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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6-05 (화) 07:36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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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231      
[삼국] 0830. 국내성터

0830. 국내성터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

국내성은 고구려의 두번째 도성이다.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으나, 현재는 통구에 남아있는 통구성으로 보고 있다. 이 성은 압록강 북쪽의 통구분지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몇 차례의 조사 결과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으나,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평면은 방형(方形)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그리고 성문은 여섯 곳이 있고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지(角樓址)가 있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최근의 시굴(試掘)을 통하여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 성은 그 규모로 미루어 왕궁과 관청이 있었던 거성(居城) 내지 도성으로 추측되며, 유사시에는 국왕과 백성들이 북쪽 2.5km 지점에 위치한 산성자(山城子) 산성으로 피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이 성을 답사한 건축사가 신영훈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성벽을 매우 정교하게 쌓아 올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에도 개발 붐이 일어 성터 주위에 아파트를 건축하는 등 원형이 많이 파손되고 있다고 한다.

국내성과 역시 수도로 전해지는 환도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는데, 그 중 국내성과 환도성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최근 중국 학자들은 이 산성자 산성을 환도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최초의 수도인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은 A.D. 3년(유리왕 22)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427년(장수왕 15)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국내성은 고구려의 도성이었으며, 그 뒤에도 고구려의 3경의 하나였다. 평양 천도 이후에도 국내성은 고구려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 였음은 고구려 최고 지배층의 분묘로 여겨지는 벽화고분이 평양과 통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통구 주변에는 광개토왕비를 비롯한 고구려 유적·유물들이 산재하여 고구려시대 국내성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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