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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1 (월) 09:01
분 류 사전3
ㆍ조회: 1446      
[현대] 여수순천 10.19사건 (김계유)
내가 겪은 여순 사건

김계유

1. 한 밤중의 요란한 총소리

10월 20일 오전

하룻밤에 바뀐천하 1948년 10월 20일 새벽1시,

문득 콩볶는듯한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나는 단잠을 깼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경향각지에서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자주 충돌해서 총격전을 벌이는 일이 더러 있을 때였음으로, 아마 신월리 14연대와 여수경찰이 또 한바탕 붙은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건 정말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경찰서가 훨훨 타고 있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고, 시내 여기 저기에서 때 아닌 총소리가 탕탕 울려 퍼지고 있는 것만 봐도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23세의 약관으로 여수군청에 다니면서 군자동 꼭대기에 있는 달동네 박성하영감 댁 문간채 첫째방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 둘째방에는 페인트칠을 하는 40대안팎의 임병춘이 살았다. 본채 큰방에는 복덕방에 다니는 60대의 집주인이 살았으며 그 둘째 방에는 가데기(판장에서 고기상자를 메어나르는 직업)를 하던 50대의 정재일이 살았다. 그때 우리들은 그야말로 한지붕 네식구가 오손도손 살면서 시간만 있으면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 하였다.

그때의 경찰은 정말 하늘높은줄 몰랐다. 권력을 등에 업은 그들은 연상들에 대해서도 반말 쓰기가 예사였고, 자칫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날 정도였으니,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맸다. 흔히 일제 경찰이 포악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제경찰은 법에 걸려야 간섭을 했다.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정부 치하에서 우리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면에 걸쳐서 간섭 안하는 것이 없었다. 걸핏하면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 잡았기 때문에 '민중의 몽둥이'라고 해서 민원 의 대상이 됐었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젊은 청년들은 경찰을 한번 봐주기 위해서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뛰어들어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때 내가 살고있는 집은 종고산 꼭대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여수시내의 모든 움직임이 밥상같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따라 여기 저기서 총소리만 자꾸 들려올뿐 어쩐지 전 시내가 죽은 것 같이 괴괴하기만 했다. 그때 출근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나에게 박영감이

"엊저녁에 무슨 일이 나도 크게 난 것 같은데 자네는 관공리이니까 오늘 하루 쉬는게 좋을 것 같네"

하고 말했다. 작은방에서 정씨도 나오면서

"그렇게 하소. 나도 일찍 판장에 나갔다가 군인들한테 혼쭐이 나서 쫓겨왔네"

라고 했다. 나는

"여하튼 국이 끓는지 장이 끓는지 알아보고나 올랍니다."

하고 집을 나섰다. 진남관 네거리에 내려오니 웬 수산학생 두사람이 총을 메고 섰다가 '누구엿'하면서 총대로 앞을 가로 막았다. 다행히 그 중 한사람이 안면이 있어

"자네 백초련형이 동생아닌가? 나 가사리 김계윤데 왜 그러는가"

했더니 그 학생은 머리를 긁으면서

"그러셨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금족령이 내려져 있어서 어디 움직이 면 안됩니다."

하면서 그가 들려준 어젯밤의 사건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신월리 14연대는 지난 9월 육군본부의 군장검사를 받을 때 곧 제주도로 출동할것이라는 낌새를 맡았다. 그러자 이 연대의 인사처 선임하사관이며 또 이 연대 남로당 조직책임자인 지창수상사는 이 기회에 한번 들고 일어나기로 연대 40여명의 핵심 좌익 프락치들과 물샐틈 없는 면밀한 계획을 짰다. 그리고 이북 인민군들과도 기맥을 통해, 14연대가 일어나면 이북 인민군도 38선을 뚫고 밀고 내려오기로 굳은 약속이 돼 있었다. 그리고 남한내의 다른 국방들도 14연대만 일어나면 사방에서 벌떼 같이 호응하기로 짜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어젯 밤(19일 밤8시) 상부에서 제주도에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지창수상사는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먼저 탄약고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비상나팔을 불어 3개대대의 전연대가 똘 똘뭉쳐 연대내의 반동장교 20여명을 사살하고 밤11시 30분 신월리를 출발, 비상소집으로 시내를 지키고 있던 1백 50여명의 경찰을 물리치고 오늘 새벽 3시 30분 여수경찰서를 점령한 뒤 좌익단체 청년들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오늘 새벽부터 경찰을 검은개, 장교들을 노랑개로 부르며 우익진영 요인들과 함께 잡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또 이북 인민군과 합류키 위해 김지회중위가 2개대대를 이끌고 오늘 아침 8시에 이미 순천으로 떠났다. -

는 것이었다.

나는 온몸에 전율같은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뒤 박영감이 듣고온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오늘 10시쯤 읍사무소에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들어섰는데 김영준의 고무공장에서 휜 자카다비를 세트럭 싣고 오고, 또 신월리 14연대에서 99식 소총과 카빈 소총을 산더미 같이 싣고와 민애청과 학생동맹원들을 무장시켜 경찰과 우익진영 요인들을 이잡듯이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할 일 없이 또 막걸리 파티를 벌려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말로 38선이 터졌을 까요?"

"글쎄, 저 사람이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그나저나 신문이 와야 뭘 알지"

하고 박영감이 말하니까

"이럴 때 라디오가 있으면 좋은데"

하고 임씨가 나서자

"이 사람아, 지금 여수 시내에 라디오가 몇 대나 있을 것 같애"

하고 정씨가 말해 우리는 모두 웃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 당시 라디오란 일부 특권층만의 점유물에 불과했다. 또 정씨가 말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번 사건도 이승만대통령 땜새 일어난지도 모를거여. 김구씨 말대로 남북협상인가 뭣인가를 끈덕지게해서 나라를 통일시켜 놓고 봐야 하는건데 그놈의 영감태기가 얼른 대통령 해묵을라고 5.10선거를 서두르고 반쪼가리 정부를 세워놓으니까 세상이 늘 시끄러운 거여"

하니까 임씨가 무슨 중대결심이나 하는 것 처럼 한참을 있다가

"그건 그렇다치고, 요새 경찰놈들 땜새 우리 백성덜 어디살아 가겄어요"

하고 말했다.

그 당시 누구나 경찰 이야기라면 바짝 긴장하고 들을 때였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고소동 김모씨 집에 사찰계에 다니는 박이라는 형사가 하숙을 했는데, 그 집 쥔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집 쥔이 간통죄로 일을 꾸미려 하자 그 형사놈이 좌익문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그 집 장롱에 살짝 넣어놓고 딴 형사를 시켜 가택 수색을 시켰다. 문제의 문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형사놈이 쥔을 사상가라고 경찰서에 잡아넣으려고 하니까 오히려 쥔쪽에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래서 요새는 아주 터놓고 벼개 동서격으로 세 사람이 사이좋게 (?) 산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래쪽 공동수도거리에 사는 반장이 올라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경찰서에서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비상소집령을 내려 1백 50명이 나왔는데 결국 22명이 최후까지 버티다가 5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다 도망쳤다는 것이다. 오늘 12시 현재 40여명이 잡혀 들어갔다는 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3시에 중앙동광장에서 인민대회가 있으니 한 집에 꼭 한사람씩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후환도 없애고 공기도 알아볼 겸 해서 가보기로 했다.

2. 인민대회 : 10월 20일 오후

혁명과업 6개항 결의

골목길에 나와 보니 벌써 인공기를 내건 집들이 더러 있었고, 중앙동 벽보판에는

인민 해방군 환영,
만세!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 인민에게 고함

토지는 농민에게

등등 낯설을 벽보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어제 낮까지만 해도 이따위 벽보는 바로 총살감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도 세상이 변하다니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다.

중앙동광장에는 벌써 1천여명의 군중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얼른 봐도 그 계통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지금의 해바리기 슈퍼앞에 연단이 마련돼 있고 임시로 만든 국기게양대가 서있었다. 곧이어 이용기, 이창수, 박창래, 주원석, 유목윤, 김상열, 김현수, 강대훈, 박채영, 문성휘, 김 귀영등 여수 좌익계의 거두들이 호리낭창한 키에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사람을 안내하고 들어서자 장내에서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늘의 주인공은 지창수상사였다.

곧 연장자인 이창수의 사회로 인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추도가해방의 노래를 시작으로 인공기가 서서히 올라가 하늘높이 펄럭였다.

맨처음 남로당 여수지구위원장인 이용기의 식사가 있었고, 보안서장으로 내정됐다는 유목윤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세번째로 지창수의 인사말이 있었다. 전남 벌교태생으로 일제 때 지원병 출신이였다는 그는 군중들의 열띤 환호속에 손을 흔들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등단해 능란한 말솜씨로 장내를 사로잡았다.

"친애하는 여수 인민 여러분. 저는 14연대 인민 해방군사령관 지창수입니다. 어젯밤 우리는 미리 북조선 인민군과 짜놓은 계획대로 동족상잔의 제주 파병을 거부하고 여수 인민을 해방시켰습니다. 또 우리는 북조선 인민군과 약속대로 합류하기 위해 오늘 아침 김지회동무가 2개 대대병력을 이끌고 이미 순천으로 떠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순간 국내에 있는 우리 국방군 동무들도 우리와 호응하기 위해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이승만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미 일본으로 도망가고 없습니다. 여수 인민 여러분! 이제 우리의 조국 통일은 단지 시간 문제입니다. 앞으로 우리 인민해방군은 통일의 첫 걸음이 되는 군사작전에만 힘쓰고, 후방의 혁명과업은 인민위원회와 보안서가 맡아서 잘 처리해 나갈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혁명 사업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승만일당의 주구 노릇을 하던 경찰과 친일파, 모리간상배등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땅을 파는 농부가 땅임자가 되는 진정한 해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앞으로 이 여수 땅은 우리 14연대가 조국통일의 첫 북을 울린 영광스런 인민해방의 땅으로 영원히 역사에 빛날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우뢰같은 환호와 박수가 장내를 메웠다.

이어서 박기암이 여수 인민을 대표해서 14연대 해방군에게 드리는 메세지를 채택했고, 그 다음 의장단 선출에 들어가 그들의 각본대로 이용기, 송욱,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6인으로 구두 호천을 뽑았다. 이어 전평, 민청, 여맹대표들의 짤막한 축사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6개항의 결의문 낭독이 있었는데 이용기가 1개항씩 읽으면 박수로 승인하는 식이었다.

가. 인민위원회가 여수지구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것을 인정한다.
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다.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라.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한다.
마. 친일파 모리간상배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바. 무상 몰수 무상 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 결의문이 채택되자 또 한차례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인민위원장인 이용기의 취임 인사가 있었다.

이용기! 그는 1908년생으로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시절부터 학업성적이 남달리 우수했으나 가정이 어려워 수업료를 늘 제때 못 낸 탓으로 조행성적이 깎여 우등생이 못되었다. 이에 자극 받은 그는 소년시절부터 좌경사상에 물들기 시작해 3학년 때인 1930년 3월 동교졸업생 윤경현과 같이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차별을 철폐한다.
한국인에게는 모국어를 가르쳐라.

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일으켰는데, 동조자들은 거의 퇴학처분되고 주모자인 그와 윤은 각각 징역 2년씩을 선고받았다. 그 뒤 이용기는 해방전 경성일보와 동아일보지국장을 지내면서 지방민들로부터 신사로 존경받았다.

만장의 박수 속에 등단한 그는 장내의 열띤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히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여수인민 여러분! 그동안 미제국주의자들의 압박속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해방 후 우리나라는 마땅히 연합국 측의 신탁통치를 받아 들였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민족적 양심으로 그렇게 했어야 시일이 많이 걸리더라도 통일된 조국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순전히 자기 개인의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조국을 분단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민족 반역자들도 많지만 이승만도 이완용 못지않은 민족 반역자일 것입니다. 이번에 다행히 우리 14연대 인민해방군의 영웅적인 봉기로 우리 여수는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조선 우리 인민군의 남진으로 우리 조국도 곧 해방될 것입니다. 우리 인민위원회에서는 방금 여러분께서 결의해 주신대로 우선 다음과 같은 중요과업을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첫째, 친일파 모리간상배를 비롯해 이승만 일당들이 단선단정을 추진하는데 앞장섰던 경찰과, 한민당 독립촉성회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을 반동단체로 규정하고 그중 악질 간부들을 골라 징치하되 반드시 보안서의 엄격한 조사를 거쳐 사형, 징역, 취체, 석방 등의 네등급으로 구분처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려둘 것은 사형만은 최고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심중히 처리할 것이며, 또 최소화 할 것입니다.

둘째, 친일파와 모리간상배들이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압수할 것입니다.

셋째, 적산가옥과 아무 연고도 없이 관권을 이용하여 부정하게 빼앗은 것은 재조사해서 옳은 연고자에게 되돌려줄 것입니다.

넷째, 매판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넘겨 줄것입니다.

다섯째,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극빈자대중에게 쌀을 배급할 것입니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없는 무산대중에게도 돈을 대부해 줄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또 벅찬 환호와 박수가 장내에 메아리쳤다. 그는 실지로 군부와 서종현일 당의 강경파 중간에 서서 인명피해를 없애려고 무척 애썼다는 후일담이 많이 남아있다.

끝으로 인민공화국 만세삼창이 있었고, 최후의 결전가를 끝으로 시가행진에 들어갔는데,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회를 계기로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있던 민애청, 민청, 학동, 여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원 6백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고, 무기를 들고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체포에 나서는 바람에 시내는 새로운 긴장감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여느때와 같이 전등불이 빤짝 켜지자 어디서 나는지 불꺼라...는 우렁찬 함성이 시내에 메아리 쳤다. 반면에 시내 곳곳에 있는 그들의 초소에서는 때아닌 모닥불이 훨훨 타올라 마치 어느 동화책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그들이 전등불을 끄게 한 것은 라디오를 못듣게 하기위해서 였다고 함)

3. 사무인계 10월 21일

내무과장의 소집

어제의 분위기로 봐 우리 관공리는 별탈이 없을 것 같아 집에 멍하니 있는데 오후 2시경 청 부 육삼조가 올라와 내무과장 정주양의 회장을 내밀었다. 정주양의 친필이 틀림없는 그 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고, 이미 70여명 직원들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 회 장 -

내일 오전 10시 군인민위원회에 사무인계가 있으니 전청원은 이 회장을 보는 즉시 등청하여 인계서 작성에 착수하시기 바람.

단기 4281년 10월 21일 내무과장 정주양

(이때 정주양이 군직원을 소집한 것은 군직원들을 유입시키기로 이용기와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함)

이때 군수 장성필은 사건 전날 광주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내무과장이 군수 직무를 대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회장으로 직원들을 소집한 것이었다.

군 인민위원회가 된 군청에는 무장보초만 두 사람 서 있을뿐 평소와 아무 다름이 없었다. 사무실에도 1백 20여명의 직원중 70여명 가량이 나와 있었다.

5.10선거당시 직원들 앞으로 선거보이콧 우편을 띄우고, 군청 인공기 게양사건으로 평소 주목을 받아오던 공보계 노용배, 학무계 강대학, 농회 서정태 세사람이 부지런히 설치고 다니면서, 과장급 이상은 몰라도 우리 직원들은 아무 염려 없으니 걱정들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조금 뒤 지시에 따라 줄을 서자 인민위원회 간부란 사람이 나와 좌익식으로 하는 사무인계 서식을 말해주었고, 또 이등 중사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어제와 오늘 사이에 14연대가 이룩한 전과를 설명해 주었다.

어제 아침 통근 열차 8량과 화물트럭으로 순천으로 올라간 2개대대 병력은 어제 오후 순천을 점령한 뒤 3개 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부대는 구계, 곡성, 남원을 점령하기 위해 학구로 향진 중이며, 또 한 부대는 보성, 화순,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벌교로 쳐들어 가고 있고, 또 다른 한 부대는 하동을 발판으로 경상도로 쳐들어가기 위해 광양으로 진격중

이라고 했다.

시간이 파한 후 나는 시내의 공기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 저기를 돌아다녀 보았는데 시내는 어느덧 좌익일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 같이 보였다. 어쩌다가 경찰관이 잡혀나오면 행인들은 물론 우물가의 아낙네들까지도 열띤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 역시 당초의 공포 분위기와는 달리 윗전에 물러나 차분히 구경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중앙동에서 구둣방을 하는 오길곤을 찾았는데, 그는 나와 국민학교 동창생으로 못할 말이 없는 사이였다. 우리는 소주에 오징어 다리를 씹으면서 마주 앉았다.

대관절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애?

이사람, 전국적인 현상인데 뭣이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다 돼버린 것이지.

시내의 분위기는 좀 어떤가?

올것이 왔다고 다 좋아들 하고 있어.

오늘도 고연수서장의 사찰계 악질 형사놈들이 보안서 앞에서 10명 총살됐는데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박수를 쳤다는 거야 남들이 해도 자네는 하지 말어 쌍둥이가 다 하나 물든 놈들이 하지.

우리는 웃었다.

인민위원회의 훈시 : 10월 22일

10시에 군청 회의실에 모였다. 이용기가 막료 두 사람과 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정주양내무과장과 함께 들어섰다. 우리는 긴장했다.

군직원 동무 여러분! 저는 아직 나이도 적고 또 배운 것도 아주 짧습니다. 동무들 가운데는 저보다 연세도 많으시고 또 학벌도 높은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동무 여러분! 이번에 우리 14연대가 이승만도당들이 시키는 대로 만약 제주도로 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왔겠습니까. 일제 36년 동안 그들 등살에 못견뎌 일본이나 만주등지로 유리걸식하고 다니다가 해방이 돼서 내 고향이라고 찾아온 우리 동포들을 그들은 5만명이나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선단정을 반대 한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승만 도당이 단선단정으로 조국을 영영 분단 시켜 놓자 이북에서도 할 수 없이 금년 8월달에 와서 전기를 끊어 버려 우리 남한내의 공장 기계가 안돌아 산업이 파탄됐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인 단독 정부를 세우자 금년 9월 이북도 할 수 없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 14연대 동무들이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일어 선 것입니다.

군직원 동 무여러분! 대체 미제국주주의가 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은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한데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죽고, 어떤 사람은 배가 터져 죽습니다. 또 어떤 죄를 지어도 돈있고 권세있는 사람이 지으면 죄가 안되고, 돈없고 약한 사람이 지으면 죄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런 세상은 뒤엎어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인민위원회에서는 과거 일본놈들한테 빌붙어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군 친일파와 우리 민족은 굶어죽거나 말거나 대련이나 향항으로 우리 나라 쌀을 내다파는 모리간상배들의 은행예금을 동결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권력과 결탁해서 부정하게 차지한 적산가옥을 재조사해서 정당한 연고권자에게 되돌려 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승만이 단선단정을 세우는데 앞장섰던 경찰을 비롯한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소탕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간에는 경찰을 잡으면 현장에서 처형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만 그건 낭설입니다. 앞으로 경찰은 물론 어떠한 반동분자라도 반드시 보안서에서 엄밀히 조사해서 처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군직원여러분을 그대로 포섭해서 썼으면 좋겠습니다만 대외적인 체면도 있는 것이니 여기서 호명하는 간부 몇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 동무들은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와 함께 혁명과업완수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열렬한 박수를 쳤다. 이어서 해직자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군수 장성필, 내무과장 정주양, 산업과장 한창석, 후생과장 박학래, 행정계장 윤태병, 학무계장 김주식, 공부계장 이기호, 산립계장 이문재, 농정계장 심창식, 면작계장 나은채, 농사계장 나종방 등 11명으로 기억된다.그 자리에서 해직자를 대표해 정주양이 짤막한 이임인사가 있었다.

이어서 군인이 나서서 21일 현재의 전황보고를 했는데, 14연대는 보성, 광양, 구례, 곡성, 화순, 장흥, 담양, 남원, 하동까지 완전 점령했다고 말해 우리는 또 박수를 쳤다.

우리는 행정반이란 붉은 완장을 얻어차고 사무인계서를 만들었으나 당장 인계받을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지시에 따라 과별로 취합하여 위원장실에 넘겼다. 오후부터는 조를 짜서 친일파 모리간상배들의 은행예금고를 조사하고 적산가옥 대장을 열람하기 위해 각금융기관과 관재서 및 등기소로 나갔으나 어느 기관이나 개점 휴업상태여서 조사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우왕좌왕 하다가 각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집에와 보니 낮에는 국군 정찰기가 뿌리고 갔다는 전단을 아내가 몰래 주어놨다가 내 놓았다. 국무총리겸 국방부장관 이범석명의로 된 이 삐라에는 반란군은 지도자를 사살하고 부대의 백기를 달고 투항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집단 혹은 개인적으로라도 총기, 탄약, 화약을 파괴하고 귀순하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나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뿐만아니라 그때까지 이 사태가 전국적인 현상인줄로만 알고 있던 시민들도 단순히 14연대만의 반란사건이라는 낌새를 알게 되어 상당히 동요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뒷날에야 안 이야기지만 이때 건국 후 처음으로 여순지구에 계엄령이 선포됐었다는데, 그 때는 물론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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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심적인 경찰관 석방 : 10월 23일

우익 인사 처형

아침 일직 정주양의 집에 갔으나 그는 이미 집에 없었다. 나도 남산동 친척집으로 몸을 피했다. 이날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읍인민위원회에서는 극빈자들에게 인민증을 발급해주고, 식량영단의 창고문을 열어 인민증소지자에 한해서 1인당 3홉씩의 쌀을 배급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각금융기관에서는 정상적인 일과로 돌아가 대부사무까지 취급했다고 하며, 각 사업 장에서도 종업원들에게 운영권을 넘겨주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보안서에는 20일 새벽부터 그때까지 잡아들인 경찰과 우익진영 인사들이 약 1백20명가량 되었다고 하는데, 이날 오전 10경 아군 정찰기의 엔진소리를 듣고 흥분한 나머지 그중 연창희(경찰서 후원회장, 5.10선거 출마자)와 박귀환(대동청년단장) 두 사람이 2층에서 뛰어 내리다가 보초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당황한 보안서에서는 그동안 최고 심사위원회에서 사형이 확정된 경찰관 2명과 민간인 10명의 집행여부를 놓고, 결정대로 집행을 하자는 유목윤일당의 강경파와 징역으로 감일등 하자는 이용기일파의 의견이 대립돼 집행이 유보돼 왔는데 이같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자 이날 오후 2시 보안서 앞뜰에서 이들을 처형해버렸다. 나머지는 전원 석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불의의 사고가 생겼다. 즉 이날 밤 업무타협차 의장단이 신월리군부에 가고 없는 사이에 평소에 행동대장이라고 설치고 다니던 서종현 일파가 낮의 최고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낮에 풀어준 사람들 중 평소 자기들과 감정이 안좋던 경찰관들을 도로 잡아다가 상당수 사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날밤 사살된 경찰관들이 과연 몇명이었는지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여순사건으로 죽은 경찰관의 수는 전사자를 포함해 모두 74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날 낮 소위 양심적인 경찰관이라 해서 풀려난 사람들의 이름을 다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정홍수(보안과장), 정주용(수사과장), 이해진(경사), 허종(경사), 김우본(순경), 이상배(순경), 김형순(순경), 이정호(순경), 정선도(순경) 등이었고 이 날 처형된 경찰관 2명은 박찬길(사찰계 형사), 박기남(사찰계형사) 등이었으며, 민간인 8명은 김영준(천일고무사장, 한민당위원장), 차활언(한민당 5.10선거출마), 김창업(대한노총지부장), 김수곤(한민당), 최인태(우익), 김본동(우익), 서종형(우익), 이광선(미CIC 요원) 등이었다. 그런데 이때 김영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샀으며, 김창업이 마지막 부른 봉선화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자기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원수를 사형장에서 구해내 양자를 삼은 손양원목사의 거룩한 인간애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날 이승만대통령의 대국민경고담화가 발표됐었다고 하나 그 당시는 물론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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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수 탈환작전

10월 24일 : 진압군의 참패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동도 앞바다에 해군 함정 7척이 떠있어 시민들은 아연긴장했다. 저 군함들이 아군 편이냐? 그렇지않으면 14연대 편이냐? 하는 것을 궁금해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14연대 병사들과 민간인 가담자들이 군함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또 새로운 걱정이 시민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저 군함들이 함포사격을 퍼붓고, 국군이 순천에서 밀고 내려 오면 여수 시내는 과연 어떻게 되겠느냐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이런 걱정은 곧 현실로 눈앞에 다가왔다. 이날 오후 이 사건 후 처음으로 내외신 보도진까지 거느린 진압군이 송호성전투사령관의 진두지휘 아래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소령 휘하의 주력부대가 둔덕동 철교위 산협까지 밀고 내려오다가 잠복한 14연대의 기습을 받아 송호성이 차에서 떨어져서 고막이 터지는 참패를 당하고 순천으로 퇴각해 버린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여수에 잔류하고 있던 14연대 1개 대대도 비록 국군의 1차 공격은 물리쳤다 하더라도 순천이 21일 탈환된 마당에 퇴로가 차단될 것이 겁났던지 이날 야음을 틈타서 백운산방면으로 퇴각해버렸다. (지창수도 이때 퇴각했다 함) 물론 이때 많은 민간인 가담자나 학생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고, 남은 것은 저들이 짐이 될까봐 안데리고간 피라미들 뿐이었다.

이날 또 저들의 탄약을 운반하다가 여맹원 정기덕(18)이 사망했는데 그 뒷날 떠들썩한 인민장이 있었다. 또 이날, 의장단의 한 사람인 박채영이 구여수일보를 여수인민보로 제호를 바꿔 21일자로 소급발행했는데 그들의 선전문으로 꽉 찼던 것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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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 시민들의 피난 행각

어젯밤 여수에 남아있던 14연대 주력부대가 퇴각한줄을 모르는 시민들은 오늘에야 말로 진압군이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아침부터 필사적으로 피난행각에 나섰다. 온 종일 서교 뒤의 한재와 미평가도는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마치 막혔던 봇물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전개될 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여수에 남았다. 이때 여수 인구는 8만 명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의 피난으로 시내가 텅텅 빈감이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날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일 들은 이야기지만 이날은 진압부대를 재편성 하느라고 공백이 있었다함)

어떤 기록에는 이날도 국군의 공경이 있었다고 돼 있지만 적어도 여수에 남았던 나의 기억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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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 불바다가 된 여수

오늘은 틀림없이 국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보고 아침부터 여수시내는 숨막힐 것 같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먼곳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긴장감이 온 시내를 휘덮었다. 이런 것을 두고 태풍 전야의 정적이라고 한다던가. 일분, 또 일분 시간이 갈수록 온 시내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1948년 10월 26일 오후 3시. 종고산, 예암산, 장군산, 구봉산 꼭대기에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린다고 느껴지는 순간 종고산 꼭대기의 일성포화를 신호로 전 시내가 순식간에 포연탄우가 소가 돼 버리지 않은가!

육지에서는 사방에서 콩볶는것 같은 총소리! 따아 따아 따아하고 쉴 새 없이 뿜어대는 기관총소리! 쿠웅 쿠웅 쿠웅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박격포소리! 바다에서는 아무대나 용서 없이 쏴대는 함포사격소리! 하늘에서는 귀를 째는 비행기의 굉음! 좌우간 이 순간의 여수는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연상케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 어느 때 내집에 직격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숨가쁜 순간들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어찌 살기를 바라랴. 하느님 맙소사. 그 순간 우리 여수사람들 입에서는 누구나 그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네식구들도 모두 자기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온 가족이 서로 몸을 부둥켜 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그것밖에 없었다. 죽어도 온 식구가 같이 죽자는 절박한 생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시가지를 완전포위하고 시내로 압축해 들어오던 진압군은 어느덧 집집마다 들이닥쳐 손들어하는 짤막한 외침소리와 함께 싸늘한 총구를 가슴에 들이댔다. 우리들은 그들이 내 모는대로 서국민학교로 향했다. 거리거리에는 진압군들이 총구를 겨누고 서서 이탈자를 경계하고 있다. 이탈하면 반란군으로 보고 바로 쏴버린다는 것이다.

아직 잔당소탕의 전진이 자욱한 시내로 끌려갔다. 서교까지는 약 30분 거리였다. 도중에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도소의 양 그대로였다.

이윽고 서교 정문앞에 도착했다. 중기관총구를 시내쪽으로 세워놓고 군인들이 겨누고 있는 것부터가 섬뜩했다. 교정에는 벌써 많은 시민들로 꽉차 있었다. 주위를 무장군인들이 뺑 둘러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날 이같은 현상은 동정 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진남관, 종산국민학교(중앙교), 서국민학교의 다섯군데에서 똑 같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온 서 국민학교는 진압군의 본부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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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월 26일 : 즉결처분 심사

즉결처분 심사가 시작되었다.

심사라는 것은 14연대나 지방가담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피해를 입으려다가 구출됐거나, 또 수배대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거꾸로 현장에서 가담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진영 요원들과 진압군인으로 이뤄진 5~6 명의 심사원들이 시민들을 열지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훑고 다니다가 가담자가 눈에 띄면 저 사람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끝장이었다. 바로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즉결처분(총살)을 해버렸다.

임사호천, 사람이란 누구나 죽게되면 하늘을 부른다고 했다. 그때 여수시민들은 누구나 마음 속으로 하늘을 불렀다. 그런 가운데 정문에 간혹 소탕작전에서 잡혀오는 것으로 보이는 파리한 몰골의 젊은이들이 2~3명씩 나타났다. 그들도 뒤뜰로 끌려갔고, 어김없이 기분 나쁜 총 소리가 뒤 따라와 사람들의 간장을 얼어붙게 했다.

이런 심사는 한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심사원들의 얼굴이 바뀔때마다 다시 반복된다. 이유는 심사원들이 5개 수용소를 번갈아 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사람들이 제일 겁을 먹은 것은 아무리 양민이라 할지라도 혹 운수가 나쁘면 그들의 착각이나 혹은 개인 감정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장내에는 남녀노소 그 많은 사람들이 꽉차 있으면서도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심사의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했다.

교전중인자.
총을 가진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자.
흰 지카다비를 신은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고 있는자.
머리를 짧게 깎은자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었을까, 뒤에서 약간 어술렁이는 것 같아 뒤돌아 보았다. 아! 그런데 거기에는 여수읍장 김정식과 군 내무과장 정주양이 장교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본부로 당당히 걸어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 순간 시민들은 환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기대는 헛되지 않고 나타났다. 그것은 이들이 계엄사령관 박기병소령과 담판한 결과 첫째 한집에 한 사람씩의 부녀자들을 돌려 보내 밥과 모포를 가져오게 한다. 둘째 여기와 있는 기관장이나 지방유지에 한해 두 사람이 신원을 보증하는 사람은 통행증을 끊어줘 이날밤 돌아가게 한다는 두가지였다. 그 결과 서교에 와 있는 군직원 7명이 불려나가 본부요원으로 군정반이라는 완장을 차고 이런 서무를 맡아보게 됐던 것이다.

나는 그때 상사를 잘만나 14연대 치하에서와 진압군치하에서 두번씩이나 완장을 얻어차고 모진 고생을 면한 것을 지금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그날밤 우리 군정반에서 통행증을 끊어준 사람은 23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날 밤 8시께였다. 난데없이 서시장 일각에서 불이 나 온 밤을 제멋대로 타면서 서교동 일대를 완전히 태워버렸다. 그러나 거기있는 사람치고 그 누구도 화재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 밤이 깊어갔다. 썰렁한 땅바닥에 앉아 온 밤을 나는 시민들의 고생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늦가을의 찬서리를 바로 맞으면서 뼛골까지 스며드는 모진 추위를 견딘다는 것은 일제 36년동안에도 차마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같은 동포로부터 그 같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이런 땅에 내 몸을 낳게 해준 하늘을 원망했다. 이같은 고통은 서교뿐 아니라 5개 수용소가 다 마찬가지일터 였다.

사건 진압후 우리 여수 사람들은 이런 몸 서리치는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이같은 일은 비단 우리 여수에서 만의 일은 아니고, 해방 후 제주도 4.3사건이나 6.25사변을 겪는 과정에서 군경으로부터 받는 모진 탄압 때문에 조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한때 조총련이 성한 것도 그 까닭이 아니었나 생각될 때가 있다.

한편, 이날 최후까지 여수에 남아 저항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이는 14연대 잔당 일당이 이날 오후 5시 여수를 마지막으로 떠나면서 당시 한국은행 여수지점에 있던 돈 3억 6천만원 가운 데 2천 1백만원을 싣고 갔다. 좌우간 이같은 무자비한 색출로 양산된 그들이 퇴각한 곳은 백운산이었다.

여기서 의문으로 남은 것은 이용기의 자살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14연대 잔당들을 따라가지 않고 석천사 뒤 마래산에서 혼자 소나무에 목을 맨 채로 발견 됐을까? 그때 그의 나이 40세. 이 사건에 대한 도의적 속죄때문이었을까?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그렇잖으면 입산생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가 간지 이미 40개 성상이 흘렀지만 오늘날까지도 그의 죽음은 구구한 억측을 남긴채 많은 사람들의 뇌리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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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또 여수의 심장부를 태우다 신항에 있던 마산 5연대 1대대(대대장김종원대위)가 상륙했다. 시내에서는 아직 산발적으로 소탕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서교에서는 오전 중 또 한차례의 심사가 있었다.

이날 밤 두번째의 화재가 일어났다. 밤 8시께 충무동 시민극장 근처에서 갑자기 화광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해안통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휘발유드럼에 옮겨붙었다. 그야말로 마치 로마의 대화재를 연상케 하리만치 큰 불로 번져나갔다.

화재가 휘발유드럼에 옮겨붙자 휘발 유드럼이 천지가 깨지는 것 같은 무서운 굉음을 내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아무도 끄는 사람 이 없는채 이 불은 28일 오후까지 뭉게뭉게 탔는데 이 불로 중앙동, 교동, 충무동 일대의 여수시 중심가가 완전히 잿더미가 돼버렸다.

진압군 측에서는 박격포사격으로 인해 불이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불은 연이틀 동안 똑 같은 밤 8시에 났을뿐 아니라, 그 시간에는 박격포도 쏘지 않고 또 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건물안에 숨은 잔당들의 소탕을 위해서 진압군이 일부러 불질을 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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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담자 색출과 처벌

10월 28일

종산국민학교의 비극 이날 오후 3시께에야 시민들은 풀려났다. 시간의 차이는 약간 있었어도 5개 수용소가 다 마 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된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담자의 색출과 처벌이란 무서운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즉 40세미만의 남자들은 일용 가담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종산국민학교에 따로 수용하고 살벌한 색출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여수의 하늘은 다시 검은 먹구름이 뒤덮였다. 숨막힐 것같은 무서운 공포분위기가 온 여수를 짙게 내려 누르고 있었다. 내 가족의 시체가 밖에 버려져 있어도 군경이 무서워 그대로 방치해야했고, 길거리에 혹시나 군경을 만날까봐 일부러 골목길을 택해 살금거리며 다녀야 했다. 오늘날 광주사태가 어쩌고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민주화가 많이 된 세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대로 법 질서도 잡혀 있는 상태하에서의 광주사태다. 그때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대한민국 건국 후 최초의 계엄하요, 토벌작전하의 여수였다. 완전 인권 제로지대였다.

가담자를 색출해 내기위해 수도경찰이라 부르는 주부대(주종일 경감)와 전남도경 특수대, 그리고 여수경찰 특수대가 종산국교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시민들을 팬티만 입힌 알몸으로 교정에 앉혀 놓고 근달포동안 한 사람씩 조사실로 불러들여 장작개비를 휘두르며 자백을 강요했다. 견디다 못한 피의자들은 끝내는 마치 동물의 절규 같은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다가 까무라쳐 버린다. 그러면 바케쓰로 찬물을 끼얹고 다시 고문을 반복, 억지로라도 자백을 받아내야 그만 두는 것이었다.

교정 북쪽 버드나무 밑에서는 백두산호랑이(김종원을 지칭)가 시내에서 잡아오는 가담자들을 시민들이 두려움 속에 지켜보는 가운데서 권총으로 쏴 죽이고, 일본도로 쳐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학살을 광란적으로 벌이고 있는 판이었다.

가담자들이 그해 11월 13일부터 14일까지 이틀동안 순천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의 언도받은 내용이 바로 그들의 죄상이 어떠했는가를 백일하에 폭로해 주고 있다.

재판에 회부된 인원 : 458명
양민으로 판명돼 석방된자 : 190명
사형 : 102명
20년 징역 : 75명
5년 징역 : 79명
무죄 석방 : 12명

이때 강석오작사, 박시춘작곡의 여수부르스가 흘러나와 여수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데 곧 진압군에 의해 금지돼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여수 부르스

1. 여수는 항구였다아- 철석철석 파도치는 꽃피는 항구 안개속에 기적소리 옛님을 싣고 어디로 흘러가나 어디로 흘러가나 재만 남은 이 거리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2. 여수는 항구였다아- 마도로스 꿈을 꾸는 꽃피는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오막살이 처마 끝에 부슬부슬 이슬비만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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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맺는 말

속칭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일어나 25일까지 7일동 안 14연대 치하가 되었고, 26일부터 27일까지 진압군의 소탕작전이 있었으며, 28일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달포 동안 가담자 색출과 처벌이라는 미증유의 공포시대를 만나 여수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14연대 치하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소위 반동분자로 수배된 사람들이나 떨었지 일반 시민은 별로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이 쳐들어와 소위 진압작전을 벌이면서부터는 시내의 공기가 무겁고 소름끼치는 공포 분위기로 완전히 일변했다.

우선 그 진압작전이란 것만해도 진압군이 쳐들어왔을때는 14연대 주력부대는 이미 다 퇴각해 버리고 피라미 같은 학생들 정도가 산발적으로 대항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육해공 3군이 합동작전을 벌여 여수를 불바다로 만들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클뿐이다. 그것은 당시 진압군의 일원이었던 함병선소령도 명백히 증언하고 있는 바이다.

또 한가지는 아무리 잔당들이 건물에 숨어 저항한다 할지라도 꼭 시가지에 두 차례씩이나 불을 지르지 않으면 이들을 완전 소탕할 수 없었느냐 하는 뼈아픈 의문이다.

또 있다. 진압군의 무분별한 살상행위가 보여준 야만성이다. 국군이 정부의 관리 잘못으로 반란을 일으켜 국민에게 피해를 줬다면 마땅히 그 원인을 제공케한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당시 이승만정부는 저들의 총칼앞에 마지 못해 가담한 사람들까지도 그 흑백을 가릴 겨를도 없이 마구잡이로 학살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우리 여수에는 그 당시 한창때일 50~60세 남자가 귀하다.

이것은 저 6 25때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던 보도연맹을 전국적으로 대량 학살했던 사건과 견주어 보면, 여수사건때 우리 여수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나 하는 것을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당시 알게 모르게 이같은 민족적 죄악을 범한 책임자들은 마땅히 마음속으로나마 민족천추의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사죄해야 할 것이다.

출전 : 임승수의 인터넷집 자료실-한국 근현대사-10.19사건(여순 반란사건)-내가 겪은 10.19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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