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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0 (화) 16:11
분 류 사전1
ㆍ조회: 507      
[종교] 천주교 1 (민족)
기독교(천주교)(基督敎(天主敎)) 천주교 1

로마 교황을 교회의 대표자로 인정하는 종교.

개설

공식명칭은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 또는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이다. 우리 나라에 전래되면서 서학(西學)·서교(西敎)·천주학(天主學)·천주공교(天主公敎) 등으로 불리어오다가 천주교로 정착하였으며, 카톨릭으로도 불린다.

천주교신앙은 절대자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한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그리고 천사와 인간을 창조한 진실하고 영원한 전지전능의 존재이다.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인간은 원죄를 쓰고 태어났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 인간이 범한 죄를 대신 보상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제시되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된다.

즉, 예수는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의 죄의 사함을 받았고, 예수의 부활은 그가 곧 하느님이고 인간의 구세주임을 말한다. 하느님〔聖父〕은 그리스도〔聖子〕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고, 성령(聖靈)은 교회 안에 머물러 인간을 거룩하게 한다. 여기서 위(位)는 셋이나 하느님은 단 하나라는 신비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가 세운 교회를 통하여 삼위일체인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성부에게는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성자에게는 인간을 구원하였음을, 성령에게는 인간을 거룩하게 함을 감사드려야 한다. 예수가 교회를 세웠으므로,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하는데, 사제는 거룩한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사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은 제각기 성체봉헌에 참여하여 성사(聖事)를 받음으로써 온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를 바친다.

신자들은 성세성사(聖洗聖事)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견진성사(堅振聖事)로 교회와 더욱 일치하고, 신자의 양식인 성체(聖體:빵과 포도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음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

또한 고백의 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고, 병자의 성사로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는다. 이 밖에 혼인성사와 신품성사(神品聖事)를 합쳐 이를 칠성사(七聖事)라고 하는데 인간은 기도와 성사, 거룩한 생활과 사랑, 즉 십계명(十戒命)을 충실히 지켜 실천함으로써 나날이 거룩해져 영원한 삶, 천당에서의 영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톨릭이란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그것이 전인류를 위하고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며,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는 말에 대하는 말로, 카톨릭교회의 외부적인 여러 활동(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활동)을 가리켜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 외부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때때로 지침을 제시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교황의 회칙(回勅)이다.

정치에 대해서는 국가를 자연법적인 견지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나 국권남용의 전체주의적인 운용을 제한하려 하며, 경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그 어느 것도 긍정하지 않고 제3의 길로서 직분적 사회질서(職分的社會秩序)의 테두리 안에서 경제적 공동선(經濟的共同善)을 실현하기 위한 경제질서를 건설하고자 노력한다.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사회성을 인정하여, 사회는 인간완성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기는 하나, 결국은 인간 인격의 완성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격주의 측면을 취하며, 문화에 대해서는 각 문화영역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인정하되 그것을 구령(救靈)이라는 최고의 종교목적에 통합시키는 완전한 휴머니즘의 측면에 선다.

천주교 조직의 원리는 교계제도(敎階制度)에 있으며, 그것은 원래 ‘거룩한 질서’의 위계(位階)를 뜻한다. 이 제도에 의하여 하부에 신자층, 즉 평신도가 있고, 상부에 성직자층, 즉 주교와 신부가 있어, 이 두 위계가 합쳐져서 ‘하느님의 백성’, 즉 교회를 형성한다. 교회의 정점에 교황이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는 교황·주교·신부·평신도가 다같이 그 일원에 불과하다.

교회조직은 교구로 나누어지고, 교구는 다시 본당으로 구분되어, 교구는 교구장, 즉 주교에 의해서, 그리고 본당은 주임신부에 의하여 관장된다. 로마교구의 교구장인 로마주교는 동시에 교황으로서 카톨릭교회의 최고의 권위자요 통치자이다. 이는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 수위권(首位權)의 계승자인 사실에 근거한다.

교황은 또한 신앙과 도덕문제에 있어서 그르칠 수 없는 이른바 ‘무류지권(無謬之權)’을 소유하며, 정치적인 면에서 교황은 동시에 바티칸시국의 주권자이다. 교황은 교회의 최고 통치기구로 교황청을 두고, 교황청은 교황의 비서국인 국무성성을 비롯해서 많은 성성(聖省)으로 구성되는데, 각 성성의 장관은 추기경(樞機卿) 중에서 교황이 임명한다.

추기경은 교황이 임명하는 최고의 고문이며, 또한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이 선출된다. 교황은 교회의 중대한 문제를 전세계의 주교들의 모임을 통해 결정하는데, 이것이 공의회로 최근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21회에 걸쳐 개최된 바 있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각기 지역교회, 즉 교구를 다스리며,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교구 내의 본당을 관리한다.

이러한 성직자의 직책을 직위적 사제직이라고 부르며, 평신도도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데, 이를 공동사제직(共同司祭職)이라고 부른다. 천주교에의 정식입교는 영세(領洗)로써 이루어지고, 영세와 동시에 교회의 일원이 된다.

한국의 천주교

1. 전사(前史)

근세 초기 지리상의 발견과 이에 따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과 동시에 서학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일찍이 우리 이웃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진출하여 있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Cespedes,G.)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세스페데스는 1598년(선조 31) 말에 조선에 도착하여 약 1년반 동안 부산 부근의 일본진영에 머물면서 일본군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물론 그는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을 것이지만, 적대관계에 있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민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음을 보고, 일본의 예수회는 조선 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가지고 조선인 개종자를 통하여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하여 점점 조선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특히 리치(Ricci,M., 중국명 利瑪竇)·샬(Schall,A., 중국명 蕩若望) 등 선교사들의 학덕은 중국황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아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북경을 찾은 조선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하여 새 지식을 얻고자 기회만 있으면 선교사를 만나려 하였고, 선교사들 또한 그들을 기꺼이 대해 그들과 학문과 종교에 관해 필담(筆談)을 나누게 되었다.

이리하여 부경사(赴京使)를 통하여 비로소 서양문물이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1631년(인조 9)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은 신부 로드리게스(Rodriguez,J., 중국명 陸若漢)를 만나 과학기구와 서적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720년(숙종 46)에는 주청사(奏請使) 이이명(李蓬命)이 신부 쾨글러(K─ gler,F.)와 수아레스(Suarez,J.)를 방문하고 역상(曆象)과 서교(西敎)에 관해 논담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다.

1766년(영조 42)에는 홍대용(洪大容)이 흠천감(欽天監)이던 신부 할레르스타인(Hallerstein,A.)·고가이슬(Gogeisl,A.)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하여 필담을 나누었다. 이렇듯 북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직접 조선에 잠입하여 전도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사신들을 통한 간접적인 시도를 하였다.

특히 중국의 재상인 서광계(徐光啓)와 북경에 볼모로 잡혀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통해서도 조선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만은 17세기 초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하였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학자들 사이에서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實學運動)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서학이란 서양의 종교와 학문을 내포한 개념인데, 서학은 우선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즉,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는 이미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같이 봄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하여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고, 이익(李瀷)도 ≪천주실의≫ 발문에서 유몽인과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판토자(Pantoza,D.de, 중국명 龐迪我)의 ≪칠극 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는데, 이러한 보유론적인 관점이 이익의 제자들에 이르러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배척하는 측과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이를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측으로 갈라서게 한다.

즉, 신후담(愼後聃)은 ≪서학변 西學辨≫에서 일련의 서학서를 논평하는 가운데 천주교의 근본교리인 천주의 창조설과 영혼의 불멸설을 일축한 반면,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때가 1770년경이었다.

그 뒤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 등이 주어사(走魚寺)·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천주교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여,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2. 천주교의 수용과 교회의 창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정약전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벽은 이승훈이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찾아가 교리를 배워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천주교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이승훈은 그의 말대로 북경에 들어가 북당(北堂)의 신부 그라몽(Grammont,J.J.de, 梁棟材)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1784년 봄에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은 돌아오자 곧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친지와 친척들에게 전도하여 그 해 9월부터는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세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고, 중인인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짐으로써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벽은 교회창설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창설 직후 복음전파를 할 때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그는 우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이어 중인계급에 전파하여 김범우를 비롯하여 최창현(崔昌顯)·최인길(崔仁吉)·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신생교회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면 무엇보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저명인사를 입교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權氏) 일가를 찾아가 전교하여 그 결과 철신·일신(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권일신은 개종과 더불어 열렬한 복음전파자가 되어 제자인 호서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호남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천주교를 널리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까지 전파시킬 수 있었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 성세성사만이 아니라 고백성사·성체성사 등 다른 성사까지도 집전하기로 하고, 이승훈·유항검·권일신 등 10인을 신부로 임명하여 견진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유항검은 교리서를 읽으면서 견진성사 집전이 불법이고 독성적(瀆聖的) 행위임을 깨닫고, 즉시 이승훈 등 교회지도자들에게 성사를 중지하고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견하여 지시를 받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성사가 중단되고 조선교회의 밀사로 지명된 윤유일(尹有一)은 1789년(정조 13) 말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들어가 이승훈의 편지를 북당 선교사에게 전하고, 회신을 받아서 돌아왔다.

회신에서 선교사들은 성사의 은총에 참여하기 위해 조속히 선교사를 영입할 방법을 강구하도록 권고하였는데, 이에 따라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를 영입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실현을 위해 윤유일을 다시 북경으로 파견하였다.

윤유일은 북경에서 주교 구베아(Gouvea,A.de, 중국명 湯士選)를 만나 조선교회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고, 구베아는 선교사 한 명을 보내줄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그 해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선교사를 조선에 잠입시킬 수 있는 시기와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그러나 약속에 따라 조선 국경까지 온 선교사는 그를 맞아들이기로 한 조선 교우들과 길이 어긋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구베아는 윤유일을 떠나 보낸 뒤 조선에 천주교가 기이한 방법으로 탄생한 사실을 로마 포교성성에 보고하면서, 조선교회를 발전시키려면 관리가 필요하고 북경교구가 이를 담당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포교성성은 1792년 조선교회를 구베아의 보호와 지도 아래 맡기기로 하였다. 이때 조선교회는 박해로 말미암아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1793년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밀사를 북경에 보낼 수 있었다. 구베아는 다시금 선교사 파견을 약속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1794년에 조선에 파견하였다.

주문모는 그 해 말에 조선국경에서 지황을 만나, 그의 인도로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 초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얼마 동안 조선말과 풍습을 익힌 다음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배신자의 고발로 그의 입국사실이 관헌에 알려지고, 간신히 피신할 수는 있었지만 관헌의 수색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과 교리연구, 복음전파를 위한 명도회(明道會)의 조직과 회원들의 성공적인 전교활동, 특히 초대 회장 정약종(丁若鍾)과 황사영(黃嗣永)의 지도,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등 여교우들의 헌신적인 활동 등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에 불과하였던 신자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3. 조선교구의 설정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조선교회를 거의 폐허상태로 만들었다. 한 사람뿐이던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서도 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할 수 있게 되어 다시금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1811년 동지사 편을 이용하여 북경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교회의 참상을 알리면서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간청하였다.

이때 그들은 선교사의 파견만이 아니라 파견된 선교사의 체류보장까지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선교사 파견과 선교사의 체류보장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북경교구에서는 당시의 사정으로 인하여 단 한 명의 선교사도 파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선교인들은 1824년에 다시금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직접 보냈다.

이 서한에 접한 포교성성은 더 이상 북경교구에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조선교회 문제해결에 직접 관여하기로 결정하여, 1827년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조선교회를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외방전교회측은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과 조선입국의 어려움 등의 이유를 들어 조선교회 수락을 주저하였다.

이때 이 회의 회원이면서 당시 샴교구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 re,B.)가 조선선교사를 자원하고 나섰으므로, 교황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1831년 9월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다.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지만, 조선국경까지 도달하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을 고난 속에서 허송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북경교구 선교사들의 방해가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조선교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됨으로써 포르투갈 보호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중국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1836년 이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에 주교 앵베르(Imbert,L.M.J.)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에 계속

<최석우>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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