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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2 (금)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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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427      
[남북국] 발해 (브리태니커)
발해 渤海

698~926년의 220여 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나라.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唐)이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해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 데서 비롯했다 (→ 색인 : 대조영).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진국(震國)이라 칭했으며 일본과의 사절 교환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칭하기도 했다.

역사와 강역

역사: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으나, 유민의 저항이 심하자 치소(治所)를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30년 만인 698년에 결국 폐지했다. 이후 요동지방에는 고구려유민 중심으로 자치국인 소고구려국을 세워 9세기 초반까지 유지했다. 안동도호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696년 무렵 전통적으로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중시되던 요서지방의 요충지 영주(營州)에서는 당의 압제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이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1년 여에 걸친 반란의 와중에서 고구려 멸망 후 강제로 이 지역에 옮겨져 살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들이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지도 아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면서 동만주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98년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진국이라 했다. 현재의 아오둥산청[敖東山城]과 청산쯔산청[城山子山城]이 그 유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화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契丹)·해(奚) 등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랴오허 강[遼河]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이어 713년에는 고왕(高王) 대조영을 정식으로 발해군왕에 봉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조영은 요서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당과 평화적인 교류도 계속 유지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영토의 확장에 주력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 만주 일대와 연해주 남부지역이 판도에 포함되는 것은 이때였다.

발해가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 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이를 염려해 721년 강릉 이북 지역에 장성을 쌓아 대비했다. 또한 발해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헤이룽 강[黑龍江] 하류지역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당과의 연계를 통해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 역시 발해의 세력확장을 경계하고 있던 당은 흑수말갈이 내속의 의사를 보이자 이를 계기로 726년 이곳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했다. 이같은 사태의 전개로 인해 위기감을 가지게 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의 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과 직접 충돌이 야기될 것을 우려한 대문예는 정벌을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으로 망명했다.

당은 대문예를 우대하여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임명하고 발해의 송환요구를 거절했다. 양자의 대립은 결국 발해 수군의 산둥[山東] 등주(登州) 공격, 당·신라 연합군의 발해공격이라는 무력대결로 발전했다. 732~733년에 걸친 발해와 당·신라의 대립은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737년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해 평화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해소되었다.

문왕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고 750년대 전반에는 도읍을 상경으로 옮긴 뒤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당에서 〈당례 唐禮〉·〈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의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물을 들여와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안녹산(安綠山)·이정기(李正己) 등 당의 지방 군웅들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향상을 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신라·거란 등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793년 문왕이 사망하자 성왕(成王:大華璵)·강왕(康王:大嵩璘)·정왕(定王:大元瑜)·희왕(僖王:大言義)·간왕(簡王:大明忠) 등이 뒤를 이었으나 짧은 재위기간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818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해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를 새롭게 했다. 이때 싱카이 호[興凱湖] 북쪽의 말갈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랴오허 강 일대로 진출해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3경에 서경과 남경이 추가되고 헤이룽 강 하류지역과 요동지방에 새로운 주가 설치되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된 것도 이때였다. 당은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830년 선왕이 사망한 후 대이진(大彛震)·대건황(大虔晃)·대현석(大玄錫)·대위해(大瑋)가 그 뒤를 이었고 대인선(大)이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왕으로 즉위했으나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여 11대왕 이후의 즉위년·사망년·왕계(王系)는 분명하지 않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 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지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유민들은 12세기초까지 200여 년 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

출전 : [브리태니커CD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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