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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24 (금)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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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425      
[고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 관찬과 사찬의 관점에서 본 서술상의 상호비교 -

Ⅰ. 들어가며

역사 편찬은 이전 시대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으로서, 유교적 왕도 정치 구현의 문화적 기념물이다. 동시에 그것은 중앙집권 완성의 표징으로서 왕실권위의 확립을 위한 산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무사히 후세에 전래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역사적 관점과 의식을 통한 검증을 통해 내려왔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양자는 그 시대의 역사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시대 (고려)에 저술되었지만 관찬과 사찬의 또다른 형태로 서술되었으므로 역사 서술상의 비교에 좋은 참고사항이 되리라. 그러므로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술 당시의 역사의식과 저자의 생애와 역사 서술상의 태도 상호비교 즉 시대 배경, 저자, 서술 방법을 통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을 알아보고 역사적 의의를 알아보도록 한다.

Ⅱ. 삼국사기

⑴ 고려시대의 역사의식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 창비사) p.45 ∼47

10세기 초 왕건 일파에 의한 고려의 건국은 신라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지양하여 좀더 도덕적인 사회를 재건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된 주민들을 재통합하여 민족통일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크게 보아 고려는 신라의 변경지방에서 성장한 지방세력가들이 연합하여 세운 것이지만, 그 핵심적 주역은 예성강 일대의 고구려 후예들이었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그 후예들이 세운 발해의 유민들을 포용하여 민족의 대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국가적 이상으로 표방되었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고구려 수도이던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켜 북진정책의 거점으로 발전시킨 것, 그리고 발해의 망명 귀족들을 대거 포섭하여 우대한 것 등이 그러한 국가적 이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고려 전기 200년간을 지배했던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토를 확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거란과의 전쟁을 마감하고 송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도 좀더 유려하고 세련된 유교정치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인종대에 이르러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이 새로이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국내정치에 새로운 파동이 일어났다 . 국제평화와 유교정치에 의해 주춤해진 북진운동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니, 묘청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서경파 지식인의 반란이 그것이었다.

개경에 있는 유학파 관료와의 권력투쟁적 요소도 함께 지닌 묘청 일파의 반란은 결국 대세에 밀려 유학파에 의해 진압되고, 고려는 다시금 유교정치의 고삐를 다그치게 되는데, 바로 유교정치의 재확립을 목표로 하여 관찬으로 편찬된 새로운 역사책이 김부식 등 11명의 유학자 관료들에 의해 씌어진 「삼국사기」(인종23, 1145)였다.

⑵ 삼국사기의 편찬목적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한영우 - 창비사) p.47

「삼국사기」는 묘청의 난으로 분열된 민심을 재수습하여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금과 의 관계에서 유연한 평화적 외교술로 안정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편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삼국의 역사를 정리함에 있어 힘의 논리로 중국과 겨루다가 패망한 고구려의 전통보다는, 유연한 외교술과 충의의 도덕정신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역사 전통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에서 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국가재정상 낭비적 요소가 많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닌 불교·풍수지리사상과 신화적 세계관을 배격하고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에 기초를 두어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⑶ 김부식의 생애와 역사의식

● 생애 및 비판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 창비사) p.57
[삼국사기 열전의 분석] 「한국사 총론」 (신형식, 1978) p.3

김부식은 문종 29연(1075)에 태어나서 순종·예종·인종·의종 등 8왕을 거치면서 의종 5년(1151)에 7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의 70여세의 생애 전반기는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절정기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후반기는 안으로 문벌귀족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으며, 밖으로는 여진의 군사적 압력이 가중되는 시련기였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환경은 그가 「삼국사기」를 저술하게 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즉,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편찬을 통해 이전 신라의 문화를 정리하는 동시에 묘청의 난 이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킬 바탕을 마련하였고,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간접적인 현실비판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에 기초를 두어 삼국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크게 활약한 시기는 60년 이후였다.

61세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묘청의 난 수습을 분열주의에 대한 국민적 통일 주의의 승리라고 간주하며, 갈등과 분열을 국가멸망 원인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당시 사회모순을 간접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결국 김부식 생애의 전·중반기는 문벌귀족들의 횡포와 비리에 대한 현실비판의식과 금의 압력에 대한 국가의식이 강조되는 때였다. 그리고 후반기는 묘청의 난 진압 이후 왕권의 강화와 고려왕조의 통치권 확립을 위한 노력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여기에 「삼국사기」편찬의 배경이 있다. 즉 이 책은 안으로 왕권을 옹호하고 밖으로 나라를 지켜주는 정신적 구실을 하고자 한 것이다. 김 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가로서,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편찬자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종래 그의 역사관과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는 문벌귀족의 역사가, 역사사실을 마음대로 날조 삭제한 역사가, 사대적인 역사가로 평가되어 왔고, 유교적인 역사가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전통 적인 고유사상을 삭제하였다고 비판되었으며, 조선 초기 이래 그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을 받아 왔고, 삼국초기의 기록은 믿을 수 없는 사실로 제쳐놓는 견해도 있어 왔다. 그러나 현재에는 김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견해도 있다.

즉 김부식의 역사관은 조선시대의 역사가들보다는 덜 사대적이었고, 신라 중심적인 서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삼국에 대하여 공평한 입장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날조는 생각할 수도 없으며, 지나친 산일(散逸)과 변개(變改)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고, 과거의 역사가에게도 서술의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하며, 사학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는 고대의 설화중심적, 신화중심적 역사 서술로부터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역사학을 발전시킨 역사가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나아가 사대적인 성격을 김부식 개인의 문제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 사대 정책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반드시 부 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중세에 기여한 점도 있다고 보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 역사의식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 - 창비사)
[삼국사기연구] (신영식 - 일조각, 1981)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사학에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다. 그것 은 어디까지나 기존사서의 재편집이므로, 「삼국사기」의 경우도 그 내용 전체가 김부식의 독창적인 저작물이 아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의 편목이나 지(志)의 서론, 그리고 열전의 인물평가 등과 논찬(論贊) 등을 통해 그의 역사관을 찾을 수밖에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기전체로 편찬하였다. 그런데 중국측 기전체의 경우 열전이 전체의 60% 정도가 되는 데 비해, 「삼국 사기」는 20%내외의 분량을 갖고 있으며, 본기가 반대로 60% 정도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항목의 안배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뜻으로 풀이할 수가 있다. 더구나 본기에서 삼국을 시작부터 완전한 국가로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왕은 처음부터 정치·군사·외교·종교 및 재판권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로 설명하였다. 어디까지나 김부식은 중국과 대등한 우리 역사를 다 시 써서 후세에 남겨주겠다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국초 이래 왕(위)·신하(중간)·백성(아래) 3자간의 행동규범에서 역사의 내용을 찾으려 했다.

그러므로 첫째로, 그의 역사인식은 무엇보다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려는 전통사학의 범주 속에 머물러 있지만, 강력한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자아의식은 열전에서 나타난, 순국한 인물의 투철한 국가의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즉 열전에 등장한 69명 중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은 21명이었고, 34명이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둘째,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관련적 사고라는 견지에서, 자연의 변화(천재지변)와 인간의 활동(정치와 전쟁) 의 관계를 중시했다. 이것은 사마천의 '천인지제승 통변'의 범주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의 상관 관계를 실질적인 역사내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본기 내용은 정치·천재지변·외교·전쟁의 4항목으로 되었으며, 그 속에서 국가를 구성한 3요소인 왕·신하·백성이 각기 그들의 책무를 다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천인관계는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면서 역사발전의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김부식은 역사를 교훈이나 후세의 귀감으로 파 악하였으므로, 역사서술을 현실비판의 도구로 삼았다. 그는 「진삼국사표」에서 저술동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더욱이 고기에는 문자가 거칠고 사적이 빠지고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는 군후의 선악이나 신자의 충 사, 국가의 안위 그리고 인민의 이란 등을 드러내어 후세에 경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3재를 얻어 일가지사를 이룩하여 만세에 남겨두는 교훈을 삼아 해와 별과 같이 밝히고 싶다.

그는 역사는 국민적 교화와 계몽의 수단이라고 이해하였으므로, '분열과 갈등은 국가의 우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관은 조선 초의 역사서술은 물론, 이후의 전통사항게 큰 영향을 끼쳤다.

넷째, 김부식은 '사실을 사실대로'기록하려는 객관적 서술자세를 갖고 있었다. 춘추필법 이후 '술이부작'의 원칙은 작사의 기본 원칙이었으며, 역사편찬은 기존 사서의 편집에 불과하였던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는 「삼국사기」편찬시에도 「구삼국사」, 「당서」,「자치통감」 등 기존사료를 충실히 전재하였으며, 전승된 자료를 산삭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때문에 그는 신라의 고유왕명을 신라본기에 그대로 기록하였으며, 신라의 관명에도 이벌찬·파진찬 등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이처럼 신라 고유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사실의 객관적 서술인 동시에 점차로 독자적인 자아의식의 표현으로 결집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사기」가 단순히 사대주의적인 저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부식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영웅주의사관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주의적 역사관이 아니라,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공적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국가의식을 강조하려 는 것이다. 때문에 열전에 등장한 인물도 군사적 활동을 한 사람이 절반이 넘으며, 통일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영웅주의사관은 전통사학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다. 이는 「삼국사기」열전 10권 가운데 김유신전에 3권을 할애한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김부식의 논찬도 결국 '군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였으며, 국가에 기여한 공헌이라는 현실주의적 사 관과 그 뜻을 같이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부식에게 역사는 국가에 대한 의무적 행위의 요구이며, 국민교화의 수단인 것이다.

⑷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위치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조동걸, 한영우, 박 찬승 - 창비사) p.73∼7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 국가의식] (부산대 논문집 - 1989)

이상에서 김부식의 생애와 역사인식 그리고 「삼국사기」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았다. 전통사회에서 역사편찬은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화를 집대성한 시대적 소산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도 안으로 문벌귀족간의 갈동과 묘청의 난 진압 후의 혼란된 사회를 수습하고 밖으로 여진의 위협에 직면하여 고려왕조의 권위를 고양하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책임편수관인 김부식은 10명의 보조편수관의 도움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는 김부식과 10명의 보조편수관, 그리고 왕(인종)의 입장이 공동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역사인식은 특정 개인의 주관보다는 시대환경이 요구 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최종 책임을 진 김부식의 사관이 「삼국사기」의 역사인식은 특정 개인의 주관보다는 시대환경이 요구한 역사관이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김부식의 사관이 「삼국사기」의 역사인식과 같은 맥락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전통적인 역사관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독자적인 성격도 없지는 않다.

첫째, 그의 역사인식은 유교적이며 사대적인 사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나 정치상황에서 볼 때, 그리고 역사서술 체제로 볼 때 그것은 불가피 하였다.

그러나 범람하는 중국문화 가운데에서 우리 현실에 대한 강렬한 자아의식과 투철한 국가의식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자연현상을 정치현상 못지 않게 중시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또한 과거의 특정 사실을 현재 와 결부시킴으로써 역사서술을 현실 비판의 도구로 삼은 데서 나타나듯이, 역사를 국민교화 내지는 계몽의 수단으로 이해하였음 도 주목할 일이다.

둘째, 김부식은 '술이부작'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취하였으므로 기존 사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고유한 명칭과 방언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전통과 법속을 지켜주었다. 또한 김부식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유교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역할을 민족 본연의 토성으로까지 승 화시켰다. 이러한 자아의식의 자세는 현실주의적 인시곤으로 확대되어 국민(왕·신하·백성)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법규 속에서 묶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전국민을 하나의 범주 속에 규제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국민 상하간의 조화와 균형을 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적 개악서는 아니다. 중국문헌의 닮은꼴이라고 무조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3국을 중국과 맞선 독립국가로 서술하였고, 왕을 절대군주로 묘사하여 천자와 같은 지위로 승격시켰다. 나아가서 삼국 사회를 발전사적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순환론적인 시각에서 역사사건을 해석하여 왕조교체의 당위성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신채호 이래 많은 선학들은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해왔다. 그러나 그는 사대적이면서도 유교적인 시대분위기 속에서 우리 현실을 잊지 않았으며, 항상 우리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Ⅲ. 삼국유사
⑴ 당시의 역사의식6)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3장 (정병삼 - 창비사) p.82∼85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역사인식은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 을 찾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150년 가량 앞서 고려문화의 난숙기에 편찬된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는 정치제도 중심의 현실문제를 주로 다룬 것이었고, 그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 등의 역사의식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토대로 하는 유교적 정치사관이었다. 이러한 유교 적 정치사관은 고려전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편찬사서를 중심으로 지배적인 조류를 이루었다.

이들 관찬사서들이 갖는 유교적 정치사관은 합리주의의 추구라는 긍정적인 일면을 갖는 동시에 「삼국사기」에서 보듯이 고대 전통문화의 이해범위 축소와 사회모순에 대한 인식의 회피라는 문제점도 보여준다. 그런데 고려의 정치가 몽고의 간섭을 받는 시기에 이르면 유교적 정치사관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적 역사 의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하는 사서가 「삼국유사」인 것이다.

⑵ 삼국유사의 편찬목적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차적인 동기는 '유사(유사)'라는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유사'가 사가(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등의 기존 사 서에 대한 보족의 의도에서 찬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연이 「삼국사기」를 '국사(國史)' 또는 '본사(本史)' 등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를 정사(正史)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일연은 이와 같은 기존 사서에서 간과해버린 고대사와 불교사의 많은 부분을 다방면의 사료를 모아 폭넓게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족적인 것이라 해서 「삼국유사」를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자신이 구성한 의도에 따라 강한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각 고의 노력을 통해 이룩한 것이 「삼국유사」이기 때문이다.

또 일연은 「삼국사기」에서 제외된 고대문화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일연의 관심이 불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연은 고기(古記), 사지(寺誌), 금석문(金石文), 사서, 승전(僧傳), 문집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함은 물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발굴해낸 민간 전승의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도 주요 자료로 제 시하였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는 단순한 불교사 또는 불교문화사가 아닌 종합 사서인 것이다. 일연의 역사의식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은 「삼국유사」기이(紀異)편의 서문인데,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체로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에 부명(符命)을 받고 도록을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대변(大變)을 타고 대기(大器)를 쥐어 대업(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인데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삼국유사」전편에 걸쳐 그 저변을 이루는 신이(신이)는 이처럼 일연이 가졌던 가장 중요한 역사인식이었다.

⑶ 일연의 생애와 역사의식7)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권 (조병삼) - 창비사
[일연의 사상적 경향] (채상식 - 한국문화연구, 1988)

● 생애 (1206∼1289)

우리 고대문화에 대한 폭넓은 탐구를 가능하게 해주는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은 무신정변과 몽고의 침공 및 압제로 이어지는 변화와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고려전기에 문벌귀족체제와의 깊은 연계 속에 주류를 이루어오던 교종불교는 무신정권의 성립에 따라 나타난 사회 전반의 변화 에 상응하여 새로운 결사운동을 주창한 지눌의 수선사(수선사)가 주도하는 가운데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일연은 희종 2년(1206) 경주의 속현인 장산군(현재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은 지방의 향리층으로 짐작된다. 일연의 처음 이름은 견명(견명)이고 자는 희연이었다.

일연은 처음 포산에 들어온 이후 22년간 걸쳐 포산의 여러 사찰에 머무르면서 활동하는데 포산 곧 비슬산은 다양한 불교 형태가 공존했던 지역이었다. 신라 화엄십찰(화엄십찰)의 하나가 있었으며 아미타신앙 결사가 이루어졌고 법화경 예참이 시행되며 밀교 신앙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신앙 분위기는 일연이 어느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계통의 신앙과 사상을 모은 「삼국유사」와 같은 저술을 이루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 역사의식

일연의 역사의식은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해 과 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의 특색은 저자 일연이 어떤 강한 목적의식을 갖고 「삼국유사」를 지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 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전거에 의하여 뒷받침하려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유사'라는 겸손한 제목으로 인하여 이를 한낱 한가한 저술로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적어도 「삼국유사」의 저술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는데 소요된 노력만도 적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

이점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룬데 대해서 비합리적인 사실들만을 골라서 다루었다.

「삼국유사」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서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 실들에 놓여 있었다. 가령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기사를 적되, 김유신이면 삼선녀신과의 관계가, 김춘추면 문희의 이야기라든가 일일의 식사분량이라던가 하는 것이 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연 자신은 '신이'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 유사」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인 것이다. 이 같은 신이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 까.

첫째로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 풍조에 대하여 대항하고 나선 것이 「삼국유사」였다. 일연이 유교의 합리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기이편의 서에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 동일한 입장은 효선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일연은 현세에서의 효만이 아니라 신앙면에서 선하기도 해야 즉 효선쌍 미해야 내세에 가서까지 효할 수 있어서 말하자면 가장 지극한 효를 실천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같은 유교의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역사적인 신이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는 중국이 아닌 천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사의 기원에 대하여 고조선 - 위만조선 - 마 한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것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신이한 것임을 자랑스러이 기술하고 있다.

원의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하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일연이 지니고 있던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적인 신이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불교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 이 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돈된 불교문화사인 것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나려고 한 것은 합리주의를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앙의 세계이었던 것이다. 일연은 이같이 비합리주의인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것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술이 전거를 중요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삼국유사」의 세계는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의 세계이 며 신앙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 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복고적인 것이었다.

⑷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위치8) [한국사의 역사인식] 상권 (이우성)
[한국고전 심포지움] 제일집 (진단학회 - 일조각) p.15∼20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사관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내지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띄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일사유문적)인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고어휘)·성씨록(성씨록)·지명 기원·사상·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 및 고적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우리 나라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학사적 위치는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현대사학에서 지니는 의의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삼국유사」가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다음의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삼국유사」의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전거를 밝혀 주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전거를 제시한 인용문은 일연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거의 무한한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둘째로는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는 과제였기 때문에 자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배외적인 경향을 띤 중국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은 근대에 민족사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필수 적인 것이었는데, 이점 또한 「삼국유사」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이 근대사학의 평가에도 제 약이 있다. 우선 사료적 가친 그것이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연이 전혀 예기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원사료 들이 망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감산사의 조상명은 실명이 남아있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되고 잘못된 판독이 섞여있 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축을 같이하지만, 그렇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고대사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Ⅳ.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상호비교

⑴ 체재의 성격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정사)였던 데 대해서,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사찬서)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 는 중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사서류)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기사)를 선택하고 예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 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록하였다.

이 점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⑵ 서술방법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 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수정가필)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상지론지][의왈(의왈)] 등으로 분명히 자신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편찬은 전거(전거)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⑶ 사학사적 의의

「삼국사기」는 인종 23연(1145)에 고려 귀족문화를 정리하고 강렬한 국가의식을 표출하는 가운데 중국의 역사관을 수용하면서 도 독자성과 융통성을 강조하여 현실긍정과 합리성이 두드러진 사서이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전편을 통해 강조하는 신이(신이)는 민족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을 내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외세의 압제에 대항하여 그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의 원천이 자기 전통이라는 강한 확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사를 파악하는 정신사관에 의해 대단히 폭넓은 역사와 불교를 정리하였다.

일연이 각고 끝에 수집한 사료의 전거를 소박한 표현으로 명시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는 등의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고증한 수많은 서목(서목)이 실린 「삼국유사」는 다양함이나 치밀함에서 「삼국사기」보다 훨씬 뛰어나며 원사료의 본모습을 더 많이 전 해주어 그만큼 사료적 가치도 높다. 객관적 서술태도를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찬술태도로 채록한 많은 민간 전승 자료들이 고대문화의 원형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일연이 차지하는 사학사적 의의는 대단히 크다.

Ⅳ. 의견제시

역사서술은 저자의 다양한 인식체계 아래 서술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명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한 사건은 색다르게 비춰진 다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인식의 동기는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그것은 현재까지 사학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양 사서의 서술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저술 당시의 사회상황과 저자개인의 경험을 통해 획득된 눈을 통해 서술의 위치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저자의 역량에 따라 보충 또는 삭제를 통해 전말을 제시함으로써 역사는 빛을 발할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시대에 저술되었음에도 당시의 시대배경과 저술목적, 그리고 저자의 생애 및 서술상의 방법차이에 의해 전형적인 관찬과 사찬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후세에 있어서의 전대 사학자와 사서에 대한 인식도 후세 사학의 인지를 통해 재조명될 수 있음을 전술을 통해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가 수레바퀴와 같이 돌고도는 재반복의 진행과정이라 한다면 진정한 역사서술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진실을 볼 수 있고 역사가 재반복의 과정을 통해서도 앞으로 진보할 수 있도록 보조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 논하는 바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정신을 알려줌으로써 민족의 진일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제시한 역사적 사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도표를 통한 상호비교

구분
삼국사기 (관찬)
삼국유사 (사찬)
저술당시의 사회적 배경

ㅇ고려 인종23년 (1145), 50권 10책
ㅇ금의 고려에 압력으로 인한 북진 운동의 발현
ㅇ묘청의 난으로 인한 민심의 분열
ㅇ고려 충렬왕 7∼9 (1281∼1283)
ㅇ무신정변과 몽고의 침공 및 압제

저술목적

ㅇ민심의 재수습
ㅇ국왕중심의 중앙집권체제 강화
ㅇ유교정치의 재확립 목표
ㅇ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정신적 기준을 찾기 위한 과거의 전통 재인식

저자의 역사인식

ㅇ김부식 (1075∼1151)
ㅇ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구현
ㅇ역사를 교훈이나 후세의 귀감으로 파악하여 역사서술을 현실비판의 도구로 삼음
ㅇ단순한 개인주의적 사관이 아닌, 멸사봉공의 의무와 도리를 강조한 국가의식을 강조

ㅇ일연 (1206∼1289)
ㅇ신이의 강조
ㅇ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ㅇ불교적·신화적 세계

서술상의 방법

ㅇ기전체 (열전 20%, 본기 60%)
ㅇ본기·지·연표·열전으로 구성
ㅇ열전에 등장한 인물69명중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이 21명, 34명이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로 구성
ㅇ체재를 정의할 수 없으나, 저자 개인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 선택
ㅇ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편 구성
ㅇ[상지론지] [의왈(議曰)] 등으로 자신의 의견 제시

사학사적 의의

김부식의 역사학은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것이건 불만족스러운 것이건 간에 한국사학사상에서 역사학적 방법과 역사관에 있어서 고대사학으로부터 새로운 발전을 한 것이다.

기록을 그대로 전재하고 설화와 신화를 그대로 기록하던 고대의 역사학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한 문헌기록에 의존하고 또한 기록된 사료의 사실 여부를 검토·비판하여 취사·선택하고 자신의 견지에서 역사사건을 비판했으며, 우리 나라만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논하지 않고 당시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한국 중세사학의 기초를 정립

ㅇ사료적 가치의 중요성 - 전거를 명확히 밝힘
ㅇ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
ㅇ풍부한 신화의 세계 존재
ㅇ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
- 민족 자주성과 문화의 우위성 강조
ㅇ불교사관을 통한 불교사 영역의 확대

출전 : http://mahan.wonkwang.ac.kr/source/삼국유사와삼국사기.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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