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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11-18 (일)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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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70      
[조선] 조준의 졸기 (태종실록)
조준의 졸기 趙浚 1346∼1405 (충목왕2∼태종5)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이 죽었다. 준(浚)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호(號)는 우재( 齋)인데, 평양부(平壤府)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인규(仁規)인데, 고려(高麗)에 공(功)이 있어 벼슬이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다. 아버지는 덕유(德裕)인데, 판도 판서(版圖判書)이다.

준(浚)은 가계(家系)가 귀현(貴顯)하였으나, 조금도 귀공자(貴公子)의 습관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충효(忠孝)로써 자허(自許)하였다. 어머니 오씨(吳氏)가 일찍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의 가갈(呵喝)을 보고 탄식하기를, “내 아들이 비록 많으나, 한 사람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하니, 준(浚)이 곧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맹세하고 분발해 배움에 힘썼다. 홍무(洪武) 신해년(1371, 공민왕 20)에 공민왕(恭愍王)이 수덕궁(壽德宮)에 있을 적에, 준(浚)이 책을 끼고 궁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왕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곧 보마배 행수(步馬陪行首)에 보(補)하고 매우 사랑하였다.

갑인년(1374, 공민왕 23)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병진년(1376, 우왕 2)에 좌·우위 호군 겸 통례문 부사(左右衛護軍兼通禮門副使)에 임명되었다가, 뽑혀서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민(吏民)들이 두려워하고 사모하여 사납고 간사한 무리가 없어졌다. 순행하다가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시귀(詩句)를 남겼는데,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기었다.

“동쪽 나라 바다를 깨끗이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여기 사는 백성은 눈을 씻고 그 때를 기다리게나”

여러 번 옮겨서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이때에 조정의 정치가 날로 어지럽고, 왜구(倭寇)가 가득하여, 장수(將帥)들이 두려워서 위축(萎縮)되어 있었는데, 임술년(1382, 우왕 8) 6월에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이 준(浚)을 들어 써서 경상도(慶尙道) 감군(監軍)을 시키니, 준(浚)이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두류(逗 )한 죄를 문책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참(斬)하여 장수들에게 조리를 돌렸으므로, 제장(諸將)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들었다.

계해년(1383, 우왕 9)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으며, 무진년(1388, 우왕 14) 여름에 최영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칠 때에,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대의(大義)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쌓인 폐단을 크게 개혁하여 모든 정치를 일신(一新)하려고 하였는데, 준(浚)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으시고, <준을> 불러서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발탁(拔擢)하시고,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하니, 준(浚)이 감격하여 분발(奮發)하기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경기(經紀)를 바로잡고,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없애어,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탕화(湯火) 가운데서 나와 즐겁게 사는 마음을 품게 한 것은 준(浚)의 힘이 퍽 많았다. 위주(僞主) 신우(辛禑)가 강화(江華)로 쫓겨날 적에 태상왕이 왕씨(王氏)를 세우기를 의논하였는데, 수상(首相) 조민수(曹敏修)가 본래부터 이인임(李仁任)의 편당(偏黨)으로서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이에 준(浚)이 맨먼저 민수(敏修)의 간사함을 논하여 쫓고, 이어서 인임(仁任)의 죄를 논하여 그 시호(諡號)와 뇌문( 文)을 깎아 없애기를 청하고, 또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기를 청하니, 세가(世家)와 거실(巨室)에서 원망과 비방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준(浚)이 고집하고 논쟁하기에 더욱 힘쓰니, 태상왕이 준(浚)과 뜻이 맞아 마침내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시행하였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기사년(1389, 창왕 1) 겨울에 창(昌)이 친조(親朝)하기를 청하니, 예부(禮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붙여서 이성(異姓)이 왕이 된 것을 책(責)하였는데, 창(昌)의 외조(外祖) 이임(李琳)이 수상(首相)이 되어 비밀에 붙이고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이 본래부터 왕씨(王氏)의 뒤가 끊긴 것을 분하게 여기고, 마침내 태상왕의 계책(計策)에 찬성하여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 등 일곱 사람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맞아서 세웠다.

문하 평리(門下評理)에 옮기고 책훈(策勳)하여 조선군 충의군(朝鮮郡忠義君)을 봉하였다. 세상에서 이를 ‘구공신(九功臣)’이라 이른다. 경오년(1390, 공양왕 2)) 겨울에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신미년(1391, 공양왕 3) 6월에 중국에 들어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는데, 길[道]이 북평부(北平府)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연저(燕邸)에 있을 때인데, <태종 황제가> 마음을 기울여 <준을> 대접하였다. 준(浚)이 물러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王)이 큰 뜻이 있으니 아마 외번(外藩)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정몽주가 우상(右相)으로 있었는데, 태상왕의 심복(心腹)과 우익(羽翼)을 없애려고 하여 비밀히 공양왕에게 고하기를, “정책(定策)할 때에 준(浚)이 이의(異議)가 있었습니다.” 하니, 공양왕이 이 말을 믿고 준에게 앙심을 품었었다.

임신년(1392, 태조 1)) 3월에 정몽주가, 태상왕이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할 때를 타서 대간(臺諫)을 시켜 준(浚)과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 등을 탄핵하여, 붕당(朋黨)을 만들어서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지적하여 모두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내 수원부(水原府)로 잡아 올려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4월에 우리 주상(主上)께서 조영규(趙英珪)로 하여금 정몽주를 쳐 죽이게 하여, 준(浚)이 죽음을 면하고 찬성사(贊成事)에 복직되었다.

7월 신묘에 준(浚)이 여러 장상(將相)들을 거느리고 태상왕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즉위(卽位)하던 날 저녁에 준(浚)을 와내(臥內)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한문제(漢文帝)가 대저(代邸)에서 들어와서 밤에 송창(宋昌)으로 위장군(衛將軍)을 삼아 남북군(南北軍)을 진무(鎭撫)하게 한 뜻을 경이 아는가?” 하고, 인하여 도통사(都統使) 은인(銀印)과 화각( 角)·동궁( 弓)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5도 병마(五道兵馬)를 모두 경에게 위임하여 통솔하게 한다.” 하고, 드디어 문하 우시중 평양백(門下右侍中平壤伯)을 제수하고, 1등(一等)의 훈작(勳爵)을 봉(封)하여 ‘동덕 분의 좌명 개국 공신(同德奮義佐命開國功臣)’의 호(號)를 주고, 식읍(食邑) 1천 호(戶), 식실봉(食實封) 3백 호(戶)와 전지(田地)·노비(奴婢) 등을 하사하였다.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은 차비(次妃) 강씨(康氏)에게서 출생하였는데, 태상왕이 이를 특별히 사랑하였다. 강씨가 개국(開國)에 공(功)이 있다고 칭탁하여 이를 세자(世子)로 세우려고, 준(浚)과 배극렴(裵克廉)·김사형(金士衡)·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을 불러 의논하니, 극렴이 말하기를, “적장자(嫡長子)로 세우는 것이 고금(古今)을 통한 의(義)입니다.” 하매, 태상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준(浚)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功)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하였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준(浚)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浚)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태상왕이 마침내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삼으니, 준(浚)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12월에 문하 좌시중(門下佐侍中)이 되었다. 준(浚)이 전(箋)을 올려 식읍(食邑)과 실봉(實封)을 사양하니, 특별히 전교(傳敎)하여 윤허하지 아니하고, 은총(恩寵)과 위임(委任)이 비할 데 없었다. 갑술년(1394, 태조 3)에 또 5도 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고 막료(幕僚)를 두었는데, 태상왕이 명하여 도성(都城) 사문(四門)의 열쇠를 주관하게 하고, 그것을 준(浚)의 집에 간직해 두고 <사문(四門)의> 열고 닫음을 맡게 하였다.

정축년(1397, 태조 6)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 안에 희모( 侮)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이 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띈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 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준(浚)이 옳지 못하다 하여 말하기를, “이는 특히 그대들의 오산이다. 상감의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아니하다.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는 것은 불의(不義)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억지로 병(病)을 이기고 들어와서 <태상왕을> 뵙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백성들의 기뻐하고 숭앙(崇仰)함이 도리어 잠저(潛邸) 때에 미치지 못하옵고, 요즈음 양도(兩都)의 부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로함이 지극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착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으로서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

마침내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은(誾)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 하였다. 태상왕이 준(浚)의 말을 좇으니, 의논이 마침내 그치었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은(誾)과 함께 매양 태상왕에게 준(浚)의 단점(短點)을 말하였으나, 태상왕이 대접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다.

일찍이 화공( 工)에게 명하여 준(浚)의 화상( 像)을 그려서 하사(下賜)한 것이 두 번이고, 도전(道傳)으로 하여금 그 화상에 찬(讚)을 짓게 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준(浚)의 집을 지났는데, 준(浚)이 중당(中堂)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인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갑자기 변(變)이 일어나서, 임금이 밤에 박포(朴苞)를 보내어 준(浚)을 부르고, 또 스스로 길에 나와서 맞았다. 준(浚)이 이르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적장자(嫡長子)를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니, 태상왕이 이를 가하다고 하여, 9월에 상왕(上王)이 내선(內禪)을 받았다. 이에 공(功) 1등(等)을 기록하고, 인하여 좌정승(左政丞)을 제수하고 정난 정사 공신(靖難定社功臣)의 이름을 더하고, 다시 전지(田地)와 노비(奴婢)를 하사하였다.

기묘년(1399, 정종 1) 8월에, 상왕(上王)의 꿈에 준(浚)이 벼슬과 지위가 분수에 넘친다고 스스로 진술하여 물러가기를 원하였는데, 날이 밝자, 준(浚)이 과연 전(箋)을 올려 사면(辭免)하니, 상왕이 감탄하기를 매우 오랫동안 하다가, 위로하고 타일러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2월에 다시 사양하니,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집에 가 있게 하였다.

준(浚)이 수상(首相)이 되어 8년 동안 있었는데, 초창기(草創期)에 정사가 번거롭고 사무가 바쁜데, 우상(右相) 김사형(金士衡)은 <성품이> 순근(醇謹) 자수(自守)하여 일을 모두 준(浚)에게 결단하게 하였다. 준(浚)은 <성품이> 강명 정대(剛明正大)하고 과감(果敢)하여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에서 지휘(指揮)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同列)들이 숙연(肅然)하여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체통(體統)이 엄하고 기강(紀綱)이 떨치었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을 독점하고 권세를 오래 잡고 있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므로 준(浚)이 정승(政丞)을 사면하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손님을 사절(謝絶)하며, 시사(時事)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정비(靜妃)의 동생 무구(無咎)와 무질(無疾)이 좋은 벼슬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준(浚)이 막고 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경진년(1400, 정종 2) 7월에 이를 두 사람이 가만히 대간(臺諫)에게 사주(使嗾)하여 몇 가지 유언(流言)을 가지고 준(浚)을 논(論)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드디어 순위부(巡衛府) 옥(獄)에 가두었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일이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줄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마땅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직사(職事)에 이바지해야 될 것인데, 세도가(勢道家)에 분주히 다니면서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일을 꾸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해치니, 이는 실로 전조(前朝) 말기의 폐풍(弊風)이다.” 하고, 문사 위관(問事委官) 이서(李舒)에게 이르기를, “재신(宰臣)은 정인 군자(正人君子)이다. 옥사(獄辭)를 꾸며서 사람을 사지(死地)에 넣을 수는 없다.” 하였다. 그리고, 곧 상왕(上王)에게 아뢰어서 준(浚)을 풀려나오게 하였다.

11월에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그대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임명하고, 갑신년(1424, 태종 4) 6월에 다시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준(浚)이 다시 정승이 되어 일을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자기와 뜻이 다른 자에게 방해를 받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아니 되어 다시 파(罷)하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죽은 나이[卒年]가 60이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통곡하고, 소선(素膳)을 자시었으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輟朝]하였다. 임금과 세자(世子)가 친림(親臨)하여 조제(吊祭)하고,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자는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장사할 때 이르러서는 삼도감(三都監) 녹사(錄事)와 각사(各司) 이전(吏典)의 무리들이 모두 노제(路祭)를 베풀고 곡(哭)하였다. 준(浚)이 만년(晩年)에 비방을 자주 들었으므로, 스스로 물러나 피(避)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는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여, 임금이 일찍이 공신(功臣)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준(浚)에게 이르자, 임금이 수(壽)를 빌고, 그를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죽은 뒤에 어진 정승[賢相]을 평론(評論)할 적에 풍도(風度)와 기개(氣槪)를 반드시 준(浚)으로 으뜸을 삼고, 항상 ‘조 정승(趙政丞)’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준(浚)은 국량(局量)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風采)가 늠연(凜然)하였으니,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차별을 두지 아니하며 현재(賢才)를 장려 인도하고, 엄체(淹滯)를 올려 뽑되,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그만 장점(長點)이라도 반드시 취(取)하고, 작은 허물은 묻어두었다. 예위(禮 )를 세 번이나 맡았는데, 적격자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미 귀(貴)하게 되어서도 같은 나이의 친구를 만나면, 문(門)에서 영접하여 관곡(款曲)히 대하고, 조용히 손을 잡으며 친절히 대하되, 포의(布衣) 때와 다름이 없이 하였다.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詩文)이 호탕(豪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 문집(文集) 약간 권(卷)이 있다. 일찍이 검상 조례사(檢祥條例司)로 하여금 국조 헌장조례(國朝憲章條例)를 모아서 이를 교정하여 책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 하여 중외(中外)에 간행(刊行)하였다. 아들이 하나 있으니 조대림(趙大臨)이다. 임금의 딸 경정 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어 평녕군(平寧君)에 봉하였다.

【원전】 1 집 329 면
【분류】 *인물(人物)

출전 : 태종실록 009 05/06/27(신묘) /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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