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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17:00
분 류 사전1
ㆍ조회: 2286      
[조선] 서원 1 (민족)
서원(書院) 서원 1

서원 1
서원 2

개관

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구.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나라에 들어와서이며, 특히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 연마의 도장으로 보급한 이래 남송ㆍ원ㆍ명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조선의 서원은 그 성립 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서원이 관인 양성을 위한 준비 기구로서의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사림의 장수처(藏修處)이면서 동시에 향촌 사림의 취회소(聚會所)로 정치적ㆍ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ㆍ사우(祠宇) 등과 혼칭되고 성격도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본래는 [표 1]과 같이 구별되고 있었다.

서원의 성립

[성립 배경]

서원이 성립하게 된 배경은 조선 초부터 계속되어온 사림의 향촌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사회에 있어서 자기세력기반 구축의 한 방법으로 일찍부터 사창제(社倉制)ㆍ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을 개별적으로 시행하여왔다. 특히 정계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이를 공식화하여 국가정책으로까지 뒷받침받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구심체로서 유향소(留鄕所)의 복립 운동을 전개하다가, 향권 독점을 두려워한 훈구척신(勳舊戚臣) 계열의 집요한 반대와 경재소(京在所)에 의한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다시 사마소(司馬所)를 세워 본래의 의도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연산군대의 거듭된 사화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향촌 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 서원이 성립ㆍ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서원이 16세기 중엽인 중종 말기에 성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림의 정계 재진출에 따라 그 정책으로 제시되었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 체제의 혁신에 있었다.

조광조(趙光祖)로 대표되던 신진 사류들은 지치(至治)의 재현을 목표로 도학 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며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중의 하나인 문묘종사운동은 사람마다 도학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하고 이를 숭상하도록 하기 위하여 도학에 뛰어난 학자를 문묘에 제향하여야 한다는 명분에 근거를 두고, 사림계 유학자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등의 종사를 추진하였다.

이는 그 자체가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 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에 대한 교화라는 명분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서원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한편, 당시의 훈척 계열이 쇠잔한 관학을 존속시키는 방향에서 그 개선책을 모색하였던 반면, 사림계의 경우는 그들이 내세우는 도학 정치를 담당할 인재의 양성과 사문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위기지학(爲己之學) 위주의 새로운 교학 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그들이 곧 실각함으로써 관학에 대체할 새로운 교학 기구의 모색은 중단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이 뒷날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를 위한 장소로서 서원의 출현을 가져온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성립 과정]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하였다. 또한 영남감사(嶺南監司)의 물질적 지원과 지방 유지의 도움으로 서적과 학전(學田)을 구입하고 노비 및 원속(院屬)을 확충하는 등 그 영속화를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이를 기초로 유생을 교육하여 여러 명의 급제자를 내게 하는 등 서원체제를 갖추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이었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習俗)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도장으로 중국에서 발달되어온 서원 제도가 우리 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서원의 존재 이유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되면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그 보급에 주력하였다.

[표 2]에서 보듯이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 소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서원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외면적인 확대와 아울러 서원의 내용면에서의 충실에도 유의하였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체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의 학습 활동과 그 운영방안을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부터 계속된 향촌에서 사림 활동의 구심체적 기구의 모색 노력은 중종초 조광조일파의 신진사류에 의한 문묘 종사 운동 및 새로운 교학 체제 모색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서원의 형태로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며, 이황에 의하여 정착, 보급되기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 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으나,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 양성과 교화 정책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ㆍ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며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 서원이 있었다. 그 뒤 영조 때에는 서원 폐단의 격화로 인한 강력한 단속으로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서원의 전개

조선 시대에 건립된 서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후일에 이를수록 인물 위주로 남설(濫設)되어 사우와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첩설을 금지하는 조처로 처음에는 사우로 이름하였다가 금령(禁令)이 완화되면 서원으로 승격시킨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서원으로 설립되었다가 금령에 저촉되어 사우로 강호(降號)되거나 아예 철폐된 것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때 편찬된 ≪조두록 俎豆錄≫과 고종 때에 증보된 ≪문헌비고≫ 및 ≪열읍원우사적 列邑院宇事蹟≫ 등에 기재된 서원명단을 토대로, ≪서원등록 書院謄錄≫ 및 ≪승정원일기≫ 등 연대기류에 나타난 철폐된 서원을 조사하여 합하면 대략적인 건립추세는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지방별 분포와 함께 시대별로 정리해보면 [표 2]와 같다.

[표 2]에 의하면 서원은 전 시기에 걸쳐 8도에 417개 소가 있었으며, 사우는 492개 소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후기, 특히 숙종 때 서원이 남설되면서부터 서원ㆍ사우의 구별이 모호해졌으므로, 사우까지도 서원과 비슷한 성격으로 파악하여 양자를 합하면 모두 909개 소에 이른다. 1741년(영조 17) 서원철폐론의 당시 서원ㆍ사우 등 여러 명칭을 모두 헤아린 숫자가 1,000여개 소에 가깝다고 말한 것이 통계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 통계에 나타난 서원건립의 추세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따른 내용적인 면에서의 변천을 고려하여 조선 서원의 전개과정을 살펴본다면, 우선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의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그리고 영조 17년 이후의 서원철폐 및 쇠퇴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

초창기에 건립된 서원의 숫자는 19개 소(중종 이전에 이미 3개 소의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신빙성이 없어 제외)이다. 이는 당시의 정계가 전반적으로 척신계에 의하여 주도된 사정을 감안할 때 상당한 진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초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액된 곳이 4개 소나 되는 것은 서원이 이 시기에 이미 관설에 준하는 교학 기구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 보급 운동이 거둔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황의 거주지이며 그 문인의 활동이 성하던 경상도 지역에 전체의 반이 넘는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척신 세력으로서도 관학의 쇠퇴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는 단계에 이르러, 그 대체 기구로서 서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향 인물인 안향ㆍ정몽주(鄭夢周)ㆍ최충(崔食)ㆍ최유길(崔惟吉) 등이 사림 이전의 고려시대 인물이었던 관계로 척신세력의 반발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서원의 설립이 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면에서도 장차의 서원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즉 서원의 전반적인 면에 걸친 건전한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규정으로, 이황의 〈이산서원원규 伊山書院院規〉를 기본으로 각 서원별 원규가 작성되어 이에 의한 강학 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향촌 유지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서원전(書院田)과 어물(魚物)ㆍ소금 등 현물 조달 체제의 영속화를 통한 안정된 재정 기반 구축과 원속ㆍ노비 등의 확보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명종 말ㆍ선조 초의 활발한 사림의 공급은 바로 이러한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밑바탕으로 하여 가능하였던 것이다.

[발전기]

서원은 선조 때,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우선 양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만 60여개 소를 넘었으며, 22개 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 뒤 현종 때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연평균 1.8개씩 106년간 193개 소가 설립되었으며, 그 가운데 0.9개가 사액서원이었다.

지역별로는 초창기의 경상도 일변도에서 점차 벗어나 전라ㆍ충청ㆍ경기도 지역에서의 건립이 활발해졌다. 그래서 한강 이북 지역에서도 차차 보급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특히 황해도의 경우는 선조 연간 이례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확산을 보게 된 것은 사림의 향촌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진 정세의 변화라든가, 특정 유학자의 서원 보급 운동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깊은 요인은 붕당 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사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이 붕당은 그 정쟁(政爭)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므로, 당파 형성에 학연(學緣)이 작용하는 바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그 조직과 확장에 중심적인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각 당파에서는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그 지역 사림과 연결을 맺고 이를 자기 당파의 우익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에 향촌사림으로서는 서원을 통하여 중앙 관료와의 연결을 맺어 의사 전달과 입신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기에 서원건립을 놓고 양자의 이해 관계가 서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서원이 수적 증가는 현저하였다. 그렇지만 아직 남설이라든가 그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우려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이 때까지만 하여도 붕당이 권력 구조 균형의 파탄을 초래할 지경에 이를 만큼 격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조ㆍ현종 때의 복제 논쟁(服制論爭)에서 나타나듯 그 논쟁의 초점이 학문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아서, 그 논리적 기초의 심화와 공감대의 확산을 위한 장소로 서원의 소임이 크게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이나, 정경세(鄭經世)ㆍ허목(許穆)ㆍ윤휴(尹鑴)와 같은 당파의 영수이면서 학자이었던 인물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왕성한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학적 기반을 구축하면서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꾀하였던 것이다.

서원의 양적 증가가 곧 그 문란을 의미하지 않음은, 배향자의 대부분이 조광조나 이황ㆍ이이ㆍ조식(曺植) 등 사화기의 인물이거나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유학자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 않은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서원의 발전은 양적인 증가에서뿐만 아니라 기능의 확대라는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 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 사림 사이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곳으로서의 구실과, 특히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 운영 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하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향촌방어를 목적으로 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고 또 그것을 일으키기 위한 사림의 발의와 조직의 편성에 서원이 그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심지어는 향풍(鄕風)을 문란하게 한 자에 대한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는 향촌 사림의 사적인 제재조처까지 단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설기]

서원은 숙종대에 들어와 166개 소(사액 105개 소)가 건립되는 급격한 증설현상을 보였다. 연평균 건립수가 3.6개 소로서 발전기의 두 배를 넘어섰으며, 사액도 2.5배(연평균 2.3개 소)가 증가되어 남설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경종과 영조 초기에 다소 줄었지만, 반면에 사우의 수는 격증하였다.

사우의 건립 추세는 현종 때까지 서원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1703년(숙종 29) 이후 현저한 증가현상을 보여 서원을 능가하고 있으며, 경종○영조 초에 와서는 서원을 압도하였다. 영조 초의 17년 사이에 무려 137개 소가 건립되어 연평균 8개 소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남설이 문제되던 이 시기는 서원 명칭으로의 건립이 금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금령을 피하여 대신 사우를 건립하는 사례가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경우 서원ㆍ사우의 구별은 실제적으로 무의미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우의 격증을 서원남설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원남설은 외면적인 숫자의 격증만이 아닌 내용에서도 나타났다. 예컨대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전국에 44개 소(사우 포함)나 되었다. 당시 10개 소 이상에 제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르는 데서 보이듯 동일한 인물에 대한 중첩된 서원건립이 성행하였다.

제향 인물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당쟁 중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善治守令), 행의(行誼)있는 유생, 그리고 심지어는 단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 추향(追享)되는 사례가 자행되었다. 서원의 이러한 첩설과 남향은 이 시기에 당쟁이 격화되고 그 폐단이 표면화된 데에 원인이 있었다. 서원은 이제 학연의 확대를 기한다는 면에서보다는 정쟁에 희생된 자기파 인물에 대한 신원(伸寃)의 뜻을 보다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또 붕당의 원리가 포기된 상태에서 외면적인 당파의 양적 확대에만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향촌사림을 포섭하려 하자, 자연히 서원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서원의 남설과 사액의 남발을 더욱 부채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원남설은 오직 당쟁문제로만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17세기 후반 이후 현저해진 현상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사족 사이에 동족 내지 가문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나타난 후손에 의한 조상 제향처 내지 족적 기반 중심지로 서원 건립이 자행되었던 것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성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행위가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기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서원 금지령이 내려진 1703년(숙종 29) 이후 서원 대신 사우가 격증한 것은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다. 서원의 남설은 필연적으로 그 질적인 저하를 수반하고 사회적인 폐단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제향 자격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봉사 대상으로 선정되는 사실과 함께 점차 그 성격에 있어 제향 일변도의 경사가 마침내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하였고, 그에 반비례하여 강학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었다. 또 점차 타락의 도를 더해가는 당시 사림의 기강이나 능력으로 보더라도 더 이상 서원이 학문기구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서원이 날로 증가하지만 사문은 더욱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서원 무용론까지 대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후에 서원 철폐의 명분이 되었다.

서원의 사회적 폐단은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갹출하는 구청(求請), 양정(良丁)을 불법적으로 모점(冒占)하여 피역시켜 양정 부족현상을 야기하여 양역폐를 격화시키는 폐단, 교화를 구실로 대민 착취 기구로 전락된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쟁의 격화로 서원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는 속에서 중앙의 고관이 향촌의 1개 서원에 진신유사(搢紳有司)로 추대되어 일정한 상호보험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질적인 저하에도 불구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이 누리는 권위는 강대하였으며, 바로 이 점이 사회적 폐단을 야기할 수 있는 근본요인이었던 것이다.

[훼철기]

서원 문제는 1644년(인조 22) 영남감사 임담(林机)의 서원남향에 대한 상소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그 뒤에도 효종ㆍ현종연간을 거치면서 간헐적이기는 하나 그 폐단을 논하는 상소로 인한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서원 건립이 허가제로 결정되고 첩설금령이 발포되며, 때로는 집권파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당파에 속하는 인물을 제향한 서원이 남향을 구실로 사우로 강호되거나 심지어는 한두 곳이 훼철(毁撤:헐어 부수어서 걷어 버림)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숙종 초까지만 해도 남설로 인한 서원의 문란상은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아직은 서원 옹호론이 우세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마련된 서원 대책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서원에 대한 통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1703년(숙종 29)에 이르러서이다. 이 때 전라감사 민진원(閔鎭遠)은, 조정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고 수창유생(首倡儒生)을 정거(停擧)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왕이 찬동함으로써 서원금령이 강제성을 띠게 되었다.

서원 금령은 그 뒤에도 수시로 신칙되어서 1713년 말에는 특히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의 첩설(疊設)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1717년에는 8도의 관찰사에게 숙종 29년 금령 후 창건된 서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1719년(숙종 45)부터 왕이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경상도의 경우에는 훼철을 단행하기까지 하였지만, 곧 숙종이 죽어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경종 때 사액서원의 면세지를 3결로 확정하되, 토지는 서원자체에서 마련할 것이며 위토(位土)가 3결에 차지 못한다고 해서 민전(民田)을 점거하는 일이 없도록 규정하였다(종래는 사액서원에 대하여 토지 3결을 편액과 함께 사급한 것으로 보고 이것이 사액서원이 가지는 특전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국가로부터 토지 지급은 없었고 여기서 보듯이 단지 면세권만 3결에 한하여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어 서원구청을 금단하고 원속ㆍ보노(保奴) 등을 일체 폐지하는 등 강경책을 썼으며, 특히 대사성 이진유(李眞儒)의 주장으로 1703년 이후의 첩설서원은 그 편액을 철거하게 하였다. 이는 소론의 노론서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여 영조 즉위 후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 이와 같이 숙종 말년 이후부터 단행된 강력한 서원통제책은 계속된 정권 교체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서원 폐단에 대한 조야의 인식이 깊어지고 서원 통제론이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며, 1741년(영조 17)의 서원 철폐는 여기서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서원 철폐를 단행하게 된 계기는 그의 탕평책 실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1741년은 노론이 결정적으로 우세를 확립한 시기로 신유대훈(辛酉大訓)이 반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으로서는 탕평파를 이용, 노론의 일방적 권력 행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조낭관(吏曹郎官)의 통청권(通淸權)과 사관의 천거권을 폐지하는 등 탕평에 예의 주력하였다. 따라서 서원에 대해서도 그것이 노론ㆍ소론ㆍ남인 사이의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건립에 따른 시비를 근원적으로 봉쇄할 목적으로 탕평파의 협조를 얻어 1714년 갑오 이후 건립된 서원은 물론 사우ㆍ영당 등의 모든 제향기구(祠院)를 일체 훼철하게 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이 조처는 지방관의 책임 하에 철저하게 진행되었고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합계 173개소의 사원이 훼철되었다. 그 뒤 서원첩설 및 남설의 경향은 [표 2] 에서 보듯이 크게 둔화되어 거의 정지 상태로 되었다. 이는 탕평하에서 의리논쟁과 인물시비가 기피되는 정치사안이 되자 이와 직결된 서원건립문제가 자연히 외면되었기 때문이다.

또 순조 이후의 세도정치 하에서 의리나 명분 자체가 무의미해졌기에 더 이상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데 이유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방관에 대한 처벌이 건립을 효과적으로 봉쇄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원 금령이 정조와 철종연간에 한두 차례씩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없이 이제는 가문의식과 관련하여 후손에 의한 건립이 종종 시도되었던 데 그 까닭이 있다.

실로 서원 훼철과 같은 강경조처로 서원 금령의 강화는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보조를 거의 단절케 해서 서원 재정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끝내는 이를 메우기 위한 대민작폐의 심화와 함께 서원재정 담당을 기화로 한 후손의 서원 관여를 더욱 조장하여 19세기 이후는 전국의 서원이 대부분 후손에 의하여 운영되고 또 건립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한편, 서원 건립이 중단된 것과 반비례하여 이미 교화의 방향을 상실한 사림층의 대민 착취와 서원의 부패로 인한 민폐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외형적인 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었고, 충청도 유림의 여론을 좌우하는 거점으로 전국에 광대한 수세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복주촌(福酒村)을 두어 지방재정을 좀먹고 관령(官令)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墨牌)로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않던 화양동서원의 작폐는 19세기 이후의 서원이 사회에 끼친 역기능적인 폐단을 극적으로 말해 주는 예이다.

그러므로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며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이미 민폐문제를 구실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그 존폐여부의 처리를 묘당에 맡겼으며, 1868년과 1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원(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 소의 사원만 남겨놓게 된 것이다. 이때 존치된 47개 소는 서원명칭을 가진 것이 27개 소, 사(祠)가 20개 소이다. 그 명단은 [표 3]과 같다.

(계속)

<정만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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