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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3-19 (금) 21:54
분 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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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구분] 시대 구분론 (7차 지도서)
Ⅲ. 시대 구분론

1. 시대 구분론이란?

(1) 시대 구분의 의미

인류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고 긴 시간의 변화 과정이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역사의 발전 과정이나 시대적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에 의해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시대 구분은 일정한 기준에 의해 역사 과정을 체제적ㆍ법칙적으로 파악하려는 방법이다. 시대 구분을 하는 방식은 시대 구분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적 과정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보편적인 판단 기준을 찾으려 한다. 자유, 평등, 생활 등 인간의 존재 조건과 관련하여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 권리가 어떻게 형성 발전되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시대 구분은 인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식이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 살펴보는 시대 구분 방식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기본 원칙을 밝힐 뿐만 아니라 각 시대, 각 지역의 특수성을 보다 분명하게 밝힐 수 있게 도와준다.

(2) 시대 구분의 기준

어느 시대나 이전 시대를 파악하는 구분법이 존재하였다. 현 시대를 토대로 이전 시대를 금ㆍ은ㆍ동ㆍ철ㆍ흙으로 인식하였던 그리스 시대의 과거 인식이나, 각 시기의 왕조를 흥망성쇠 과정을 통해 파악하는 방식도 있다. 르네상스기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대를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시대를 중심으로 과거를 고대와 중세로 나누어 특징을 파악하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그들이 미래에 할 것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은 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목적과 기준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 구분을 위한 보편적인 기준을 찾으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 1818∼1883)가 사적 유물론으로 역사 발전 과정을 원시 공산 사회, 고대 노에제 사회, 중세 농노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미래 공산주의 사회로 설정하여 당시 사회의 과제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가기 위한 단계로 설정하였다. 이런 시대 구분 방식이 사회 운동의 한 방편으로 만들어졌지만 시대 분석의 기준, 도구 및 방법은 이후 역사학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 구분법은 칼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기초로 체계화되어 일반적인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하였다.

이후 역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아날 학파에서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보다 넓게 시대 구분을 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세분하여 전문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특히 예술사, 문학사, 미술사, 복식사, 풍숙사 등과 같이 세부적인 영역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독자적인 시대 구분을 하기도 하였다.

2. 한국사의 시대 구분 이론

(1) 시대 구분론의 전개 과정

우리 나라에서 시대 구분 논의는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이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비판하여 한국사에 고대 노예제 사회, 아시아적 봉건 사회의 역사 발전 단계를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합법칙적 발전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한국사 발전 단계의 설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가 중단되었다.

그 이후 1950년대 북한 학계에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역사적 당위성을 역사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하려는 시대 구분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매우 격렬하였고, 시대 구분 논의도 고ㆍ중세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기점,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 혁명의 과제와 결부되어 근ㆍ현대사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는 사회 구성의 성격, 계급 투쟁을 중심으로,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주체 사관에 따라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한 학계의 경우 이념적 편향성으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 연구 업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1960년대부터 식민 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을 올바르게 정립하려는 방향에서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1967∼1968년 한국 경제사학회 주최의 [한국사의 시대 구분 문제]를 주제로 한 시대 구분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기준도 다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한계를 반영하여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다수가 왕조적인 시대 구분을 서양의 시대 구분 기준에 맞추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1970∼1980년대에 한국사 연구에서 구체적인 업적이 축정되면서 시대 구분을 위한 사실적 토대가 구축되어 갔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러 역사학의 과학적ㆍ실천적 의식을 반영하여 시대 구분에 관한 논의는 1984년에 강만길의 저서 [한국 근대사], [한국 현대사] 서평 좌담회에서 그년대사의 시대 구분 문제를 거론하였던 정도였다.

1980년대 후반에서부터 1990년 초반에 북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북한의 시대 구분 논의가 정리되고, 이를 남한이 경우와 비교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시대 구분 논의 결과를 남한의 시대 구분에 대한 논의에 반영하게 되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시대 구분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2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한국사 시대 구분의 제문제'를 주제로 학술 회의를 개최하여 각 시대의 기점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였다. 그동안 시대 구분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던 현재사의 기점 문제가 제기되고, 분야사인 경제사에서의 시대 구분, 중국사의 시대 구분이 논의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각 시대의 사회 구조와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1993년부터는 한국 역사 연구회에서 시대 구분을 위한 토론회를 각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1980년대의 한국사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국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식민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의 주제로 논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논의에서 분과별 토론을 통해 시대 구분의 전체상 종합 시도, 시대 구분의 기준 설정 등을 중심 과제로 삼고 사회 구성의 성격을 분석하여 시대 구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1993년의 한국 고대사 연구회의 '고대와 중세 한국사의 시대 구분'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까지 개최되어 중세의 기점을 통일 신라설과 나말 여초설로 집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논의에서는 저이, 사회, 사상, 경제,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시대 구분의 전환점을 확인하려고 한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이러한 시대 구분 논의의 흐름과는 달리 기왕의 논점을 비판하려는 시각도 제기되었다. 1994년 한림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사 시대 구분론'의 학술 회의는 세계사적 시대 구분이나 고대ㆍ중세ㆍ근대의 개념,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 등을 배척하고 그 대신 한국사의 특수한 시대 구분, 분류사적인 시대 구분을 시도하고, 시대 구분 대신 시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 시대 구분에 대한 시각을 다양화시켰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시대 구분의 기본적인 목적을 상실한 측면을 보여주었다.

(2) 한국사의 시대 구분 논쟁

1) 전근대사의 시대 구분

전근대사의 시대 구분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국가의 성립,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중세 사회의 성격 및 그 내부에서의 사회적 변동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① 국가의 성립

국가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생산 도구와 사회의 성격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방법이 병행되고 있다. 사회의 성격을 중심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방법은 일제하에서 19세기 후반 모건(Morgan)이 성(性)에 기초를 둔 사회 조직으로서 씨족-포족(胞族)-부족-부족 연합체-국가의 순으로 분류한 이래 지속되었다.

백남운(白南雲), 손진태(孫晉泰)는 부족 국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1960년대에 고대 국가가 성립되는 중간에 부족 국가가 존재한 것으로 보아 씨족 사회-부족 국가-부족 연맹체 국가-고대 국가의 순서로 시기 구분하는 부족 국가설이 통설적인 견해로 자리 잡았다(김철준). 1970년대에는 서비스(Service)의 군(群)-부족-군장(추장) 사회-초기 국가로 시기 구분하였다(김정배). 또한 베버(Wever)의 도시 국가설을 받아들여 군 사회-부족 사회-군장 사회-초기 국가로 시기 구분하거나(천관우), 씨족 공동체-성읍 국가-연맹 왕국-귀족 국가로 시기 구분하는 성읍 국가설도 제시되었다(이기백).

한편 북한의 경우 원시 시대를 원인 단계(전기 구석기), 고인 단계(중기 구석기), 신인 단계(후기 구석기∼중석기)의 모계 씨족 사회, 발전된 모계 씨족 사회(신석기), 부계 씨족 사회(청동기)의 5단계로 시기 구분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도구의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시기 구부낳고 있는데, 남한 학계와 유사한 경향이다.

②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

전근대사 시대 구분의 핵심적인 논의는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대표작인 백남운은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된 내용인 정체성 이론을 비판하면서 한국사의 발전 과정을 유물 사관의 사회 구성체 발전 단계설을 적용하여 체계화하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이 한국사에는 봉건제 또는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는 정체된 사회라고 한 주장을 비판하면서 한국사에도 세계사적 발전 법칙이 관철되고 있음을 실증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 발전 과정을 원시 사회-노예제 사회(삼국)-아시아적 봉건 사회(통일 신라ㆍ고려ㆍ조선)로 파악하였다.

백남운의 주장은 시대 구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농쟁의 핵심은 백남운이 삼국 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 점에 모아졌다. 백남운은 노예제 사회의 직접 생산자는 노예와 일반 농민의 두 유형이 있지만 노예 노동이 질적ㆍ양적으로 일반 농민의 노동을 압도하여 한국에도 그리스ㆍ로마형의 노예제 사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논쟁의 핵심은 직접 생산자인 노비(奴婢)ㆍ하호(下戶)ㆍ부곡민(部曲民)ㆍ일반 옹민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었다. 노예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도 그리스ㆍ로마형의 발달된 노예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시아적 노예제는 존재하였다는 주장이다. 즉, 가내적ㆍ가부장적 노예제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비는 노예로, 하호와 부곡민은 노예 또는 노예적 처지에 있는 자, 양인 신분의 소농민은 노예적인 자 또는 노예의 원천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삼국 시기에 봉건제가 존재하였다는 견해는 일반 농민의 존재를 기본적인 것으로 보고 그들을 농노로 파악하였다. 노비ㆍ하호ㆍ부곡민ㆍ소농민은 모두 농경지와 가족을 가진 농노적 농민으로 규정되었다. 논쟁의 결과 삼국 시기는 봉건제 사회로 규정되었고 그 이전 시기에는 노예제 사회가 존재한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중세 봉건제의 시작을 삼국 초기로 보는 견해, 통일 신라 시기로 보는 견해, 고려 시기로 보는 견해 등이 있지만 결국 원시-고대 노예제 사회(고조선ㆍ부여ㆍ진국)-중세 봉건제 사회(삼국 이후)의 시대 구분이 확립되었다.

남한에서는 북한보다 늦어 1967년부터 시대 구분에 대한 몇 가지의 주요한 견해가 나타났다. 첫째 사회 인류학의 밥법을 도입하여 신라 말 고려 초까지를 고대 사회, 고려 성종 이후를 중세 사회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김철준). 그 근거는 고대 사회를 친족 공동체를 기초로 한 족장 세력의 정치 지배 시대, 중세 사회를 족장 세력의 정치 지배권이 소멸되고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 관료제가 성립된 사회로 보는 데 있었다.

둘째, 사회 경제사적 방법을 도입하여 국가의 잉여 생산물 수취 방식의 변천을 기준으로 고려 전기까지를 고대 노예제 사회, 고려 무신 집권기부터 고려 말까지를 이행기, 조선 시기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강진철). 고대 사회는 인정의 다과(多寡)에 기초하는 노동력의 직접적인 수탈 단계이고, 중세 사회는 토지를 매개로 하는 수탈 단계로 보아 인신적 지배에서 토지를 매개로 하는 지배로의 전환에 주목하였다. 이행의 계기는 무신 집권 이후의 사적 토지 소유의 진전에서 찾았다.

셋째, 사회 경제사적 방법의 입장에서 토지 소유자와 직접 생산자 사이의 생산 관계의 특질을 중심으로 삼숫 시대를 고대 노예제 사회, 삼국 시대 말 이후를 중세의 전환기로 보고 통일 신라 이후를 중세 봉건제 사회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김용섭). 고대 사회는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층과 직접 생산자인 하호층 내지 노예 사이에 인신적 예속을 기초로 한 생산 관계가 전개된 노예제 사회이고, 중세 사회는 봉건적 지주 전호제 및 자영농제가 일반화되어 토지 소유 관계를 매개로 봉건적 관계가 발전한 사회로 보았다. 순장을 고대 사회의 지표로 보고 삼국 시대 말 순장의 사멸과 전호의 발생을 중세적 토지 소유 관계의 성립으로 보았다.

남한 학계에서 중세 사회의 시작 시기를 고려 중엽부터로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 고려부터로 보는 견해가 가장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통일 신라부터 중세 사회로 보려는 견해가 점차 우세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 집권적 국가가 확립되고 점차 관료제가 시행되며, 경제적으로는 사적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둔 지주제가 형성되고, 사회적으로는 법제화된 세습 신분제가 확립되고, 이데올로기로서는 중세적인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합리화시켰던 불교와 유교 사상이 도입 정착되기 시작하였던 점을 주목한다.

일본에서는 일본사의 전개와 맞추어 주로 고려 중엽부터 중세 사회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다. 고대는 공동체적 소유가 지배적이고, 중세 사회는 개별적인 토지 소유가 실현되는 단계로 보아 12새기경을 기준으로 삼는다.

③ 중세 사회의 성격 및 그 내부에서의 사회적 변동

북한 학계에서는 중세 사회의 성격을 봉건제 사회로 보는 데 이의가 없지만, 최기에느 토지 국유제론에 입각해서, 후기에는 토지 사유제론에 입각하여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 서양과는 달리 중앙 집권적 형태의 정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전제는 모두 일치한다.

남한 학계에서는 중세 사회를 봉건제 사회로 볼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봉건제 사회라는 개념 대신에 귀족 사회 또는 양반 사회로 보려고 하거나 봉건제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도 나왔다. 한국 중세 사회를 봉건 사회로 보는 견해는 토지 사유론 특히 지주적 토지 소유에 기초한 집권적 봉건제론을 제시하지만 경제사학계에서는 아시아적 생산 양식론에 근거해서 국가적 농노제론도 제기되었다.

중세 사회 내부의 사회적 변동 문제는 왕조 교체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이다. 중세 사회의 기점은 삼국의 성립, 통일 신라, 고려, 조선 등으로 갈려 차이가 크지만 어느 경우에도 왕조 교체가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점에 의미를 두지 않아 왕조 교체가 가져오는 제반 변동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남한 학계에서는 조선 사회를 근세 사회로 설정하듯 왕조의 교체에 의미를 두는 경향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왕조의 교체를 봉건 사회의 성립, 발전, 재편 등 중세 사회 내부의 사회적 변동으로 흡수하여 파악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통일 신라 시기(또는 남북국 시기)를 봉건 사회의 성립기, 고려 시기를 발전기, 조선 초ㆍ중기를 재편기, 18∼19세기를 해체기로 보는 견해이다. 이렇게 보면 긴 기간의 중세 사회를 정체된 한 시기로 보지 않고 발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디고, 또한 왕조 교체의 의미도 포괄 할 수 있게 된다.

2) 근ㆍ현대사의 시대 구분

근ㆍ현대사 시대 구분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 근대 사회의 성격과 식민지 사회와의 관계, 현대 사회의 성격과 그 구분 문제이다.

①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문제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국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연구, 논의되어 온 주제이다. 1967∼1968년의 한국 경제사학회의 시대 구분 토론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7∼1968년의 토론에서는 근대의 기점이 18세기 후반, 1860년대, 1876년 등으로 제시되었다. 18세기 후반설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극격하게 발달하는 상업, 수공업의 변동 속에서 초기 자본주의적인 경제 양상을 발견함으로써 이 시기를 이 시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잡았다(유원동). 1860년대설은 한국이 직접 유럽 세력의 위협을 받아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상적정치적군사적으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던 1860년대를 근대의 기점으로 잡았다(이선근). 1876년설은 개항 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지, 반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에 있어서의 근대사는 반제 및 반봉건 투쟁의 모습으로 전개된다고 보고 그 기점을 개항으로 보았다(조기준). 그 밖에 17세기 초 내지 18세기 후반부터 3ㆍ1 운동 내지 1945년 후반까지의 시기를 과도기로 설정하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천관우). 이 때의 토론에는 식민주의 사학을 비판하면서 1960년대에 제기된 내재적 발전론의 영향으로 한국 근대사의 기점을 내재적 측면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었다.

1984년의 [한국 근대사], [한국 현대사] 서평 좌담회에서는 1860년대설과 1876년설이 제기되었다.1860년대설은 1860년경부터 1945년까지의 역사적 성격을 중세적 사회 조직 또는 중세적 봉건성을 극복하고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이었다고 보아 근대화를 위한 노력과 그 결과를 중시하였다. 1876년설은 민족 문제를 중시하였는데, 한국 근대사의 내용을 민족 통일에서 완결될 한국 주민 집단의 근대 민족으로서의 자기 확립 과정, 또는 자주적이고 통일된 민족 국가의 수립으로 보고 그 시작을 개항으로 잡았다. 이 때의 토론에는 1980년대에 고양된 민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1993년 한국역사연구회의 기획토론에서는 1860년대설, 1876년설, 1894년설의 세 가지 학설이 뚜렷이 대비되었다. 1860년대설은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반침략 운동과 반봉건 운동의 결합이 맹아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 진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정치 사회적 변동이 나타나나고 있는 점에 그 근거를 두었다(장동표). 1876년설은 개항 이후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급속히 성장하고, 근대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이윤상). 1894년설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하는 과정을 보호, 촉진시키는 국가 권력의 수립에 초점을 맞추어 그런 국가 권력이 1894년의 개화 정권이고 그들이 수행한 갑오개혁을 근대사의 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도면회). 이때의 토론에서는 근대 사회의 기점이 1860년에서 1894년까지 비교적 가까운 시기로 모아졌고,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수립이라는 측면과 근대 민족 국가 수립 운동이라는 측면을 근대 사회의 기준으로 제시하였던 점에 의의가 있었다.

근대의 시대 구분 논쟁은 초기에는 근대 사회로의 내재적 이행을 중시하였고, 최근에는 세계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식민지가 된 사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시각을 중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1960년대까지 근대사의 기점과 종점에 대한 논의는 1876∼1945년 사회 경제설, 1866∼1919년 계급 투쟁설, 1866∼1945년 절충성 등 세 가지의 주장이 있었다.

사회 경제설은 사회 경제적 변화, 즉 생산 방식의 변화 및 발전에 의한 사회 경제 구성의 교체를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근대사의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 상응하는 역사이며, 한국 근대사의 시기 구분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조응하는 역사가 구체적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어떠한 특수성을 가지고 어떠한 역사적 기간에 존재하였는가를 규명하는 데 귀착된다고 보고 근대사의 시기를 1876∼1945년으로 설정하였다.

계급 투쟁설의 특징은 한국 근대사가 반식민지ㆍ식민지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근대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세계사적 시대 구분의 원칙을 한국 근대사에 기계적으로 직접 적용할 수 없다고 보고, 식민지 시기의 사학에서는 민족 모순이 주요 모순이고, 따라서 민족 투쟁이 주요한 투쟁이라고 주장하는데 있었다.

절충설은 시대 구분의 기준과 그 징표를 구분하였다. 근대의 기준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사회 경제설에 동의하면서도 시대 구분의 기점과 종점을 구체적으로 채택하는 징표는 계급 투쟁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결과는 사회 경제설에 입각한 견해로 정리되었다. 시대 구분은 생산 방식의 변화 발전에 의한 사회 경제 구성의 교체를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근대는 자본주의 사회에 상응하고 우리 나라의 근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한 유형으로서의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시기적으로 1866년∼1945년으로 설정되었는데, 1866년은 1876년과 통일적으로 본다는 전제하에 근대 사회의 기점으로 설정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주체 사관이 확립되면서 시대 구분 논의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주체 사관은 역사를 인민 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였다. 주체 사관은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사회 구성체를 고려하면서도 본질적인 기준은 역사의 동력인 주체적인 측면에 두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근대사를 반침략ㆍ반봉건의 부르주아 민족 운동으로 규정하며, 그 기점으로 1860년대의 반침략 투쟁에서 찾는데 부르주아 민족 운동이 단순한 반침략 운동이 아니라 반봉건 부르주아 개혁 운동과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근대의 기점을 전후한 부르주아 민족 운동 및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ㆍ발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근대의 종점은 1926년으로 보았다. 북한 학계에서는 시대 구분의 기준이 초기의 사회 구성 및 계급 투쟁에서 주체 사관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근대사의 기점과 종점도 변화하였다. 북한에서의 시대 구분은 특히 이념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③ 현대 사회의 성격과 그 구분 여부

현대사를 하나의 시대로 구분하려는 역사학계의 논의는 매우 초보적이다. 1992년 국사 편찬 위원회 학술 회의에서 제시된 견해는 근대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면, 현대는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구별되는 독점 자본주의 시대이자 사회주의 체계의 시기라고 보아, 현대를 근대와는 다른 사회 구성체로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서중석). 그리고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독립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진 해방 이후의 시기를 현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경우 초기에는 1945년 이후 사회주의 건설 시기를 현대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주체 사관이 성립된 이후에는 현대사를 1926년 이후 반제ㆍ반봉건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진입한 현대사의 기점으로 1926년 타도 제국주의 동맹의 결성을 제시하였다.

현대 사회에 대하여는 그것을 한 시대로서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북한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대 사회를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하고 과거 역사를 평가하는 근거로 삼지만 남한 학계에서는 현대 사회의 설정 자체에 회의를 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근대 사회를 민족 통일의 완성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분단 극복이 근대사의 과제로 파악되고, 따라서 아직 근대사회가 지속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사회 구성체로 파악하려는 측면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워 현대사를 당대사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1], 풀빛, 1997.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4.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6.
김영미ㆍ강봉룡ㆍ안병우, [식민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와현실, 1994.

3. 동양사의 시대 구분

동양사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3000년 이상의 기간이므로 그 발전상을 살핀다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몇 개의 시대로 구분하여 살표볼 필요가 있다.

종래에는 왕조 중심의 역사로 파악하는 순환적인 입장이 과거의 전통적인 역사 파악 방법이었지만 발전 과정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시대 구분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ㆍ중세ㆍ근대의 3구분을 그대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서양과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회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 문제가 있다.

동양사의 중심이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동아시아의 발전 단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1) 일본의 중국사 시대 구분론

일본에서는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이 황제와 귀족 권력, 이민족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상고(고대)는 후한까지(제1 과도기는 후한 중엽부터 서진까지), 중세는 5호 16국부터 당 중엽까지(제2 과도기는 당 말기부터 5대까지), 근세는 송대 이후로 구분하였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나이토의 설에 서양 문명의 침투를 중대 사건으로 보고 중화민국 설립 또는 아편 전쟁으로 또  한 시대를 구분하여 최근세를 설정하였다.

마에다 나오노리(前田直典)는 마르크스 사관을 통해 노예제 사회를 당 중기까지로 보고, 당 말기에서 송대에 오면서 자작농과 전호에 의한 경작이 나타났다고 보아 중국은 중세의 시작을 9세기로 파악하고, 한국과 일본은 12∼13세기에 이르러 중국과 같은 단계로 이행하였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사 시대 구분론

1) 중국 학계의 동향

중국 학계에서의 시대 구분론은 대체로 세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시대 구분론이 처음으로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였다. 이 때는 중국에 마르크스주의가 이미 정착하였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백색 테러로 인해 국공 합작이 와해되어 공산주의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이른바 사회사 논쟁이 진행되었으며, 체계적인 실증 작업은 소홀하고 지나치게 논리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시대 구분론은 1950년대에 다시 활발해졌다. 혁명의 성공과 함께,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 때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말부터 역사의 동력에 관한 논의와 함께 자본주의 맹아론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과 더불어 본격화된 개방과 개혁을 맞이하여,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 설정을 모색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서 주의할 만한 점은 실증적인 작업이 이론적 작업 못지 않게 활발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의 시대 구분 논쟁은 몇 가지 주요 이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아마도 고대사 시기 구분과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근대사 시기 구분 등이 논쟁거리였지만, 이 두 가지 이슈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대사 시기 구분 논쟁은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의 시기 구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이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론적으로 '아시아 생산 양식'에 대한 열띤 공방과 은대(殷代)와 주대(周代)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사회 성격 구정이 주로 논의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존재했던 노예가 과연 중국 사회에서도 존재했는가? 존해했다면 은나라 때부터인가 주나라 때부터인가? 주나라의 정치적 봉건제가 과연 사회 구성체인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였는가?

고대사 시기 구분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맹아론도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등장은 혁명 전의 사회사 논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50년대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거치지 않고 단숨에 자본주의 사회 다음의 단계인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의 정체성을 극복하는 노력은 당연히 절실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중국사의 역동성을 부각시킬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였다.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자본주의 싹은 텄지만, 서구 사회와는 달리 중국의 자본주의는 끝내 반식민지 투쟁으로서 중국 공산 혁명의 의의와 더불어 자본주의 다음 단게로의 도약하는 계기였음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다.

중국학자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오 쩌둥의 '선각자적 발언'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1939년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이란 제목 아래 발표한 글에서 마오는 "중국 봉건 사회 내의 상품 경제 발전은 자본주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설령 외국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중국은 서서히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나갔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얼마만큼 마오의 견해가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위에 인용한 그의 주장은 어쨌든 자본주의 맹아론을 충분히 요약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이 본격화된 것은 엉뚱하게도 고전소설 [홍루몽(紅樓夢)]에 관한 문학 논쟁의 여파에서 비롯되었다. 이 소설은 18세기 중국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강남 등 일부 선진 지역에서의 농업 노동자의 출현, 신흥 시민 세력의 등장 등 자본주의 맹아를 보여 주는 사회 현상이 소설 속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중국 역사학게는 문화 혁명 발생 이후 잠시 계급 투쟁을 강조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역사는 계급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농민 운동사 등에 초점을 두었다. 사실상 마르크스의 역사관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대립되는 경향이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 등에서 보여 주는 객관적 조건의 강조와 계급 투쟁이다.

이외에도 2분법이 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역사를 근고(近古)의 2분법을 사용해 왔다. 이러한 전통에서 중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사에 대한 2분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에를 들어, 레이하이쭝(雷海宗)은 일시적으로 화북 지방을 통일한 전진(前秦)이 동진(洞晉)과 일전을 벌인 비수지전(肥水之戰)이 발생했던 383년을 기점으로 중국사를 양분하였다. 그에 의하면, 중국사의 전반부에서는 순수한 문화가 유지했던 반면 후반부에서는 이민족과의 혼합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2) 중국사의 시대 구분론

중국에서는 1930년에 궈모뤄(郭沫若)가「중국 고대 사회 연구」에서 마르크스 사관을 적용하여 은대 및 그 이전을 원시 공산 사회, 서주를 노예제 사회, 춘추 이후를 봉건제 사회로 구분하였다. 여기에 뤼전위(呂振羽)는 갑골문을 사료로 은대가 노예제 사회이고, 서주는 봉건제 사회라고 보았다. 이 두설을 기초로 논쟁이 전개되어 궈모뤄는 자기 주장을 수정하여 은대도 노예제 사회이며 춘추 시대 말기까지 지속된다고 하였다. 허우와이루(侯外盧)는 중국의 노예제를 아시아적 생산 양식론에 근거하여 특수한 노예제로 보고 궈모뤄와 뤼전위의 설을 절충하였다. 현재는 은대는 노예제 사회, 서주 이후는 봉건제 사회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근대를 아편 전쟁 이후 5ㆍ4 운동(1919)까지 그리고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중국의 근대를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로 보아 이 시기에 외국 침략을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해혁명(1911)은 의미가 없어져 민국 혁명이라고 보고 신해혁명을 민국 혁명 1기, 5ㆍ4 운동을 민국 혁명 2기로 설정하는 방식도 있다.

이러한 고대, 중세, 근대의 3단계 구분법은 동양사인 중국의 역사를 서양사의 관점과 틀에 지나치게 얽매여 봄으로써 중국사의 특성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하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중화 민국 이후를 기준으로 근세와 최근세를 구분하여 중국사를 고대, 중세, 근세, 최근세의 4개 시기로 구분하는 4분법이 등장하였다. 최근에는 중국사 시대 구분론이 3분법에서 점차 4분법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각 시가마다의 구체적인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고 있어 중국사를 구분하는 방법도 다르게 적용되고 있어 중국사를 구분하는 방법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사는 다음의 다섯 단계로 나뉜다.

1. 원시 공동체 사회 (170만년 전∼삼황오제 시기)
2. 노예제 사회 (하∼춘추 시기)
3. 봉건제 사회 (전국시대∼청 아편 전쟁 시기)
4.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 (1840 아편 전쟁∼1949 중화 인민 공화국)
5. 사회주의 사회 (중화 인민 공화국 시기)

또, 고대, 근대, 현대, 당대의 4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을 근거로 삼았다. 고대는 원시, 노예, 봉건제 사회를 포괄하는 시기로 정하여 중국의 시작부터 아편 전쟁가지 시대를 한정하였다. 근대는 아편 전쟁 이후부터 5ㆍ4 운동까지로 구분하고, 이 시기는 마오 쩌둥의 '신민주주의론'에 의거하여 구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로 보았다. 현대는 5ㆍ4 운동 이후부터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건립까지로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로 보았다. 당대는 현 사회주의 사회인 중화 인민 공화국 시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다양한 시대 구분론의 제시와 논쟁은 당시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의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일본에서도 중국의 시대 구분론을 따라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민두기 편, [중국사 시대 구분론], 창작과비평사, 1984.
佐伯富 외, [세미나 중국사], 민족문화사, 1982.

4. 서양사의 시대 구분

(1) 3시대 구분법의 정착

오늘날 서양사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시대 구분법의 원형은 3시대 구분법으로 고대ㆍ중세ㆍ근대로 나누는 것이다. 이 구분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인문주의자들이 신시대의 도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대의 부활로 '새로운 시대' 근대가 출현하였고, 중간 시대의 개념으로 중세가 사용되었다. 또 폴란드 신학자 보에티우스가 교회사 연구에 3시대 구분법을 사용하였으며, 17세기 말 독일의 학자 켈라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까지를 고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까지를 중세, 그리고 그 이후는 근대로 설정하여 3시대 구분법을 확산시켰다. 이 밖에도 4 제국설로,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 독일로 계기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는 설도 있었다.

이러한 3시대 구분설이 정착하게 된 것은 세계사를 일반화시키는 데 공헌한, 19세기 중엽부터 나타난 사회 발전 단계설이다. 이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노예제ㆍ봉건제ㆍ자본제라는 사회 발전 단계설이다. 고대를 노예제 사회, 중세를 봉건제 사회, 근대를 자본제 사회로 등치시킴에 따라 유럽사의 시대 구분을 세계사의 보편저인 역사 발전의 법칙으로 발전시켯다. 1960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제 11회 세계 역사학 회의에서는 고대는 로마 제국의 멸망(476년)까지, 근대의 시작은 17세기 영국의 혁명, 현대의 시작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2) 3시대 구분법의 수정과 비판

19세기 후반 3시대 구분법이 정착하면서 고대ㆍ중세ㆍ근대의 시점과 종점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대체로 고대의 종점은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중세와 근대의 분기점은 르네상스, 종교 개혁, 지리상 발견 등으로 제시되었는데, 20세기에 들어와 비판이 가해졌다.

고대와 중세의 경계론에서는 돕쉬의 고대 문화 몰락론과 문화의 비연속성에 대한 비판 있어쏘, 피렌에 의해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중시하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근대에 대해서도 르네상스의 기원을 중세로 소급하거나 르네상스 속성을 중세에서 찾거나 르네상스를 중세 말기적 현상으로 보는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또한 종교 개혁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대성과 더불어 종교와 정치의 관련 문제로 보아 진정한 군대라 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고, 15세기의 신항로 개척도 12∼23세기의 유럽 팽창 경향과 연결지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4∼17세기를 또 하나의 시기 즉, post-medieval, pre-modern 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비판이 3시대 구분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사가 새로운 시대 구분법으로 제기되면서 근본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전에는 현대를 동시대 또는 근대의 연장으로 보았지만 베라클로가 그의 [현대사 서설]에서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듯이 현대사를 그 이전 시기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시대"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현대를 1890년에서 1960년까지로 보거나 소련 역사가처럼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보거나 제1차 세계 대전부터 보는 등 다양한 입장이 있다.

특히 이러한 시대 구분법으로 다양한 시대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아날 학파처럼 보다 넓은 시대 구분을 하는 거시적인 파악을 하거나 좀더 시대를 세분하여 파악하려는 노력도 있다.

참고문헌

김태승 편역, [서양사의 기초 지식], 신서원 1991.

출전 : [고등학교 국사 교사용 지도서], 교육인적자원부, 2002, pp.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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