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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6-19 (화) 16:51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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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348      
[조선] 4140. 다산초당

4140. 다산초당(茶山草堂)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다산 정약용은 실학의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과학기술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정조의 후원을 받아 규장각에 들어가 학자 관리로 뜻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보수 세력인 벽파가 시파 세력을 천주교도를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목으로 학살하면서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정약용도 1801년의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경북 영일을 거쳐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1808년 봄 그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귤림처사 윤단의 정자였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유배가 끝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당시 해남 윤씨 집안에는 고산과 공재 이후 수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다산은 이 책들을 읽으면서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기와집으로 변했지만 다산은 이 곳에 손수 연못과 차를 달이던 뜰 앞의 바위, 샘, 그리고 초당 뒤의 바위에 새긴 '정석(丁石)'은 그의 자취를 뚜렷하게 남겼다. 이곳에는 차나무가 자생하여 동네가 다산동인데, 정약용은 이곳에서 나온 차를 좋아하여 자신의 호인 다산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다산의 유배가 풀린 후에 그의 제자들은 해마다 다산에게 햇차를 보내기 위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다산초당이란 현판은 1957년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글자의 크기와 구성이 어수선하다. 그러나 동쪽의 암자 곧 동암에 걸린 추사체의 보정산방(寶丁山房; 보배로운 정다산의 산에 있는 집)이란 현판은 추사체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추사는 다산보다 24세 연하로 다산에게 경학의 가르침을 청하는 정중한 서한이 있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옆에는 다산동암(茶山東菴)이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있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는데, 제자들은 서암에 머무르고 다산은 주로 동암에 거처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불후의 명저를 완성한 장소이다. 한 마디로 다산초당은 다산학을 낳은 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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