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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06 (일)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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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849      
[고려] 이자겸 (민족)
이자겸(李資謙)

?∼1126(인종 4). 고려 중기의 권신. 본관은 경원(慶源 : 仁州, 지금의 仁川).

호부낭중(戶部郎中)을 지낸 호(顥)의 아들이다. 경원이씨는 나말 여초의 인주지방 호족세력으로서, 이허겸(李許謙)의 외손녀가 현종의 비로 책봉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귀족가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기는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 때부터였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문벌귀족으로 성장해 이자겸의 누이 중 장경궁주(長慶宮主)는 순종의 비가 되었고, 부인은 해주최씨(海州崔氏)로 수상을 역임한 사추(思諏)의 딸이다. 이와 같은 가문을 배경으로 그는 음서(蔭敍)로 진출, 초직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다.

이후 그의 둘째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부터는 더욱 빠른 속도로 출세하게 되었다. 그 뒤 참지정사(參知政事)·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개부의동삼사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司徒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진급했으며, 곧 이어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작됨과 동시에 여러 아들들도 승질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이와 같이 예종 때부터 권력의 핵심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 정계를 쥐고 흔들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국왕인 예종이 귀족관료 전체의 대표로서 그들을 균형 있게 조절해 어느 한쪽의 독주를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안인(韓安仁) 일파가 세력을 쥐고 이자겸 일파와 대립, 암투가 벌어졌던 상황이 그와 같은 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고 그의 외손 인종이 어린 나이로 이자겸의 보필에 힘입어 왕위에 오르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새 왕이 등극한 뒤 우선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守太師中書令邵城侯)에 책봉되어 인신(人臣)으로서는 최고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12월에는 반대파 제거에 나서 왕의 작은아버지인 대방공 보(帶方公喇)와 한안인·문공인(文公仁) 등이 역모를 꾀했다며 주모자와 그 일당 50여 명을 살해 또는 유배하였다.

이에 왕의 극진한 우대를 받으면서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에 제수되고 관부(官府)를 열어 요속(僚屬)을 두기에 이르며,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진다. 한편 여러 아들들의 관직도 승급되면서 그의 일문은 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고려사회는 종래와 달리 귀족관료 내부간의 균형이 깨어졌고 왕권의 상대적인 약화까지 초래하였다. 1123년(인종 1)에 송나라 사신을 따라왔던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이라는 견문록에서 이자겸을 “풍채는 맑고 위의는 온화하며 어질고 착한 이들을 반겼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 때가 이자겸이 한창 득세하고 있던 시기인 만큼 서긍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에게서 군자풍의 태도와 행동의 일면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물과 권력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고려사≫ 이자겸전에 의하면, 그는 “남의 토전(土田)을 강탈하고, 복례(僕隷)들을 풀어놓아 마차와 말을 약탈해 자기의 물건을 날랐다.”고 하며, 권세를 남용하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집에는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려도경≫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경원이씨 이외의 성씨에서 왕비가 나오면 권세와 총애가 분산될까 염려해 왕에게 강청(强請), 셋째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얼마 뒤에는 다시 넷째딸을 왕비로 들여보냈다.

어쨌든 그는 강력한 정치권력과 경제적 토대 및 당시 또 하나의 큰 세력이던 사원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정계를 마음대로 움직였을 뿐더러, 왕권에까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한때 사사로이 자기 부(府)의 주부(注簿)인 소세청(蘇世淸)을 송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스스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지군국사가 되고자 왕이 자기 집에 와서 그 조칙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날짜까지 정하였다. 지군국사란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인신은 대유(帶有)할 수 없는 직함이었다.

이 같은 전횡 때문에 왕도 그를 몹시 꺼려하였다. 이를 안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과 공모해 왕에게 아뢰고,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과 함께 이자겸과 그의 일당인 척준경(拓俊京) 등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약속된 날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우선 척준경의 동생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과 아들인 내시 척순(拓純) 등을 살해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이자겸의 난’의 발단이었다.

변란을 알게 된 이자겸과 척준경은 당여(黨與)와 병졸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한 뒤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놀란 왕은 글을 지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부(兩府)의 의론을 겁내었고, 한편으로는 재종형제간으로 그의 발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수(李需)와 귀족관료인 김부식 등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그 뒤 그는 왕을 자기 집으로 이어(移御)시키고 국사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마침 이 때 군신관계를 요구해 온 금나라에 대해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사금책(事金策)을 결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인종을 여러 차례 독살하려 하였다. 그 때마다 왕비의 기지로 왕은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종의 밀명을 받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를 떼어놓는 데 성공, 척준경에 의해 거세된 이자겸은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高麗貴族社會의 諸矛盾(金潤坤,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3), 李資謙의 勢力基盤에 對하여(金潤坤, 大丘史學 10, 1976), 高麗時代土姓硏究 上(李樹健, 亞細亞學報 12, 1976), 高麗慶源李氏家門의 展開過程(李萬烈, 韓國學報 21, 1980), 李子淵とその家系(藤田亮策, 靑丘學叢 13·15, 1933·1934).

<박용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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