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6:58
분 류 사전1
ㆍ조회: 3268      
[고려] 최승로 상서문 (민족)
최승로상서문(崔承老上書文)

관련 항목 : 최승로

982년(성종 1) 최승로가 지어 성종에게 올린 문서. 이해 6월 성종은 경관(京官) 5품 이상자들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의 벼슬에 있으면서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상서문의 첫째 부분은 태조ㆍ혜종ㆍ정종ㆍ광종ㆍ경종 등 5조(朝)의 치적을 평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최승로가 5조 치적평(五朝治績評)을 하게 된 것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 오긍(吳兢)이 ≪정관정요 貞觀政要≫를 지어 바쳐서 현종에게 태종(太宗)의 정치를 본받도록 권한 것처럼 자신도 5조의 치적에서 선악을 가려서 성종으로 하여금 어진 임금이 되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였다.

둘째 부분은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의 봉사이다. 이는 성종대에 이루어야 할 정치개혁을 모두 28개 조목으로 나누어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그 중 22개조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나머지 6개조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복원작업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성종은 최승로의 상서문에 크게 공감하고, 새로운 국가 체제 정비에 그의 견해를 많이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상서문은 고려 초기의 새로운 정책 수립자이며 정치 담당자였던 최승로의 정치 사상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고려사≫ 편찬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사≫ 최승로전에 전문(全文)을 수록하였고, 선거지(選擧志) 전주조(銓注條), 병지(兵志) 숙위(宿衛)ㆍ진수조(鎭戍條), 형법지(刑法志) 노비조(奴婢條) 등에도 해당 시무조항을 나누어 싣고 있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고려사절요≫ㆍ≪동국통감≫ㆍ≪동문선≫ㆍ≪동사강목≫ 등에도 상서문이 실려 있다.

5조 치적평에서 최승로는 태조에게서 이상적인 군주상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상께서 만약 태조의 유풍을 지키신다면 어찌 현종의 문황(文皇 : 唐太宗)의 고사(故事)를 추모함과 다르리요.”라고 말하고 있다.

최승로가 예찬한 태조의 치적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들이 예시되고 있다. 첫째로 거란과의 대외관계에서 보여준 심계원책(深計遠策), 둘째로 발해의 멸망 때 그 지배층을 받아들인 포섭력, 셋째로 한 사람의 양장(良將 : 庾黔弼)을 파견하여 북계(北界)를 안정시킨 데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잘 알아 등용하고 원인(遠人)을 회유하며 가까이 있는 자를 잘 부리는 역량, 넷째로 신라의 군신(君臣)이 항복을 자청했을 때 처음에 예로써 사양하여 지방세력가 중 내복자(來服者)를 많게 한 예양심(禮讓心), 다섯째로 후백제의 평정과정에서 보여준 넓은 도량 등이다.

이 밖에 후삼국을 통일한 뒤의 안락한 환경에서도 안일함이 없고, 아랫사람을 공경으로 대하며, 절검을 숭상한 것과 시기적절하게 상벌(賞罰)함으로써 권선징악한 것, 그리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신임하고, 사악한 자는 주저없이 제거한 사실 등을 태조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최승로는 태조에 대해서는 결함이 없는 군주로 평가하고 있으나, 나머지 네 임금의 치적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좋은 점과 함께 나쁜 점을 지적하고 있다.

혜종에 대해서는, "사부(師傅)를 높이 예우하고 빈료(賓僚)를 잘 접대하여 이로 말미암아 영명(令名)이 조야에 들려, 처음 즉위하자 뭇사람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라 하여 좋은 점을 들었다. 반면, 만년에 조신(朝臣)과 현사(賢士)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신변에 항상 향리소인(鄕里小人)들만 거처하게 한 것을 큰 실덕(失德)으로 지적하였다.

정종에 대해서는, 즉위 초에 조신ㆍ현사들을 자주 접견하고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 애쓴 것을 좋게 보았다. 그러나 만년에는 신하들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서경(西京)으로 천도할 계획을 강행한 사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광종의 치적에 대해서는, 즉위 후 8년 동안의 다스림을 중국의 삼대(三代)에 비교할 만하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 뒤의 치적에 대해서는 격렬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그 일례로, 광종이 956년(광종 7)에 중국 후주(後周)출신의 쌍기(雙冀)와 같은 쓸모 없는 사람을 중용한 사실을 들었다.

그로 인해 광종의 왕권강화책을 돕는 측근세력을 제외하고는 군신 사이에 대화의 길이 막히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어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과도한 불교행사ㆍ토목공사 등으로 국가재정에 큰 손실을 초래한 것을 실정(失政)으로 보고 있다.

끝으로 경종의 치적평에서는, 즉위 초 광종대의 참훼문서(讒毁文書)를 불사르고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혀 있던 무고한 사람들을 석방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반면에, 정체(政體)에 밝지 못하여 정권은 권호(權豪)에게 맡기고 여색과 잡기만을 즐겨 정치가 어지럽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최승로는 5조 치적평을 통해 성종이 역대 국왕의 치적 중 좋은 것은 취하고 좋지 못한 것은 경계함으로써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훌륭한 군주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되 독주하지 않고 조신들과 상의하는 군주임을 구체적인 치적을 통해서 밝혀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시무 28조는 새 국왕에게 정책을 건의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현전하는 22조를 부문별로 분류하면 〔표〕와 같다. 〔표〕에 제시한 시무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최승로는 그 당시 고려가 당면한 대내외문제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불교의 폐단과 사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불교에 대한 태도가 비판적이었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그가 불교교리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파생된 폐단을 비판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첫째는 전래의 불교의식을 그대로 행하고 있던 성종에 대한 간언(諫言)이었다. 최승로는 그의 시무 제2ㆍ4ㆍ8조에서 성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 모두를 광종의 고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것은 성종이 불선(不善)의 표본인 광종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는 불교의 사회적 폐단에 대한 비판이었다. 제6ㆍ10ㆍ16ㆍ18조가 이에 해당된다. 특히, 제18조에서는 신라 말에 불경ㆍ불상에 금은을 쓰는 등 사치가 지나쳐서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8조목에 걸쳐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성종대에 정치개혁을 실현하려면 성종이 지나치게 불교에 몰두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성종이 재위 동안에 여러 가지 유교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펴나가게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최승로가 시무 28조에서 역점을 둔 정책건의는 민생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민중들이 집권층ㆍ사찰ㆍ지방호족세력 등에 의해 가혹하게 유린당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여러 조목에서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시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제6조에서 불보전곡의 폐단을 시정해야 될 이유로 백성의 노요(勞擾)를 들고 있다. 제7조에서는 지방관 파견을 건의하면서, 향호(鄕豪)가 매번 공무를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백성이 그 명을 견딜 수 없는 실정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제10조 승려의 역관유숙 금지에 대한 건의도 민폐가 초점이 되고 있다. 제13조의 연등ㆍ팔관회 규모축소 건의도 민중을 널리 징발하여 노역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고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시무 22조 중 민폐의 시정과 민역(民役)의 감소 등 민생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제4ㆍ6ㆍ7ㆍ10ㆍ12ㆍ13ㆍ15ㆍ16ㆍ17ㆍ20ㆍ21조 등 모두 11개조에 걸쳐 있다.

특히, 제21조에서는 "민력(民力)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으면 그 복은 반드시 기도하는 바의 복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민생의 안정이 곧 정치적ㆍ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최승로는 신라 말 이래 문란해진 복식제도ㆍ신분제도 등의 정비에도 관심을 보였다. 제9ㆍ17ㆍ22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정비기준을 한결같이 신라 이래의 전통에 두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 현실에 대응하는 개혁책을 제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탈피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전래의 가치관에 토대를 둔 제한된 사회개혁이 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관계를 2개 조목에 걸쳐 다루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5조와 제11조에서 중국에 대한 태도를 밝힌 것은 광종의 지나친 모화적(慕華的) 태도에서 빚어진 혼란을 반성하고, 이제부터는 중국에 대하여 긍지와 독자성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맹목적인 도입을 삼가고 우리의 현실에 알맞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제11조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다.

시무 28조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조목은 군주의 태도를 밝힌 제14조이다. 최승로는 앞서 5조 치적평에서 군주의 도리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제시한 바 있다. 제14조에서 이를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치개혁의 성공 여부가 군주의 태도에 달려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제14조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로 더욱 삼가서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접함에 공손함을 생각하며, 혹 죄 있는 자가 있더라도 죄의 경중을 모두 법대로만 논한다면 곧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최승로의 상서문은 단순히 최승로 개인의 생각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성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성종대의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로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최승로 상서문이 가지고 있는 사료적 가치는 매우 크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史綱目, 崔承老의 時務二十八條(金哲埈,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政治理念(李基白, 大東文化硏究 6ㆍ7合輯, 1970), 高麗貴族社會의 形成(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1974), 高麗初期 崔承老의 政治思想硏究(河炫綱, 梨大史苑 12, 1975).

<하현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한국] 한국 문화의 특성 (민족)
아래글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1 (이덕일)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920 사전1 [조선] 이황의 성학십도 (민족) 이창호 2002-09-27 3368
2919 사전1 [고려] 고려 시대의 불교 (민족) 이창호 2002-04-18 3368
2918 사전1 [남북국] 발해사의 제문제 (방학봉) 이창호 2002-03-22 3362
2917 사전1 [조선] 붕당정치 (민족) 이창호 2002-10-15 3313
2916 사전1 [한국] 한국 문화의 특성 (민족) 이창호 2002-05-01 3296
2915 사전1 [고려] 최승로 상서문 (민족) 이창호 2002-04-18 3268
2914 사전1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1 (이덕일) 이창호 2002-11-03 3238
2913 사전1 [삼국] 삼국시대 (민족) 이창호 2002-04-22 3231
2912 사전1 [역사] 중세사회 (한메) 이창호 2002-04-27 3178
2911 사전1 [삼국/남북국] 신라의 제도 (민족) 이창호 2002-04-21 3140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