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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7 (일)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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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268      
[조선] 김천일 (민족)
김천일(金千鎰(조선중기의병장))

김천일의 글씨.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김천일 영정. 1537(중종 32)-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진주성이 함락되자 순사했다. 나주 정렬사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1537(중종 32)∼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감(諫)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활약상]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潁)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趙憲)과 호서 지방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에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해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해 전투 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양천(陽川) 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했고 매일같이 강화 연안의 적군을 공격했으며,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한편, 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해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일본군의 원릉(圓陵) 도굴 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해 구휼하였다.

전투에서도 경기수사·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해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00여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진주성 싸움과 순절]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亂中雜錄, 睡隱集, 谿谷集, 健齋集, 燃藜室記述, 湖南節義錄, 海東名臣錄, 懲毖錄, 壬辰戰亂史 中(李烱錫, 壬辰戰亂史刊行會, 新現實社, 1974), 壬亂義兵將 金千鎰硏究(趙湲來, 學文社, 1982), 壬辰倭亂과 湖南義兵(宋正炫, 歷史學硏究 Ⅳ, 全南大學校史學科, 1972), 金千鎰의 義兵活動과 그 性格(趙湲來, 史學硏究 31, 1980), 全羅道義兵について(貫井正之, 朝鮮歷史論集 上, 1979).

<김석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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