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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21 (토)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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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113      
[고려] 고려시대의 문학 (민족)
문학(고려시대의 문학)

세부항목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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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참고문헌)

[고려 전기의 문학]

후삼국의 쟁패가 벌어지자 건국신화가 재현되는 것 같았다. 지배자는 신이한 능력을 타고나 고난을 이기고 나라를 이룩하였다 하였으며, 고려의 경우 왕건(王建)의 선조가 여러 대에 걸쳐서 신화적인 내력을 지닌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신화 시대가 아니므로, 한문학에 의한 건국이념을 수립하는 데 아울러 힘쓰는 쪽이 승리를 거두게 마련이었다. 신라의 전통을 이은 문인들이 골품제를 철폐하면서 더욱 능력을 발휘한다. 한편, 통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장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고려 전기의 문화와 문학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신라에서 시작된 향가는 고려 전기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유는 문화 구조가 기본적인 동질성을 가졌던 데서 찾을 수 있으나, 향가의 잔존 형태는 그전처럼 떨칠 수 없었다. 균여(均如)는 광종 때 지배적인 이념 수립에 깊이 관여하면서 화엄사상(華嚴思想)에 입각한 교화를 널리 펴자고 흔히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라고 총칭되는 사뇌가 11수를 지었다. 이것이 본격적인 향가로서는 마지막 작품인데, 이미 서정적인 표현은 약화되었다. 그 뒤 예종이 건국의 공신들을 추모해서 지은 〈도이장가 悼二將歌〉(1120)는 8구체 향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의종 때 정서(鄭敍)의 작품인 〈정과정곡 鄭瓜亭曲〉은 후대의 국문 표기로 남아 있으나 사뇌가와 상통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고려는 불교 국가임을 다짐하고 불교 이념에 의존하였으나, 불교 문학이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발전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첫 단계에는 교리를 번다하게 풀이하는 쪽으로 기울어져서 창의력이 결핍된 것 같다. 균여의 화엄학 저술은 아주 방대하지만 문학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의천(義天)이 나서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까지 아우르려고 하자 시문이 생기를 되찾고 개인적인 감회까지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의천의 후계자들 중에는 다른 행적은 확실하지 않으나 시를 남겨서 주목되는 승려도 있다. 한편, 변두리로 밀려난 선종에는 탄연(坦然) 같은 시인이 있어서 고려 후기에 이루어질 전환을 준비하였다.

958년(광종 9) 과거제가 실시된 것은 신라 이래의 염원을 실현하였다 하겠으며, 문학사에서도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그때부터 고려의 과거는 경전 이해보다는 시문 창작능력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한문학의 융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첫 단계의 과거를 주관하던 문인들은 뚜렷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최승로(崔承老)에 이어서 최충(崔食)·박인량(朴寅亮) 등이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최승로는 성종이 즉위하자 정치의 득실을 논한 글을 바쳐 그러한 문장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최충은 사학(私學)을 일으켜 유학을 진흥하는 한편 한시에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박인량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한편, 파격적인 기질을 가진 김황원(金黃元)은 과거의 격식 때문에 생기를 잃은 문학에 반발하고 참신한 표현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 무렵 설화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문종 때 금관(金官)지방의 수령 노릇을 하던 어느 문인이 ≪가락국기≫를 편찬하였다. 금관은 김해인데, 그곳에 전하고 있던 가락국의 사적을 모으고, 당시까지 행하여지고 있던 민속까지 수록하였으며, 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미에 첨부하였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책을 박인량이 보완하고 개작하였으리라고 하는 ≪수이전 殊異傳≫은 역사 기록의 이면에 버려져 있던 민간전승을 모아 신이한 설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역사보다는 설화가 중요시되는 풍조를 시정하고 유학에 입각한 통치 이념을 확립하고자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정통적인 역사서인 이 책에도 설화가 자료로 이용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열전에는 우수한 표현을 갖춘 작품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

한문학은 일반적으로 귀족적인 기풍을 지녔다 하겠으나, 방황과 진통을 겪었다. 예종은 곽여(郭輿) 같은 사람과 어울려 시를 주고받는 것을 무척 즐겼는데, 유학의 구속을 버리고 도가적인 초탈을 동경하였다. 이자현(李資玄)은 명문 출신으로서의 지위와 영달이 보장된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은거하는 길을 택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뒤 인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는데, 국왕이나 집권층이 안일에 빠져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비판이 계속 일다가 마침내 서경천도운동으로 인한 내전을 겪었다. 천도파에 가담한 정지상(鄭知常)은 자기 고장 서경의 정서를 살리면서 절실하고도 아름다운 표현을 살리고자 해서 김부식 일문의 권위의식과 맞섰다. 김부식은 유학의 경전을 모범으로 삼는 고문을 이룩하고자 하였으며, 스스로 기발한 표현을 개척하기보다는 전거와 교훈을 존중하였다.

의종이 정치를 그르치는 것을 거침없이 간하다가 자살한 정습명(鄭襲明)은 부귀를 멀리하고 평화로운 자연을 동경하는 심정을 읊은 시를 남겼다. 고려 전기 귀족 문학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을 때 무신란으로 치달을 사태가 준비되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학]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란과 그 뒤 한 세기 동안 계속된 무신정권은 문학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고려 전기 귀족문학을 대신해서 새로운 문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의의를 가진다. 김극기(金克己) 같은 사람은 그러한 시절에 크게 나서지 않으면서 100권이 넘는 문집을 완성하고, 특히 농민 생활의 실상을 담은 작품세계를 보여주었으니, 전에 없던 일이다.

오세재(吳世才)나 이인로(李仁老) 등의 구귀족은 죽림고회(竹林高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문학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한편, 무신정권에 등용되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최충헌(崔忠獻) 시절에 이르러서는 무신정권에 등용된 문인들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주저하는 바 없이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규보(李奎報)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규보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아주 다양한 작품세계를 이룩하였는데, 그 가운데 농민의 처지를 대변하고자 한 시가 특히 주목된다. 비평은 고려 후기에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인로의 ≪파한집≫으로 출발점을 삼는다.

이인로는 거기서 위기에 몰린 문학을 옹호하여 빈부와 귀천으로 우열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아름답게 아로새긴 문장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이규보는 문집에 남긴 수많은 글과 ≪백운소설≫로 엮어놓은 비평집을 통해서 반론을 제기하면서, 문학은 수식보다는 내용이 선행하는 것이어야 하며 독창성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최자(崔滋)는 ≪보한집≫을 지어 이규보의 지론을 잇고 작품 비평에서 구체화하였다. 최해(崔瀣)가 ≪동인지문 東人之文≫을 편찬하면서 그 취지를 밝히고, 이제현(李齊賢)이 ≪역옹패설 饑翁稗說≫에서 신흥사대부의 문학관을 역설한 것은 그러한 움직임의 연장이다.

지눌(知訥)이 불교를 혁신하며 선종을 크게 일으키고, 혜심(慧諶)이 그 뒤를 잇자 불교문학의 양상이 달라진 것도 함께 주목할 일이다. 혜심은 논리적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겉으로 보아서는 말이 안되기에 충격을 주는 선시(禪詩)와 선문답(禪問答)을 내놓으면서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적극 개척하였다.

이와는 노선을 달리하는 쪽에서는 천책(天刎) 같은 승려시인이 나타나 일반 한시로서도 높이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을 이룩하였다. 혜심의 법통을 이은 충지(食止)는 처음부터 문학에 힘써 이 두 가지 영역을 구비하는 한편, 원나라 지배하에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아주 실감 있게 표현하였다.

선종의 문학은 경한(景閑)·보우(普愚)·혜근(惠勤)에게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노래를 만들어냈는데, 그 중 한시의 격식을 버린 것도 적지 않다. ≪삼국사기≫가 이룩한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민족사를 주체적으로 재인식하자는 움직임이 문학창작을 통해서 나타난 것도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어준다. 이규보는 〈동명왕편 東明王篇〉에서 고구려 건국서사시를 재현하면서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은 ≪삼국사기≫에 빠져 있는 불교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서 ≪삼국유사≫로 넘어가는 길을 열었다. 일연(一然)은 계속되는 전란으로 민족문화가 파괴되고 원나라의 지배 때문에 주체성이 손상된 시기에 ≪삼국유사≫를 편찬하여 불교와 민간전승이 어우러진 데서 민족정신의 맥락을 찾고자 하였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는 민족사의 전개를 중국의 경우와 대비하여 노래한 또 하나의 서사시이다. 사람의 일생을 다루는 일은 이른 시기의 신화에서부터 있었으며, ≪삼국사기≫ 열전이나 ≪해동고승전≫도 그 방면의 좋은 전례를 남겼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문학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행장(行狀)·묘지(墓誌)·전(傳) 같은 것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을 짓되 이름은 나지 않았으나 불우한 일생을 보냈기에 오히려 문제가 되는 인물을 택하는 것이 새로운 풍조였는데, 이색(李穡)의 전이 그 좋은 예이다. 이규보와 최해는 자기를 다른 어떤 인물에다 가탁을 하여서 칭송도 하고 비하도 하는 탁전(托傳)이라는 것을 개척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사물을 의인화하여서 세상 형편을 수많은 고사를 동원하여 흥미롭게 서술하는 가전(假傳)이 이루어졌다. 임춘(林椿)의 〈공방전 孔方傳〉은 돈을 의인화하였고, 이규보의 〈국선생전 麴先生傳〉은 술을 등장시켰다.

≪고려사≫ 악지에 소개되어 있고 ≪악장가사≫ 같은 데서 국문으로 된 노랫말을 얻어 볼 수 있는 속악가사(俗樂歌詞)는 고려 후기에 성행하던 궁중악에 소용된 것이다. 그 중에는 〈정읍사 井邑詞〉나 〈처용가〉처럼 삼국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도 있고, 〈쌍화점 雙花店〉 같은 창작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당시의 민요를 채택하여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형식도 민요풍이려니와, 여음이 삽입되는 데 따라서 장(章)이 나누어지고 3음보가 두드러진 구실을 하는 긴 형식은 그때까지 잠재되어 있던 민요의 전통이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동동 動動〉은 여인이 임을 그리워하는 달거리노래인데, 서두에다 존귀한 분의 덕과 복을 기원하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가시리〉·〈이상곡 履霜曲〉·〈만전춘별사 滿殿春別詞〉·〈서경별곡 西京別曲〉은 남녀의 사랑을 아주 실감나게 다룬 사연을 지니고 있다. 〈청산별곡〉은 여러모로 추측을 자아내게 하나, 살 길을 잃고 헤매는 유랑민의 노래가 주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과 민사평(閔思平)이 남긴 〈소악부 小樂府〉에도 당시 민요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서로 견주어 볼만하다.

몇 가지는 서로 겹치고 소악부에는 백성의 참상을 더 잘 나타낸 것도 있다. 제주도 민요를 옮겨 놓은 것이 이제현의 〈소악부〉에 포함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고려 후기의 설화는 민요만큼 적극적인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어디 모아놓은 데가 없으며, 산발적으로 확인될 따름이다. ≪고려사≫에서는 원나라나 왜구 때문에 참상을 겪을 때 정절을 지켜 죽음을 택하거나 효성을 온전히 하느라고 고생한 인물의 이야기를 실어서 교훈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해가 되는 풍습을 지적하느라고, 우왕 때 이금(伊金)이라는 인물이 미륵불로 자칭하면서 나무에서 곡식이 열리고 한 번 심어서 두 번 거두게 되며 신령을 보내어 왜구를 잡겠다고 하며 민심을 소란하게 하였던 일을 들었는데, 그러한 데서는 무가가 변형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비문학의 더 깊은 층위는 연극이다. 연극은 충렬왕이 특히 좋아하여 궁중에서도 공연된 것 같다. 그러나 민간의 탈춤과 〈꼭두각시놀이〉가 주류를 이루었고, 수탈을 풍자하는 내용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경기체가(景幾體歌)·가사(歌辭)·시조가 나타나면서 향가가 자취를 감춘 다음 시기의 상층 시가문학이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한림별곡 翰林別曲〉(1216)을 첫 작품으로 하고, 안축(安軸)의 〈관동별곡 關東別曲〉·〈죽계별곡 竹溪別曲〉으로 이어진 경기체가는 한자어구로 지칭된 사물을 열거하면서 흥취를 찾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향찰로 표기된 혜근의 〈승원가 僧元歌〉가 발견되면서 가사가 고려말에 발생하였다는 견해가 확인되었는데, 이 작품은 교리를 설명하면서 불교 포교를 꾀한 것이다.

시조는 심성을 노래하는 서정시여서 경기체가나 가사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4음보라는 점에서 가사와 같으나 3행으로 마무리되면서 긴장된 시상을 갖춘다.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의 작품부터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고려 말의 정치적 전환에서 각자가 가지는 고민을 표현하면서 특히 중요한 갈래로 뿌리를 내렸다 하겠다.

무신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권문세족과의 경쟁을 벌이며 역사의 방향을 이끌어나가고자 한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을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우고 현실의 문제를 깊이 다루며 문학에서도 전에 볼 수 없던 기풍을 확고하게 하였다. 최해·안축·이제현의 세대는 그 길을 열었다 하겠고, 그 뒤를 이어서 이곡(李穀)은 백성의 참상에 대하여 한층 관심을 가지고 현실 비판의 주제를 더욱 심화하였다.

이색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적 이념을 문학에다 구현하면서 문학을 또한 다채롭게 살릴 수 있는 방향이 정립되었다 하겠으나, 현실을 타개하는 데는 오히려 한계가 드러나 사대부문학이 분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를 위해서 충절을 지키려는 쪽에서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이 이상을 그것대로 추구하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 때문에 번민하였고, 새 왕조를 일으키는 쪽에서는 개혁을 완수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를 실현하는 길이라면서 문학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조동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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