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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0 (화)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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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83      
[종교] 천주교 2 (민족)
기독교(천주교)(基督敎(天主敎)) 천주교 2

에서 계속

4. 시련과 발전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1백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즉, 1785년(정조 9) 봄 당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초기 신자들이 형조에 적발되는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벌어졌는데, 양반의 자제들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유배형을 받고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김범우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숨짐으로써 한국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을 당하였는데,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해서 홍낙안(洪樂安)·이기경(李基慶) 등 공서파(攻西派)의 남인 신서파(信西派)에 대한 공격은 더욱 심해져 이승훈·권일신·최필공(崔必恭) 등 10여 인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사형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1795년의 을묘박해는 주문모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문모는 피신하고 그 대신 최인길·윤유일·지황 등 3인이 포청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서울에서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일단락되었으나, 지방에서의 박해는 계속되어 특히 호서지방과 경기도의 양근·여주지방에서 박해가 심하였다.

그러나 정조 때의 박해는 정조의 온화한 성격과 교화정책 때문에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규모는 아니었다. 정학(正學)인 유학(儒學)을 천명하면 사설(邪說), 즉 천주교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801년 순조가 즉위하자 다시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득세한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신유박해는 그 해 1월 10일 정순왕후(貞純王后) 대왕대비 김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자 척사윤음(斥邪綸音)으로 끝나게 되는데, 크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인 동시에 남인의 지도급 인사로 간주되고 있는 이가환·권철신·이승훈·최필공·홍낙민·정약종·홍교만(洪敎萬) 등의 사형이다.

사형된 사람들 중 이가환은 원래가 천주교인이 아니었고, 이승훈은 전에 배교한 사실이 있음에도 사형을 당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박해가 정치적 보복의 색채가 농후함을 알 수 있다.

둘째 단계는 신부 주문모의 순교이다. 그에 대해서는 한때 청나라로 송환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끝났고, 여기에 연루되어 강완숙 등 여교우들도 많이 참수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황사영의 순교이다.

황사영의 체포로 백서사건(帛書事件)이 확대되어 관련자가 처형되는 동시에, 봄에 갇혔다가 풀려난 정약전·정약용 등 남인의 거물들이 다시 잡혔으나 백서와 관련된 사실이 없었으므로 유배로 끝나고, 황사영만은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되었다.

황사영의 처형으로 박해는 점차 수그러져 정부에서는 우선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진주사를 청나라로 보내 박해가 불가피하였음을 설명하였고, 이어 박해의 종말을 고하는 척사윤음을 전국에 선포하여 박해행위를 변호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과 전주에 수감되어 있는 천주교인들의 처형을 서둘러, 가혹하였던 박해는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두 번의 박해가 일어났는데, 1815년(순조 15)의 을해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자행되었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와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헌종 때 두번째의 큰 박해가 일어났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교인의 후예들이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사 영입운동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1836년 이래 주교와 선교사들이 입국함으로써 천주교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는데, 1839년(헌종 5)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3월 5일에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발표되어 당시 입국해 활동하던 3인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하였고,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조신철(趙信喆) 등 교회의 중요 인물이 모두 순교하였는데, 특히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미리 재상에게 제출할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작성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0월 8일 ‘척사윤음’이 선포되어 세 번의 사형집행을 끝으로 이번 박해도 막을 내렸다.

1846년의 병오박해는 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체포가 발단이 되어 김대건과 남녀 교우 9인이 순교하였는데, 그 중 현석문(玄錫文)은 기해박해 이래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 己亥日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해박해 이후 성직자 없는 교회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1860년(철종 11)의 경신박해는 교회측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 관변측 기록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는 아마도 박해의 주동자가 조정이 아니고 포도대장이 자의로 일으킨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과 탐욕에서 박해를 일으켰고, 국민의 여론과 정부가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포도대장직을 사임해야 했고, 그래서 박해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 등으로 보아 과거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박해의 장본인은 흥선대원군이었는데 그는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남침야욕을 막기 위해 주교 베르뇌(Berneux,S.F.)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박해자로 돌변한 이유는 1860년(철종 11)의 북경함락사건에 이어 양인학살(洋人虐殺) 사실이 조선에 전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기까지 근 10년간 계속되었는데, 크게 3단계로 진행되었다.

병인년 초에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중이던 선교사 12인 중 9인과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 등 교회의 지도층 평신도들이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인의 선교사 중 신부 리델(Ridel,F.C.)은 조선을 탈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조선교회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로즈는 조선에 대해 군사적 보복을 결심하고, 두 차례에 걸쳐 군함을 이끌고 한강과 강화도에 나타나 선교사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병인양요로, 이로 인해 박해는 재연되었고, 특히 대원군은 프랑스함대가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였다고 해서 천주교인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인근 양화진(楊花津, 일명 切頭山)을 새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선참후계형식(先斬後啓形式)으로 천주교인을 무수히 학살하였다.

제3단계는 1868년 오페르트(Oppert,E.J.)에 의해 자행된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계기로 박해가 재연되었는데,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신부 페롱(F─ ron,S.)과 일부 천주교인이 이 일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해미지방(海美地方)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천주교인이 희생되었다.

그 뒤 1876년에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곧 체포되었으나, 주교 리델과 드게트(Deguette,V.)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는 것으로 박해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상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로 낙인을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이 밖에 유교의 배타주의는 유교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단시했고, 조선왕조는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에 입각해서 정치적 질서와 종교적 질서가 혼동됨으로써 잦은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혼동은 당쟁과 세도정치에도 파급되어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종교를 구실로 삼는 일이 자주 일어났으며, 더구나 천주교도들의 성직자 영입운동과 종교자유를 획득하고자 한 운동은 쇄국양이주의(鎖國壤夷主義)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역적으로 가차없이 처단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렇게 여러 번의 박해를 계속 받음으로 해서 처음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계급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신앙관을 바탕으로 영적 구원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처음 사회를 개혁해보려던 강한 의욕은 사라지고 현세도피적이고 내세구원적인 신앙으로 변천되어갔다.

또한,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하여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철종조로 접어들면서 천주교는 비교적 평온을 누려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세도정치의 주인공인 안동 김씨는 시파(時派)로,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었으므로 천주교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교회서적을 인쇄하여 보급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더욱 널리 전파시켜 나갔다.

5. 개화기·일제강점기의 천주교

1882년(고종 19)에 미국을 비롯한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과의 조약, 특히 1886년의 조불수호통상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프랑스인의 자격으로 개항지에 정착하여 토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증명서였던 호조(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선교사가 한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 뒤 본당의 조직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개항지 밖으로는 정착이 허용되지는 않았으나 선교사들은 이에 구애됨이 없이 지방에도 정착하여 본당을 건설해나갔다.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본당(鐘峴本堂:현재의 명동)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되자 종현언덕에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수녀원 등의 부속시설에 필요한 대지를 마련하고, 우선 대성당건축을 위해 정지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한성부에서 갑자기 종현대지의 소유권을 억류함으로써 ‘종현기지분쟁’을 야기시켰다.

3년간 계속된 분쟁은 결국 교회의 승리로 끝나 비로소 대성당건축에 착수하게 되었으며, 종현에 이어 이리·원산·제물포·부산·마산·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건설되고, 개항지가 아닌 갓등이와 평양과 같은 지방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건설되었다. 본당의 건설과 더불어 성당들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또한 성당건축이 발전하게 되었다.

즉, 1892년에는 약현본당(藥峴本堂:오늘의 중림동)에 최초의 고딕양식의 벽돌 성당이 세워졌으며, 6년 후에는 같은 양식의 웅장한 종현 대성당이 준공되기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제7대 교구장인 주교 블랑(Blanc,J.)은 종현구내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고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을 초청하였고, 이 무렵 용산에는 신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한편, 이 시기에는 이제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거나 또는 낙후되었던 지방에까지, 즉 남으로는 제주도에서 북쪽은 간도지방에까지 복음이 미치게 되었다.

특히, 황해도는 이 시기에 개종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곳으로, 1895년까지만 해도 본당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3년 사이에 4개의 본당이 서게 되고, 선교사가 처음으로 황해도에 부임했을 때 6백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6년 사이에 약 10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반면에 필연적으로 정부, 특히 지방당국과 잦은 마찰을 빚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것이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사건들이다. 교안이란 지방관리와 지방의 선교사, 지방민과 지방의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조선과 프랑스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을 말한다.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교회의 당면과제는 조선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지구입과 건축을 통해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획득하려는 투쟁과정에서 자연 교안이 수없이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잡다하여 그 중에는 일부 선교사와 지방관리의 월권, 일부 교인과 주민들의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것도 없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배경에서 일어난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축교안(辛丑敎案)과 해서교안(海西敎案)이었다. 거기에는 정부나 교회가 다 같이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민조약은 1899년(고종 36) 조선교구장인 주교 뮈텔(M─ tel,G.)과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체결되어 비로소 한국인에게도 신교의 자유가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에는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지방 본당에서의 선교사들의 정착권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개화기에 천주교는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 발간한 순한글의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은 1906년에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지속되었는데, 국권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른 시기에 내적 개화를 강조하면서 국민을 자강운동으로 계몽하고 인도하였다.

천주교의 교육사업은 처음에 국민교육과 기초교육에 치중하였는데, 1909년부터는 독일의 분도회(芬道會)를 초대하여 서울에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일제와 일본인들의 교육 독점으로 폐교되었다.

일제하에서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비록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평신도들은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독실한 천주교신자인 안중근(安重根)의 의거는 국권수호운동의 대표적인 실례로 손꼽힌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서상돈(徐相敦)도 열렬한 천주교신자였다. 안악사건(安嶽事件)에도 안명근(安明根)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이 참여하였고, 105인 사건에도 관련이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교회당국의 절대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섰으며, 황해도 은율(殷栗)의 신부 윤예원(尹禮源)을 비롯해서, 강화(江華)·광주(廣州) 등지에서는 천주교인이 만세시위의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하여 당시 서울·원산·신의주·평양·공주·대구 등지의 감옥에는 53인의 천주교 신자가 투옥되었고,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교인들도 적지않았다.

일제의 종교탄압은 해를 거듭할수록 노골화되어 앞에 말했던 ≪경향신문≫이 끝내는 폐간되었고, 사범교육기관인 숭신학교도 폐교당하였다. 그 뒤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포교를 은연중에 제재하였고, 교회학교의 종교교육까지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교인들에게 이를 거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 있는 주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해석하였고, 이를 근거로 하여 교황청이 신사참배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 뒤 천주교인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이에 응한 것은 아니고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직장에서 추방되거나 투옥된 사례도 적지않았다.

더구나 일제는 1940년대에 이르러 외국인 교구장을 일본인 교구장으로 대치시키고 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였으며, 기타 외국인 선교사들을 구금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교구는 크게 발전하여 1911년에는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었고, 동시에 조선교구는 서울교구로 개칭되었다. 1920년에는 원산교구, 1927년에는 평양교구, 1928년에는 연길교구, 1937년에는 전주교구와 광주교구, 1939년에는 춘천교구가 창설되었다. 1940년에는 원산교구가 폐지되고 대신 덕원(德源) 면속구(免屬區)와 함흥교구가 설정되었다.

교구의 설정으로 새로운 선교단체가 진출하게 되는데, 이미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에 진출했던 분도회는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진출한 미국 메리놀선교회는 평양교구를, 1930년대에 진출한 아일랜드의 룸바노외방전교회는 광주와 춘천교구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새로 설정된 전주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짐으로써 처음으로 방인교구(邦人敎區)가 탄생하였으며, 이어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신부 노기남(盧基南)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광복 이후의 천주교

민족의 광복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에게도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민족사는 교회의 기대대로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광복은 되었으나 정부는 수립되지 못한 채 3년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천주교는 개신교와 더불어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즉, 언론·출판 분야에서 ≪경향신문≫이 창간되고,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이 속간되었다. ≪경향신문≫은 한말의 ≪경향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았으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 속간은 아니었다. 교육사업으로는 종래의 초등기관들이 중·고등교육기관으로 개편되었고, 또한 성직자 양성기관인 신학교가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되었다.

교회조직면에서는 충청남도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대전교구로 독립,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수도회로는 최초의 방인 여자수도회로써 복자수녀회가 창설되고, 샤르트르의 바오로수녀회가 일본관구에서 분리되어 독립관구로 승격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에 교황사절이 부임하였다.

천주교는 당시 대한민국의 건국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총선거에 대비하여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 신자와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교구장들은 연합교서를 발표하여 신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특별기도와 희생을 당부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도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해 순교정신으로 대항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간접적인 투쟁선언을 의미한다. 당시 천주교는 남한의 좌익분자들과 투쟁을 계속하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교회학대에 대해 결사적으로 항거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못지않게 국내의 사회부조리의 제거가 조국통일의 전제조건임을 역설하였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결과적으로 북한 교회의 전멸을 초래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부터 토지개혁·화폐개혁을 거쳐 점차 종교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6세 때부터 종교를 밝혀야 하였고, 종교가 드러나면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더구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종교말살정책이 노골화되고 본격화되었다.

1949년 5월 공산주의자들은 덕원의 분도회수도원을 습격하고, 그 곳에 있던 주교 사우어(Sauer,B., 辛神父)를 비롯하여 함경남북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신부·수사·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교구의 주교 홍용호(洪龍浩)가 항의하고 나섰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평안남북도의 모든 한국인 신부들까지도 체포하였다.

또한 황해도와 강원도에 남아 있던 신부들도 6·25전쟁을 전후하여 모두 체포되어 북한에는 한 명의 신부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한편, 남한의 천주교는 6·25전쟁의 시련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하였고 휴전 후에는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휴전 당시 16만 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1962년은 한국 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고, 또한 이 해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한국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자립교회로 승격함으로써 교구가 많이 증설되는 등 발전을 이룩한 반면, 제2차 공의회 결과로 교회의 미사는 모국어로 집전되고 전례와 예식이 종전과는 달리 대단히 간소화되었으며, 평신도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갈라진 형제들과의 대화·기도회 등이 빈번해졌으며, 신구약 성서가 공동으로 번역되기까지 하였다.

바티칸공의회는 이렇듯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교회 안의 사회참여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경제제일주의에서 비롯된 인간경시·황금만능의 풍조, 각종의 사회부조리와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에 입각해서 인간 존엄성의 회복과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등,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교계제도의 설정과 공의회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가속화시켜 1969년에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에 서임되는 결실을 가져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스스로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1981년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기념과, 이어 1984년 교회창설 2백주년 기념을 연이어 맞게 되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84년 5월 초에 한국천주교 2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2백주년을 맞는 한국천주교회를 축복하였고, 이어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있게 한 순교복자 103위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여 그들을 모두 성인품(聖人品)에 오르게 하였다.

103위 성인 중에는 10명의 외국인 선교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순교한 자들이므로 당연히 한국교회에 속하는 성인으로 시성된 것이며, 나머지 93명은 한국인으로 순교한 사람들이다.

순교시기로 구분하면,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정하상·유진길 등을 포함하여 모두 67명이고, 1846년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김대건을 비롯하여 모두 9명,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는 남종삼 등 모두 합해 17명이다.

이들 중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는 이미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으며,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는 1968년 10월 6일에 로마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인데, 한국 천주교회는 성인을 배출함으로써 세계만방에 한국 천주교인의 영광을 빛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해외선교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한국외방선교회에서 파푸아뉴기니아에 4명의 신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하여, 현재는 대만, 필리핀, 파푸아뉴기니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페루 등의 나라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세계천주교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천주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위해 북한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주로 부각되었던 사회정의와 사회복지의 신장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문제와 더불어 한국의 전통적 문화와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에서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을 새로운 과제로 부여받고 있다.

1968년 4월 27일 제5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한 이래 한국천주교회의 최고 장상으로서 교계 내외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이 퇴임함에 따라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대주교가 1998년 6월 29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였다.

1995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천주교회의 총 신자수는 357만 명 정도이며, 교구수는 서울·부산·마산·대구·대전·제주·전주·광주·춘천·청주·원주·수원·인천·왜관의 14개 교구로, 그 중 서울·대구·광주의 3교구는 대교구이다.

본당수는 1,051개, 공소는 1,242개이고, 신부는 2,538명(외국인 221명포함)이며, 수도회는 모두 127개로서 39개의 남자 수도회에 소속된 수사가 1,095명, 88개의 여자 수도회에 소속된 수녀는 7,574명이다.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는 가톨릭대학을 비롯하여 대학교가 8개교, 전문대학 3개교, 고등학교 37개교, 중학교 28개교, 초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많은 특수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의료사업으로는 성모병원을 비롯해서 종합병원 20개소, 의원 15개소, 의료연구소 8개소, 무료병원 11개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 밖에 사회사업으로는 수많은 양로원·고아원·요양원·나환자수용소 등을 세워 불우어린이와 노인 및 근로여성을 보살펴 주고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黃嗣永帛書, 韓國基督敎及外交史(李能和, 基督敎彰文社, 1928), 한국천주교회사(柳洪烈, 가톨릭出版社, 1962), 한국79위순교복자전(로네 著, 安應烈 譯, 가톨릭出版社, 1970), 한국천주교회사(달레 著, 安應烈·崔奭祐 譯註, 분도出版社, 1980), 韓國敎會史의 探究(崔奭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邪學懲義(韓國敎會史硏究所編, 韓國敎會史硏究資料 7, 弗咸文化社, 1977), 한국종교연감(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저, 고려한림원, 1997).

<최석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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