419년(세종 1) 왜구가 근거지로 삼던 쓰시마섬을 정벌한 뒤 왜관에 거주하던 항거왜(恒居倭)를 없애는 한편 왜인의 왕래를 금하였다. 그러다가 26년에는 그들의 간청으로 다시 3포(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어획을 허락하고, 43년에는 쓰시마섬 도주와 계해조약(癸亥條約)을 맺어 세견선의 수(數) 등 구체적 교역규정을 정하여 제한을 가하였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교역이 중지되었다가 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 제포만 개항하였다. 55년(명종 10) 수십 척의 왜선이 전라도 연안을 침범한 달량포왜변(達梁浦倭變)으로 다시 두절된 뒤 임진왜란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3포를 다시 개항한 후 초량(草梁)에 왜관을 설치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공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37년(인조 15) 이후에는 왜관을 중심으로 한 공무역 체제가 무너지고 비밀로 거래하는 사무역(私貿易)이 성행하였다.

2. 병자수호조약과 개항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더욱 심해진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내외적으로 거센 개국의 도전을 받아 파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1801년(순조 1) 이승훈(李承薰) 등의 학살로 시작된 가톨릭교에 대한 탄압은 차츰 서구의 눈길을 조선에 쏠리게 하였다. 국내에서는 실학파(實學派)의 학풍을 계승한 19세기 전반기의 학자들이 외국과의 교역의 당위성(當爲性)과 서양 문물의 수용을 적극 주장하였다. 이것이 박규수(朴珪壽) 등의 개항론(開港論)과 자주개국론(自主開國論)이다.

1842년(헌종 8) 청(淸)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한 결과 상하이[上海] 등 5개항을 개항하고 홍콩을 할양(割讓)한다는 조건으로 강제 개국되었고, 45년에는 일본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개항함으로써 다음 개항의 표적이 조선이라는 것은 자명하게 되었다.

1846년 세 신부의 학살에 대한 문책서한(問責書翰)을 전달하기 위해 프랑스 군함 3척이 내도(來渡)한 것을 비롯하여 ‘이양선(異樣船)’으로 불리던 서구의 군함들이 계속 한반도 연해에 출몰하여 민정(民情)을 소연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1832년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소속의 영국 상선이 몽금포(夢金浦)에 와서 최초로 통상을 요구하였고, 61년(철종 12) 이후에는 러시아 ·영국 ·독일 등이 군함 또는 상선을 보내어 통상을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정(執政)으로 쇄국의 문이 더욱 굳게 닫혀진 뒤에도 열강의 통상 요구는 계속되어 1866년(고종 3)에는 통상 요구차 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號)를 소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같은 해 두 차례에 걸친 프랑스 군함의 내침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1871년 미국의 주청공사(駐淸公使) 로는 로스 제독(提督)과 함께 군함 5척을 이끌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고 양측이 크게 충돌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구미문화(歐美文化)를 접촉하여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개국을 일본에 넘기게 되었다. 그 동안 일본은 바쿠후 정권[幕府政權]이 쓰러지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새 정부가 수립되어 1869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고하는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를 파견해왔으나 조선정부는 이들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의 도서(圖書:印符)를 변경하였다는 것과 서식문구(書式文句)가 종전과 다르다는 이유로 대수대차사의 접견 및 문서의 정식 수리조차 거부하였다. 이 문서수리 문제로 1년 동안 논쟁을 거듭하고도 해결을 하지 못하자 일본 조야(朝野)의 일각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을 들먹이는 자들마저 나타났다.

일본은 1870년, 1871년에 이어 1872년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花房] 등을 파견하여 담판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므로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그대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흥선대원군 집정하의 한 ·일 교섭은 번번이 결렬되었고 감정대립만 격화되어 마침내는 하나부사가 머물던 부산 일대에서는 재류 일본인들에게 양곡과 연료의 공급을 거부하는 경제봉쇄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러던 중 1873년 11월 척왜정책(斥倭政策)의 최고책임자인 흥선대원군이 거세되고 고종이 친재(親裁)함에 따라 영의정으로 등장한 이유원(李裕元)이 흥선대원군의 대일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사태는 급전(急轉)하게 되었다.

조선 정정(政情)의 이와 같은 변화를 계기로 외교 자세를 저자세에서 고자세로 바꾼 일본은 1875년 군함 4∼5척을 조선 근해에 보내어 포격시위를 하던 중 운요호[雲揚號]는 경고포격을 한 초지진(草芝鎭)에 맹포격을 가하였다. 또한 영종진(永宗鎭)에도 포격을 가하고 육전대(陸戰隊)를 상륙시켜 방화 ·약탈 ·살육을 자행하였으며, 무수한 군기(軍器)와 막대한 재산을 약탈하여 돌아갔다. 이것이 개항 전야의 ‘운요호 사건’인데, 이러한 불법침공을 당하고도 조선정부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백성에게는 의식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운요호 사건으로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대한강경책(對韓强硬策)을 써서 1876년(고종 13) 1월 전권대신(全權大臣) 구로타 기요타카[黑田淸隆] 일행이 군함 6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여 무력으로 위협하는 가운데 조선 대표 신헌(申櫶) 일행과 국교재개를 위한 회담에 들어갔다. 76년 2월 11일에 회담을 시작하여 보름만인 2월 27일에 조인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丙子修好條約 ·江華島條約)’는 그들의 협박과 기만적 술책으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뒤이어 체결된 부록(附錄) ·무역규칙 등의 후속조치들을 근거로 해서 첫째 부산의 개항과 추후 2개 항의 개항, 개항지에서의 일본인의 토지 임차, 가옥 건축허가, 둘째 일본의 조선연해 측량, 셋째 양 국민의 무역을 관리가 간섭하거나 제한 또는 금지하지 못한다, 넷째 일본거류민의 범죄에 대해서 조선정부는 관여할 수 없다(치외법권), 다섯째 개항장에서의 일본 화폐사용, 여섯째 일본선박은 항세(港稅) 없이 항구를 출입하며 일본선박은 조선 내 어디서든지 운송업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등 일방적으로 유리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당시 조선 관리가 국제정세에 어두움을 기화로 관세조항을 조약에 삽입하지 않는 사기적 수법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한국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근대 국제법상의 통상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먼저 부산이 개항되고, 1880년과 1883년에 원산(元山)과 인천(仁川)이 각각 개항되어 서구의 근대적 상품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봉건사회의 분해(分解)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의 희생이 되고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 개항이라는 근대사적 의의는 무산(霧散)되었다.

이로부터 1882년까지 일본은 한국과의 무역에 있어 거의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여 한국에 수출한 상품의 11.7 %만이 일본제품이었고, 88.3 %는 서구상품, 특히 영국제품이 일본 상인을 거쳐 들어왔다. 당시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은 면세포(綿細布) ·일용잡품 등 서구제품과 동(銅) ·견직물 ·도기(陶器) 등 일본 토산품이었고, 한국의 대일수출품은 쌀 ·콩 ·김 ·소 ·말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일본 상인이 개항장에 들여온 사업 업종은 금융업 ·운수 ·무역 ·미곡 ·잡화 ·여숙(旅宿) ·음식업 등이었고, 상인들의 진출은 인천의 경우, 인천이 개항된 1883년 말에 400명이던 것이 1900년에는 2,650명이었다.

3. 청나라 및 구미제국에 대한 개항

강화조약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 진출에 당황한 청나라는 종주권(宗主權)을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하였다. 그들은 우선 일본의 독점적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881년 톈진[天津]에서 조 ·미 간 통상회담을 주선하여 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게 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성립시켰다. 조미조약은 강화조약과는 달리 수출입세에 관한 조항이 규정되어 있고 이로써 처음으로 구미국가와의 직접적 교역이 이루어졌다.

그 후 83년에는 영국 및 독일, 84년에는 러시아 및 이탈리아, 86년에는 프랑스, 92년에는 오스트리아, 1901년에는 벨기에, 1902년에는 덴마크 등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목포 ·군산 ·마산 ·신의주 ·용암포(龍巖浦) ·성진(城津) ·진남포(鎭南浦) ·웅기(雄基) 등이 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개항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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