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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7 (목)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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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699      
[현대] 대한민국 정치1-정치 외교 (민족)
대한민국(정치1)

세부항목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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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1945년 8월 15일 우리 겨레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이때부터 3년 동안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 국내외적으로 기울여졌으나 불행히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국가가 세워졌다.

[정부수립과정]

일제의 패망에 따른 조국의 광복은 환희와 더불어 안타깝게도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통일된 독립운동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통치권은 공백상태가 예상되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송진우(宋鎭禹)와 여운형(呂運亨) 등의 조선의 지도자들과 치안권 또는 행정권의 이양을 협의한 끝에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포함한 행정권의 일부를 넘겼다. 여운형은 치안유지의 차원을 넘어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 이틀 뒤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약칭 建準)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당초 좌우익과 중간노선의 정파 모두를 포함하려 하였던 건준은 안재홍(安在鴻) 중심의 우파들이 탈퇴하고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은 뒤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선포한 이른바 ‘인공(人共)’에는 사전승낙도 없이 우익민족지도자들조차 망라하고 있어 국민들을 현혹시켰으며, 이는 미군이 진주하여 10월 10일 불법단체로 선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이 시기에 건준 및 조선인민공화국에 반대하는 보수 계열의 지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공산주의자의 활동에 비해서는 미약하였다.

뒤이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귀국함에 있어 미군정 당국은 ‘인공’을 부인하는 논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부인함으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한반도에는 정치세력의 분립현상이 나타났다.

그 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ㆍ영국ㆍ소련 3개 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결정된 〈코리아에 관한 의정서〉 가운데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정치세력들은 찬탁과 반탁으로 양극화되었다.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싸고 그것을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비상국민회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좌파들의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논의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12일까지, 그리고 1947년 5월 21일부터 10월 18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열리는 동안 소련점령군 당국은 북한지역에서 토지개혁, 산업시설의 국유화, 지방정권기관 조직 등 단독공산정권 수립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미군정 당국도 1946년 2월 군정청 자문기관으로 구성되었던 ‘남조선민주의원’을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개편하면서 북한지역의 동향에 대응하게 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승만의 단정(單政) 추진이 벌어지는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조차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인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거부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신탁통치 대신에 최단시일 내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47년 9월 17일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연합총회에 의제로 상정하였으며, 국제연합총회는 11월 14일 국제연합 감시하의 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이 소련 당국에 의하여 거절됨으로써 총선거는 선거감시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는 유권자 총수의 75%가 투표에 참가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제헌의회를 출범시켰다. 북한공산 당국 역시 1947년 11월 헌법제정에 착수하였으며, 1948년 4월 초안을 채택하고 그 해 9월 8일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한 뒤 이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제연합총회가 결의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국회 구성과 이 국회로 하여금 독립된 통일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결정은 실현되지 못하고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선에 즈음해서 김구(金九)ㆍ김규식(金奎植) 등 일부 지도자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호응하여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헌정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한 헌법을 채택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헌정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제1공화정은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총선거의 기초 위에서 세워졌다. 이때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협상 지지세력은 5ㆍ10선거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5ㆍ10선거 결과 제헌국회에는 적지 않은 수의 무소속 의원들이 포함되었으나 대체로 5ㆍ10선거를 추진하여 온 이승만계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약칭 한민당)계 의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단 제1공화정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곧 한민당을 배척하였으며, 그리하여 한민당은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약칭 민국당)으로 개편되면서 야당의 입장에 섰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중도파가 크게 진출한 반면에 이승만 지지파와 민국당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 달도 채 못 되어 북한의 남침에 의한 6ㆍ25전쟁이 일어났으며, 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이승만은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여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으며, 반대파는 이를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치상황에서 이승만은 1952년 여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그 헌법에 의한 대통령직선제에 따라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5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비로소 정당정치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무소속 당선의 수가 크게 줄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원내 제1당으로 등장하였고, 민국당은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으나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자유당은 곧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방식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통과시켰고, 이에 맞서 반대세력 가운데 보수세력은 민주당(民主黨)으로 결집되었고 혁신세력은 진보당(進步黨)으로 결집되어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ㆍ제4대 부통령선거에 임하였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유세 도중 급서하여 이승만은 여유 있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의 대통령후보인 조봉암(曺奉岩)이 200여만 표를 얻었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되어 자유당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제1야당인 민주당이 대도시에서는 물론, 중소도시의 많은 곳에서 승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헌저지선인 원내 3분의 1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연히 국민의 관심은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로 집중되었다. 마침내 자유당 정권은 3월 15일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실시하여 자유당의 이승만ㆍ이기붕(李起鵬)을 대통령 및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이에 저항한 4월 19일의 전국적 학생의거는 4월 26일의 시민혁명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제1공화정은 붕괴되었다.

제1공화정의 붕괴와 함께 외무장관(수석국무의원)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출범하여 의원내각제로 개헌하고,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선거와 초대 참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의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그리하여 윤보선(尹潽善)을 대통령으로 하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한 제2공화정이 1960년 8월 13일 출범하였다.

제2공화정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2년 가까이 계속된 권위주의체제의 급격한 붕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 각계각층의 욕구가 분출하여 사회는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치 역시 갖가지 분파작용을 거듭할 뿐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여기에 혁신계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 및 현상타파운동이 급격히 번져나가며 기존 질서의 안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군사정변의 주동자들은 반공을 앞세우며 제2공화정을 무너뜨린 후 군정을 실시하였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제를 통하여 새 헌법을 확정지었다.

1963년 1월 1일자로 민간인의 정치활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5ㆍ16세력은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으로, 반대세력은 민정당(民政黨) 등으로 결집되었다.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보 박정희(朴正熙)는 민정당의 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르고 당선되었고,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제1당이 되었다. 민정당과 민주당 등은 원내에서 삼민회(三民會)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제3공화정이 1963년 12월 17일 출범하였다.

제3공화정은 ‘조국근대화’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한일국교정상화와 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실현하였다. 제3공화정은 1967년 실시된 첫번째 국민의 심판을 통과하였는데, 그 해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新民黨)으로 결집한 단일야당의 후보 윤보선을 여유 있는 표차로 물리쳤으며, 6월 8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여전히 제1당의 자리를 지켰다.

1969년 박정희는 자신의 3선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할 수 있었고, 집권여당의 이점과 여러 형태의 부정을 통하여 신민당 후보 김대중(金大中)을 힘겹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어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박정희의 공화당은 고전을 면하지 못하여, 비록 제1당의 지위를 굳히기는 하였으나 신민당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국제적으로는 강대국들 사이에 긴장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물결이 우리 나라에도 밀려와 남북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박정희는 통일에 대비한다는 명분 아래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3공화정을 유신체제(維新體制), 곧 제4공화정으로 대체시켰다. 이 체제 아래 그는 1972년 12월 23일 새 헌법이 마련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의석의 3분의 1은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추인하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의원으로 채워졌고, 나머지 3분의 2는 1선거구에서 2명씩 당선되는 지역구 의원들로 채워졌다. 지역구 선거에서 공화당이 제1당을 차지하여 원내는 공화당과 유정회의 여권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원내의 세력분포와는 관계없이 원외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범국민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갔다. 정부는 해외망명투쟁의 구심점이던 김대중의 납치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이와 같은 사태에 대처하였으나, 반유신운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반대 속에서 박정희는 1978년 7월 4일에 실시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공화당은 신민당보다 1.1% 뒤진 득표밖에 얻지 못했다.

사실상 승리하였다고 확신한 신민당은 정부에 대한 보다 선명한 투쟁을 내건 김영삼(金泳三)을 새 총재로 선출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공세를 가중시켰다. 정부와 여당은 사법적인 조처를 통하여 그의 의원직을 박탈하였다.

이 같은 상황은 곧바로 부마사태(釜馬事態)를 낳았으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집권층은 분열되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박정희를 암살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유신체제는 사실상 끝을 맺었다.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권력의 중추는 12월 12일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全斗煥) 중심의 신군부로 넘어갔다. 신군부는 곧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반대세력은 최규하체제를 유신체제의 연장으로 보고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공화당 총재 김종필(金鍾泌), 신민당 총재 김영삼, 그리고 반유신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김대중 등 이른바 3김(三金)이 각각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실질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최규하 정부는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김대중과 그 측근 지도자들 및 재야지도자들을 구속하였다. 이에 대한 항쟁이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생하였으며, 마침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신군부는 이 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이른바 ‘광주사태’라는 우리 나라 역사상 커다란 비극을 낳았다.

전국적인 계엄하에서 정국불안이 점차 수습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11대 대통령에 전두환을 선출하였다. 이 정부 아래 새 헌법이 확정되었고, 1981년 2월 25일 그는 새 헌법이 마련한 선거인단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제5공화정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정의 출범과 더불어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제1당으로, 민주한국당(民主韓國黨)이 제1야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제2야당으로 등장하였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정당은 제1당의 위치를 굳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명야당의 깃발 아래 출발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면서 민한당을 흡수하여 국회사상 최대의 야당이 되었다. 2ㆍ12총선과 더불어 헌법의 개정 여부가 국내정치의 쟁점이 되었다.

야당은 직선대통령중심제로의 개헌을 부르짖었고, 여당은 처음에는 호헌을 주장하다가 1986년 이후 의원내각제 개헌으로 돌아섰으며, 결국에는 1987년 6월항쟁에 압도되어 6월 29일 ‘민주화선언(民主化宣言)’을 통하여 직선대통령중심제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아홉 번째가 되는 새 헌법은 다시 직선대통령제로 돌아섰다. 같은 해 12월 16일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노태우(盧泰愚)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가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6공화정이 출범하였다.

제6공화정이 출범한 직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약칭 민정당)은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는 못하였으며, 김대중의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 약칭 평민당)이 제2당으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약칭 민주당)이 제3당으로,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이 제4당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 3월 민정당은 통일민주당 및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여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으로 발족하였으나 1992년에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승리하여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다.

그 뒤 1995년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이어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집권여당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는 상당한 강세를 보였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제휴를 성사시킴으로써 마침내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불렀다. 이 정부는 대한민국 최초의 공동정권이다. 현재 제1당은 이회창(李會昌)이 이끄는 한나라당으로 이 당은 신한국당의 후신이다.

[정치제도]

앞에서 보았듯이 40년 헌정사에서 잦은 개헌을 경험한 결과 대한민국의 정치제도 역시 자주 바뀌어 왔다. 제1공화정 때는 대체로 대통령제를 골격으로 하되 의원내각제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가미하였다. 국무총리를 둔 점, 국회에 국무위원불신임권을 준 점 등이 그 예들이다.

한편, 제1차개헌과 제2차개헌에서 모두 국회의 민의원ㆍ참의원 양원제가 규정되었으나 정부는 참의원선거를 끝내 실시하지 않았다. 〈지방자치법〉은 1949년에 공포되었으나 그 첫 번째 지방의회선거는 1952년 4, 5월에 실시되었다.

제2공화정은 의원내각제 헌법을 채택하였다. 대통령은 상징적이며 의전적인 국가원수에 지나지 않았고, 행정권은 내각인 국무원에 소속되어 국무총리가 행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었고, 민의원은 내각을 불신임할 수 있는 반면 국무원은 민의원을 해산할 수 없었다.

경찰의 중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공안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사정위원회를 폐지하는 대신에 감찰위원회를 부활시켰다. 한편, 각 부에 사무차관과 정무차관을 두었다. 지방자치 행정제도는 1960년 11월부터 바뀌어, 지방자치단체의 장인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및 시ㆍ읍ㆍ면ㆍ동ㆍ이장을 주민의 직선으로 뽑게 하였다.

제2공화정의 붕괴와 더불어 군사쿠데타 주도자들은 군정의 실질적 중추기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였다. 이 기관은 입법권을 행사하였으며, 사실상 행정부와 사법부를 지휘하였다. 군정기간 동안 국회와 지방의회는 모두 해산되었고, 정당은 1962년 12월 31일까지 해산되었다.
제3공화정은 고전적 삼권분립원칙에 입각한 대통령제이었다. 국민 직선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면서 행정부 수반이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였다. 대통령제이면서도 제1공화정 때와는 달리 부통령제를 두지 않았다.

단원제인 국회는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해서도 불신임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정부 역시 국회를 해산할 수 없었다.

중앙행정관청으로 감사원과 중앙정보부가 신설되었고, 자문기관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경제과학심의회의가 신설되었으며, 국무총리에 직접 소속되는 중앙행정기관으로 경제기획원이 신설되어 그 장관이 부총리를 겸하였다. 1969년 국토통일원이 신설되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으로 서울특별시장과 부산직할시장, 그리고 도지사와 시장 및 군수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었고, 지방의회는 설치되지 않았다.

대법원장은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였다. 대법원판사는 대법원장이 법관추천회의의 동의를 얻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일반법관은 대법원판사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였다.

제4공화정의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켜 대통령에게 입법부와 행정부 및 사법부의 총조정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고 국회를 해산시킬 수 있으며 비상사태에 임하여 긴급조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새 헌법기관으로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하여 간선되었다.

국회는 단원제이며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다. 의원의 3분의 2는 중선거구제 아래 1구 2인씩 선출되며, 3분의 1은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였다. 국회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불신임을 의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헌법 이전의 헌법에서 국회가 가졌던 국정감사권은 폐지되었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및 일반법관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졌다. 유신헌법 이전의 헌법에서 규정된 법관추천회의는 폐지되었다. 전반적으로 입법부와 사법부의 지위는 격하되었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는 여전히 유보되었으며 지방행정제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중앙행정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공업진흥청과 특허청 및 항만청이 신설되고 농림부가 농수산부로, 내무부 치안국이 내무부 치안본부로 각각 개편되었다.

제5공화정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의 요소를 가미하였다.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속하고, 대통령은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선되며 임기는 7년으로 연장되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가졌다.

국회는 단원제로서 의원의 3분의 2는 중선거구제 아래 1구 2인씩 선출되고 3분의 1은 전국구로 선출하게 되었으며, 임기는 4년으로 되었다. 국회는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해임을 의결할 수 있었으며, 국정조사권을 가졌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및 일반법관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졌다. 헌법위원회가 일종의 헌법심사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한편, 대통령의 통일정책자문기관으로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가 헌법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제5공화정의 행정제도는 제3ㆍ4공화정의 행정제도에 비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뜻에서 1981년 10월에 단행된 행정개혁을 통하여 행정기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한편, 정부 부서로 1982년 체육부가 신설되었고, 1981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1985년 원호처가 국가보훈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방자치제도의 실시는 여전히 유보되었다.

제6공화정에서는 중앙행정기구에 변화가 있었다. 그 대표적 예로 문교부가 교육부로, 체육부가 체육청소년부로,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국토통일원이 통일원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건설부와 교통부가 건설교통부로, 상공부와 동력자원부가 통상산업부로 각각 통폐합되었으며, 보건사회부는 보건복지부로 개칭되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개편이 이루어졌다. 외무부가 통상산업부의 통상기능을 흡수하여 외교통상부로, 문화부가 체육청소년부 및 공보처를 흡수하여 문화관광부로, 내무부와 총무처가 행정자치부로 각각 통폐합되었으며, 통상산업부는 산업자원부로 바뀌었고,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부로 승격되었다. 기존의 정무 제1장관실이 폐지되었고, 여성문제를 전담하였던 정무 제2장관실은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 바뀌었다.

한편, 공무원제도는 제1공화정의 수립과 더불어 근대적 의미의 민주행정제도가 〈헌법〉과 〈정부조직법〉 및 〈국가공무원법〉에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무원제도가 법적으로 확립되었다. 공무원제도의 발전과정은 국가공무원제도와 지방공무원제도의 두 갈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국가공무원제도는 1949년 8월 제정된 〈국가공무원법〉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 법은 공무원이 주권을 가진 국민의 수임자로서 국민의 봉사자요 국민의 대표자임을 명백히 규정하였다.

〈국가공무원법〉은 그 뒤 몇 차례 개정되었다. 최근의 개정의 한 예는 유신 이후인 1973년 2월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정을 통하여 민주적 공무원제도와 직업공무원제도가 확립되어 왔다. 국가공무원의 중앙인사기관으로 현재 행정자치부와 소청심사위원회 및 중앙징계위원회가 있다.

국가공무원의 임용은 신규임용 또는 승진임용에 의하며, 모두 성적주의에 따른다. 국가공무원의 교육 및 훈련기관으로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있다.

지방공무원에 관한 최초의 법적 근거는 1950년 2월에 제정된 〈지방공무원령〉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가공무원법〉에 비하여 불합리성이 적지 않았으므로, 1963년 11월 〈지방공무원법〉이 제정되어 지방공무원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외교

[정책변천]

대한민국은 제1공화정 수립과 동시에 자신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간주하고 북한의 공산정권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외교는 줄곧 이 입장을 국제사회에 뿌리내리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왔다.

대한민국은 우선 1948년 12월 12일 제3차 UN총회에서 승인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뒤따라 1949년 1월 1일 미국이, 1월 4일 중화민국이, 1월 18일 영국이, 2월 5일 프랑스가, 그리고 3월 3일 필리핀이 각각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은 계속되어 1950년 6ㆍ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의 수는 30개 국에 가까웠다. 이에 비하여 북한을 승인한 나라는 소련권에 국한되었다.

국제사회에서의 승인을 넓혀가면서, 제1공화정은 그 초기에 태평양동맹체의 발족을 추진하였다. 주로 중화민국 및 필리핀과 손을 잡고 반공의 성격을 가지는 지역공동체를 출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미국의 냉담한 반응으로 좌절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남침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은 미국과 국제연합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다. 3년간의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매듭지어진 뒤 한반도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1954년 제네바에서 열렸다.

남북한이 함께 참석한 이 회담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은 14개 항목의 제의를 하였다. 그 핵심적 내용은 대한민국 주권 아래 남북한을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제네바회담은 자유진영의 입장과 공산진영의 입장이 대립되어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6ㆍ25전쟁과 제네바회담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친미ㆍ친서방ㆍ친UN외교는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에, 공산권에 대해서는 물론 중립국가들에 대해서조차 반공적 입장에서 철저히 반대하는 노선을 걸었다.

1960년 4ㆍ19혁명으로 제1공화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정부는 제1공화정의 반공적 외교노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노선은 한계에 부닥쳤다.

왜냐하면, 1950년대 후반 이후 독립을 얻어 UN에 가입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은 반서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친미적 대한민국의 외교노선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중립국들은 1961년 봄 제15차 UN총회에서 대한민국대표만을 초청하던 종래의 결정에 반대하여 남북한대표를 동시에 초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미국은 북한이 UN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한다면 남ㆍ북한 동시초청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고, 그리하여 이 수정안은 통과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군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가들은 물론 중립국가들, 이른바 제3세계에 외교적으로 접근해 갔다. 이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어 대한민국의 외교관계는 넓어져 갔다.

군정을 계승한 제3공화정은 우선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하였다. 국내에서의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관계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뒤 제3공화정은 베트남전에 깊이 개입하였는데, 1964년 9월 이동육군병원팀과 태권도팀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 1973년 사이에 국군을 보내어 전투에 참가시켰다. 베트남파병은 한미간의 유대를 크게 강화시켰으나 친공적 중립국가들로부터는 상당한 반발을 받았다.

제3공화정은 이어 아시아ㆍ태평양이사회(ASPAC)의 창설에 성공하였다. 1966년 6월 일본과 필리핀을 비롯한 8개 국 각료가 서울회의를 열고 이 지역 최초의 지역협력기구를 발족시킨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이 기구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1969년 미국에 닉슨(Nixon,R.) 행정부가 들어서고,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철수와 남한에서의 미군감축을 포함한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의무감소정책인 ‘닉슨 독트린’을 채택한 뒤 한미관계는 긴장을 겪었다.

특히, 미국이 공산권과의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하여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권고한 것은 우리 정부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곧 국제질서의 변화를 받아들여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여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73년부터 남북한관계는 다시 교착되고 때로는 긴장의 고조를 겪었다.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국제사회에 대하여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 또는 ‘정부’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리하여 이제까지 북한을 승인하지 않던 서방국가들 중의 일부에서 북한을 승인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대한민국이 건국 초부터 지켜 온 이른바 할슈타인원칙, 즉 ‘대한민국은 북한을 승인하는 나라와 단교한다.’는 원칙은 위협받게 되었다. 여기서 제4공화정은 1973년 6월 23일 ‘외교에 관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사실상 할슈타인원칙을 버렸고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정책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소련 및 동유럽권과의 관계가 조금씩 좋아졌다.

제4공화정은 1976년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미국에 영향력을 쌓기 위한 로비활동이 불법적이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그것이 조사받게 되면서 이른바 ‘코리아게이트’라는 추문으로 악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77년에 출범한 카터(Carter,J.) 행정부는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추진하고, 제4공화정의 유신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한미관계를 더욱 긴장시켰다. 이 시기에는 중앙정보부가 1973년에 김대중을 일본에서 국내로 납치하여 온 사건을 계기로 한일관계도 긴장을 겪었다.

한편 제4공화정시대에 들어와 한반도문제는 더욱 ‘비(非)UN화’되었다. 즉, 국제연합과 국제사회는 한반도문제가 국제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북대화를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1975년의 국제연합총회에서는 한반도문제를 놓고 서방측 안과 공산측 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일마저 있었다.

제5공화정의 수립 이후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는 정부 대 정부의 차원에서 1970년대 후반의 ‘불편’을 씻고 다시 가까워졌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현상은 공산권과의 관계개선이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비정부(非政府)의 차원에서 크게 좋아졌다. 소련과의 관계는 1983년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기격추사건이 빚었던 긴장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잠재성이 점차 현재화의 전향성을 보였다.

제6공화정에 들어서자 대한민국은 북방정책을 활발히 전개하게 되었다.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ㆍ7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대 공산권 외교의 폭을 넓히는 조처를 취하였으며 실제로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소련ㆍ중국 등과 인적ㆍ물적 왕래가 활발하게 되고 1988년 12월에 헝가리와는 정식 국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공산권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공산국가들과의 수교는 빨라졌다. 1990년에는 소련과, 1992년에는 중국과 각각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1991년에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실현되었다.

[외교현황]

1989년 3월까지 대한민국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의 수는 모두 131개 국이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세계 191개 국 가운데 183개 국과 수교를 맺고 있다.

미수교국은 북한을 제외한 쿠바ㆍ시리아ㆍ아프가니스탄ㆍ마케도니아ㆍ산마리노ㆍ모나코 등이다. 이 가운데 남북한 동시수교국은 1989년에는 70개 국이었으나 1999년에는 131개 국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대한민국은 1989년에 91개 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으며 35개 소에 총영사관, 3개 소에 대표부를 두고 있어 96개 국에 129개의 공관을 설치하고 있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91개 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있고 30개 소에 총영사관, 4개 소에 대표부를 두고 있어 91개 국에 125개의 공관을 설치하고 있다.

1989년보다 수교국이 늘어난 데 비하여 공관 숫자가 줄어든 것은 1998년 9월에 우루과이ㆍ유고ㆍ카메룬ㆍ잠비아에 있던 총영사관을 철수하고 벨기에에 있던 대사관과 유럽연합대표부를 통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북한도 1989년에는 101개 국과 외교관계 맺고, 72개 국에 상주공관을 두고 있었으나 1999년 4월 현재 135개 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고, 52개 국에 상주공관을 두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표 1〕과 같다.

[교민정책]

1987년의 해외교포 수는 401만5000명으로 추계되었다. 중국이 176만 명으로 가장 많고 북미지역 107만 명, 일본 67만 명, 소련 40만 명, 중남미 8만1000명, 유럽 1만6000명, 동남아시아 1만5000명, 중동지역 1,000명 순으로 99개 국에서 살고 있었으며, 1995년 1월 현재 해외교포 수는 494만1324명으로 추계되고 있다.

지역별로 보면 중국이 192만6017명으로 가장 많고, 북ㆍ남미지역이 181만7188명, 일본 65만9323명, 독립국가연합 46만1576명, 아주지역 4만5661명, 유럽 2만7967명, 아프리카지역 1,328명, 중동지역 150명 순이고, 기타 홍콩ㆍ대만 등에 2,114명이 99개 국과 2개 특수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외 장기 체류자를 포함하면 500만 명을 훨씬 상회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해외교포들은 이민동기나 생활양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정부의 교민대책은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수립된 교민대책은 재일교포문제로서, 제2차세계대전 후 일본 내의 피압박ㆍ피차별 소수민족인 재일교포들이 좌익계로 기울어진 데 대응하여 민족진영의 교포단체로 재일거류민단을 조직하여 민단계 교포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재일교포들은 민단계, 조총련계, 그리고 일본에 귀화한 성화회(成和會) 등 3개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대한민국의 국력신장과 더불어 재일교포 모국방문사업 등을 통하여 점차 민단계의 우세가 굳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체결 이후 일본사회 내의 갖가지 차별대우로 인한 재일교포들의 생활환경조건 개선, 2ㆍ3세들의 처우 개선 등에 중점을 두고 재일교포대책을 펼쳐 왔다.

북미지역에서는 1970년대 이후 급증한 교포들에 대하여 모국과의 연계관계를 심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교포사회 내의 공동체 활동 및 모국방문을 적극 지원해 왔다. 중남미로의 이주는 1962년의 〈해외이주법〉 실시에 따라 인구정책 차원에서 추진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주대상지역의 열악한 환경조건 및 이주자들의 현지적응태세 미비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초에는 현지 농촌개발이 이주목표였으나 오늘날 중남미 이주민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상공업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및 중동지역에는 한국인들의 해외진출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이주민들이 생겼으며, 대체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

위의 여러 지역과 달리 중국ㆍ소련 등 공산권지역의 교포들에 대해서는 그 동안 북한측이 접근시도를 해왔지만 교포들의 거부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 1988년의 서울올림픽대회 이후로는 대한민국의 민간교류 등 접근 움직임이 현지교포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 점차 정책접근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들 공산권 교포문제에 있어 고령의 제1세대 교포들이 모국귀환을 희망하고 있어 교민대책의 긴급한 당면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사할린 교포문제는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다.

<김학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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